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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교회를 가다㊲ 몰몬교(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상<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77회)
최재영  |  9191j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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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27  1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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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65회부터는 남측 교회와 해외교회가 주도해 북측 영토에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건축사업이 중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그 원인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자 한다. 이중에는 ‘평양조용기심장전문병원’내에 마련될 30평 규모의 ‘병원교회’와 평양 대동강변 IT단지에 설립될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 예장 합동 측의 ‘평양장대현교회’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현재 추진 중인 미국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의 주도로 지어질 ‘평양국제외국인교회’도 다루고 평양 조선영화촬영소 산속에 지어진 ‘형제산교회당’과 거기 딸린 목사관을 방문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며 나진선봉교회도 다룰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분류된 ‘통일교’가 평양보통강호텔 앞에 설립한 ‘국제평화센터’와 평화자동차 공장 방문이야기들을 다룰 것이며 안식일교와 몰몬교의 대북사역 등도 심도 있게 다룰 것이다. / 필자 주 

 

몰몬교와 북한과의 관계

이번 몰몬교 편은 2회에 걸쳐 몰몬교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 폭 넓게 살펴보면서 동시에 현재 북한의 몰몬교 교세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아울러 미국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몰몬교 출신 대북관련 저명인사들을 파악해 그들의 활동을 면밀히 관찰해 보고자한다. 특히 현재 국제사회는 물론 북미 간 혹은 남북 간에 매우 예민한 사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북 인권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로버트 킹(Robert King) 대북인권특사(US Special Envoy for North Korean Human Rights Issues)는 과거 몰몬교 선교사를 지원해 다녀올 정도로 독실한 신자인데 그가 종교인으로서 어떻게 대북 특사활동을 조화롭게 수행하는지를 살펴보았다.

평소 몰몬교의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킹 대사가 북을 이해하는 방식이 객관적이고 내재적인 접근방식이 아닌 미국의 기존 정책을 수행하는 대북 고립 압박 정책을 고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이런 그의 대북관과 종교관도 점검할 것이다. 아울러 지난 2012년 미국 대선에서 보수적인 공화당의 대선후보 미트 롬니(Mitt Romney)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오바마 대통령과 최후 대결을 벌였는데 그는 자신을 포함해 온 가족이 독실한 몰몬교 집안이다. 그가 대선에 출마해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몰몬교가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으며 실제로 미국의 몰몬교 교인수가 650만 명으로 증가하기도 했는데 그가 지니고 있는 대북관도 살펴보았다.

또한 서북미 지역에는 미주 한인 이민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교포로 인정받아 온 신호범(愼昊範, Paull Shin, Ph.D) 박사가 독실한 몰몬교 신자인데 워싱톤주 상원 부의장을 지낸 그는 1990년대는 주한 미국대사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입양한 양부를 따라 평생 몰몬교 신자로 살면서 일본에 몰몬교 선교사로 파송되는 등 미국과 한국의 몰몬교에서는 매우 비중 있는 몰몬교 지도자 역할을 해왔으나 정계에 은퇴하기 전에 장로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개종한 이후에도 자신을 키워준 몰몬교와는 단절하지 않고 기본적인 교류를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북한에 대한 객관적 이해부족으로 현직에 있는 동안 보수적인 성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그의 대북관에 대해서도 알아 볼 것이다.

미 서부지역에는 청와대 대통령직속 기구인 민주평통자문위원회(평통) LA평통위원장을 지낸 차종환(車鍾煥) 박사가 독실한 몰몬교 신자인데 그는 이곳 미국에서 몰몬교의 남가주한인공보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이민을 오기 이전에도 동국대학교 부학장을 지내면서 몰몬교의 제7대 서울지방 부장(1966-1969)을 맡을 정도로 몰몬교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지금도 미주 한인 이민사회에서 대북전문가로서 통일문제뿐 아니라 북한의 농업과 식물, 생물학분야의 권위자로 활동하는 한편 최다 저술가로서 기네스북에 오르는 등 미주 한인사회의 비중 있는 인물이다.

한편 몰몬교의 본 고장 유타주에 있는 브리검 영(B.Y.U) 대학교에서 아시아언어학을 전공하던 중 한국에 몰몬교 선교사로 파송된 스네든이라는 청년이 중국에 체류 중 갑자기 방북해 지금까지 10년 넘도록 평양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 되고 있는데 필자는 이에 대해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스네든에 대한 납치의혹을 제기한 측의 주장에 의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집권하던 시절이던 2004년 8월 스네든이 중국 윈난(雲南)성에 있는 북한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갑자기 실종됐는데 10년이 지난 현재 평양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영어교사를 하던 중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세 자녀들(김정철, 김정은, 김여정)을 대상으로 한 때 영어 전담 교사를 맡기도 했으며 그 후 다시 영어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스네든은 북에서 결혼해 현재 부인과 두 자녀까지 두고 있다고 하는데 그 같은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스네든의 네 식구들만 해도 이미 북에는 몰몬교 신자가 4명이 되는 셈이다.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몰몬교 신자들의 특성상 아마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생활 가운데 몰몬교 포교 활동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러한 스네든의 실종 문제와 현재 북한에 거주한다는 사실여부를 점검해보고자 하며 이에 따라 현재 북한의 몰몬교 교세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또한 몰몬교 차원에서 1995년부터 추진된 곡물, 의약품, 의료지원, 농업, 산림 등의 다양한 인도적 대북지원사업이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며 마지막으로 북 당국은 몰몬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의 여부도 알아 볼 것이다.

   
▲ 2009년 9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국무부 대북인권특사로 임명된 로버트 킹 대사의 모습. 그는 몰몬교 선교사 출신의 독실한 신자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독실한 몰몬교 신자로서 2012년 미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오바마와 대결했던 미트 롬니 후보. [사진제공 - 최재영]

 

   
▲ 한국에서 몰몬교 서울지부장을 지냈던 차종환 박사는 이민 후에도 몰몬교 남가주한인 공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대북전문가로서 LA평통위원장을 지낸 그는 2013년 국회 에서 열린 세계한인의 날 시상식 참석 후 몰몬교 동대문 와드에서 강연하는 모습 (2013.10.8.). [사진제공 - 최재영]

 

   
▲ 워싱톤주 상원 부의장을 지낸 신호범 박사는 몰몬교 선교사 출신이며 미국에서 발령을 받아 한국에서 몰몬교 선교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사진은 몰몬교 시애틀지부에 참석해 성찬식을 마친 후 신자들과 함께한 모습(2009.7.26.). [사진제공 - 최재영]

 

정통교회는 아직도 이단으로, 사회적으로는 기독교의 한 교파로

2016년 현재 ‘몰몬교(Mormonism, Mormons)’의 정식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이며, 영문 명칭은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이하 LDS)’라고 부른다. 몰몬교가 처음 창건될 당시는 기존의 개신교 교회 명칭과 혼선을 빚을 정도로 흡사해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Jesus Christ)’,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등의 다양한 명칭을 사용했으며 1834년부터 ‘후기성도교회(Church of Later Saints)’라고 불렀다. 그 후 1838년부터 다시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 Day Saints, 약칭 LDS Church)’로 사용되는 등 명칭에 대한 변동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말일성도(末日聖徒) 예수그리스도 교회’라는 명칭은 어감상 좋지 않고 오해의 소지가 있어 다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 처음 소개될 당시인 1955년에 ‘Latter-day’를 일본어식 ‘말일’로 번역해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 몰몬교 본부 측에서는 2005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현재와 같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로 재개칭해 사용하고 있다. 그동안 외부에서는 ‘몰몬교회’, ‘몰몬교’로 지칭해왔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교회에서는 실제로 수용하는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도록 권유하고 있다. 현재는 간략히 표기할 경우 ‘교회’ 혹은 ‘예수 그리스도교회’라는 명칭만을 사용할 것을 당부하고 있으나 통상적으로 일반인들은 ‘몰몬교’라는 명칭을 아직도 편하게 사용하고 있다. 몰몬교 또한 일반 기독교 교파들처럼 원류에서 갈라진 분파가 많기 때문에 몰몬교에 대한 기초적인 역사와 연혁을 알아야 몰몬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 몰몬교의 유래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몰몬교는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지역의 버몬트(Vermont) 출신의 ‘조셉 스미스 2세(Joseph Smith, Jr.)’가 19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이른바 ‘제2차 대각성’이라 불리는 기독교 부흥기에 맞춰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뉴욕주에서 창교했다. 그는 1823년 숲속에서 기도하던 중 천사 모로나이(Moroni)로부터 고대 기록이 담긴 금판을 얻어 하나님에게 신권(神權)과 교의(敎義)를 회복하는 사람으로 선택되었다고 주장했고, 그 후 1830년 금판에 새겨진 글을 번역해 몰몬경(Book of Mormon)이라는 책으로 출판하며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1830년 미국 뉴욕주의 맨체스터에서 시작한 몰몬교는 설립자 스미스 2세와 동료 6명이 시온(하나님의 나라)이 아메리카 대륙에 수립된다고 믿었으며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교회의 권위와 조직을 회복하겠다는 목표로 창립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831년에는 미국 중서부 오하이오주의 커트랜드(Kirtland)로 교회본부를 옮기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모방해 ‘에녹협동교단(United Order of Enoch)’을 세워 교세를 넓혔고 1836년에는 미주리의 콜드웰 카운티(Caldwell County)에 ‘파 웨스트(Far West)’라는 정착촌을 세워 새로운 종교 공동체를 세우려 했으나 현지 주민들과 무장 충돌까지 벌어지는 갈등을 빚는 바람에 결국 1839년 미시시피 강 유역인 일리노이의 핸콕 카운티(Hancock County)로 옮겨 ‘나우부(Nauvoo)’라는 종교 공동체를 세웠다.

그러나 독특한 몰몬교리와 신자들의 행동양식은 기존 사회제도와 정통교회들로부터 수용되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추방과 박해를 받기 시작했는데 특히 독자적인 신정정치(神政政治)를 따던 몰몬교는 이곳에서도 주민 조직과 갈등을 빚었다. 1844년 결국 조셉 스미스 2세와 그의 친형 ‘하이럼 스미스(Hyrum Smith)’는 일리노이주의 카테지 형무소에서 민병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가 피살된 후 그 뒤를 이은 브리검 영(Brigham Young)도 일리노이주에서 추방당하며 1847년 로키산맥 너머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로 옮겨 정착하면서 지금까지 교세를 크게 확장시켜왔다. 이처럼 뉴욕주에서 시작된 박해가 오하이오, 미주리, 일리노이 등을 거쳐 1847년 현재의 유타주로 들어간 그들은 솔트레이크시를 거점지역으로 확보한 후 스미스 2세의 후계자인 브리검 영의 지도하에 그곳에서 독특한 신앙 공동체를 건설했다.

그 후 신도들은 서부의 여러 도시들을 개척하고 정착하는 데 성공했으며, 브리검 영은 유타 주의 초대 지사를 지내기도 했으나 1857년 몰몬교회의 신정정치와 일부다처제의 관습을 둘러싸고 주민들과 갈등이 확대되면서 무장 충돌이 벌어졌고, 급기야 연방에서 파견된 군대와 자위권을 행사하려는 몰몬교 민병대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브리검 영은 평화협상 제안으로 1858년 ‘알프레드 커밍(Alfred Cumming)’에게 주지사 자리를 물려주었다. 원래 멕시코 영토였던 유타주는 1896년에야 미국의 정식 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몰몬교회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유타주 주민의 60% 정도가 몰몬교(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의 교인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몰몬교회의 교리에는 고대 성경시대와 같은 조직과 신앙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에도 성경시대와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의 관습을 유지해 왔는데 이 문제가 주민들과 갈등을 빚는 큰 요인이 된 것이다. 1889년 결국 미국 정부는 몰몬교회의 일부다처제가 국법에 위배된다며 교회의 모든 재산을 동결하자 몰몬교 본부 4대 회장인 윌포드 우드러프는 1890년 교회가 더 이상 일부다처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하였고, 1904년에는 6대 회장 조지프 F. 스미스 시니어가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교인에 대해서는 파문을 하겠다고 선언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한 몰몬교회는 정통 기독교 교단으로부터는 이단시되었으나 사회적으로는 배척과 질시에서 벗어나 점차 기독교의 일파로서 인정받으며 세계 각국으로 퍼져 그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1830년 뉴욕주 시골마을의 작은 농장에서 여섯 명이 모여 시작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몰몬교는 전 세계 160개국에 1,600만 명에 육박한 신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2012년 통계상 전 세계 몰몬교 신자는 14,137,100명이며 2014년 기준으로는 1530만 명에 달할 정도로 확장됐고 전 세계적으로 하루 1000명씩 신자가 늘어날 만큼 성장속도가 매우 빠르다.

특히, 몰몬교는 미트 롬니(Mitt Romney)가 2012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오면서 오바마 대통령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며 미국 내 몰몬교 회원(신자들)은 650만 명으로 증가되기도 했다. 이는 전 세계 신자의 42%가 되는 숫자이며 나머지는 전 세계에 골고루 퍼져 있다. 650만 명의 교세는 미국 내 가톨릭, 남침례교회, 연합감리교회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규모의 교파이다.

   
▲ 솔트레이크시에 위치한 몰몬교 본부 26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템플스퀘어(Temple Square)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솔트레이크시에 위치한 몰몬교 성전(Salt Lake Temple)의 야경. [사진제공 - 최재영]

 

   
▲ 몰몬교 성전(Salt Lake Temple)은 40년에 걸쳐 건축했다. 건축완공을 앞두고 70% 마무리 단계에 있는 공사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 템플 스퀘어(Temple Square) 광장 맞은편에 위치한 몰몬교 대회장(Conference Center)의 위용. 내부 회의장은 21,000석의 좌석을 보유했으며 2000년 3월에 완공했다. 1년에 두 번 이곳에서 몰몬교 연차대회가 열린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몰몬교의 조선 전래와 연혁

필자는 몇 해 전 북한에는 과연 몇 명의 몰몬교 신자가 존재하고 있는지 궁금해 위키백과에 확인한 결과 현재 북에는 다섯 명의 몰몬교 신자가 존재한다고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 숫자는 12년 전 북으로 갔다는 스네든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다양한 확인과 검증 작업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이북의 몰몬교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아시아권인 남한의 몰몬교 역사에 대한 파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다른 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루트를 볼 때 거의 이북지역을 통해 선교 거점을 확보했으나 몰몬교의 선교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평양이나 이북지역이 아닌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몰몬교가 조선에 전래된 시기를 보면 1910년 1월 일본에서 선교사로 근무하며 선교부 회장을 지낸 ‘엘머 테일러(Elmer Taylor)’가 미국으로 귀국 직전 조선에 건너와 전임 선교사 파송 여건과 시기 등을 저울질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을 거쳐 중국 단동을 거치는 등 모두 두 달을 체류하며 조사활동을 벌인 후 미국으로 귀국해 상세히 보고하면서 조선에 대한 선교 행정이 본격화되었다. 그 후 32세의 나이에 미국 몰몬교의 최고위직인 십이사도에 임명된 ‘데이빗 맥케이(David Oman Mckay)’가 1921년에 조선을 방문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인 최초 방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맥케이는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의 뒤를 이어 78세의 고령에 제9대 교회 회장이 되었다.

또한 조선인으로 가장 먼저 최초로 몰몬교 신자가 된 사람은 1927년 하와이에서 침례를 받은 김재한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 하와이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타계했으므로 조선 최초의 몰몬교 신자는 김호직(金浩稙)으로 기록된다. 김호직은 김재한보다 한참 후에 침례를 받았으나 귀국 후 국내에서 최초의 몰몬교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1951년 미국 유학 중에 침례를 받고 신자가 된 후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1952년부터 최초의 몰몬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몰몬교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그는 이승만 정부에서 문교부 차관, 유네스코 한국대표 등을 역임하는 등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왕성한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말 조선에 주둔한 일제의 항복을 미군 편에서 이끌어낸 ‘덴마크 젠슨(Denmark C. Jensen)’ 대령이 독실한 몰몬교 신자였는데 그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조선에서 몰몬교를 전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일제로부터 해방 직후 미군정 기간에 몰몬교 신자 군인이었던 ‘루드 로빈슨(Ruth Robinson)’ 하사가 12명의 다른 군인들과 함께 인천항으로 입국해 1년간 체류하면서 조선인들에게 몰몬교를 전파하다가 이듬해인 1946년 10월 26일 미국으로 귀국했다.

그 후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몰몬교를 믿는 미군과 UN군의 참전을 통해 부산에서 본격적으로 포교가 시작되었는데 우선 미군 중심의 모임을 가진 후 한국인들도 참석을 권유하며 포교가 시작됐고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유학하던 김호직이 귀국 해 미군들의 포교활동과 맞물려 몰몬교의 확산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당시에도 몰몬교의 포교정책 중 가장 중요한 전략 중에 하나인 영어교육은 포교 대상자들과의 가장 유용한 접촉점이 되었는데, 당시에도 한국인들의 영어교육 열풍과 맞물리며 선교사들은 청소년들과 대학생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에게 인기를 차지하며 자연스럽게 접촉하는 등 그 결과 영어공부 모임은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큰 효과와 결실을 거뒀다.

몰몬교가 한국에 뿌리 내리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김호직 박사는 그의 가족들도 전도하여 1952년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그의 아들 김신환과 그의 딸 김영숙을 포함한 4명이 한국 역사상 몰몬교의 첫 수침자(몰몬교 교리에 따라 침례를 받은 신자)들이 되었다. 이처럼 전쟁의 혼란기에도 불구하고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시작된 영어공부 열풍과 모임이 확산되며 침례자들은 점점 늘어났다. 이때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사람이 미군 군목 ‘스펜서 파머(Spencer Palmer)’였는데 훗날 그는 다시 한국으로 몰몬교 선교사로 파송돼 사역하며 한국학에 관한 많은 연구 성과를 남겼다.

한국전쟁 후 2년 뒤인 1955년 8월 2일 당시 ‘12사도 정원회’의 회장이 한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일본 몰몬교 선교본부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에 지방부가 조직되며 김호직이 초대 지방부장으로 임명받았다. 이듬해인 1956년 4월 20일 미국 몰몬교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한국에 파송되어 두 달 후인 6월 3일 한국지방부 서울지부가 조직되며 서울고등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보았다. 그 후 1966년 9월 10일 한국 땅에 최초로 몰몬교 방식의 표준 건물이 대지 1,145평에 건평 322평으로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동부 지부 예배당으로 헌납되었다.

한국 몰몬교의 발전과 국제적 위상

1957년에는 초대 한국지방부 회장을 지낸 김호직 박사에 의해 ‘한국몰몬교회재단’이 설립되었으며, 1962년 7월에는 ‘한국선교부’가 조직되기에 이른다. 1967년 3월에는 ‘몰몬경’이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1968년 10월 ‘교리와 성약’, ‘값진 진주’ 한국어 합본이 번역 출간되었고 1970년에는 한국어 찬송가가 번역 출판되었다. 그 후  2005년 7월 1일 몰몬교의 중요한 세 가지 경전인 ‘몰몬경’, ‘교리와 성약’, ‘값진 진주’가 다시 한글 개역판으로 출간되었다. 몰몬교에서는 성경책을 특별히 구별하기보다 이 3권의 책들과 함께 하나의 경전으로 보고 있다.

1973년 3월 8일에는 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서울 스테이크(교구조직)가 조직되었으며 세계 교구 조직상 북아시아 지역에 소속되었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한 한국 몰몬교는 아시아 대륙의 첫 번째 성전인 서울성전이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에 장소를 정하고 1981년 4월 1일 성전 건설 계획을 발표했고, 1983년 ‘마빈 애쉬톤(Marvin J. Ashton)’ 사도의 감리 하에 기공식이 거행되었으며, 1985년 12월 14일 당시 부대관장이었던 ‘고든 힝클리’ 장로에 의해 헌납되었다. 그 후 한국 몰몬교는 전국에 17개의 스테이크, 4개의 선교부, 6개의 지방부 및 단위교회로서 150여개의 와드와 지부로 발전되었으며 교인 수 10만 명, 4백여 명의 선교사들이 선교부에 소속되어 다양한 선교활동과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한국인 몰몬교 선교사로 파송 받은 이영범 장로를 필두로 한국 몰몬교인들이 각국에 선교사로 임명되고 있으며 한인상 장로가 한국인 몰몬교 지도자로서 사상 최초로 총관리 역원(칠십인 제2정원회)으로 선출되었고 칠십인 제2정원회에 고원용 장로가, 칠십인 제1정원회에 최윤환 장로가 선출되기도 했다. 또한 북아시아 지역 칠십인 정원회에는 김창호 장로, 정태걸 장로, 구승훈 장로가 선출될 정도로 한국 몰몬교는 국제적으로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으며 2005년 7월에는 한국전래 50주년을 기념했으며 작년 2015년에는 전래 60주년을 맞았다.

몰몬교는 조직의 특징상 ‘총관리 역원’이라는 최상위 의결기구를 두고 있는데 그중에 ‘제1회장단’을 필두로 ‘12사도 정원회’이 그 뒤를 잇고 있으며 ‘70인 정원회’를 두고 있는 등 핵심 지도자 그룹을 두고 있다. 또한 일반 기독교의 교구와 구역 조직처럼 ‘지부’와 ‘와드(Ward)’ 그리고 ‘스테이크(Stake)’로 분류되며 몰몬교 신자들에게 있어 가장 크고 중요한 핵심 장소는 그들이 신전(神殿)으로 여기는 ‘성전(신전, Temple)’이다. 이 성전건물은 일반 기독교 교회당 건물과는 달리 십자가를 세우지 않고 그 대신 지붕 위 꼭대기에 천사 모로나이의 황금빛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성전에서는 일반 성당과 교회당에서 매주 주일예배나 미사를 드리는 개념과 매우 다르게 활용되고 있는데 이곳에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위한 특별한 의식만을 집행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죽은자’들이란 주로 자신들의 조상들이나 가족들을 의미하며 주로 성전에서는 이들에 대한 침례의식을 치른다.

교구조직을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 몰몬교의 가장 기초조직인 ‘지부(Branch)’는 200명 미만의 회원(신자)을 가진 조직을 말하며 그 조직을 관리하는 자를 ‘지부회장’이라 부른다. 지부보다 큰 규모는 ‘와드(Ward)’인데 와드는 일반 기독교 교회당 건물과는 달리 십자가를 세우지 않은 교회당을 두고 있으며 보통 2-3백명의 회원(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와드는 대단위의 단일교회가 없고 직업적인 성직자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스테이크(Stake)’는 와드보다 2~3배 정도 큰 규모인데 3명의 ‘대제사’로 구성된 스테이크 회장단과 12명의 대제사로 된 고등평의원회(高等評議員會)로 이뤄진다. 이처럼 스테이크는 보통 1,500-2,500명의 신자를 가진 규모로서 일반 기독교나 가톨릭의 교구 규모라고 볼 수 있다. 보통 1개의 스테이크는 10여개의 와드(단위교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관례이다. 그렇다면 과연 남한이나 미국의 몰몬교는 북한에 직접적으로 몰몬교 선교를 하고 있는지는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한국 최초의 몰몬교 신자가 된 김호직(金浩稙) 박사. 미국 코넬대 유학 중이던 1951년 침례를 받고 신자가 된 후 귀국해 최초의 몰몬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에서 1956.6.18.까지 교육부차관을 지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한국 최초의 몰몬교 침례식 장면(1952.8.3.). 부산 송도 앞 바다에서 김호직 장로(당시 부산 수산대학 학장)의 아들 김신환과 그의 딸 김영숙을 포함한 4명이 침례를 받았다. [사진제공 - 최재영]

 

   
▲ 한국 몰몬교 최초의 교회모임. 1951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영어 성경공부를 시작하며 포교가 본격화되어 이후 부산처럼 서울, 대구 등지로 확산되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몰몬교는 전 세계에 132개의 성전이 운영 중이며 한국은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신촌)에 서울성전이 있다. 일반 개신교회가 주일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성전) 개념과는 다르 게 신전으로 활용된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몰몬교 성전은 에배를 드리는 교회당과는 달리 각 국가에 한두 개 정도만 건축이 허락된다. 특히 죽은 사람을 위한 침례의식을 치르거나 특별한 의식만을 집행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2004년부터 북에 체류하고 있다는 몰몬교 선교사에 대해서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은 2016년 9월 1일 한국에 거주하는 납북가족자모임 대표 최성룡의 증언을 인용해 지금부터 12년 전이던 2004년에 실종된 미국인 몰몬교 선교사에 관한 충격적인 보도를 했다. 유타주 소재 몰몬교 재단의 브리검 영 대학에 재학 중 한국으로 건너와 몰몬교 선교사로 근무했던 ‘데이빗 스네든(David Sneddon)’이라는 젊은 선교사가 한국에서의 선교사 활동을 마치고 아시아권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중국을 여행하던 중 북으로 납치됐다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스네든이 실종 당시 20대 초반의 김정은(현, 국무위원장)의 개인영어 교사를 했다는 내용까지 포함된 것이다. 남한과 일본의 납북자 가족모임에서는 그의 실종이 북한과 연루되었다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필자가 볼 때 스네든이라는 20대 중반의 건장한 청년을 외국에서 납치해 북에 끌고 갔다는 주장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납치라는 방법 외에 다른 어떤 사연이나 내막이 있을 것으로 보이며 필자도 현재 확인 작업 중에 있다.

스네든은 대학에서의 언어전공과 한국에서 선교사로 근무한 경력 때문에 한국어가 매우 유창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스네든이 2004년 8월, 중국 윈난(雲南)성을 여행하던 도중 북한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온 뒤부터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가족들과 몰몬교회 측은 실종 직후부터 납치 의혹을 제기했지만 중국 당국은 스네든을 찾기 위한 인근 수색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사망이나 실종과 관련된 아무런 단서나 흔적을 찾지 못했고, 결국 중국 공안 당국은 “스네든이 하이킹을 즐기며 여행하던 중 사고를 당해 강물에 익사한 것”으로 처리했다. 물론 시신은 발견돼지 않았으나 스네든의 가족들에게는 공식적으로 사망 통보를 하며 사건은 일단락 됐다. 그러나 스네든의 가족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12년 동안 아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 헤매던 중 뜻밖의 영국 신문의 보도를 접한 것이다.

“아들이 몰몬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일했다. 그가 한국어가 매우 유창했기 때문에 북한의 타깃이 된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스네든이 강물에 빠져 사망했다는 중국의 공식 통보를 믿지 않았으며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그동안 마음속에서 느낄 수 있었고 굳게 믿고 있었다. 우리는 아들의 송환을 위해 계속 싸울 것이다.”

아직 살아 있다면 2016년 현재 36세가 된 아들이 현재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부모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으며 모친 캐슬린(Kathleen)은 기쁨과 함께 아들의 송환을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은 스네든이 평양에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이북 처녀와 결혼해 슬하에 두 자녀까지 두었으며 현재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밝힌 대로 사건 직후부터 한국과 일본의 납북자 관련단체는 그가 북한에 의해 납치됐을 가능성을 제기해왔으며 미 정보기관도 스네든의 납북과 관련한 일부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스네든의 납북 의혹은 UN에도 통보된 상태이며 아울러 지난 2016년 2월에는 미국 의회에 스네든의 납치 의혹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제출됐다. 그러나 오히려 미 국무부는 “현재로선 스네든이 납북됐다는 사실을 입증할만한 그 어떤 확실한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스네든을 찾기 위한 노력을 앞으로도 계속하고 있다” 고 밝히면서 납북설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울러 워싱턴 정가의 대북인권단체인 ‘북한자유연합’에서는 스네든의 구출과 납북자 조사결의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서명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반북단체들이 제기하는 여러 의문들은 명확한 근거 자료가 제시되지 않은 채 막연한 의혹만으로는 진상 규명이 힘들다고 여겨진다.

유달리 아시아인과 아시아 문화를 좋아했던 스네든

스네든의 납치의혹을 제기한 측에 따르면 한국에서 몰몬교 선교사로 일했던 스네든은 북한에 입국한 초기에는 영어교사로 근무했지만 나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당시 20세의 김정은(현 국무위원장)과 세 살 아래(17세) 여동생 김여정 그리고 세 살 연상(23세)의 김정철에게 영어를 가르쳐 왔다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세 자녀들의 영어 개인교사로 활동한 이후에는 다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올 해 36세인 스네든은 몇 년 전 ‘김은혜’라는 북 여성과 결혼해 슬하에 두 자녀가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한식(조선식) 이름을 부여받아 ‘윤봉수’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스네든의 부모와 통화해 알아본 결과 그의 가문은 몰몬교 개척 초기부터 뼛속깊이 몰몬교를 신봉해 왔던 가정이며 부부는 매우 차분하고 지적인 인텔리였다. 스네든의 부친 ‘로이 스네든(Dr. Roy Sneddon)’은 토목공학 박사로서 평생 건설회사에 몸담아 일했으며 모친 ‘캐슬린(Kathleen)’은 도서관 과학분야 전공의 석사학위를 취득해 대학에서 근무하던 중 스네든의 실종 사건을 당하면서 지금까지 10년 넘게 아들을 찾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부부는 슬하에 7남 4녀를 두었는데 이중에서 10번째로 태어난 아들이 스네든이며 11명의 자녀들 중에 무려 8명을 스웨덴, 일본, 스위스, 독일, 폴란드, 한국 등 해외선교사로 보낼 정도로 강직한 몰몬교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스네든은 평소에도 각별히 아시아인들과 아시아문화를 동경하고 좋아해서 학부과정을 아시아 언어와 아시안 비지니스를 전공과목으로 택할 정도였으며 유달리 언어 기술을 습득하는 능력과 재능이 있어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지녔다고 한다. 경영감각도 뛰어나 큰 형과 함께 한국에서 ‘Multiling Corporation’라는 회사를 차리고 한국 판매 담당 대표로 사업을 했으며 실종되기 한 해 전 여름에도 서울에서 체류했다고 한다. 이 회사는 프록터 & 갬블 혹은 델 컴퓨터와 같이 다국적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인데 스네든의 큰 형 마이클이 설립자이며 스네든도 형과 함께 회사의 소유주로 되어있다. 또한 부모의 말에 의하면 스네든은 미국으로 귀국하면 브리검 영 대학교를 마치고 대학원에서 국제법과 비즈니스 연구를 수행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스네든의 실종문제가 구체적으로 국제사회에서 공식 거론되기 시작한 시기를 잠시 살펴보면 지난 2012년으로 거슬러 간다. 유럽의회가 2012년 6월 29일 개최한 북한인권 청문회에서 일본인 납북자 가족 모임인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 가족 연락회’의 마쓰모토 데루아키 회장에 의해 스네든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스네든의 부모와 형이 일본 도쿄에 있는 자신들의 단체를 찾아와 논의하며 그의 실종 사태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북한을 의심할만한 정황들이 많다고 여겨졌다고 증언했다. 역시 이날 청문회에는 로버트 킹 대북 인권특사가 증언자로 나와 자신이 파악한 북한의 인권 실태, 미국 정부의 입장, 유엔 등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상황 개선 노력을 설명하면서 스네든의 실종문제를 거들면서 본격화되었다.

   
▲ 스네든의 고교졸업 사진. 졸업 후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Asian Languages를 전공하던 중 한국으로 몰몬교 선교사를 떠났다. 학부를 졸업한 후에는 대학원에서 국제비지니스와 국제법률을 전공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 한국에서 몰몬교 선교사 활동을 하던 시절의 스네든. [사진제공 - 최재영]

 

   
▲ 스네든이 중국 체류 중에 여행을 하면서 모내기를 마친 농촌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사진제공 - 최재영]

 

   
▲ 스네든의 부모와 가족사진. 그의 부모는 7남 4녀(11남매)를 두었으며 스네든이 열 번째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스네든의 부모와 일곱 형제들.[사진제공 - 최재영]

 

   
▲ 스네든의 부친 로이 스네든(Roy Sneddon)은 토목공학 박사, 모친 캐슬린(Kathleen)은 도서관 과학석사를 가졌으며 이들은 아들의 잠적 이후 10년 넘도록 아들을 찾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실종되던 해에 찍은 스네든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몰몬교의 대북사역 실태와 인도주의 활동

몰몬교가 1985년부터 2010년까지 세계 178개 국가에 제공한 식량, 의료품, 의류 등 자선 구호품을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3억 달러에 이른다. 2011-2015년까지 기간에도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세계 각처에서 발생하는 재난이나 비상사태에 그 어느 종교단체나 기독교 교파보다 가장 먼저 구호품과 구호의 손길을 전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황폐해진 유럽지역에 미국정부보다 먼저 구호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2년 LA흑인폭동이 발생하였을 때도 제일 먼저 LA 한인타운에 구호 물품을 제공한 곳도 몰몬교였다. 이밖에도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원 등을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있으며 홍수, 화재, 지진, 쓰나미, 전쟁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가나 지역 주민들을 위해 피해 복구 및 지원 활동을 해주고 있다.

또한 건조한 지역에 우물파기나 농사기술 등을 지원해 왔는데 1985년에는 미국과 캐나다 지역 신자들이 하루 동안 특별금식을 하여 640만 달러의 금식 헌금을 모아 당시 가뭄과 내전으로 엄청난 기아 상황에 처한 이디오피아에 음식과 약품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허리케인 샌디 피해 복구 활동을 비롯해 시리아 내전, 필리핀태풍, 일본지진과 쓰나미 등 대규모 재난 피해 복구 활동을 비롯해 하이티와 칠레 지진, 파키스탄 홍수 피해 복구 활동, 사모아 쓰나미 피해 복구 활동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한 몰몬교가 추진해 온 대북지원 사업을 보면 우선 김일성 주석이 타계한 이후 대홍수와 가뭄, 냉해 등의 천재지변으로 식량난을 겪던 시기인 1995년부터 본격적인 대북구호사업을 시작했다. 1995년 8월 여름 최악의 대홍수 이후 악화된 식량위기에 클린턴 행정부는 22만 5천 달러의 수해 지원금을 제공하고 민간 종교단체들의 대북 수해지원을 인도적 차원에서 승인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가장 앞장선 종교단체가 바로 몰몬교였다. 이때부터 밀가루, 옥수수, 비료, 농약, 의료기구, 묘목, 담요 등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왔다.

특히 당시 몰몬교 북아시아지역 회장을 맡고 있던 ‘데이빗 소렌슨(David Eugene Sorensen)’은 1997년 5월 1일부터 10일간 평양을 1차 방문한데 이어 6월 21일- 24일까지 2차로 방문해 몰몬교를 대표해 지원사업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김수만 UN북한대표부 차석대표 초청으로 2차 방북이 성사되었으며 일행 4명과 함께 평양과 인근지역을 다니며 그동안 6억 원의 식량과 구호물품을 전달했다. 당시 소렌슨 장로가 방북 후 언론과 몰몬교에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아를 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백만 톤의 식량이 필요하다고 들었으며 이밖에 비료와 농약, 의약품, 연료, 분유 등도 외부지원 없이는 수급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옥수수와 분유, 비료, 농기계 등을 추가로 보낼 계획이며 이 가운데 상당한 물량을 한국에서 구매하는 방안도 간구중이며 이미 제공된 구호물품들이 효과적으로 배분되는 현장을 이번에 확인했다. 군인, 공무원, 학생들이 농부들을 도와 작물을 재배하는 등 식량난해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앞으로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계와 기술지원도 늘릴 생각이다. 몇몇 농장을 선정해서 기계영농의 시범케이스로 육성하는 것도 고려중이다.”

이와는 별도로 당시 한국의 몰몬교 신자들도 북 동포들을 돕기 위해 ‘하루 두끼 굶기 운동’을 펼쳐서 모아진 기금으로 대북지원금을 납부해 몰몬교 아시아 지도부를 감동하게 했다고 한다.

   
▲ 다국적 몰몬교 자원봉사자들이 재난현장과 구호현장에서 봉사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몰몬교 북아시아지역 회장으로서 고난의 행군 당시 여러 차례 북을 방문해 구호활동을 펼친 고 데이빗 소렌슨(David Eugene Sorensen) 장로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황해도에 30만 그루의 미국 몰몬교(LDS)산 사과농장이 운영 중

필자는 몇 년 전 여의도 면적과 동일한 ‘대동강 과수농장’을 참관한 적이 있는데 이곳은 온통 가도가도 끝없이 사과나무 농장이 펼쳐져있었다. 그러나 이곳 외에도 북에는 더 유명한 과수단지가 있는데 그곳은 바로 황해남도 ‘과일군(郡)’이다. 이곳은 대동강 과수농장이 조성되기 전까지는 북 전체 사과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으며 농경지의 70% 이상이 사과, 배, 복숭아, 포도 등을 재배하는 특수지역이다. 북측은 2006년 4월 북미친선우호와 문화친선 교류차원에서 미국의 컨트리 악단인 ‘트레일 밴드’를 초청해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이들이 공연을 마친 뒤 단원들을 모두 과일군으로 데려가 미국이 지원한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여주면서 친선과 우호를 각인시켜 준 적이 있었고, 이어서 2008년 2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공연 당시에도 단원들을 과일군으로 데려가 참관시킨 적이 있다.

이처럼 필자가 볼 때 미국인들이 방북하는 경우에 북 당국자들은 반드시 그들을 과일군에 있는 과수농장을 참관시키는 반면 해외동포가 방북하면 대동강 과수농장을 참관시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황해남도 서쪽으로는 황해가 흐르고 있으며 이곳은 과일군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지역이 위치해있다. 1967년 10월에는 농장지구 일대가 ‘과일군’으로 분리되면서 22개 마을은 과일군으로, 풍해리를 과일읍으로 개편하면서 현재의 과일군은 1읍(과일읍) 24리로 구성되어 있다. 순수한 우리말인 ‘과일’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읍(邑)과 군(郡)이 생긴 것이며 실제로 과일군은 이름 그대로 과일만을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군(郡)이 된 것이다.

이곳 ‘과일군(郡)’은 갈수록 북 전체 사과 생산량을 초과하면서 현재는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미국 몰몬교의 지원으로 심겨진 30만 그루의 사과나무가 크게 한 몫을 했다. 당시 몰몬교 북아시아지역 총책임자인 마이클 링우드(Michael T. Ringwood) 회장은 미국 워싱턴주의 사과나무 30만 그루를 이곳 과일군으로 보내는데 실무적으로 앞장섰던 인물인데, 그로 말미암아 현재 황해남도에는 미국 몰몬교산(Made in LDS Church) 사과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고 있던 것이다.

“최근 6년간 북한에 사과나무 묘목 30만 그루를 보냈다. 과수원 주변 주민들은 사과나무들을 ‘LDS사과’로 불렀지만 ‘LDS’가 우리 교회(몰몬교) 약칭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용하고 있었다. LDS를 단순히 외국의 인도주의 구호단체 정도로 알고 있었다. 우리가 보낸 묘목들은 황해도 과일군의 과수원 등 4곳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우리가 보낸 사과나무를 통해 지역주민들이 자립할 수 있기를 원한다. 우리가 북을 지원하는 목적은 그들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며 그동안 우리가 북을 지원하면서도 외부에 적극적으로 알리지는 않은 것은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고 북 당국을 배려한 차원이었다.” 

이처럼 황해남도 과일군(郡)에 산재한 서너 곳의 농장에는 일명 몰몬교산(産) 사과나무 농장(Apple Falm LDS Church)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링우드 회장은 당시 세 차례 방북해 교회에서 보낸 사과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한편 과일군에 대한 몰몬교의 사과나무 묘목지원은 미국의 국제 구호단체인 머시코(Mercy Corps)의 대북지원과 협력해 이루어졌다. 오리건주에 본부를 둔 이 단체는 1996년부터 북한 농어업 분야에 대한 기술지원을 해오다 2000년 봄부터 사과나무 1만 그루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수만 그루씩 지금까지 모두 수십만 그루의 사과나무를 과일군으로 보냈다. 일명 ‘사과나무 프로젝트’라는 이 대북 지원사업은 머시코의 낸시 린드버그 회장과 기술진이 직접 방북해 매번 추진되었다.

사과나무 대목을 심은 과수원과 그에 따른 부수적인 물품들을 지원한 머스코는 2004년 처음 황해남도 과일군에 보낸 사과나무 대목 10만 개가 성공적으로 번식하는 것을 확인한 후 2010년 4월에는 또 다시 10만 개의 사과나무 대목을 황해북도 연탄군의 과수원에 보냈다. 오레곤의 과수원에서 보내는 사과나무 대목은 북한의 토양에서 잘 자라고 생산력이 우수해 2004년 과일군에 보낸 10만개의 대목이 2010년도에는 80만 그루로 번식했다고 한다. 머시코는 2000년부터 수십만 달러를 투자해 식량난 개선과 산림 복구의 두 가지 효과를 주는 사과나무 지원사업을 해 왔는데 처음 3년은 뿌리줄기가 아닌 총 7만 2천 그루의 나무를 보내며 살충제 등을 지원했다. 이뿐 아니라 미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USAID)에서 받은 100만 달러의 지원금으로 황해남도 해주의 소아병원, 산원 등과 과일군의 병원 등 5개 병원에 발전기를 비롯해 초음파기와 X-선 촬영기 등을 설치하고 기술적 자문을 해 왔다. (계속)

   
▲ 황해남도 사과농장 지원을 주관했던 ‘마이클 링우드(Michael T. Ringwood)’ 몰몬교 북아시아지역 회장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사과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 몰몬교의 황해남도 사과농장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여의도 면적 크기의 ‘대동강 사과농장’을 방문한 필자와 현지 여성 해설사. [사진제공 - 최재영]

 

   
▲ 드넓은 면적에는 사과나무들과 버팀목들이 조화를 이루며 끝없이 펼쳐져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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