허 석 / 소통과혁신연구소 연구위원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정국이다. 그래서 온 국민이 TV뉴스에 주목하기도 하고 거리로 나서기도 한다. 가장 인기가 있다는 예능프로그램이 외면당하고 있다니 국민의 애타는 마음을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처럼 혼미한 정국, 그래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던 정국은 광복 이후 몇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친미보수세력은 교묘한 술책으로 권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진정한 자주를 염원하는 민초들의 처지는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이제 저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야 할 시점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의 교훈을 찾아야 하는 더 절박한 이유다.

1945년 광복은 갑자기 주어진 측면이 강하다 보니 주체세력의 준비정도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았다. 한반도를 삼키려는 열강들조차도 예기치 못한 측면도 있었다. 그리하여 저들 서로 간에 시간을 벌기 위해 획책한 것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합의한 신탁통치 인 셈이다. 남한만 놓고 본다면 3년 가까운 미군정 시기, 우리는 친일파를 척결하고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친미로 둔갑한 친일 세력은 1948년 5.10 단독선거를 강행하였으며, 민족자주세력이 이에 대항하는 세력관계가 전선을 형성하였다. 5.10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세력은 아쉽게도 이미 미군정의 폭압과 진보의 좌우편향으로 민중적 조직기반이 파괴되고 지식인과 일부 세력에 국한됨으로써 4.3학살과 여수-순천의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슈와 전선의 전국화를 하지 못하고 결국 친일보수세력의 권력을 유지시켜주고 말았다. 

미국이 남한의 안정적 지배통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민족주의 세력 가운데 일부 카드를 만지작거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정치지도자였던 김구, 김규식은 남한만의 단선선거-단독정부에 완강하게 반대했고 자주적인 민족통일정부 수립의 일념으로 북행길에 올라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까지 참석하였으니 미국의 눈 밖에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최종 선택은 뼈 속 깊이 친미반공, 단선단독의 주창자,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자유당의 일당 독재에 항거하는 전선이 형성된 것은 12년 뒤의 일이었다. 1960년 4.19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는 역시 학생과 지식인층에 국한됨으로써 미완의 혁명으로 기록되고 만다. 이승만의 전격적인 하야와 하와이 망명으로 전선이 교란되고 1년 남짓, 박정희를 내세운 군부세력이 5.16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역시 민주주의 세력 가운데 일부 카드를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최종 선택은 박정희 였던 것이다. 친미반공이란 전제조건이 확고하다면, 장면이나 윤보선 같은 유약한 민간정치세력 보다 강력한 박정희 군부정치세력이 미국의 대 남한 지배전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좌익 활동의 경험이 있는 박정희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 때문에 전선이 흐트러진 것은 매우 아쉬운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박정희 정권은 군부독재로 대변된다. 미국식 경제모델을 도입하면서 복지와 분배라는 나사를 빠뜨린 박정희 정권은 저임금과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펼치면서 노동자의 불만을 억누를 군부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그런데 우발적인 것처럼 보이는 10.26 사태로 인하여 정국은 다시 한 번 소용돌이친다. 박정희 정권의 18년 통치로 들끓는 민심이 자칫 반미시위로 격화되기를 원하지 않는 미국에서 박정희를 제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일었다.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학생과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80년 서울의 봄이 왔다. 그러나 3김을 중심으로 한 야당의 집권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5.17 쿠데타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5.18 광주학살은 미국의 실체를 여실이 보여준 것이었다. 미국의 선택은 역시 전두환이었다. 보수세력의 권력 유지를 위해 하나회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군부세력의 등장을 허용한 것이다. 미국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으로 인하여 정세를 낙관하였던 것이 패인이었다.

박정희를 계승한 전두환의 철권통치는 임계점에 달하였다. 87년 6월 항쟁은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세력이 학생과 지식인층에 이어 화이트칼라에까지 번지면서 범국민적인 항쟁으로 번져나갔다. 그 불씨는 4.3 호헌조치였다.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세력과 호헌세력이 맞붙은 것이다. 그런데 노태우의 전격적인 6.29선언과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분열로 정권은 평화롭게(?) 노태우에게 넘어갔다. 그것은 보수세력의 집권 연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뒤 호랑이굴로 들어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금융실명제, 하나회 혁파 등의 성과를 낳기도 하였지만 본질적으로 보수세력의 집권 연장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최초의 수평적인 정권교체라는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서, 그리고 그에 이은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서 보수세력을 척결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를 세우는 기대감이 증폭되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보수세력의 척결은 온 데 간 데 없고 여전히 기득권층은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러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그마저도 참지 못하는 보수세력의 반격에 의해 정권은 다시 이명박에게 넘어갔는데, 어땠는가. 전두환 노태우보다 더 나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명박 정부는 4대강을 파헤쳐 온 국민의 생명권을 위태롭게 하고, 비핵개방3000이니 5.24조치니 하는 친미반북대결정책으로 온 겨레의 평화권을 유린하였다. 퇴임 후를 걱정하는 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들어낸 것이 바로 박근혜 정부다.

지금 국민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단지 박근혜 대통령이 사이비 교주나 무당에 놀아나 국민을  농락하였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보수세력이 사실상 반세기 이상 장기집권하면서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에서 극소수 친일파가 득세하고 대다수 국민의 등골이 휘었던 것처럼 대다수 국민의 휘어진 등골 위에 극소수 친미보수세력이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전선이 무당정치와 같은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들고 일어나는 형국을 보이고 있지만 실은 보수기득권 세력의 갑 질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을들의 반란의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국면에서 미국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들은 남한에서 보수세력이 발본색원되는 것을 두고 볼 것인가? 박근혜 하야를 위한 범국민적 단결력과 투쟁력의 크기에 따라 미국의 카드가 달라질 것이다. 예컨대, ‘87년의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바뀌듯이 친박에서 비박으로, ’90년 김영삼 앞세워 민자당을 만들 듯이 비박와 비노의 연합으로, ‘97년 김대중 중심의 DJP연합 하듯이 제1야당+일부보수의 연합으로...

이 땅 진보민주세력의 힘이 크면 클수록 미국과 수구보수세력은 더욱 더 수세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현재의 국면을 전환하고 개헌논의를 재점화하여 이원집정부제 개헌 등을 통한 친미보수대연합일 수 있다. 권력 분점 등을 통해 보수세력의 교집합을 최대화함으로써 어떻게 해서든지 파국을 피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버틸 수밖에 없는 박근혜도, 그로 인해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우리국민도 그 새로운 보수대연합을 돕지 않는다.  

과거와는 다르게, 전선의 확대라는 점에서 동력은 충분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눈을 크게 뜨고 미국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야권의 분열을 국민 모두가 온몸으로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새로운 민주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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