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65회부터는 남측 교회와 해외교회가 주도해 북측 영토에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건축사업이 중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그 원인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자 한다. 이중에는 ‘평양조용기심장전문병원’내에 마련될 30평 규모의 ‘병원교회’와 평양 대동강변 IT단지에 설립될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 예장 합동 측의 ‘평양장대현교회’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현재 추진 중인 미국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의 주도로 지어질 ‘평양국제외국인교회’도 다루고 평양 조선영화촬영소 산속에 지어진 ‘형제산교회당’과 거기 딸린 목사관을 방문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며 나진선봉교회도 다룰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분류된 ‘통일교’가 평양보통강호텔 앞에 설립한 ‘국제평화센터’와 평화자동차 공장 방문이야기들을 다룰 것이며 안식일교와 몰몬교의 대북사역 등도 심도 있게 다룰 것이다. / 필자 주 

 

몰몬교 신자들이 생각하는 북한
     
한국의 몰몬교는 선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개신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비판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연유로 인해 몰몬교 측은 한국사회나 일반 기독교와의 친밀한 접촉점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최근 2015년 5월 22일에는 서울 연세대 신학관 채플실에서 한국종교학회가 주최한 행사에서 ‘몰몬교와 다른 종교와의 만남’을 주제로 몰몬교 핵심인사인 제임스 팔코너(James E. Falconer) 박사의 강연이 열렸다. 한국 종교학계에 몰몬교를 알리는 자리였지만 개신교 대학의 상징인 연세대학교 캠퍼스 안에서 몰몬교 핵심인사의 강연이 공개적으로 개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게타 마사코(氣多雅子) 일본종교학회 회장을 비롯해 해외에서 여덟 명의 종교학계 인사가 참여하는 등 다양한 종교인들이 참석한 자리였다. 이날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종교학자등 200여명의 청중이 채플실을 가득 메웠다.
     
뿐만 아니라 한국 몰몬교는 지난 2009년 8월 12-15일까지 개신교 재단의 숭실대학교 캠퍼스에 세워진 ‘한경직기념관’에서 몰몬교 청년신자들의 가장 큰 대회이자 축제인 ‘2009 전세계한인청년대회’를 열었다. ‘시온으로 모이자’는 행사 주제로 개최된 이 행사를 학교 측에서는 몰몬교가 주관하는 행사인줄 모르고 장소를 대관해 줬다가 첫날에만 장소 사용을 허락하고 그 이후 모든 일정을 취소시키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몰몬교는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라도 한국의 개신교회와 사회 속에 조용히 들어와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홍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지난 일반 개신교와는 달리 몰몬교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과연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필자는 유타주의 브링엄 영 대학교에서 영국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는 제임스 팔코너 박사를 통해 그가 생각하는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1962년 당시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처음 한국에 방문한 그는 장성한 후에 다시 한국을 찾아와 6년 가까이 몰몬교 선교사로 활동을 했다. 그가 서울에서 선교사로 근무하던 1968년 1월 21일, 그날은 마침 팔코너 선교사가 중무장한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종로에 있던 몰몬교 사무실로 가던 도중 광화문 일대에서 군인들이 버스를 막아 세웠으며 서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나는 당시 영화를 촬영하는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한국에 관심이 많은 몰몬교 간부의 눈에 비친 북한의 이미지는 전쟁과 테러의 이미지로 각인돼 있었으며 그 외 많은 한국과 미국 등 국내외 몰몬교 신자들과 간부들도 아직도 북을 바라볼 때 보수적인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미국 서부지역에서 대표적인 몰몬교 간부로 활동하며 대북전문가와 통일운동에 앞장서는 차종환 박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아울러 워싱톤주 상원 부의장을 지낸 신호범 박사의 대북관과 사역을 살펴볼 것이다. 그는 몰몬교 일본 선교사 출신으로 또한 한국에 파견된 몰몬교 한국선교부장 출신으로서 그동안 미국 서북부지역 한인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성공한 한인지도자로서 활동해 왔는데 그가 6.25전쟁을 겪으며 형성된 대북관을 통해 워싱톤주 정가와 한인사회에서 어떻게 대북사역에 기여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필자의 은사로서 기존 정통 개신교단과 몰몬교단과의 관계회복에 오랫동안 힘을 써온 미국 파사데나에 소재한 풀러신학교의 마우어 총장의 성향과 폭넓은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 한국종교학회가 주최하고 연세대 미래융합연구원 종교와사회연구센터와 연세대 신과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가 공동주관한 ‘2015년 춘계한국종교학대회’에서 몰몬교 대표로 제임스 팔코너 박사가 강연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지난 2009년 8월 12-15일까지 개신교 재단의 숭실대학교 한경직기념관에서 몰몬교 청년신자들의 가장 큰 축제인 ‘2009 전세계 한인청년대회’가 열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몰몬교 한인공보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차종환 박사
    
독실한 몰몬교 신자인 차종환 박사는 몰몬교에서 ‘남가주한인공보위원회’ 위원장직이라는 교역자급의 중책을 맡아 온 인물이다. 또한 그는 이민 오기 이전부터 한국 몰몬교의 초창기 ‘역대 지방부장 및 스테이크장(교구장)’ 연혁에도 올라와 있을 정도로 핵심 인물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제1대 ‘서울지방부장’은 한국 최초의 몰몬교 신자인 김호직(1956-1959) 박사가 맡았고 2-4대는 김 박사의 뒤를 이어 미국 선교사들이 맡았는데 그후 차종환 박사가 제 7대(1966-1969) 지방부장을 맡을 정도로 한국 몰몬교에서도 지도자급이었다. 또한 차 박사는 ‘서울지방부’의 명칭과 교구조직이 변경되면서 새로 신설된 ‘한국중앙지방부’의 제1대 (1969-1970) 부장을 연이어 맡을 정도로 비중 있는 몰몬교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1966년 동국대에서 이학박사(도목생육에 미치는 초생부초의 영향) 학위를 받은 후 동국대 교수와 부학장을 지내며 왕성하게 교수활동을 하던 중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해직당해 결국 미국으로 건너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민 온 후에도 1976년 C.C.U에서 농학박사(사막식물의 생리생태학적 연구), 1986년 P.W.U에서 교육학 박사(한미교육제도 비교 연구)를 받으며 재미교포 학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또한 남가주에 거주하며 대북사역과 몰몬교 사역을 균형적으로 수행해 온 그는 통일운동과 대북사역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미주 이민사회의 원로로서 교포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민 오기 전에도 동국대를 비롯해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에서 강의를 했던 그는 동국대 박사학위에서 멈추지 않고 학구적인 열정을 이어가며 미국 UCLA 대학원에서 Post Doc(박사 후 과정)을 이수하여 객원교수를 역임하는 것을 필두로 그의 전공에 따라 미국 Bateson 원예대학장, 한미농생물협회장, 유타주 BYU(브리검 영 대학교) 초빙교수(1970) 등을 역임하는 등 몰몬교 출신의 학자로서 캐릭터를 유지하며 미국사회에 봉사하였다.
     
또한 2007년 8월 24일에는 대통령직속 LA민주평통 13기 회장에 취임해 교포들의 통일의식구조 개선에 노력하는 한편 UCLA 연구교수 시절부터 무려 120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농업발전을 위한 ‘농축호분 비료와 토양개량’과 관련한 특허를 취득하는 등 대북 학술전문가로서의 위치를 굳혀왔다. 그동안 학술교류와 대북지원 등의 목적으로 여러 차례 방북 했던 그는 2014년 7월에도 중국 연변 조선자치주 현황을 파악한 후 방북해 두만강 너머 나선특별지역을 답사하고 이어서 북한 본토에 있는 5대 명산 중에 하나인 칠보산을 마지막으로 탐방해 5대 명산 답사를 모두 마쳤다. 북한의 자연보존 실태와 식물 생태계를 연구하는 그는 귀국 후에는 몰몬교회당에서 방북 보고회를 개최해 미주동포들에게 북한의 종교현황과 자연보존 실태, 생물학실태 등에 대한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필자와도 미주 한인사회에서 통일운동과 대북사역 현장에서 마주 접촉하는 차 박사는 갈수록 냉각되어가는 남북 관계를 화해시키기 위한 첫 걸음은 해외동포들이 북한을 올바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며 우리 조국이 세계화로 진입하기 전에 우선 남한만이라도 동서화합을 이루고 그 다음 남북의 긴장과 대결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주관을 갖고 있다.
 
“나는 남북 간의 이질화를 해소하고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일의 대상인 북한을 객관적으로 올바로 알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남북화해의 해법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사실 그대로 올바로 직시하고 그것을 기초로 민족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이런 지론을 갖고 남북문제와 통일운동에 접근하고 있다. 또한 종교인으로서 몰몬교 ‘남가주한인공보위원회(Southern California Korean Publis Affairs Committees)’에서 공보위원장직을 맡아 온 차 박사는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개척자상 제정’, ‘영사의 날’, ‘개척자의 밤’, ‘족보사업’, ‘대북구호 및 지원사업’과 ‘빈곤국가 지원사업’, ‘장학금 지원사업’ 등을 폭넓게 벌이는 한편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스티븐 코비 박사를 몰몬교회당으로 초청해 간증과 강연 집회를 주최하는 등 서부지역 몰몬교회의 발전과 신자들의 수준 향상을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미주 교포사회에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몰몬교를 선교하고 있다.
     
또한 몰몬교 서부지역 지부장도 맡아 온 그는 그동안 몰몬교 본부 차원에서 시행하는 대북지원정책의 일환으로 각 교회별로 매달 6천 달러를 헌금하는 제도를 마련해 대북지원을 하는 사업에도 앞장서 왔다. 몰몬교가 전 세계 대북지원단체 중 가장 많은 금액을 지원하는 기구가 되도록 힘써왔으며 한인 몰몬교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이 사업에 동참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여왔는데 그 결과 LA인근 4개 몰몬교회에 출석하는 6천명의 회원(신자)들 절반 이상이 매달 20달러를 대북지원 헌금으로 꼬박 지출하도록 했다. 2002년 9월에는 유진벨 재단이 남가주한인사회에서 벌인 대북지원 모금운동을 하는데 남가주 몰몬교회들이 가장 앞장서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차 박사는 지난 1964년부터 저술 활동을 시작해 2013년 1월까지 40년간 무려 250권의 단행본 저서와 180편의 학술논문을 출간했다. 이는 국내도서 251권과 영문도서 5권, ‘Desert in Plant Ecology’ 외 180편(국내학술지 60편, 국제학술지 120편)의 학술논문을 집필해 세계 기네스북 등재를 대행하는 ‘한국기록원’에 의해 공식 인증을 받기도 했으며 2013년 1월 9일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민국 국회에서 전 현직 중진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개최하기도 했다.
     
미국에 입국한 1976년부터 집필된 그의 저서들은 단순한 서적의 의미를 넘어 미주 한인역사와 동포들의 권익을 위한 법률문제, 통일문제와 남북문제, 건강, 미용, 교육전문 분야, 자녀교육, 식물학 등 다방면에 걸쳐 집필되었으며 각 권마다 그가 겪은 40년간의 한인 이민사가 그대로 반영되었다. 특히 농학, 이학, 교육학 등 여러 개의 박사학위를 소유한 그는 몰몬교를 믿는 종교인의 관점에서 직접 관여했던 해외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그리고 동포권익 향상운동과 장학사업 등에 관한 생생한 내용들을 수록했다. 이학박사로서 식물학자이기도 한 그는 직접 발품을 팔아 남한의 독도를 비롯해 북한의 5대 명산 등 한반도 전체를 두루 돌아다니며 식물학 관련 전문서적들을 열정적으로 집필해왔다. 특히 남쪽에서는 쉽게 방문 할 수 없는 백두산과 묘향산, 금강산, 구월산, 칠보산 등을 직접 학술 탐방하며 한반도 이북지역의 식물학 실태를 집대성한 저서들은 한국에서 대학교의 생물학과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독도 관련 서적을 세 권이나 출간했다.
     
또한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교육공로상’(제1회 한인회 주최)과 쿼바시에서 수여한 ‘북미주 한국인 지도자상’을 수상(1993)했으며 ‘L.A시 우수시민봉사자상’(1994), 국무총리 표창장(1995)을 수상했으며 2005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비롯해 다수의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서울대 사범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 교사와 동국대 교수에 재임 중이던 1976년, 유신정권에 의해 부당하게 해직되어 미국으로 이민을 온 후 40년만인 2006년이 되어서 노무현 정부가 마련한 ‘해직교수 구제특별법’ 관련 재판에서 명예회복 판결을 받는 등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왔다.
   
미국에 정착한 차 박사는 UCLA 연구교수로 22년간 재직하는 동안 남가주한인회 부회장, 남가주 호남향후회 1-2대 회장, 한미교육연합회장, 한미교육연구원장, 남가주서울대 대학원 동창회장, 평통 2기 자문위원(1983), 한미농생물협회장(1984), 국민화합해외동포협의회 명예회장,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LA지부고문 및 회장, 재외동포지위향상 추진위원회(한국)고문, 한반도통일연구회 부회장, 남가주장학재단 이사장. 한인공제회 이사장,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LA평통회장 등  그동안 40여 단체장을 맡아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그가 믿는 몰몬교 신앙을 바탕으로 인재양성을 위한 목적으로 지난 1976년 ‘한미교육위원회’를 조직해 현재까지 수백 명에 달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해왔으며 매년 10여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오다 몇 해 전부터는 1년에 40여명에게 장학금을 전해주고 있다. 조국과 미주한인사회에 대한 차종환 박사의 이러한 봉사와 헌신의 삶은 그가 몰몬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폄하되거나 평가절하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졌다.

▲ 수백 권에 달하는 자신의 저서만을 모아둔 서가에서 포즈를 취한 남가주 몰몬교의 차종환 박사. [사진제공 - 최재영]

 

▲ 초창기 한국 몰몬교에서 큰 활약을 했던 젊은 시절의 차종환 박사(우측에서 두 번째). [사진제공 - 최재영]

 

▲ 국회에서 열린 차종환 박사의 ‘한국기록원 등재’ 기념식에서 손학규 전 의원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국회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현역의원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는 차종환 박사(우로부터 김성곤 의원, 차종환박사, 김영진 의원). [사진제공 - 최재영]

 

▲ 오랫동안 미주사회에서 ‘개척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식을 주도하고 있는 차종환 박사가 수상자들과 함께 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몰몬교 선교사 출신의 워싱톤주 상원부의장을 지낸 신호범 박사
    
신호범 박사는 6.25전쟁 통에 한국에서 몰몬교 침례를 받은 독실한 몰몬교 신자로서 미국으로 입양된 후 몰몬교 일본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그 후 쇼어라인 커뮤니티 칼리지를 비롯해 메릴랜드대, 하와이대, UW, 웨스틴워싱턴대 등 여러 대학에서 30년 동안 교수로서 재직했으며 도중에는 한국 몰몬교의 최고책임자인 한국선교부장으로 발령받아 근무하기도 했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는 워싱톤주 하원의원과 상원의원 등 5선에 당선되었으며 워싱톤주 상원부의장까지 올라 온 그는 자신이 속한 워싱톤주는 물론이고 동부와 서부는 물론이고 미 전역과 해외 동포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다. 아울러 한국사회에서도 지명도가 높아 각종 강연과 간증, 언론 인터뷰등이 쇄도하고 있는 신 박사는 평소 필자와도 교류하고 있는데 그가 미국의 정치인으로서, 종교인으로서 어떠한 대북관과 통일관을 지녔는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어 그의 인생역전 드라마를 대략 살펴보며 확인해 보았다. 
    
1935년 경기 파주 금촌에서 출생한 신 박사는 만 4살 때 모친이 유방암으로 죽자 부친이 머슴살이를 하기 위해 신호범을 외가에 맡긴 후에는 행방불명되었고 어린 신호범은 여섯 살까지 외가에서 살다 눈칫밥을 견디지 못해 결국 가출하여 고아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도둑기차를 타고 상경해 거지생활을 시작한 그는 서울역에서 구걸하며 친하게 지낸 거지 친구가 철교위에서 투신자살을 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다시 외가로 귀가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그의 부친은 신호범을 외가에 맡기고 머슴살이를 했으며 그 후 일본으로 돈을 벌러 다녀 온 후 재혼해 새 가정을 꾸민 것이었다.
   
부친은 신호범을 새 살림집에 데려가 초등학교에 보내주었으나 학교생활과 가정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가출해 노숙자 생활을 하거나 남의 집 머슴으로 사는 등 부랑자 생활을 이어가다가 15세 때에 6.25전쟁을 만났다. 전쟁이 터지자 영등포에 사는 부친의 집에서 새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난 신호범은 수원을 거쳐 평택에 도착해 하룻밤을 지낸 후 이튿날 평택강을 건너려는데 마침 인민군의 진로를 막으려는 미군들이 주둔한 것을 목격하고 그곳에서 대기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 밤 그가 묵고 있는 곳에서 난데없는 여자들의 울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밤의 적막을 깼고 이어서 동네 어른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한숨 소리가 땅이 꺼지는 듯 들려와 놀란 마음에 현장에 달려가 보니 불량한 몇몇 미군들이 마을 처녀들을 추행하고 겁탈했던 것이다.

“에이, 버러지 같은 놈들!”
“저 몹쓸 놈들, 저러다 동네 처녀들 다 망쳐놓고 말겠어!”
“으이구, 순 쌍놈들 같으니라구!”
“남의 나라 돕는다고 와서 도대체 무슨 짓들인지, 나 원 참!”
“그러게, 차라리 인민군이 더 낫겠네!”

마을 주민들의 이런 탄식소리는 그의 자서전 ‘공부 도둑놈, 희망의 선생님’ 58-59페이지에 나오는 증언중의 한 대목이다. 그 후 평택에서 인민군을 만나자 더 이상 피난 갈 이유가 없어진 가족들은 다시 서울로 복귀했는데 이는 인민군이 자신들보다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전쟁 통에서도 어린 신호범의 눈에는 인민군과 미군(UN군), 국군 등 여러 부류의 군인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미군들이 저지른 만행을 바라 본 신호범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군 트럭을 따라 다니다가 결국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가 되었으며 그 결과 몰몬교를 믿는 미군 군의관 장교의 양자로 입적되어 미국으로 이민 가는 인생 전환점을 맞는다.
     
그러나 신호범은 훗날 미국 주류사회의 교수와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조국이 당면한 남북문제와 통일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으며 간혹 교회나 단체들로부터 강사로 초청을 받을 때 탈북자들과 함께 강연을 하는 등 보수적인 관점에 머물 뿐이었다. 특히 신 박사는 미국 정계에 발을 들여 놓기 전부터 지금까지 오랜 친구로 지내고 있는 충남 당진 출신의 김현욱 전 의원(당시 국회 외교분과위원장)의 영향을 받아서 북한에 대한 객관적 시각이나 통일지향적인 성향은 없다. 김현욱 전 의원은 지금도 미국의 수잔 솔티와 막역한 관계이자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는데 솔티는 지난 2005년부터 미의회에서 북한인권법안을 통과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철저한 반북인사이며 미국 네오콘 그룹에 속한 강경파 여성이다. 특히 솔티는 풍선 삐라를 살포하는 탈북자 단체 대표인 박상학을 초창기부터 재정적, 정신적으로 지원하며 대북 풍선 삐라를 살포하는데 가장 앞장서고 있는 미국 측의 총매니저 역할을 하며 대북삐라 때문에 남북 관계를 경색시키고 있는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신호범 박사가 미국에 오게 된 과정과 몰몬교 정치인으로서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한 이야기를 계속 살펴보도록 하자. 신호범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미군 트럭과 지프차들을 따라 다니다가 결국 미군 장교들의 시중을 두는 하우스 보이로 뽑혔으며 그곳에서 몰몬교 출신의 미군 군의관 레이 폴(Ray Paull) 대위를 만나게 된다. 폴 대위는 전쟁 중이던 1951년에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신호범을 양자로 입적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있는 부산으로 데려가 입양수속을 했으며 귀여운 신생아도 아닌 다 큰 청소년을 양자로 삼아주어 미국으로 데려가려 했다. 또한 폴 대위는 자신의 양자인 신호범이 전방지역에서 포탄을 나르는 하우스 보이 역할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서울 명동성당으로 보내 미국에 입국할 때까지 윤 신부가 기거하는 사제관 3층에 살도록 했다.
     
신호범은 주일마다 성당의 새벽종을 치고 새벽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파이프 오르간 페달을 밟으며 사제들의 교회 잡무를 도와주었으며 길 건너편에 있는 영락교회와 명동성당을 오가며 예배와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미국에 입국하기 위한 비자 수속이 느려져 3년을 기다리는 동안 폴 대위는 신호범에게 돈을 송금해주기 까지 했으며 그러는 와중에 명동성당을 나와 다시 판문점 부근에 있는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을 하던 중 휴전을 맞이했다. 평소 양아버지 폴 대위가 알려준 용산 미군부대에 있는 몰몬교 교회당을 찾아가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던 그는 이 교회당에서 한국 최초의 몰몬교 개척 신자인 김호직 박사(문교부 차관)의 환영을 받으며 교제하기 시작했다. 그후 양아버지의 신속한 조치로 미국비자가 나오고 비행기와 선박 티켓을 보내왔으나 여비가 모자라 미 8군에 있는 몰몬교 교회 모임에 참석해 미국행 입국 경비 부족금 110달러를 후원받고 미국행 부산에서 미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마침내 신호범의 나이 19세 되던 해인 1995년 9월 부산항 국제부두에서 ‘S.S. Contest’호라는 이름의 미군 수송 화물선에 올라 이민을 떠난 그는 무사히 미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초등학교 정규 교육 조차 받은 일이 없었기에 양아버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특별교육 프로그램인 검정고시(GED, General Education Degree)에 도전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인정받아 대학교에 입학할 자격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고등학교 교장 케니스 화 박사와 영어교사 에반스 부인의 특별 교육과 양부의 배려로 하루 3시간 잠을 자며 불철주야 공부한 결과 9개월 만에 합격하게 된다.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모두 마친 그는 양부의 안내로 유타주 몰몬교 재단학교인 ‘브리검 영 대학’에 입학해 전공을 정치학으로, 부전공은 역사학을 택했다. 이 당시 양부 폴 대위는 낮에는 치과의사로, 밤에는 의과대학교수로 일하며 신호범을 뒷바라지 했다.
     
미국에 도착해 몰몬교회를 구심점으로 펼쳐지는 그의 사회생활과 캠퍼스 생활이 적응될 무렵 몰몬교 본부로부터 일본 선교사 파송 초청장을 받고 1956년부터 2년간 일본으로 몰몬교 선교사를 떠나게 된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군대 영장을 받고 군복무를 다녀오듯 몰몬교에서는 선교사로 봉사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2년간 자비를 들여 다녀오도록 안내하며 그들은 선교사 경력을 평생 자랑으로 여기게 된다. 신호범은 일본 요코하마로 발령 받았고 그곳에서 지방부장을 맡아 일요일마다 자신의 구역 교회들을 순회했고 그곳에서 일왕 조카의 사생아였던 시즈에라는 남편과 사별한 두 아이를 둔 여인을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데이트도 해서는 안 되는 선교사의 규정 때문에 타지인 오카야마로 전근 발령을 받은 그는 1958년 선교사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다.
   
그러나 선교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지 2주 만에 이번에는 군입대 영장을 받아 켄터키 훈련소에 들어가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등과 함께 군사훈련을 받은 후 육군 이등병의 계급장을 달고 독일로 파견되었다. 다행히 유럽 전체를 총괄하는 제자교회 소속의 추링클 군목 수하에서 군종부 군종하사관에 임명되어 유럽전체를 돌아다니며 군종활동을 했으며 독일 군인교회 피아노 반주자로 부임한 하이드런이라는 미국 유학중인 여성과 약혼까지 하게 된다. 그는 귀국 후 하이드런이 다른 남자를 만나며 파혼하면서 실연의 아픔을 겪게 되며 다시 대학에 복학했다.
    
1962년 브리검 영 대학을 졸업한 그는 외교관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64년 외교관을 양성하는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University of Pittsburgh) 대학원에서 내셔날 디펜스 펠로쉽 장학금을 받으며 국제관계학 석사과정에 입학해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졸업한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1969년부터 브리검 영 대학의 하와이 캠퍼스 교수로 초빙돼 강의를 하면서 그의 30년 교수생활이 시작되었으며 그곳에서 동양사, 국제정치, 세계문화사를 강의했다. 그곳에서 동양학생과장을 맡으며 여러 아시아 국가를 돌며 장학생을 선발하는 일을 도맡아 온 그는 그 후 74년에는 워싱턴 주립대에 입학해 중국사를 연구하여 1978년 동아시아학 박사학위를 받고 시애틀 근교 ‘쇼라인 대학교’에서 동양사를 가르쳤다.
   
이때 한편으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부동산 중개인사업을 시작한 그는 1975년 1월 한국에 거주하는 첫째 이복동생 길범을 초청하는 것을 필두로 77년에는 셋째 인범이와 막내 찬순이를, 80년에는 넷째 욱범을 초청했다. 그리고 신 박사가 몰몬교 한국선교부장으로 부임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던 89년 7월에는 둘째 봉범을, 그리고 이듬해인 90년에 생부와 새어머니를 초청하는 것을 끝으로 부모와 6형제 모두 미국으로 초청해 자신과 가까운 지역에서 살게 했다. 동생들은 학교와 사업을 하도록 뒷바라지를 했으며 미국에서 아들의 성공을 곁에서 지켜보던 생부는 78세를 일기로 암으로 사망했고 신 박사가 교수생활 25년에 접어든 해에는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은인이었던 양부 레이 폴(Ray Paull) 박사가 심장마비로 사별하게 됐다.
    
한편 부동산 투자 성공으로 경제력도 확보한 그는 25년간의 대학교수 재직 경험을 바탕으로 워싱톤주 한인사회에서 재력과 지성을 겸비한 지명도 높은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975년과 1983년 두 차례에 걸쳐 시애틀 한인회장을 역임하고 한글학교 이사장 10년, 대통령직속 시애틀 민주평통 회장 두 차례에 선출되는 등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워싱톤 주지사가 신호범을 민주당 소속의 의회 출마를 강력히 밀어붙였으나 마침 신호범이 소속된 몰몬교 본부의 댈런 옥스 총무가 한국 선교부장 파송의 중책을 맡기는 바람에 선거에 대한 요청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몰몬교에서의 선교부장이라면 몰몬교 신도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명예직이며, 특히 동양인으로서 선교부장 직책은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1988년부터 3년간의 한국 선교부장직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신호범은 이번에는 워싱톤주 국무장관으로부터 주 상원이 아닌 연방하원 출마 제의를 받았다. 두 차례 한인회장과 평통회장 경력 외에도 지역의 구제단체, YMCA, 로타리클럽 등의 이사로서 20년을 봉사해 온 그는 미국인과 동일한 영어 구사력은 물론 훤칠한 용모와 뛰어난 언변 그리고 원만하고 차분하고 대인관계를 장점으로 갖추고 있어 출마를 해도 손색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신호범 박사는 동양학 교수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데리고 아시아 여행을 자주해 각 국가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등의 언어가 가능해 에반스 주지사를 비롯 딕시레이, 존 스펠만, 부스 가드너 등 4명의 워싱톤 주지사의 무역고문을 맡아왔다.
   
1984년부터 부스 가드너(Booth Gardner) 주지사의 무역고문을 맡았던 신호범은 1987년 그의 출마권유를 5년간 미루다가 결국 1991년 미국 민주당 지명을 받아 시애틀시 21지역구에서 워싱톤주 하원에 도전했으며 그해 2월 교포사회 지도자들의 열렬한지지 속에 출마 수락 연설을 했다. 94%가 백인들 분포지역에서 선거를 치른 그는 이 지역 3선 현역 공화당 후보인 ‘잔 백’을 3천 3백표 차이로 물리치고 한인 최초의 워싱톤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1994년에는 연방하원 선거에 낙선했고 이어 96년 워싱턴주 부지사 선거에 출마해 0.4%로 낙선하는 등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이때 그는 자신이 믿는 몰몬교 신앙의 힘으로 고난과 좌절을 극복하고자 신앙에 더욱 매진하였는데 이 당시(1994년) LA의 차종환 박사 등과 함께 ‘기적의 역사’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의 내용은 몰몬교가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세계적인 종교로 등장할 것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는 낙선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정치활동을 벌이며 동시에 왕성하게 몰몬교 활동도 병행했다.
    
그러다가 1997년에는 한 해 전 12월 31일부로 주한 미대사직에서 전격 사임한 제임스 레이니의 후임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스티븐 솔라즈 연방하원 아시아태평양소위 위원장과 윈스턴 로드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등과 함께 최종 경합을 벌였으나 결국 제3의 인물인 스티븐 보스워스(Steven W. Bosworth)가 최종 낙점돼 주한 미대사로 부임했다(1997.12.15.-2001.2.10) 그가 주한 미대사직에 제안을 받고 경합을 벌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당시 주지사 임기가 마무리 되고 있던 ‘마이크 라우리’ 주지사와 신임 주지사 당선자 ‘게리 럭’을 포함해 ‘놈 라이스’ 시애틀 시장 등이 백악관의 클린턴 대통령에게 신호범의 대사 임명을 지원하는 추천서를 연달아 보내는 등 그를 아끼며 신뢰하는 모습을 여전히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 민주당 소속의 신호범은 1998년에는 주 상원의원으로 자리를 옮겨 선거전에 뛰어들어 마침내 상원의원에 당선되며 재기에 성공했으며 이듬해인 99년 1월 8일 워싱턴주 상원 의사당에서 실시된 투표에서는 사실상 만장일치(찬성 46, 기권 2, 불참 1)로 상원 부의장에 선출되는 등 이민사회의 성공 신화를 써 나가기 시작했다. 열아홉 살 때 미국에 입양돼 건너온 지 46년 만에 꿈을 이룬 것이며 그 후 2002년 11월 상원의원 재선에도 성공하는 등 그가 자진 퇴임할 때까지 워싱톤주에서 무려 5선의원이 되었다. 그러다 지난 2014년 1월 7일, 81세의 나이에 접어들며 기억력 감퇴 현상을 보여 주치의의 정밀 진단을 받은 결과 치매(알츠하이머) 초기진단을 받자 건강상의 사유로 워싱톤주 상원의원직을 전격 사임했다. 당시 그의 빈자리는 주 하원이었던 ‘말코 리아스’ 의원이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상원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2월 17일 열린 그의 퇴임식에는 워싱톤주 정가와 각계각층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아쉬워했다.
    
위와 같이 한국의 미국 이민 100년사에 3대 인물로 존경받아온 그의 그 파란만장했던 인생 스토리는 미국 전역의 교포들과 해외 한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 왔는데 특히 ‘공부 도둑놈, 희망의 선생님’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하고 2000년 12월 1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자 명망 있는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이날 몰몬교의 김종열, 고원용 지역대표와 이준택 스테이크장(몰몬교 교구장)과 경인지역 스테이크장을 비롯한 몰몬교 지도자들은 물론, 김현욱 의원(당시 자민련 사무총장)이 사회를 봤고 한화갑 의원(국민회의 사무총장)이 축하를 했으며 유재건 의원(국민회의 부총재), 이경재 의원(한나라당)과 김근태 부총재(국민회의), 고병익 서울대 총장 등 상당수의 인사들이 참석하여 그의 폭넓은 대인관계를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몰몬교에 대한 그의 이력 때문에 한인사회와 교계에는 후폭풍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신호범 박사가 상원의원직을 전격사임한 직후인 2014년 1월에는 그의 몰몬교 이력과 현재 신 박사가 출석하고 있는 장로교회당 건물의 재산권 문제 때문에 현지교민이 요청한 공개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했다. 신 박사가 직접 나타나 밝힌 바에 의하면 현재 자신은 몰몬교에 소속은 두고 있으나 매주일 몰몬교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몰몬교의 기념일이나 종교적인 큰 행사가 있으면 가족들과 함께 참석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2005년도에는 한국 몰몬교 선교 50주년 행사에도 초청받아 참석하는 등 장로교로 이적한 후에도 몰몬교와 지속적인 교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아울러 한국에서도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비롯한 전국의 유명 교회와 학교 등지에서 간증과 강연 사역을 병행하고 있으며 방송출연이나 언론 인터뷰에도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다.
    
신 박사가 일반 개신교회와 접촉하게 된 계기는 시애틀에 있는 린우드 베다니 장로교회 최창효 담임목사의 설교 테이프를 3년 동안 들으며 은혜를 받고 서서히 개신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으며 베다니 장로교회는 1998년부터 정식교인으로 등록하며 출석하기 시작했고 그 후부터 국내외 일반 개신교회의 간증집회 인기 초청강사 1순위가 되었다. 일부 한인교회들은 그가 과거 몰몬교의 열성신자였고 몰몬교 선교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몰몬교 저술가로 활동했는데 그가 단지 장로교회에 출석하는 성공한 교포라는 이유만으로 아직 개신교회의 세례도 받지 않은 인물을 신학적, 신앙적 검증도 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강단에 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신호범 박사의 담임목사는 이날 “7-8년 전부터 우리 교회에 이따금씩 나오다가 5년 전부터 정식 교인으로 등록했으나 의회 활동과 강연활동 등으로 주일 출석하는 일수가 충분치 않아 직분을 주지 않고 있다”고 해명 했으며 최 목사의 사모도 “부인과 딸들은 여전히 아직도 몰몬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가끔 신호범 장로를 따라 주일예배에 나오고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신 의원과 함께 ‘기적의 역사’를 쓴 LA 한미교육연구원 차종환 박사는 “내가 알고 있는 신호범 박사는 아직도 독실한 몰몬교 신자”라고 증언해주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신호범 박사에게 따라 다니는 ‘장로’라는 직책도 일반 개신교회의 장로교에서 주어진 직책이 아닌 몰몬교에서 받은 장로 직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신호범 박사의 꿈은 소박하면서도 매우 원대하다. 1985년 당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캐나다의 멀러니 수상이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지대에서 서로 회동했는데 두 사람 모두 영국 북부 에이레에서 미국과 캐나다로 각각 이민을 왔던 아일리시의 후손들이었다. 이날 양국의 두 지도자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자신들의 조국 아일리시의 민요를 합창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먼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된 한국의 이민후손과 캐나다의 수상이 된 한국의 이민후손이 서로 미국과 캐나다가 만나는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을 그리며 그날이 빨리 오도록  60세라는 초로의 나이에 미국 정치에 도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1999년 9월, 2세 정치인후원 장학회(후원회)를 발족시킨 것도 다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으며 미국 50개 주에서 2세 정치인 1명씩만 배출해도 우리나라 동포들은 미국에서 더 높은 긍지와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커질 것을 희망하고 있다.

▲ 몰몬교 일본 선교사로 발령받아 요코하마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20대 초반의 신호범 박사. [사진제공 - 최재영]

 

▲ 의원 행사에 참석한 신호범 박사와 그의 부인 다나(Donna). [사진제공 - 최재영]

 

▲ 워싱톤주 상원 부의장석에서 의사를 진행하는 신호범 박사(Dr. Paull Shin). [사진제공 - 최재영]

 

▲ 미국 몰몬교 본부에서 한국선교부장으로 발령받은 신호범 박사가 강원도 강릉 지방부소속 주문진 지부를 조직하고 신자들과 찍은 기념 사진(앞줄 중앙 우측). [사진제공 - 최재영]

 

▲ 한국 인턴 연수단이 워싱톤주 의사당을 방문해 신호범 상원의원의 안내를 받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몰몬교 시애틀지부에 참석한 신호범 박사가 성찬식을 마치고 신자들과 함께한 모습(2009.7.26.). [사진제공 - 최재영]

 

▲ ‘한미정치교육장학재단’ 발족을 위해 당시 정희경 의원(우측에서 세 번째) 등이 주축이 된 후원회에 참석한 신호범 박사(우측에서 네 번째). [사진제공 - 최재영]

 

▲ 필자와 함께 교제를 나눈 후 헤어지기 전의 신호범 박사. [사진제공 - 최재영]

 

▲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하는 신호범 박사의 모습. 그는 몰몬교외에도 한국교회와 해외이민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강연과 간증집회를 해왔다. [사진제공 - 최재영]


풀러신학교 총장이 바라보는 몰몬교와 북한
    
필자가 선교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풀러신학교의 도서관 2층 서가에는 필자가 재학 중일 때나 지금이나 북한 전문서적들이 그대로 진열돼 있다. 때로는 한국에서 건너 온 일반 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북에서 출판한 다양한 원서들이 서가에 꽂혀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섬짓 놀라는 모습을 필자가 목격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풀러신학교에서 오랫동안 총장직을 수행한 리차드 마우어(Richard J. Mouw) 총장은 과거 10년 이상 몰몬교와의 대화와 교류를 학교차원에서 직접 주도해왔던 인물이다. 그가 총장직에 있던 풀러신학교는 학교차원에서 북한문제, 타종교 문제, 이단문제, 동성애문제 등 한국의 보수교회와 보수신학교에서는 가장 예민하게 취급하는 신학적, 교리적 문제들에 대해 폭넓고 열린 자세로 대안을 제시하여왔다.
   
특히 2004년 11월, 당시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를 직접 방문한 마우어 총장은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몰몬교) 강단에서 직접 설교를 하거나 몰몬교 대학교의 학생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이런 마우어 박사의 행적은 교리적, 이념적 관점에서 볼 때 기존 보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반발 할 정도의 파격적 행보였다. 그가 유타주를 방문해 행한 설교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는 우리 기독교가 그동안 몰몬교가 ‘거짓된 종교’라고 단순하게 단정짓고 항상 정죄해 온 것이 늘 공정하지는 않았음을 최소한 인정한다. 복음주의자들이 몰몬교인들에게 죄를 짓는 확연한 패턴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몰몬교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단순화 하거나 그 영감과 관습에 있어서 무조건 사탄적이라고 제시해왔는데 이런 행위는 거짓 증언이었다.”

마우어 총장의 이 같은 의도는 몰몬교를 개신교와 동일한 친구의 입장에 놓고 진지한 토론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였으며 그동안 몰몬교에게 가지고 있던 오해와 편견에 대해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었다. 그의 행적은 몰몬교 신자들과 전문가들에게는 신선한 파장을 안겨주었으나 기존 보수적인 개신교회들에게는 큰 도전과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몰몬교 신자들이 인구의 약 70% 가량을 차지하는 일명 ‘몰몬교의 주(state)’라고 불리는 유타주에서 행한 그의 설교는 구체적인 화해와 사과의 메시지가 들어가 있다.

“우리는 종종 몰몬교 신앙을 가진 교인들의 신앙과 관습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심각하게 잘못된 행동을 해왔다.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먼저 묻지 않고, 당신들이 무엇을 믿는지를 당신들에게 말해왔다.”

뿐만 아니라 몇 해 전 미국의 폴러신학교 한인동문회가 마우어 총장을 초청해 포럼을 개최한 적이 있는데 필자도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해 몰몬교와의 교류 문제에 대해 그에게 질문을 던졌으며 이에 대한 진지한 답변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국교회나 이민교회의 평신도들은 대개 보수적인데 반해 마우어 총장이 실천하고 있는 몰몬교와의 교류는 신자들에게 거부감과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데 평신도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몰몬교와의 교류를 통해 우리가 얻은 유익과 이득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해주었다.

“지난번에 National Associations of Evangelicals 이사회 참석을 위해 유타주에 갔다.  일정 중에 몰몬교의 최고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12사도(십이사도)’ 중 한 명을 만나 기초 복음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결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수 있으며,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은총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에 서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뿐 아니라 그 자리에 참석했던 우리 복음주의권 인사들도 모두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몰몬교의 교리와 신학 중에서 복음적이지 않은 나쁜 요소들이 많이 있음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몰몬교에게 영향을 줘서 그 사람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오도록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고 사명이다.”

마우어 총장의 해명은 간단했다. 우리가 타종교와 타문화 국가에 선교를 하러 가는 경우에는 우선 그 지역의 문화를 파악하고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우리의 신학을 설명하고 어떤 부분이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본다. 만일 그런 식으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 가서 그런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몰몬교 신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몰몬교 측이 정통 기독교와 교류를 중단하여 대화가 단절된 지 벌써 150년이나 됐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들의 신학용어 정립이라던가 미래 방향을 점검하기 위해 먼저 우리학교(풀러신학교)를 찾아온 지가 11년이 넘었다. 우리가 타 종교권에 가서 선교를 할 때 그 쪽 종교 지도자를 만나 우리의 생각을 전하고 우리도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몰몬교와의 교류도 선교의 개념에서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그들이 신학적 용어를 정리하고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지난 10여 년간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와 몰몬교와의 대화를 주도해 왔던 그는 다시 유타주를 방문해 ‘유타 밸리 대학교(Utah Valley University)’에서 2천명의 몰몬교 대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연을 했다.

“우리와 몰몬교 사이에 오랜 대화를 통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예수와 그의 사역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공통점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복음주의자들은 종종 몰몬경의 기원이나 몰몬교 창시자 조셉 스미스의 선지자적 권위에 대한 의문에 초점을 두지만, 우리는 몰몬경의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아왔다. 그러나 몰몬경을 읽어보면 많은 교리가 우리 교리와 비슷하게 들리고 사용된 언어도 우리가 말하는 것들과 비슷하게 들린다. 특히 몰몬경 ‘알마(Alma) 7장 14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보면 내가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서 단언컨대 그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이다. 내가 몰몬교 지도자인 제프리 R. 홀랜드 장로가 2009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해 전했던 설교를 누구의 설교인지 밝히지 않고 풀러신학교 학생들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 결과 풀러의 학생들은 이 설교가 몰몬교의 것인 줄 대부분 몰랐다. 몰몬교와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똑같은 것들(the same things)’을 말하고 있다.”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와 몰몬교 간의 대화와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서로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도였으나 마우어의 이같은 발언과 행적은 몰몬교를 정통 기독교로 인정하지 않는 보수주의 교회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또한 이 날 유타 대학생 강연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본질,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등의 이해에 대한 교리 차이를 언급하기는 했으나 마우어 박사는 그런 문제들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우리가 함께 찬양하면 이런 모든 교리적인 차이들은 학문적인 희귀한 논의거리(academic rarities)로 사라질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함께 정의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우리의 소망을 우선시한다면 아마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전 세계 선교학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풀러신학교의 마우어 박사가 추구하는 ‘선교적 교회(missionary church)’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을 대하고 이해하는 차원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직면한 북한 동포들이 당면한 고난과 질문을 먼저 이해하고 난 후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그들의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를 찾아야 한다. 성경 66권의 말씀을 현장에 맞게 재해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보수적인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들은 북한을 적대시하고 왜곡하는데 앞장서고 있을 뿐이다. (계속)

▲ 동성애 문제, 북한 문제, 타종교 문제 등 신학적, 목회적 관점에서 매우 예민한 문제들에 대해 선교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며 직접 실천하는 마우어 총장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풀러신학교 신축 도서관 2층 서가에 자리잡고 있는 북한 원서 코너. [사진제공 - 최재영]

 

▲ ‘브링엄 영 대학교’ 로버트 밀러(Robert Millet) 교수와 오랜 우정을 나누고 있는 풀러신학교 마우어 박사(우측). [사진제공 - 최재영]

 

▲ ‘유타 밸리 대학교(Utah Valley University)’ 학생들에게 강연을 마친 후 인사를 나누는 풀러신학교 마우어 박사. [사진제공 - 최재영]

 

▲ 풀러신학교 박사학위 졸업식에서 마우어 총장과 함께 한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항일투사 김명주 탄생 100돌을 맞아 중국에서 출판된 ‘불멸의 투사’를 풀러신학교 도서관에 기증하는 필자(우측은 풀러신학교 도서관 책임자).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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