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최초의 전국 형무소재소자 학살 사건 조사

한국 전쟁 발발 초기 전황 파악도 제대로 못한 정부는 교도소 재소자에 대한 대응방침을 제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전쟁 발발과 함께 국민보도연맹 관련자와 요시찰인에 대해서 즉각적인 구금조치 등 대응지침을 내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보도연맹의 경우, 평소 경찰과 검찰 등에서 수시로 관리하고 있었던 데 비해 형무소의 경우에는 전쟁 상황에 대비한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전쟁 발발 당일 비상국무회의에 참석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북한의 전면남침이 아니라 이주하와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한국군의 초기 대응은 엉망이었다. 전쟁 전 남로당 지하지도부로서 남한의 좌익활동을 이끌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김삼룡과 이주하는 6월 26일 오후 6시경 남산 헌병사령부 뒷문 500미터 지점의 소나무에 묶여 총살되었다.(주1)

그러나 법무부 장관은 전쟁 발발 후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형무소에 비상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침만 내렸을 뿐 국가보안사범 등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서울의 경우 형무소는 재소자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6월 28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서울 진입과 함께 서둘러 후퇴했다. 형무소 직원들이 후퇴하면서 재소자들은 인민군에 의해 풀려났다.

그 뒤, 한강방어작전을 펴면서 약간의 시간 여유를 확보한 정부는 좌익관련 재소자에 대한 처리지침을 마련하였고, 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서울·경기지역 형무소에서 출옥한 재소자들을 체포·사살하기 시작했다. 전선의 남하와 함께 다른 지역의 재소자들도 사살되었다. 대부분의 형무소에서는 무기 등 중형을 선고받은 정치사상범을 우선적으로 처형하고 후퇴가 임박할 때쯤 좌익관련 미결수를 포함하여 단기수들까지 모두 처형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형무소 재소자가 희생된 경우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한국전쟁 전 여러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재소자들이 전쟁 직후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경우이다. 둘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이 형무소에 일시적으로 구금되었다가 살해된 경우이다. 셋째는 각 지역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재소자들이 열악한 환경 아래서 고문과 가혹행위 등으로 사망한 경우이다.

그러나 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의 경우, 다른 사건들과 달리 희생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재소자들이 형무소라는 격리된 구금시설에 갇혀 있다가 은밀하게 처리되었던 까닭에 가족들이 희생과정을 목격하거나 시신을 수습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유족들은 대부분 재소자들의 희생과정을 정확히 알 수 없었고, 단지 전쟁 후 행방불명되었으며 총살되었다는 소문을 들어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진실에 접근하기 어려움 열악한 조건 때문에 전국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과거 국가기구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전혀 시도되지 못하였다. 1960년 제4대 국회 「양민학살진상규명특위」에서도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전국 형무소 재소자들의 희생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대구형무소 재소자 1,402명이 CIC, 헌병대, 경찰들에게 인계되었다는 내용의 보고서와 명단이 공개되었을 뿐이었다.(주2)

전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에 대하여 국가 차원에서 조사하여 진실규명 활동을 벌인 것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처음이었다. 한국 현대사 최초의 재소자 희생사건 진상규명 조사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있는 진실화해위원회 활동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들은 생존 재소자, 교도소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된 보도연맹원 등의 일반 참고인의 진술과 형무관․경찰·헌병·CIC 등의 참고인 진술, 그리고 각 형무소 관련 자료를 근거로 하여 어렵게 사건 경위를 확인하고 신청자들의 희생 사실을 확인했다.

서울·중부지역 형무소 재소자 학살  

1946년 7월 남한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는 모두 17,000여 명이었다. 그러나 1946년 10월 대구사건 이후 정치범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1948년 봄에는 남한 형무소 재소자는 22,000여 명을 넘어섰다. 정부 수립 이후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으로 재소자 수가 급증하여 1949년에 35,119명에 이르렀다.(주3) 이들 수형자 중 80%가 좌익수였다. 그 뒤에도 재소자 숫자는 계속 증가해 1950년 1월에는 전국 19개 형무소에 48,0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는 적정 수용인원의 두 배를 훨씬 넘어서는 규모였고, 따라서 재소자들의 수감생활은 극도로 열악했다.

서울(서대문)·마포·부천·영등포·인천소년형무소·춘천형무소 등의 중부지역 형무소의 경우에도 4.3사건과 여순사건 이후 정치·사상범이 대거 수용되면서 재소자 수가 급증했다. 1946년부터 1950년 6월까지 중부지역 형무소의 수용 현황은 아래 <표>와 같지만 이 중 정치·사상범이 어느 정도를 차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표> 중부지역 형무소 수용 현황(1946년~1950년)(주5)                         (단위 : 명)

구분

서울형무소

마포형무소

인천소년형무소

춘천형무소

1946. 7.

3,281

1,356

 

456

1947. 3.

4,395

1,616

 

462

1948. 5.

4,509

1,928

 

469

1949. 8.

8,623

3,334

1,638

1,218

1950. 6(주4)

약 7,000

약 3,500

약 1,300

약 1,250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금화산 기슭에 위치한 서울형무소에는 약 7,000여 명의 재소자가 수용되어 있었고, 그 중 다수가 좌익사범이었다. 급박한 전황 탓에 법무부의 정확한 지시가 없자 6월 28일 부소장 김 아무개의 후퇴명령으로 형무소 직원들이 철수하면서 재소자들은 출옥할 수 있었다. 이때 출옥한 재소자 중 일부는 수원에서부터 검거되어 처형되었다고 알려졌지만 대부분은 살아남았을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서대문(서울)형무소 재소자들이 트럭 5대 정도에 실려 홍제원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아마 사형수들에 대한 사형집행이었을 것이다. 또 1950년 9.28 서울 수복 후에는 부역자들이 서울형무소에 많이 수감되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어 병사하거나 동사했으며, 고문과 가혹행위로 사망한 사람도 생겼다. 그리고 정부 대변인에 따르면, 1950년 10월 1일부터 12월 15일까지 242명의 재소자들에 대한 집단처형이 있었다.

서대문(서울)·마포형무소 경비병들이 홍제리의 영국군 제29여단 캠프 근처에서 커다란 구덩이 4개에 재소자 39명을  몰아넣고 집단으로 처형했으며, 1950년 12월 17일 또 다시 35명의 재소자를 집단처형하려다가 영국군의 재지를 받았다. 12월 17일 유엔한국부흥위원단(UNCURK)가 집단처형 장소에서 수백구의 시신을 발굴해냈다. 그런 와중에 12월 20일 한국군은 다시 58명의 재소자를 처형하려다가 영국군의 제지를 받아야 했다. 영국군의 제지를 받기 전 20명은 이미 처형한 상태였다.(주6)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에 있었던 마포형무소에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3,5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마포형무소는 서울지역의 장기수를 수형하는 중구금시설이었는데, 9월 28일 직원들이 급히 후퇴한 뒤 풀려났다. 부천형무소 직원들도 6월 29일과 30일에 걸쳐 단계적으로 재소자들을 모두 석방한 뒤 영등포형무소 수원농장과 대전형무소를 거쳐 부산형무소로 후퇴했다.

인천시 학익동 283번지에 위치한 인천소년형무소에는 1,3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는 여순사건 관련 소년재소자가 약 200여명 가량 포함되어 있었다. 6월 30일 형무소 직원들이 수원으로 후퇴하자 재소자들이 탈주하기 시작했고, 이에 국군 지휘부에서 탈주재소자의 검거와 형무소 직원들의 복귀를 지시하였다. 국방군과 형무소 직원들에 의해 탈주재소자들이 재수용되었으나 7월 3일 형무소 직원들이 다시 후퇴하면서 재소자들이 모두 출옥했다. 이들 중 일부는 역시 수원 등지에서부터 검거되어 처형되었다.

강원도 춘천시 약사동 77번지에 위치한 춘천형무소에는 당시 1,25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6월 28일 소장의 후퇴명령에 따라 중범재소자 184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다. 형무소 직원들은 중범 재소자 184명을 데리고 수원으로 후퇴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수원에서 학살되었다.

전쟁 발발 후 서울과 춘천·인천의 형무기관은 6월 28일부터 일차적으로 수원농장에 집결했다. 국군 또한 후퇴한 병력을 수습하여 수원농장 시험장에 김홍일 장군이 지휘하는 새로운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한강 방어선을 마련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6월 28일 서울에서 철수하여 7월 4일 평택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수원에 있었다. 6월 28일부터 육군 정보국(국장 장도영) 방첩대(CIC)는 수원에서 김창룡 중령의 지휘하에 좌익과 보도연맹원을 검거, 처형했다. 이때 영등포형무소 수원농장 재소자와 서울(서대문)·마포·부천·영등포·인천소년형무소 등 서울·경기지역 형무소에서 출소해 내려오다가 검거된 재소자와 춘천형무소에서 이감된 재소자들도 CIC와 헌병들에 의해 집단학살되었다.

미 공군 첩보요원 도널드 니콜스(Col. Donald Nichols)는 자신의 회고록(『How Many Times Can I Die?』)에서 재소자들의 집단처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약 1,800명의 대학살이 수원에서 있었다. 나는 전 과정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두 대의 대형 불도저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한 대는 참호모양의 무덤을 팠다. 그때 재소자들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도착했다. 손이 모두 등 뒤로 묶여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판 무덤 언저리에 길게 줄지어 세워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머리에 총탄을 맞은 채 무덤 속으로 굴러떨어졌다.”(주7)

그러나 이러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서울 등 중부지역의 형무소 재소자들이 얼마나 많이 처형되었는지 정확히 밝히는 것은 힘들다. 사망자들의 신원 또한 거의 밝혀진 게 없다.

대전형무소 재소자의 집단학살 사건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에는 전국 형무소에 수감 중인 재소자가 수용인원의 2배를 넘어서는 수감 조건이 매우 열악했다. 형무소 수감 인원의 급증에 따른 열악한 상황은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었다. 1949년 7월 25일 <서울신문> 법조기자단이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전주, 군산, 대전 등 남한의 주요 형무소 7곳을 방문하여 조사한 결과, 7개 형무소 모두 정원의 45%를 초과하고 있었다.(주8) 그 때문에 재소자들은 서로 머리를 반대편에 놓고 다리는 서로의 사이에 넣고 자고 있었으며, 더 좁은 곳은 교대로 잠을 자야 할 정도로 만원인 상태였다. 또 <영남일보>(1949. 6. 25)에 따르면, “1949년 6월경 대구형무소에서 한 달 동안 6명의 옥사자가 발생했는데, 그들의 사망원인은 극도의 영양부족인 것으로 밝혀졌다.”(주9)

▲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된 대전형무소 정치범들. [사진 출처: 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Report no. R-189-50, Records of the Army Staff G-2 ID File, Box 4622, RG 319, NARA]
▲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된 대전형무소 정치범들. [사진 출처: 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Report no. R-189-50, Records of the Army Staff G-2 ID File, Box 4622, RG 319, NARA]

 

 

 

 

 

 

 

1950년 당시 대전형무소는 대전시 중촌동에 1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주10) 당시 대전형무소의 수용가능 정원은 1,200명이었으나 3,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대전형무소는 일제강점기부터 중구금 시설로 유명해 치안유지법 위반한 독립운동가들이 수용되었고, 해방 후에는 전국의 주요 좌익사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특히 해방 전 독립운동가와 해방 후 좌익사범을 수용하던 4사는 76개 방으로 구성되었는데, 72개방은 2~3명이 수용되는 방이었고, 나머지 4개방은 독방으로 한사람이 들어가면 눕지도 못할 정도로 좁았다.

대전형무소 재소자 수는 제주4.3사건, 여순사건, 숙군 관련자들이 대거 수감되면서 1948년 5월 1,875명에서 1949년에는 3,041명으로 급증했다.(주11) 당시 여순사건 관련자들의 경우 주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아서 특별사동에 따로 수용되었는데 공간 부족으로 7~8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 15명 이상 수용되어 있었다.(주12)

한국전쟁 발발 당시 대전형무소의 재소자는 약 4,000여 명이었고, 이 중 2,000명 정도는 정치·사상범이었다. 전쟁 발발 후에는 대대적인 예비검속으로 보도연맹원 등이 대거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감옥으로 사용된 건물은 모두 16개 동이었고, 1950년 7월 1일 당시 연와공장을 개조한 임시감방인 7사에는 700~800명의 미결수들이 수감되었다.(주13) 전쟁 발발 후 내무부 치안국은 충남경찰국에 좌익과 보도연맹원을 검거, 처리하라고 무선(모스 부호)전문을 내렸으며, 충남경찰국은 이 지시를 산하 경찰서에 그대로 전달했다. 그에 따라 충남경찰국과 대전의 경찰서는 치안국 지시에 따라 보도연맹원 등을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했다가 대전형무소로 보내 수감시켰다.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7월 1일 새벽 대전형무소에 재소자 처리와 관련된 명령이 내려왔다. 그날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정 아무개는 “미명을 기해 대규모 공습이 있으니 공산당 우두머리 등 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하라”는 전문을 내렸다. 이에 대전형무소 소장관사에 머물던 법무부 형정국장 원 아무개와 특별경비대 분대장 이 아무개는 법무부장관의 재가를 받기 위해 대전역으로 갔다. 이때 장차관들은 대전역에서 피난길에 오르고 있었다.

대전형무소 사건 현장. 대전시 동구 낭월동 13번지(일명 골령골)
대전형무소 사건 현장. 대전산내유족회가 낭월동에 세운 표지석(2000년)

 

 

 

 

 

 

 

법무부장관의 재가를 받기 위해 대전역 구내에 들어갔다 나온 형정국장은 특별경비대장에게 “소장 직권에 맡길 터이니 임의로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자리를 떠났다. 이 지시를 전달받은 대전형무소장은 “지금 이런 위급한 시기에 장차관이 자기들만 살겠다고 다 도망가는데, 내가 왜 부하직원들을 개죽음시킬 필요가 있느냐”면서 직원 해산명령과 함께 일반사범 중 단기수를 석방했다.(주14)

한편, 7월 1일 당시 연와공장을 개조해 만든 임시감방인 7사에 수용되어 있던 보도연맹원 등 미결수들은 일반사범의 석방과 형무관 해산 사실을 눈치채고 감방문을 부수고 나오려고 시도했지만 특별경비대가 기관총으로 위협하면서 이들의 시도는 실패했다. 한편, 대전형무소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17연대 병력이 파견되었고, 탈옥기도자들을 즉결처분하기 위해 헌병들이 보강되었다.

이후 헌병사령관 송요찬의 지휘 아래 대전에 주둔하던 제2사단 헌병대와 제5연대 헌병대가 형무소 재소자의 인도를 요구하면서 처형 작업이 시작되었다. 제5연대 헌병이었던 김 아무개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5연대, 그때는 연대헌병대가 다 해요. 사단헌병대는 큰집이지만 병력이 없어요. (중략)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일반 범죄자가 없었어요. 맨 사상범만 있었어요. (중략) 헌병사령관 송요찬 대령이 와서 ‘이거 다 죽여야 한다’고 했어요. (중략) 송요찬 사령관이 직접 진두지휘해가지고 내 장소도 잊어먹지 않아. 충청도 옥천 근방에 산내면이라고 있어요. 거기 데려가서 싹 드르륵 해버렸어요. (중략) 그때 많이 희생됐어요.”(주15)

7월 2일경 제2사단 소속 헌병대가 대전형무소 측에 “좌익수들, 즉 포고령, 국방경비법 위반 등 주로 여순반란사건, 그리고 간첩죄, 보도연맹원, 그리고 10년 이상 강력범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기결수와 미결수의 구분도 없이 재소자 인도를 요구했다. 군의 재소자 인도 요구에 대해 이 아무개 소장 대리는 법무부장관의 재가를 받기 위해 보고하러 갔다. 그랬더니 이우익 법무장관은 “군이 달라고 하면 줄 수밖에 없다. 만약에 재소자를 인도한 게 후일 문제가 생기거든, 그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러면 사전에 장관 만났다는 소리는 말아 달라”라고 말했다. 윗선에서는 이미 얘기가 다 돼 있었던 것이다.(주16)

대전형무소 측에서는 헌병대의 요구에 따라 재소자신분장을 가져와 국가보안법, 포고령, 국방경비법 위반 등 좌익사범과 10년 이상의 일반사법을 분류해 넘겨주었다. 이렇게 분류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은 포승줄에 묶여서 헌병들이 징발한 트럭에 실려 대전 산내 골령골까지 이송되었다. 당시 재소자 호송업무를 담당한 특별경비대원 김 아무개는 그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뒤로다가 두 사람을, 한 사람 왼손하고 옆 사람 오른손하고 어긋매끼로 묶었어요. 묶어서 감방에서부터 현관까지 끌고 왔어요. (중략) 끌고 와서 재소자들을, 헌병이 징발한 트럭에 가득 실었어요. 헌병들이 총부리를 겨누면서 재소자를 트럭에 꽉꽉 채웠어요. 재소자들은 그때까지 트럭에 서 있는 채로 있었어요. 그리고 헌병들은 재소자들을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앉으라고 했어요. 못 앉을 것 같죠. 재소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앉아서 아주 납작해져요. (중략) 형무관들은 신분장을 가지고 운전석 옆에 앉고, 헌병들이 트럭 네 귀퉁이에 보초를 섰어요. 나중에는 형무관들이 트럭 네 귀퉁이에 서서 호송업무를 맡았어요.”(주17)

산내 골령골에서 세 차례 집단학살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자들은 트럭에 실려 특별경비대에 의해 산내 골령골로 호송되었다. 골령골에는 경찰이 사전에 산내 주민들과 청년방위대를 동원하여 파놓은 구덩이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산내 주민들은 이틀동안 경찰에 의해 동원되어 총살자들을 파묻을 구덩이를 팠다. 이렇게 대전형무소에 있던 재소자와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은 세 차례에 걸쳐 산내 골령골(주18)에서 집단학살되었다. 

먼저, 1950년 6월 28일부터 6월 30일까지 여순사건 관련자 일부와 보도연맹원 등이 희생되었다. 헌병대는 이송되어온 재소자들의 눈을 가리고 뒤에서 나무기둥에 손을 묶었다. 헌병 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헌병대가 총살을 집행하고, 헌병 지휘자가 확인사살을 했다. 뒤이어 소방대원들이 손을 풀고 시신을 미리 준비한 장작더미에 던졌고 50~60구의 시신이 모이면 화장을 했다. 나무기둥이 다 소진되자 이번에는 미루나무에 묶어서 처형했다.

▲ 대전시 동구 낭월동 13번지(산내 골령골)에서 출토된 유해와 유물
▲ 대전시 동구 낭월동 13번지(산내 골령골)에서 출토된 유해와 유물

 

 

 

 

 

 

이와 관련하여 미 제25사단 CIC 파견대의 전투일지·활동보고서에서는 “신뢰할 만한 정보통의 1950년 7월 1일 보고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지시에 의해, 대전과 그 인근에서 공산주의 단체 가입 및 활동으로 체포됐던 민간인 1,400명이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대전에서 약 4㎞ 떨어진 산에 매장되었다”라고 기록했다.(주19)  

두 번째는 1950년 7월 3일부터 7월 5일 사이이다. 미군자료들은 이와 관련 “(7월 3일 현재) 한국 경찰은 수원과 대전에서 공산주의 혐의자를 처형하고 있는데, 이는 잠재적인 5열을 제거하고, 서울에서 북한의 처형에 대한 보복이다”라고 기록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제주4.3사건, 여순사건 관련자와 정치·사상범, 징역10년형 이상의 일반사범, 그리고 대전 연맹원 등 1,800명이 산내 골령골에서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대전경찰서 서대전지서에 근무했던 조 아무개는, 대전주둔 헌병장교가 대전경찰서 뒷마당에서 공포를 쏘면서 경찰들을 질책했다고 증언했다. 대전 경찰들은 아침에 대전경찰서에 집합해서 준비된 트럭을 타고 대전형무소로 가서 재소자를 싣고 산내로 가서 헌병의 지휘아래 헌병과 함께 하루 종일 총살을 집행했다. 당시 현장은 경찰들이 외곽을 둘러싸서 경비했고, 청년방위대와 산내주민들이 구덩이를 팠다. 구덩이의 깊이는 1미터 50센티미터 정도였고, 넓이는 3미터 가량이었으며, 길이는 30~50미터 정도 되었다.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가 산내 현장 입구에 트럭을 세우면 청년방위대들이 재소자들을 구덩이 앞까지 끌고 가서 구덩이 쪽으로 무릎을 꿇렸다. 총살 집행은 제2사단 헌병대 책임자 심 아무개 중위의 지휘로 헌병 1개 분대와 경찰 2개 분대가 담당했다. 책임자의 ‘사격개시’명령이 내려지면 헌병과 경찰이 각각 10명씩 재소자들의 등을 발로 밟고 뒷머리에 총을 쏘았다. 다음 심 중위와 헌병들이 확인사살을 했다.

당시 총살현장을 목격한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원 김 아무개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미터 뒤에서 쏘면, 피와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중략)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요. 헌병지휘관이 국민방위군(청년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 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주20)

한편, 당시 산내 골령골 학살 장소에서는 미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LO) 총책임자 애버트(Leonard J. Abbott) 소령이 미군의 라이카 사진기로 당시 장면을 찍었다. 그리고 주한미국 대사관 소속 육군무관 에드워드(Bob E. Edwards) 중령은 1950년 9월 23일 미 육군정보부에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A-1)(주21)을 현장 사진과 함께 보냈다. 이 보고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 라디오에서는 최근 남한에서의 잔혹성과 집단학살에 대한 의문제기가 있었다. 비록 라디오에서 상당 부분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전쟁 발발 후 남한 경찰은 집단적인 학살을 자행해온 것이 사실이다.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함락되었을 당시 형무소에서는 수천 명의 재소자들이 풀려난 것으로 보고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 동안 처형한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학살이 전방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닌 점을 볼 때, 이러한 처형명령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위층(top level)에서 내려온 것이다. … 대전에서의 1,800여명의 정치범 집단학살은 3일 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되었다. 사진들은 미 극동군사령부 KLO(Laison Officer, GHQ, FEC) 애버트 소령이 라이카로 찍고, 미 육군 무관부원이 현상과 인화를 했다.”(주22)

이때 일제 때부터 활동을 한 거물 공산주의자 이관술도 총살당했다. 이관술은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1946년 11월 28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고했으나 1947년 4월 11일 기각되었다. 이관술은 서울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50년 7월 3일 대전 산내에서 총살되었다.(주23)

세 번째는 1950년 7월 6일경부터 7월 17일 새벽까지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육군형무소 병력이 대전형무소에 임시 주둔하던 시기로, 전쟁 발발 후 서울·경인지구 형무소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검거된 재소자, 청주형무소에서 이감된 재소자, 그리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나머지 보도연맹원 등이 살해되었다.

7월 11일에는 청주형무소의 징역5년 이상의 일반사범 200여 명이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서산경찰서의 보도연맹원 400명을 비롯하여 태안경찰서, 부여경찰서, 강경경찰서, 홍성경찰서, 서천경찰서 등 충남 각 지역 경찰서에서 초기에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주모자급들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이 모두 산내 골령골에서 처형된 것이다. 특히 육군형무소가 대전에서 후퇴하기 직전인 7월 15~16일에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6월 25일부터 9월 22일까지 약 70여 일에 걸쳐 대전시 동구 낭월동 13번지에서 유해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유해가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토지소유주와의 협의가 제대로 되지 못해 발굴작업을 진행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극히 일부인 34구의 유해만 발굴했을 뿐이다. 이곳에서는 재소자 또는 예비검속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갑, 신발, 단추, 숟가락, 빗, 열쇠 등의 유품과 탄알 그리고 탄피가 출토되었다.(주24)

대전 산내에서 희생된 이들은 대전형무소 재소자 중 국가보안법 위반 등 정치사상범과 10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일반사범,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이다. 그러나 당시 대전형무소의 「수용자신분장」, 「재소자인명부」, 「재소자인원일표」, 「교정통계」등의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한 희생규모를 파악할 수 없다. 공식기록은 없지만 그래도 이와 관련된 국내외 자료들은 여럿 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희생규모는 첫 번째 시기인 7월 1일까지 1,400명, 두 번째 시기에 1,800명, 그리고 마지막 시기에 1,700명이 희생되어서 4,900여명이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많다.

그러나 이외에도 여러 주장이 있어서 정확한 규모를 추정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그러니까 1,400명, 1,700명, 1,800명, 2,000명, 3,700명, 7,000명 등 다양한 기록과 주장들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 기록들 중에서도 1950년 9월 23일 주한미대사관 소속 육군무관 에드워드 중령이 미 육군 정보부에 보낸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란 제목의 보고서 䵞년 7월 첫째 주 3일 동안 1,800여명의 대전의 정치범들이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가장 직접적으로 대전형무소의 희생규모를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대전형무소에서 희생된 재소자와 예비검속자 등의 희생규모는 최소 1,800여명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주25)

공주형무소와 청주형무소 재소자 학살

공주시 교동 3번지에 있었던 공주형무소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공주형무소는 대한제국 막바지인 1908년 7월에 공주감옥으로 시작되었고,1923년 5월 공주형무소로 개칭되었다. 1978년 9월 현재의 충남 공주시 금흥동 360번지로 신축 이전했다. 전쟁 발발 당시 공주형무소는 대전지검 공주지청 관할이었고, 공주지청 관할의 공주군, 청양군, 홍성지청 관할의 홍성군, 예산군, 보령군, 서천군, 서산지청 관할의 서산군, 당진군의 수형인이 주로 수감되었다.

공주형무소 사건 현장. 충남 공주시 상왕동 산 29-19(일명 왕촌 살구쟁이)
공주형무소 사건 현장. 충남 공주시 상왕동 산 29-19(일명 왕촌 살구쟁이)

 

 

 

 

 

 

 

공주형무소에는 미군정시기부터 포고령위반 등으로 좌익사범이 수감되기 시작했으며,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수용인원이 급증했다. 여순사건 관련자 수백 명이 수감되면서 공주형무소는 포화상태가 되었다. 1948년 664명에서 1949년 1,022명으로 수감인원이 급증했다.(주26) 당시 형무관이었던 김 아무개는 여순사건 관련자가 200여명 정도 수감되었는데, 이들은 죄도 없는 데 길을 다니다가 붙잡힌 젊은이들이었다고 증언했다.(주27)

전쟁 발발 직후 CIC 지휘하의 군경합동수사본부는 공주경찰을 통해 좌익과 보도연맹원 등을 예비검속한 뒤 공주형무소에 수감했다. 공주형무소는 예비검속자들을 수용할 공간이 부족해 공장시설을 감방으로 사용했으며, 형기가 얼마 남지 않은 일반재소자는 석방시켰다. 7월 9일 공주CIC분견대는 여순 사건 관련자 등 공주형무소에 수용된 정치사상범과 보도연맹원의 인도를 요구했고, 형무관들은 정치사상범과 보도연맹원 등을 분류하여 이들에게 재소자들을 넘겨주었다.

1950년 7월 처형현장으로 이송되는 공주형무소 재소자들. [사진 출처: Picture Post-5086-Korean War Series- pub. 1950 (Photo by Haywood Magee)]. 1950년 7월 <픽쳐포스트> 기사에는 재소자들이 왕촌 살구쟁이로 끌려가는 사진이 실려 있다. 이 사진 설명은 처음에 ‘공산주의 동조 혐의자’가 나중에는 ‘반역 혐의자’로, ‘스스로 무덤을 파서 총살됐다’가 ‘전쟁 초기에 (남북한) 양쪽 모두 야만적인 행위가 저질러졌다. 다소의 재소자들은 다른 편에 의해 당했다’로 바뀌었다.(Getty Images, 「Untold Stoty: the Fall of Picture, Post」, 16 March 2002) 사진의 트럭 네 귀퉁이에 특경이라는 완장을 찬 공주형무소 특별경비대와 헌병, 경찰,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CIC,와 청년방위대가 서 있다.

공주CIC분견대는 재소자들을 넘겨받아 형무소 특별경비대와 공주경찰, 공주파견헌병대, 그리고 청년방위대까지 동원해 정치사상범과 보도연맹원들을 트럭에 실어 왕촌 살구쟁이로 이송, 집단 살해했다. 형무소 재소자 등은 50여 명씩 형무소 트럭에 실렸으며, 총살 현장으로 가는 동안 머리를 숙여 양 무릎 사이에 넣은 상태로 있어야 했다. 고개를 들면, 트럭 네 귀퉁이에 서 있던 이송 담당자들의 소총 개머리판 세례를 마구잡이로 받아야 했다.

당시 유엔한국위원단(UNCOK)의 야전관측조로 유엔과 한국군의 연락장교로 복무한 호주군의 피치 소령(Major Peach)과 랜킨 공군중령(Wing Commmander Rankin)은 이송 과정과 학살 장면을 목격했다. 피치 소령은 “바로 내 눈 앞에서 2~3명이 죽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머리가 계란처럼 으깨졌다”라고 증언했다.(주28)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은 왕촌 살구쟁이에서 오전 10시부터 해질녘까지 공주CIC분견대의 지휘 아래 공주파견헌병대, 공주경찰에 의해 총살되었다. 마을주민 이 아무개는 “오전 10시경 따발총 소리를 시작으로, 1시간 간격으로 트럭 소리와 총소리가 해질녘까지 들렸다”고 했다. 공주경찰서 사찰계 출신의 한 경찰관은 “공주형무소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들을 앉혀놓고 뒤에서 총을 쏴서 죽였다. 특히, 왕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공주CIC분견대와 공주파견헌병대에 의해 동원된 청년방위대는 구덩이들을 미리 파놓았다가 사살된 시신들을 매장했다. 나중에는 미리 파놓은 구덩이가 모자라자 처형대상자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그 앞에서 총살했다. 공주형무소에서는 7월 9일 최소 400명에서 최대 700여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6월 12일부터 7월 20일까지 왕촌 살구쟁이에서 유해발굴을 실시했는데, 3개 구덩이에서 317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나 나머지 3개 구덩이는 예산 등의 문제로 발굴하지 못했다. 따라서 발굴하지 못한 나머지 3개 구덩이까지 포함하면 최대 7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주29)

1950년 당시 충북 청주시 탑동 234번지에 있었던 청주형무소에는 청주지방검찰청 관할의 충북 출신 수형자들이 수감되었다. 수용가능 인원이 500여 명에 불과했지만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약 1,60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 중 절반 이상은 포고령 2호 위반자였다. 여순사건으로 징역 15년, 20년, 25년 등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된 군인수형자도 60명이나 있었고, 징역 10년형 이상의 일반장기수도 수백 명이 있었다. 또한 전쟁 직후 청주·청원지역의 보도연맹원 중 400여 명이 7월 5일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청주형무소 사건 현장. 충북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산 74번지(일명 청원 분터골)
청주형무소 사건 현장. 충북 청원군 남일면 화당1구 화정교 밑

 

 

 

 

 

 

 

청주형무소는 6월 29일 충청남북도 위수사령관인 제2사단장으로부터 재소자처리에 관한 군의 지휘에 따를 것을 명령받았고, 30일 새벽 충북지구CIC와 제16연대 헌병대에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36명을 인계하였다. 이들은 청원군 남일면 화당교 일대에서 총살되었다. 이어 7월 2일부터 5일까지 충북지구 CIC와 제16연대 헌병대는 남은 여순사건 관련자와 포고령2호 위반자 등 800여명의 정치사상범을 넘겨받아 청원군 분터골 등지에서 집단 사살했다. 또한 충북지구 CIC와 제16연대 헌병대는 6월 30일부터 7월 5일까지 청주형무소에 수감중이던 보도연맹원 등 400여 명을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등지에서 살해했다.

1950년 6월 30일부터 7월 7일 사이에 충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사상범과 보도연맹원 등이 충북 청원군 남일면 화당리 화당다리, 쌍수리 야산, 고은리 분터골, 낭성면 도장골, 가덕면 공원묘지 등에서 살해되었다. 이때 충북지구CIC, 제16연대 헌병대, 청주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으로 살해된 인원은 모두 1,2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주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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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010, 148쪽

2) 대한민국 국회, 󰡔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6-24), 167쪽.

3) 최정기, 「해방 후 한국전쟁까지의 형무소 실태 연구-행형제도와 수형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제노사이드연구』 제2호, 2007, 83~84쪽; 진실화해위원회, 「중부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7, 2010, 325쪽

4) 법무부, 󰡔한국교정사󰡕, 1987년, 492~509쪽.

5) 최정기, 위의 글, 21~22쪽; 법무부, 『한국교정사』, 1987, 492~509쪽;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326쪽 재인용

6) 김기진,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푸른역사, 2005, 322~323쪽

7)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345쪽 재인용

8) <서울신문>, 1949. 8. 7

9) 진실화해위원회,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5, 2010, 211쪽

10) 대전형무소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 10월 19일 충청남도 대전시 중구 중촌동 1번지에 장기수를 수용하는 중구금시설로 개청되었다. 개칭 당시 명칭은 대전감옥이었으나 1923년 5월 5일 대전형무소로 개칭되었고, 1961년 12월 23일 대전교도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4년 3월 20일 충남 대전시 중구 대정동 36번지의 현재 위치로 신축 이전했다.(법무부, 『한국교정사』, 1987, 320쪽, 1061쪽) 

11) 최정기, 위의 글, 83~84쪽

12) 법무부, 위의 책, 515쪽

13)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13쪽

14)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14쪽

15)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15~216쪽

16)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16쪽

17)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17쪽

18) 이곳은 당시 충남 대덕군 산내면으로 현재의 대전 동구 낭월동 11번지, 13번지, 산4번지 일대로서 당시에는 시유림으로 대전형무소에서 위탁사업으로 재소자들이 벌채작업에 동원되었던 곳이다.

19) War Diary and Acitivity Report: 7 October 1950, 25th CIC Detachment, 2 Nov. 1950, Box 3758, RG 407, NARA;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18쪽

20)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22쪽

21) A-1은 ‘가장 신뢰할 만한 등급’에 해당한다.

22) 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Report no. R-189-50, Records of the Army Staff G-2 ID File, Box 4622, RG 319, NARA; 한국일보 2000.1.5자 재인용

23)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23쪽

24)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41쪽

25)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42쪽

26) 법무부, 위의 책, 492~509쪽

27)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43쪽

28) Gavan McCormack, 󰡔Cold war, hot war: An Australian perspective on the Korean War󰡕, Hale & Iremonger, 1983, 129~132쪽;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46쪽

29) 진실화해위원회·충북대학교박물관, 「유해발굴 및 인류학적 조사」,『2009년 유해발굴 보고서』제1권, 2009, 89~96쪽;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57쪽

30)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153~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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