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일 길음동성당천주교묘지에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희생당한 이강복 선생 45주기 묘소참배가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풀잎도 꽃잎도 어버이 없이 살듯이 애비가 죽고 없어도 굳게 자활해 살아라.”

이 말은 이강복 선생이 죽기 직전 고 김병권 선생을 통해 가족에게 전달해 달라고 하면서 남긴 말이다.

▲ 이강복 선생이 남긴 유언장.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2016년 10월 18일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길음동성당천주교묘지에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희생당한 이강복 선생 45주기 묘소참배가 열렸다.

이 날 참배행사에는 장남 명재 씨를 비롯하여 같은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권재혁 선생의 장남 권명덕 씨 부부, 같은 사건 관련자 고 이형락 선생의 넷째 딸인 계승연대 이단아 집행위원장, 역사학연구소 전명혁 소장 그리고 연극인 최철 씨가 참석했다.

이강복 선생은 1910년에 태어나 대구고보와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다니면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호구지책으로 일본의 연극잡지사 편집부원으로 근무하던 중 PROT(일본프롤레타리아극장동맹)에 가입하면서 연극(신극)운동에 참여하였다.

▲ 춘향전 배우가 일본인들임을 알리는 기사. [출처-19380303 동아일보 캡처]

또한 선생은 일본의 선진 연극기술을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민족극을 일본인 배우가 일어로 연기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던 국내여론을 무릅쓰고 1938년 10월 경성 부민관에서 ‘춘향전’을 공연하였다.

이때 이 연극에 참여한 조선인은 조연출을 맡은 선생과 효과를 맡은 안영일 씨뿐이었다.

1945년 선생은 8.15해방의 기운을 타고 더욱 적극적으로 신극운동에 나서게 되고 1946년 7월에 좌우합작으로 결성된 조선연극동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 1947년 ‘3.1기념연극제’에서 상영된 <태백산맥>과 <위대한 사랑>을 알리는 광고.

또 1947년에는 ‘3.1기념연극제’에서 상영된 <태백산맥>과 <위대한 사랑>은 최고의 연극이었으며 이후 전국 30개 지역에서 80여회 공연으로 연인원 10만여 명이 관람하기도 했다. 이때가 선생의 생애에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이후 남북 분단이 가속화되고 선생과 함께 했던 많은 연극인들이 북으로 갔다. 북에서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던 황철 씨도 선생과 같이 신극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이강복의 연극인생을 중단시켜버렸다.

선생이 다시 운동 일선에 나선 것은 4.19혁명이후 권재혁 선생을 비롯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관련자들과 접촉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선생은 연극무대에 다시 설 기회를 얻지 못한 채 1971년 10월 18일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 추도사를 하는 전명혁 소장.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화창한 가을 날씨에 웅장한 도봉산을 배경으로 진행된 추모행사였지만, 참배객들의 마음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추모사에서 전명혁 소장은 “선생님! 해방직후 좌우의 대립이 극한까지 갔던 상황 속에서 선생께서는 연극을 통해서 민중의 삶과 모순적 시대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셨다. 그리하여 1968년 ‘3선개헌’이라는 박정희 시대의 정치적 욕망과 민중의 저항 속에서 결국 ‘남조선해방전략당’이란 이름으로 시대의 희생양이 되셨다”라고 선생의 삶을 언급했다.

이어 “얼마 전 돌아가신 통혁당 사건으로 20여년을 감옥에서 살았던 신영복 선생께서 남긴 ‘감옥으로부터 사색’에서도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신 인품의 소유자라고 회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또 전 소장은 추도사에서 해방직후 1946년 12월 조선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극 ‘폭풍의 거리’의 팜플릿에 쓴 「금일의 연극과 조선예술극장」의 한 구절을 소개하였다.

“위대한 연극은 언제나 보편성과 사회성이 있어야만 된다. 이 보편성과 사회성은 연극의 내용에 있어서 사건과 성격이 우리가 사는 일상생활의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데에서만 연극의 보편성과 사회성이 있다. 그것은 또 일상생활에 있어서 예외적인 사건을 취재하는 태도가 아니고 전형적인 사건을 취재하는 데에서만 보편성과 사회성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만 된다. 다시 말하면 한사람의 주인공을 일개인의 인간적인 면으로서만 사건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주인공과 그 환경의 대립 그 주인공이 중대한 사건을 야기하는 행위의 사회성 그 사회성은 그와 관련되는 다른 사회성과의 충돌 이러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투쟁을 집성정리하야 새로운 생활 감정과 사상을 새로운 입장에서 여실히 관객에게 전달시키며 사회사상을 가장 과학적으로 비판하며 그것을 고도한 예술가로서만 가질 수 있는 예리한 관찰력을 재현시키는 곳에 신극의 생명이 있다.”

▲ 묘소참배행사에 참여한 연극인 최철 씨.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이어 연극인 최철 씨는 “이명재 선생님과 전명혁 박사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연극인 이강복 선생을 전혀 몰랐다”라고 말한 뒤, “이제라도 선생의 삶을 알게 되었고, 그 분이 가졌던 연극의 지향이 지금 우리가 하는 극운동의 지향점과 일치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선생이 말씀하신 신극운동 즉 극에서의 리얼리즘을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라고 추모하였다. 또 “비록 오늘 이 자리에 많은 연극인들이 참석을 못했지만 이 후로 선생을 추모하는 일에 많은 예술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함께 참석한 고 권재혁 선생의 장남 권명덕 씨는 어린 시절 선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선생을 추모하였다.

장남 이명재 씨는 유족인사를 통해 “아버님의 45주기를 뜻 깊게 맞이하고 싶었다. 그래서 특별히 연극을 하시는 최철 씨를 초청하게 되었구요. 그리고 오늘 추모의 자리 이후로 (국가폭력에 의한) ‘억울한 희생자’라는 호칭 대신에 ‘연극인 이강복’, ‘우리나라의 신극을 주도한 선구자 이강복’으로 불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 이강복 선생.

1910.8.14. 대구 중구 인교동에서 부친 이기량 님의 셋째로 태어남.

1923년 3월 13세에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4월 대구고보 입학.

1925년 9월 대구고보 3년 시절에 일본 동경 동아상업학교 4년에 편입.

1927년 3월 동아상고 졸업하고 그해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 입학.

1930년 10월 20세에 정경과 2학년에 재학 중 학비문제로 중퇴.

1931년 7월 일본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제3분회 프랙션으로 활동.

1931년 12월 세아타(theater, 연극잡지) 편집부원으로 근무.

1932년 10월 일본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프롯트)에 가입.

1933년 7월 25일 일본 경시청에 검거(12월 12일 기소유예로 석방)

1933년 12월 일본 츠키지(築地) 소극장단원으로 활동.

1934년 일제당국의 소극장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프롯트는 해산되고 새로 결성된 신협극단에 참여.

1938년 10월 신협극단이 조선에 들어와 경성 부민관에서 춘향전을 공연.

1940년 12월 치안유지법위반혐의로 동경형사지방재판소 검사국에서 조사받았다.

1943년 11월 18년간의 일본생활을 접고 귀국한다.

1944년 봄 조선연극협회에 가입이후 극단 아랑과 고협 등에서 연출을 담당했다.

1945년 10월 해방이후 결성된 조선예술극장 문예부에서 일하였다.

1946년 5월 25일 조선연극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이때 ‘8.15전람회’ 준비위원으로 선출.

1946년 7월 5일 좌우합작성격의 조선연극인대회에 서기장으로 선출.

1946년 8월 16일 해방1주년을 맞아 조선연극동맹을 대표하여 [연극써클운동]이라는 글을 중외신보에 기고하였다.

1947년 11월 미군정은 좌익계열단체에 대한 탄압으로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47년 8월 17일부터 일주일간 대중극장에서 선생이 연출을 맡아 해방기념공연인 [혹](함세덕작)을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미군정의 탄압으로 무산됨.

1949년 5월 16일 선생을 비롯한 조선연극동맹 중앙위원장 이영달 등 11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됨.

1949년 10월 18일 이승만은 ‘법령 제55호 2조’에 의거하여 선생이 애써 결성한 조선연극동맹을 비롯한 남로당 근민당 등 133개의 좌익계열 단체와 정당의 등록을 말소시켰다.

1950년 조카 이강수가 경영하는 경북여객에서 관리업무에 종사.

1952년 대구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동운문구’ 개점(64년까지).

※ 이 시기 와세다 대학시절 야구를 했던 경험을 살려 대구초등학교 야구부원들을 지도하였다.

1966년 8월 중순 조카 이일재 선생을 통해 권재혁 선생을 만나 남한사회의 제반 모순에 대해 토론하고 향후 남한 사회의 진로에 대해 모색함.

1968년 7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중정에 구속됨.

1969년 9월 23일 대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1971.10.18. 환갑을 맞이했던 이 해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 간암으로 옥사하였다.

2009년 4월 사후 38년이 지난 뒤, 진실화해위원회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발표.

2010년 10월 29일 선생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재심 개시됨.

2011년 1월 14일 서울고법 무죄선고.

2014년 5월 16일 선생이 가신지 45년 만에 대법원 무죄 확정.

(참고사항) 선생의 일대기는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열사회보’ 2014년 11-12월호 ‘신극운동으로 무너진 민족혼을 부활시키자’와 2015년 1-2월호 ‘신극운동정신은 민주노동운동과 민족통일운동으로 이어지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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