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광주‧전라지역의 형무소재소자 학살 사건

해방 후 좌우익 갈등과 1946년 10월 항쟁, 1948년 4.3제주사건과 10월의 여순사건 등의 영향으로 형무소에는 좌익사범이 급증했다. 특히 광주와 전라지역 형무소에는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여순사건 관련자들은 군법회의와 순천지원 일반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전국의 여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8년 11월 4일부터 25일까지 여수, 순천, 광주, 대전에서 여순사건 관련자에 대한 군법회의가 다섯 차례 열렸으며, 총 1,931명이 재판을 받아서 1,353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전국 형무소에 수감되었다.(주1)

여순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군법회의가 모두 몇 차례 개최되었고, 모두 몇 명이 유조판결을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진실화해위원회가 입수한 두 차례의 고등군법회의 판결문(1948년 11월 21일과 12월 13일이고, 공판 장소는 여수시)에 따르면 피고인 904명 중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주2) 이들은 모두 지정된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1년형을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형무소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또 여순사건 관련으로 일반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의 수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구례, 승주, 광양, 고흥, 보성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 일원에서 ‘반란군에게 동조, 식량 제공 등의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은 순천, 장흥, 광주 등지에서 재판을 받고 광주, 목포, 전주, 군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감옥에서 한국전쟁을 맞았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광주‧목포‧전주‧군산형무소의 수용 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하지만 이들 중 이른바 좌익사범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광주‧목포‧전주‧군산형무소에 근무했던 간수들과 군경 출신들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여순사건 등의 영향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 좌익사범이 대단히 많았다고 증언했다.

<표> 광주ㆍ목포ㆍ전주ㆍ군산형무소 수용 현황(1946년~1950년)(주4)             (단위:명)

구분

광주형무소

목포형무소

전주형무소

군산형무소

1946. 7.

1,111

636

730

514

1947. 3.

966

824

810

673

1948. 5.

1,152

862

1,308

535

1949. 8.

1,780

1,085

1,533

631

1950. 6(주3)

약 1,700

약 1,000

약 1,000

약 900

광주형무소는 동구 공명동에 있었는데 한국전쟁 발발 당시 1,7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전황이 악화되면서 다른 형무소에서 이송되어온 재소자와 전시사범의 증가로 3,000명을 넘겼다. 1950년 7월 23일 군 당국의 소개명령에 따라 오전 10시부터 재소자를 일시석방한 후 직원들은 진주‧마산 등지로 대피했다.(주5) 그러나 일시석방된 재소자의 인원, 성명, 죄명 등이 기록된 자료가 없어서 ‘좌익사범’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 수가 없다.

한국전쟁 당시 광주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풀려난 사람들과 당시 형무소 근무자, 광주시 주둔부대 군인들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광주형무소에는 여순사건 관련자와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이 상당히 많이 수감되어 있었다. 여순사건 관련자로 수감되었다가 7월 23일 인민군 진입 후 광주형무소에서 출감한 정기순은 전쟁 발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좌익사범들이 헌병에 호출되어 나갔으며 이들은 광주시 광산군 비아면의 산동교 인근 등지에서 사살되었다고 증언했다. 이때 불려나가지 않은 사람들은 7월 23일 광주형무소 직원들이 후퇴한 후 진입한 인민군에 의해 풀려났다.(주6)

목포형무소는 목포시 산정동에 있었는데 전쟁 발발 당시 1,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당시 목포형무소에는 여순사건과 제주4.3사건 관련자,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이 상당히 많이 수감되어 있었다. 1950년 7월 23일 해군경비사령부의 소개명령에 따라 일반수형자는 일시석방하고 직원들은 부산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이때 정치사상범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목포형무소 간수로 근무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법무부로부터 ‘사상범은 군에 인계하고 잡범은 석방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어느 날 소속을 알 수 없는 군인들이 와서 사상범을 포박‧포승하여 트럭에 실고 갔다고 한다.(주7)

진실화해위원회가 확보한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목포형무소에서 적법하게 석방된 재소자들(일시석방자들)의 수용자신분장에는 정치사상범은 없었다. 따라서 “한국전쟁 발발 후 군인들이 목포형무소로 와서 사상범을 포박‧포승하여 넘겨주었는데, 군인들에게 실려나간 사상범들은 육지에서 사살되지는 않고 배로 실려나갔을 것이다. 사상범들은 처리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라는 간수출신의 증언이 신빙성이 높다.(주8)

전주시 진북동에 있었던 전주형무소에는 전쟁 발발 당시 1,000여명의 재소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당시 형무소 근무자, 전주 주둔부대 군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전주형무소에는 여순사건 관련자 등 정치사상범이 상당히 많이 있었는데 이들은 7월 초순부터 중순까지 사이에 제7사단 제3연대 군인들에게 끌려 나간 후 공동묘지 등에서 집단으로 학살되었다.(주9)

군산시 금광동에 있었던 군산형무소에는 당시 9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한국교정사』에 따르면, 7월 16일 일반수형자는 일시석방하고 중범수형자는 광주형무소로 이송했다가 부산형무소로 옮겼다. 당시 군산형무소에 근무했던 형무관에 따르면, 일반사범들은 일시석방하고 일부는 광주형무소로 이송했으며, 10년 이상 징역형, 무기형, 사형을 받은 정치사상범들은 군산비행장에서 헌병과 경찰이 처형했다.(주10)

대구‧경북지역 형무소재소자 학살 사건

전국 형무소재소자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과거 국가기구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960년 4.19 후 제4대 국회 ‘양민학살진상규명특위’에서 대구‧경북지역 유족들의 신청서를 받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형무소 사건에 대해서는 진상규명 활동이 이뤄지지 않았다. 단지 대구형무소 재소자 1,402명이 CIC, 헌병대, 경찰에 인계되었다는 내용의 보고서와 명단이 공개되었을 뿐이다.

▲ <1950년 대구형무소 『재소자인명부』 ‘군 헌병대 인도’ 기록>(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해방 후 다른 지역처럼 대구‧경북지역의 형무소에서도 재소자 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대구형무소의 경우 1946년 7월 2,003명에서 1949년 8월 4,397명으로 늘어났으며, 안동형무소는 1946년 7월 446명에서 1949년 8월 872명으로 증가했다.

<표> 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 현황(1946~1949)(주11)                       (단위: 명)

구 분

대구형무소

김천형무소

안동형무소

1946. 7.

2,003

843

446

1947. 3.

2,218

951

416

1948. 5.

1,877

538

687

1949. 8.

4,397

961

872

 
1950년 대구시 삼덕동 83번지에 있었던 대구형무소의 수용가능 인원은 2,000명이었다. 1949년 수용인원을 훨씬 초과하자 1950년 전쟁 직전 일부 재소자를 부산, 부천, 대전 등지로 이송을 보냈다. 그래도 과도한 인원을 수용해서 1950년 6월 기결수 1,97명, 형사피고인 2,315명, 피의자 52명 등 총 3,889명을 수감하고 있었다. 기결수 1,397명 중에서 내란, 소요,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정치사상범의 수가 1,137명, 미결수 중에서도 좌익수가 1,547명이나 됐다. 총 재소자 3,889명 중 2,684명이 좌익사범으로 69%를 차지해서 대부분이 정치사상범이었다.

대구형무소에 있던 좌익사범들은 1950년 7월 7~9일과 7월 27~31일 두 차례에 걸쳐서 1,400여명이 살해되었다. 1차에는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자들로 15년형 이상의 장기수 또는 무기수, 중형이 예상되는 좌익사범 미결수들이 헌병대와 CIC에 인계되었다. 2차는 7월 말경 북한군 주력부대인 3사단과 12사단이 김천과 안동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대구 시내가 위기에 처하자 남은 재소자들을 진주형무소로 이감한다는 구실로 군 헌병대에 인계했다. 당시 서무과에 근무했던 형무관은 원 아무개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헌병들이 죄수들을 모두 ‘진주(로) 이송’한다며 끌고 나갔습니다. 특별한 기준이 없습니다. 좌익수라면 다 끌려 나갔습니다. 서무과 명적계에서 죄수들의 기록을 관리했는데 죄수 기록이 산더미로 쌓여 있었고 직원 한 명이 계속 지키고 있었습니다. 헌병대가 죄수들을 데려 나갈 때, ‘몇 월, 며칠, 몇 시, 국가보안법 몇 백 명’이 적힌 명령서를 들고 옵니다. 그렇지만 죄수들이 너무 많아 분류하는 작업을 하지 못합니다. 명적계 직원들이 닥치는 대로 사람 수를 맞춰놓으면, 헌병대가 죄수들을 인계받아 끌고 나갔습니다.”(주12)

1950년 대구형무소 「재소자인명부」에 따르면 7월 27일부터 31일까지 1,193명의 좌익사범이 ‘군 헌병대에 인계’되었다. 재소자들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연행된 보도연맹원들도 형무소 내 공장과 교회당에 구금되었다가 함께 사살되었다. 이들은 형무소에 상주하던 대구(경북)지구 CIC와 3사단 헌병대, 대구지역 경찰 등에 의해 적법한 절차도 없이 경북 경산시 코발트광산, 대구시 달성군 가창골짜기, 칠곡군 신동재, 대구시 달서구 본리동과 송현동 등에서 집단으로 살해되었다.(주13)

▲ <1960년 대구시 본리동 발굴현장에서 발굴된 유해>(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 <1960년 대구시 본리동 발굴현장에서 발굴된 유해>(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김천형무소에는 전쟁 발발 당시 1,000여명의 재소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7월 16일 349명(군형법 기결수 84명과 2년 이하의 좌익기결수 217명, 그 외 일반 사범)을 대구형무소로 이감시키고 형무관들도 후퇴했다. 그런데 그 전 3년 이상의 좌익기결수와 8년 이상의 일반사범, 정체 미결수 등 650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7월 초순부터 김천과 인근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연행하여 그 중 일부를 김천형무소 내 공장과 창고 등에 구금했다가 재소자와 함께 사살했다. 따라서 7월 초순에서 15일 사이에 최소 650명 이상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살해되었다. 이들은 형무소에 상주하던 김천지구 CIC와 김천지구 헌병대, 김천경찰 등에 의해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돌고개와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 대항면 직지사계곡 등에서 집단으로 살해되었다.

안동형무소에는 전쟁 이전 1,200여명의 재소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일반재소자는 100명을 넘지 않았다. 7월 5일 북한군 8사단이 제천을 점령하자 상황이 급박해진 안동형무소는 5년 이상의 좌익사범 200여 명과 구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 400여 명을 처형하고 15~16일 나머지 재소자를 대구형무소와 부산형무소로 이송했다. 희생자들은 8사단 25연대 헌병대와 안동경찰, 안동형무소 형무관 등에 의해 안동시 남후면 수상리 청골과 도둑골, 와룡면 태리 기름땅 고개 등에서 집단적으로 살해되었다. 그런데 15일 안동형무소에서 대구형무소로 이송된 재소자 중에서 116명과 16일 부산형무소로 이송된 재소자 중 323명이 후에 다시 대구와 부산에서 처형되었다.(주14)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

▲ <1950년 부산형무소 수용 중인 정치범들> 1950년 9월 16일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 <1950년 부산형무소 수용 중인 정치범들> 1950년 9월 30일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아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부산‧경남지역 형무소의 경우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사이에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재소자 수의 증가 속도가 높지 않은 편이었다.

<표>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현황(1946~1949)               (단위: 명)

 

부산

마산

진주

1946.7

1632

528

601

1947.3

1496

572

466

1948.5

2021

606

834

1949.8

1977

741

803


부산시 대신동 3가 313번지에 위치하고 서면지소와 김해농장을 가지고 있었던 부산형무소의 경우, 1,500~1,600명이 수용가능 인원이었으나 전쟁 전부터 초과하기 시작했고, 1950년에는 더욱 빠르게 증가했다.

한국 전쟁 직후인 7월 부산형무소는 살인‧강도 등 일반 중범자들과 좌익사범들을 제외하고 형이 낮은 일반사범들을 석방하였다. 1950년 1월부터 전쟁 전까지 부산형무소에서 석방된 재소자의 수는 576명으로 1950년 1~5월까지 하루 평균 4~5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직후 7~8월 두 달 동안 절도‧강도 등 일반사범들 중 무려 767명이나 ‘가석방’ 또는 ‘집행정지’로 풀어주었다. 특히 8월 2~6일의 4일 동안 무려 236명의 일반사범들이 집중적으로 가석방되었다. 이는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를 구금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였다.

▲ <마산형무소 희생자 사건 현장> 구산면 심리마을 수장시신 매장지
▲ <마산형무소 희생자 사건 현장> 구산면 심리마을 수장시신 매장지

 

 

 

 

 

 

일반사범들에 대한 가석방과 함께 일차적으로 1950년 7월 26~30일 형무소에 파견된 헌병대와 CIC가 형이 중한 좌익사범들부터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부산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부성방(제주 4ㆍ3사건 관련 수형인, 국방경비법 32조‧33조 위반으로 징역 15년형 선고)도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

“제주 사람들은 20년형을 받은 사람과 15년형을 받은 사람들이 한 감방에 있었습니다. 20년형을 받은 사람들이 두 번에 걸쳐서 불려 나가서 ‘이상하다? 어디 일을 나가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간수가 저녁 먹었던 그릇을 가지러 와서는 ‘너희들만 밥 먹으니 맛좋지?’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죽으러 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화북 사람 임아무개도 20년형을 받고 우리와 같은 방에 있었는데, 그분도 끌려가서 죽었습니다.”(주15)

부산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국방경비법‧육군형사범 위반자들은 15년 이상의 장기수 또는 무기수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이 가장 먼저 살해되었다. 형무관이었던 김 아무개도 죄가 무거운 중범죄자들부터 헌병대에게 넘겨주었다고 증언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7월 말인가 8월 초부터 헌병대가 와서 재소자들을 내어달라 했습니다. 명적계가 죄가 중한 좌익사범부터 넘겨주었습니다. 헌병들이 헌병대 트럭 적재함에 푸른 옷의 재소자들을 실은 뒤 엎드리게 했습니다. 타고 있는 사람이 엎드리면 외부에서는 사람이 타고 있는 줄 모릅니다. 한 트럭에 15~20명 정도 탈 수 있었습니다. 한두 번 실어 간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싣고 갔습니다. 산속에 가서 총살시켰다고 들었습니다.”(주16)

1950년 8월 2~3일에는 2차 학살이 있었다. 8월 1일 북한 7사단과 8사단이 낙동강 도하를 시작하면서 전세가 더욱 악화되자 부산형무소는 일반사범들을 대거 석방하고 남은 재소자들을 분류하여 헌병대와 CIC에게 인계하였다. 8월 2~3일 109명의 좌익사범들이 ‘헌병대와 CIC에게 인계’되었다. 헌병대와 CIC에게 인계된 재소자들은 대부분 내란‧국방경비법‧포고령 위반‧국가보안법 위반의 죄명을 가지고 있는 좌익사범들이었다.

당시 부산형무소 형무관 박 아무개는 “사상범은 미결수도 따로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헌병대에서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감방마다 문 앞에 있는 사람부터 끌어내어 갔다 ‘버렸습니다’. 헌병이 한 트럭에 한 20명씩 손을 묶고 얼굴을 가리고 태워서 10트럭 정도 싣고 나갔습니다. 헌병들은 형무소에 상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명단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고, 간수들에게 좌익사범들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헌병대가 재소자들을 데려가는 걸 제가 직접 목격하였습니다”라고 증언했다. 헌병대와 CIC에게 인계된 109명 중 일부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헌병대에게 총살당하였고, 나머지는 집단살해된 것이다.(주17)

3차 학살은 수복 직전에 있었다.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형무관 박복용은 “1950년 9월 어느 날 해가 넘어갈 무렵 군인들이 죄수들에게 새까만 옷을 입힌 뒤 트럭에다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 트럭에 30~40명씩 태워 며칠간 계속 싣고 나갔는데 한번 실려 간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저녁 때 빈 차만 되돌아왔다. 그때 군인들이 싣고 간 사람들을 2m 정도 구덩이를 파서 다 집어넣고는 총을 마구 갈긴 뒤 모두 죽은 걸 확인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파묻어버렸다”(주18)고 증언했다.

부산지역 보도연맹원들과 예비검속자들도 이들과 함께 학살되었다. 7월 말부터 9월 사이에 부산형무소에 상주하던 부산지구 CIC와 부산지구 헌병대, 부산지역 경찰들은 최소 1,500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8부 능선, 해운대구 장산골짜기 등에서 집단총살하거나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했다.(주19) 

▲ <마산 여양리 산태골에서 출토된 유해 및 유물> 1호 돌무지 유해.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 <마산 여양리 산태골에서 출토된 유해 및 유물> 각종 군용품들.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마산형무소에서는 7월 5일, 7월 21~24일, 8월 24일, 9월 21일의 네 차례에 걸쳐 최소 717명의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들이 마산육군헌병대에 인계되어 집단적으로 살해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과정에서 이 가운데 358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들 대부분은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집단적으로 살해되었으며 일부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7월 15일부터 8월까지 마산지역 상당수의 보도연맹원들이 마산지구 CIC와 마산 육군헌병대, 마산경찰 등에 의해 마산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A, B, C로 분류된 뒤 집단살해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마산 구산면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주20)

한국전쟁 당시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1098번지에 있었던 진주형무소에는 1,000여명의 재소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진주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 중에는 좌익사범이 가장 많았으며, 이들은 진주지청 산하의 진주, 사천, 하동, 의령, 합천, 산청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진주지역은 부산, 마산지역과는 달리 1950년 8월 이후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6사단과 함양으로 진격해 오는 인민군 제4사단에 의해 점령위기에 처했다. 진주가 인민군의 점령위기에 놓이자 CIC, 헌병대, 경찰들이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을 집단으로 살해하고 후퇴했다. 진주형무소에서는 7월 중순에서 하순까지 최소 1,200명의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들이 진주지구 CIC와 헌병대, 진주경찰 등에 의해 집단으로 살해되었다. 이들은 진주 명석면 우수리 갓골과 콩밭골, 관지리 화령골과 닭족골, 용산리 용산치,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 등지에서 집단 총살당했다.(주21)

법원, 66년 만에 국가 책임 인정

경북 경산시 평산동에는 일제 강점기 1930년대 후반 군사용 코발트를 공급하기 위해 개발되기 시작해 일제 패망 직전에 폐광이 된 코발트광산이 있다. 이 광산에는 수직굴과 수평굴이 함께 존재하는 이곳에서 한국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부터 9월에 걸쳐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학살된 사람들은 경산, 청도, 대구, 영동 등지에서 끌려온 국민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들이었다. 이들은 경산‧청도지역 경찰과 경북지구CIC 경산‧청도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에 의해 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가 집단학살되었다. 유족들은 희생자 수가 3,500여명에 이를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 약간의 편차가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11월 7일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에서 최소한 1,800명을 상회할 것으로 보았다.(주22)

▲ 경산코발트 광산 내부에 흩어져 있는 유골(진실화해위원회)

군경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끌고 가 수직갱 입구에서 살해한 다음 폐광산 갱속에 떨어뜨리는 방법을 썼다. 경산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유해는 갱내에 그대로 던져진 채 세월과 함께 방치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유해발굴 용역조사’를 통해 3차에 걸쳐 경산코발트광산의 유해발굴을 진행하기 전까지는 유족들과 민간단체 관련자, 민간인 학살사건 연구자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발굴을 위해 사전 조사를 실시했을 때 갱내 이곳저곳에 유해들이 드러난 상태로 방치돼 있었고 물과 흙 속에 범벅이 된 채 뒤섞여 있었다.

1차 발굴은 2007년 6월 25일부터 9월 17일까지 85일 동안 경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때 1,2수평굴과 인근 대원골에서 발굴을 진행하여 약 107구의 유해와 희생자 유품(도장, 고무신, 단추 등), 가해자 물품(군화, 판초우의, 탄피 등) 수백 점을 발굴했다. 2차 발굴은 2008년 7월 21일부터 11월 4일까지 106일 동안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 의해 1,2수평굴에서 발굴을 진행해, 약 216구의 유해와 함께 희생자와 가해자의 유품과 군용품을 다량 발굴했다.(주23) 3차 발굴은 2009년 7월 12일부터 2수평굴에서부터 발굴이 진행되었는데 약 4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경산코발트광산에서 발굴된 유해는 충북대학교 등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이때 수습된 일부 유골을 제외하고 아직도 수많은 유골들이 갱내에 남아 있다. 워낙 오랫동안 폐광으로 방치된 상태여서 무너질 위험성이 있는 등 코발트 광산의 발굴 작업은 간단하지 않다. 국가기관의 개입과 예산 지원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다음, 경산코발트광산의 유해발굴 작업은 중단되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곳에서도 유해발굴 작업도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다. 2014년 2월 시민단체가 참여해 만든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이 자체적으로 유해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것으로는 이 같은 대규모 발굴작업은 엄두도 낼 수 없다.

2016년 9월 16일 대법원 1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강 아무개씨 등 110여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경산코발트광산사건 관련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최종 확정했다. 법원은 국가가 희생자 본인에게 8,000만원, 배우자에게 4,000만원, 부모와 자녀에게 800만원, 형제자매에게 400만원 등 총 62억원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 <처형자 가족 명부(경산경찰서, 1975)>(진실화해위원회)

1심 재판부는 희생자들이 이 사건들로 희생된 사실을 인정하고 국가에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도 1심과 같은 취지로 판결했다. 다만 일부 사망자는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의 희생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국가는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며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가의 배상책임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이와 함께 대구·경북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군위·경주·대구 국민보도연맹사건, 경북·영천 국민보도연맹사건, 한국전쟁 이전 경산 민간인 희생사건, 대구·고령·성주·영천 민간인 희생사건 등 6건의 학살 사건의 국가 책임도 인정해 310여명의 희생자 유가족에게 117억여원의 손해배상금을 주라고 판결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결정한 6건의 민간인 학살 사건 희생자는 5000여명에 달한다.(주24)

이처럼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유해발굴 작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유족들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법원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한 민간인 학살의 후속처리를 제대로 정리할 수는 없다. 국가가 과거 국가범죄 행위를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우며 고통받은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위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사 청산 작업은 아직도 진행형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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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사형 691명, 무기징역 119명, 20년형 256명, 5년형 259명, 1년형 18명 등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광주‧목포‧순천‧전주‧군산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4, 2010, 485쪽

2) 사형 116명, 무기징역 249명, 20년형 238명, 5년형 247명, 1년형 53명 등이다.(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485쪽)

3) 법무부, 󰡔한국교정사󰡕, , 1987년, 526~532쪽. 당시 형무소 근무자들의 진술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4) 최정기, 「해방이후 한국전쟁까지의 형무소 실태 연구 - 행형제도와 수형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제노사이드연구』 제2호, 2007, 21~22쪽;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486쪽

5) 법무부, 위의 책, 526~532쪽

6)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486~487쪽

7)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510쪽

8)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154쪽

9)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155쪽

10)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155쪽

11) 최정기, 위의 글, 21~22쪽; 진실화해위원회, 「대구‧경북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6, 78쪽 참고

12)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91쪽

13)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156쪽

14)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157쪽; 진실화해위원회, 대구‧경북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140~141쪽

15) 제주4ㆍ3연구소, 󰡔무덤에서 살아나온 4ㆍ3 수형자들󰡕, 역사비평사, 2002, 144쪽

16) 진실화해위원회, 「부산‧경남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395쪽

17) 진실화해위원회, 「부산‧경남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396쪽

18) <국민일보>, 2002. 4. 10

19)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157쪽

20)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157~158쪽

21) 진실화해위원회, 「부산‧경남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Ⅱ)」,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7, 23~30쪽

22) 진실화해위원회,「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010, 775쪽

23) 2차 발굴에서는 특이하게도 제1수평갱도 내부에서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용 76㎜ 고폭탄약 불발탄이 발견되었다. 경산지역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점령되지 않았던 지역임을 고려해 볼 때, 고폭탄은 코발트광산에서 희생자들의 학살과정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794쪽)

24) 김민경,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66년 만에 국가책임 인정”, <한겨레> 2016.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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