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은 존재조차 잘 모르는 이북5도위원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실향민’이 진짜 ‘탈향민’에게 밀려나는 기이한 현상이 그것이다. 외부 기고와 취재를 통해 세 차례로 나누어 짚어 본다. /편집자 주  



이호철이 쓴 ‘탈향’이라는 소설이 있다. 1.4 후퇴 때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젊은이들이 처음에는 ‘실향민’이었지만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스스로 고향의 추억과 고향 친구들을 등지는 ‘탈향민’으로 변모해 간다는 내용이다. 그 자신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6.25 와중에 실향민이 된 작가가 분단의 비극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절절하게 녹여 낸 작품이다.

그런데 지금 현실 속에서 ‘실향민’이 진짜 ‘탈향민’에게 밀려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이북5도위원회 청사. [통일뉴스 자료사진]

종로구 구기동에 청사를 두고 있는 이북5도청이라는 기관이 있다.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북5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하여 설치된 지방행정기관이다. 이북5도란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를 말한다. 이 지역을 미수복 지구로 규정하고 이에 더해 경기도와 강원도의 미수복 시군을 관리하기 위해 도청 격의 기관을 설치한 것인데, 정확한 명칭은 이북5도위원회이다. 도지사는 행정자치부장관의 제청으로 국무총리를 경유하여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북5도지사가 관할 행정 구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우습게봐서는 안 된다. 차관급 대우를 받는 별정직 공직자로, 정해진 임기는 없으며, 연봉은 1억 원이 넘는다. 사무실은 물론 비서 2명, 운전기사, 관용차 등이 제공되고 수천만 원의 업무추진비도 쓸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비용은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다.

도지사뿐 아니라 이북5도의 명예 시장, 명예 군수도 있고, 명예 읍•면•동장도 있다. 명예 시장•군수는 도지사의 추천을 받아 행정자치부장관의 제청으로 국무총리를 경유하여 대통령이 위촉하고, 명예 읍•면•동장은 시장•군수의 추천을 받아 도지사가 임명한다. 명예 시장•군수는 월 27만 원, 읍•면•동장은 12만 원의 수당을 받는다. 시장, 군수는 97명으로 1년에 가져가는 수당이 3억여 원에 이르고, 읍•면•동장은 911명으로 1년 수당이 13억여 원이 된다. 모두 국민의 혈세로 충당하는 것이다.

이북5도청 청사 입구에는 ‘함께하는 이북도민 다가서는 평화통일’이라는 현판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현판이 보여주듯이 이북5도청의 주요 업무는 이북도민 관련 행사를 지원하는 것이지만, 북한이탈주민이 늘면서 그들에 대한 지원 사업도 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올해 6월 20대 명예 시장•군수가 임명되는 과정에서 전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명예 시장•군수는 규정상 ‘해당 이북5도 등의 시·군 출신이거나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하고 통일 과업에 열성이 있는 사람 중에서 이북5도 도지사의 추천을 받아’ 위촉하도록 되어 있는데, 갑자기 규정과 동떨어진 ‘탈북민’이 함경북도 부령군 군수로 위촉됐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선발 기준과 심사 과정은 공개되지 않았고, 회령군도 같은 일을 겪었다. 함경남도 군수 임명 과정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연이은 낙하산 위촉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함경북도 부령군 군민회는 이북5도청의 부당한 인사에 즉각 반발하여 자격 없는 탈북민 명예 군수 거부를 선언했다. 언론에 보도 자료를 돌리고 이북5도청의 함경북도청에 공식 문서를 보내 항의했다. 그 결과 부령군민회로 함경북도 도지사 명의의 회신이 왔다. 이번 사태에 대해 최초로 책임 있고 공식적인 입장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회신에서, 기존 실향민은 고령화 등으로 ‘통일 선도 세력으로서의 활력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현재 약 3만에 달하는 북한이탈주민은 계속 증가 추세에 있어 ‘국가적인 기대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고 현실을 진단하면서, 북한이탈주민의 통일 자원화는 ‘대통령 지시 사항’이라고 협조를 요청했다. 아울러 미수복 지구에 시장•군수를 두는 이유는 ‘실지 회복을 통한 통일 의지를 고취’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북한이탈주민의 증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매불망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려 온 실향민과 어떤 이유에서든지 고향을 버리고 떠나온 탈북민은 그 처지도 다르고 고향에 대한 감정도 다르지만, 그 동안 800만 실향민 사회는 아무 조건 없이 탈북민 포용에 노력해 왔다. 군민회 등의 실향민 모임에서도 탈북민의 비중이 증대하였으며, 실향민 관련 행사에도 탈북민의 적극적 참여가 눈에 띄게 늘어 왔다.

그런데 실향민 지원을 표방해 온 이북5도청이 정책적으로 탈북민을 우대하고 실향민을 배제하겠다는 의도를 밝힌 것이다. 실향민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  이북5도위원회 홈페이지. [캡쳐사진-통일뉴스]

더 큰 문제는 이북5도청의 역할 설정에 있다. 이북5도청 즉 이북5도위원회의 홈페이지에는 이북5도위원회의 정책 목표를 ‘도민 화합으로 평화통일 초석 마련’에 두고, 이북도민의 화합과 단결의 장 마련, 이북도민 후계 세대 중점 육성, 국외 이북도민의 효율적 관리•지원, 이북5도 조직 역량 강화, 향토문화 계승·발전 지속 추진,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북한이탈주민의 정착 지원 강화를 주요 업무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지막에 제시된 탈북민 관련 업무가 이북5도청의 다른 모든 주요 업무를 후순위로 밀어 버렸다. 아니, 함경북도청의 회신에서 언급한 ‘실지 회복을 위한 통일 역량 강화’는 단순한 탈북 주민의 정착 지원을 넘어선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는 표현이다. 즉 이북5도청이 통일 이후에 대비한 행정 기관 정도의 역할을 넘어서 ‘실지 회복’ 추진에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의지를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북5도청은 행정자치부 소속이 아니라 통일부 산하 기관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또는 왜 굳이 탈북민 중심의 별도의 통일운동 기관을 만들지 않고 기존의 실향민 지원 기관을 내용적으로 접수하려고 하는가? 국민들은 이북5도청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마당에, 막대한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행정 기관이 국회 승인 하나 거치지 않고 은밀하게 전혀 다른 목적의 기관으로 그 업무를 변경하려고 해도 되는 것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800만 실향민 사회가 지금 동요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실향민 사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무리하게 강행된 탈북민 인사 조처가 우연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추진된 정부 정책의 일환이며, 이는 실향민의 통일 염원을 밀어낸 자리에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을 등진, 즉 ‘탈향’한 북한이탈주민의 반북 의식을 통일의 동력으로 채워 넣으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곧 정부의 통일 정책의 문제이기도 하다. 실향민의 자리를 탈향민이 접수하듯이 민족적 합의인 평화 통일의 대원칙도 흡수 통일 정책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래도 되는가? 국민적 합의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국가의 통일 정책이 바뀌고 있다. 이래도 되는가?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이북5도청이 국민의 동의 없이 북한이탈주민의 활동 지원 기관으로 그 성격이 변질되고 있다.

이것이 작은 문제가 아닐진대, 부령군의 호소에 어느 언론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 사이 함경북도청은 군수에 이어 부령군의 명예 읍•면•동장을 탈북민으로 채워 넣었다. 아마도 곧 다른 지역 군민회도 유사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명예직이라 해도 그들은 실향민 군민회 공식 행사에 참석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북5도청의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실향민 사회의 내부 결속을 와해시킬 것이다. ‘탈향’이 ‘실향’을 집어삼키는 것이다.

분단 역사의 피해자이자 그 누구보다도 통일을 염원하는 실향민들을 하차시킨 통일 기차는 이제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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