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65회부터는 남측 교회와 해외교회가 주도해 북측 영토에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건축사업이 중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그 원인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자 한다. 이중에는 ‘평양조용기심장전문병원’내에 마련될 30평 규모의 ‘병원교회’와 평양 대동강변 IT단지에 설립될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 예장 합동 측의 ‘평양장대현교회’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현재 추진 중인 미국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의 주도로 지어질 ‘평양국제외국인교회’도 다루고 평양 조선영화촬영소 산속에 지어진 ‘형제산교회당’과 거기 딸린 목사관을 방문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며 나진선봉교회도 다룰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분류된 ‘통일교’가 평양보통강호텔 앞에 설립한 ‘국제평화센터’와 평화자동차 공장 방문이야기들을 다룰 것이며 안식일교와 몰몬교의 대북사역 등도 심도 있게 다룰 것이다. / 필자 주 

 

해방 전 이북 안식교회는 78개, 목회자 27명, 신자 2665명
      
1940년 당시 1천명 이상의 신자를 보유한 이북지역의 개신교 교파는 모두 다섯 곳인데 그 순위를 보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성공회 순이다. 당시 안식교(재림교회) 교세를 보면 신자가 2,665명, 교회당이 78개, 목회자가 27명 정도였다. 각 지역별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평안남도는 신자가 1,639명, 교회당은 41개, 목회자는 12명으로 가장 많았다. 반면 평안북도는 4개의 교회당을 1명의 목회자가 순회형식으로 돌보며 사역했는데 신자 수는 전무한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황해도는 신자 289명, 12개 교회당, 7명의 목회자를 두었으며 함경남도는 661명의 신자와 14개 교회당, 3명의 목회자를 두었고 함경북도는 76명의 신자와 7개 교회당, 4명의 목회자를 두었다.
     
이는 1940년 당시 이북 전체 개신교 신자 23만 명에 비해 교세가 약한 편에 속한다고 볼 수는 있으나 당시 안식교 선교본부의 중심 역량이 서울을 비롯한 이남지역에 집중하던 시기라서 남과 북이 균형을 보여주는 통계로 나왔다. 당시 이북지역 전체 개신교 교회당은 2천 1백, 목회자는 2천명에 이르며 68.1%가 평안도, 10.8%가 함경도, 나머지는 서북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북의 안식교 교세는 분단을 거치고 5년이 지난 1946년에 들어서는 교회와 예배소, 가정안식일학교를 전부 합해 55곳으로 줄어들었다. 더구나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와 한국 전쟁 발발의 와중에서 이북의 개신교 그룹들이 대거 월남하는 과정에서 안식교 신자들도 남으로 대거 이동하는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이북은 안식교가 거의 공동현상(空桐現象)에 가까울 정도로 한산했으나 이처럼 많은 신자들이 월남하는 와중에도 북에 남아 있는 신자들과 목회자는 다소 존재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안식교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과연 어떻게 유지했으며 그후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안식교 마지막 편으로 분단 7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해방직후와 한국전쟁 이후에 북녘의 안식교 신자들이 과연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 선교 개척기 안식교 전도대원들이 가가호호 다니며 문서전도를 하는 모습. 당시 서적대금을 치를 수 없는 농부들은 곡식이나 물건 등 현물로 지불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조선 최초의 안식교 선교사로 입국한 스미스 목사(W. R. Smith) 내외 사진(1905. 11. 17). 그는 1906년 여름, 선교본부를 진남포에서 순안으로 옮겼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안식교 최초의 침례자로 기록되는 이응현(좌)과 손흥조(우)(1904.5). [사진제공 - 최재영]

 

▲ 진남포교회 설립 초기 초가로 지은 예배당 앞에 선 신자들. [사진제공 - 최재영]

 

▲ 조선 안식교의 기초를 놓은 임기반 선생. 감리교 신자로서 본명이 임형주이며 귀국선에서 전도를 받고 안식교인이 되었다. 반석 위에 기초를 세운다는 뜻에서 임기반(林基盤)으로 개명하고 귀국 즉시 진남포까지 따라가 수십 명의 신앙동지를 얻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진남포에서 개최된 안식교 첫 총회(1904.9.27.). [사진제공 - 최재영]

 

▲ 진남포에서 열렸던 안식교 제1회 천막집회(1911.8.3.-8.13).[사진제공 - 최재영]

 

분단 후에도 이북 안식교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활발히 하다
     
1945년 10월 18일부터 열흘간 서울에서는 안식교 신도대회가 열렸다. 이날 안식교 교단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조선합회장을 비롯한 교단 임원들과 교단 월간지 ‘시조사(時兆社)’의 임원 선출이 이뤄진 후 이들을 기초로 ‘합회평의회’가 열렸다. 임원 선출 후에는 재림교회(안식교) 신자들의 근황과 교회당 실태를 조사하기로 결정했는데 남한 뿐 아니라 남북을 모두 아울러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하고 우선 38선 이북지역의 교회를 탐방 할 책임자를 선출했다. 그 결과 함경북도와 강원도 순방 책임에는 김진탁 장로와 박원실 목사,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순방에 김동규 선생과 김봉덕 목사가 결정됐다. 선택된 책임자들은 비밀리에 38선 이북을 넘어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들에 대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한 후 그 결과를 평의회에 보고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다녀 온 직 후인 1946년 초, 교단 월간지 ‘교회지남(敎會指南)’2-3월(합병호)에에 그 결과를 게재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38선 이북 지역에서도 특별히 주목을 끄는 곳이 순안지역이었다. 그곳은 한 때 안식교 선교본부와 병원, 목장, 농장, 학교 등 여러 기관들이 들어선 곳이며 이북에서는 안식교 신자들이 가장 많이 집중된 지역이라 실사 방문단의 관심과 염려도 집중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실사방문단의 구체적인 활동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들은 비록 국토가 분단된 어지러운 상황이지만 1945년 12월 23일 오전을 기해 38선을 넘어 사리원, 재령, 흑교, 순안, 립석리, 평양, 장매리, 진남포 등 당시 안식교회(재림교회)가 세워져 있던 곳들을 골고루 방문해 신자들을 격려하고 교회의 문제점들을 일일이 점검했다. 어떤 지역은 예배당이 허물어져 재건축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을 보며 신자들을 위로하기도 했고 어떤 곳에 가서는 사경회(부흥회)를 직접 개최해 활력을 불어 넣기도 했다.
     
그리고 평양지역을 방문해 가장 중심교회였던 평양교회당을 방문해 열다섯 명 정도가 모인 상태에서 이북지역만의 독립된 ‘합회평의회’도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교회 재건을 위한 활발한 논의가 오가는 등 평양지역 안식일교회의 발전과 부흥을 모색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처럼 짧은 기간 내에 평양을 비롯해 이북 전역을 골고루 순회한 방문단은 전반적으로 큰 결실을 거두고 47일 만인 1946년 2월 8일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에 있는 합회 본부로 무사히 복귀했다.
    
그리고 그해 다시 이북으로 재차 올라가 조선 최초로 설립된 안식교회당인 입석리(선돌)교회에서 신도대회를 열었다. 입석리는 시골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약 200명의 신도가 참석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대성황을 이루며 분단 상황에서도 부흥의 열기도 보여주었다. ‘평안남도 용강군 입석리(선돌)’에 세워진 이 교회는 안식교 역사상 최초로 세워진 4개교회 중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1904년 9월 17일)라서 그 의미가 매우 컸다. 이들은 북조선대회를 정식으로 조직하고 대회장과 임원을 선출해 분단과 해방 이후 사회주의 인민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도 자립적인 운영을 해 왔던 것이다.
    
또한 실사 방문단은 1946년 11월부터 47년 1월까지 60일간 또 다시 순회하는 중에 평안남도 순안교회에서는 청년수양회를 열었다. 이 때 약 40명의 청년들이 참가했는데 앞서 밝혔듯이 초기 안식교 본부와 학교는 서울이 아닌 이곳 순안에 본거지가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 중에 유독 안식교 신자들이 많았으며 청년들과 청소년층에서도 신자 그룹이 많았다. 이들은 숙식에 불편한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사경회 형식으로 진행된 집회기간에 아무런 불평 없이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어가며 수양회를 참석해 주변에 있던 일반인들까지 감동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수양회에 참석했던 청년들은 그 후 동지회를 조직해 각 지역교회 선교사업을 돕기 시작하는 등 남측 합회에서 조직한 실사방문단의 이북지역 탐방사역은 해방과 분단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확장되었고 이후 각 교회들도 선교적 부흥이 일어나 새로운 신입 교인들이 속속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듯이 이북지역의 안식교 교세가 1940년에 신자 2,665명, 교회당 78개, 목회자 27명 정도였으나 5년이 지나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교회당이 55곳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래도 통계상 이남의 54곳보다 한 곳이 더 많은 숫자였다. 아무튼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해방과 분단 이후 그리고 북조선인민위원회 김일성 위원장이 집권하며 들어선 사회주의 인민정부 하에서도 안식교나 일반 개신교에 대한 직접적인 종교적 억압은 가시화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이북의 안식교 신자들이 겪게 된 갈등과 어려움들
     
위와 같은 이북지역 실사방문단과 남측 조선합회 측의 활동 기록들에 의하면 해방과 분단 이후의 이북 안식교 신자들은 정치적으로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교회재건을 위해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급변해 하루가 다르게 교회들의 상황이 악화되어 갔다. 방문단이 그동안 여러 차례 38선을 넘어 이북지역의 신자들을 격려했던 기쁨도 잠시, 전쟁이 발발하자 남진과 북진 등의 역전 상황들이 연이어 발생하며 안식교 신자들도 집단행동을 취하며 이동 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북 인민군들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그리고 연이어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결과 다시 군군에 의해 사흘 만에 서울이 수복되는 등 전세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반전이 지속됐다. 9.18서울 수복이후 힘을 얻은 UN군과 국군은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으나 그해 10월 중국 공산당에서 파견한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불과 석 달도 안 된 1951년 1월 4일(1.4 후퇴) 인민군이 서울을 재탈환하며 UN군과 국군은 서울에서 후퇴를 하게 된다. 이때 중공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이북에 잔류해 있던 안식교 신자들도 황급히 남하할 수밖에 없었는데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민 대열은 치열한 전투와 갖가지 상황으로 인해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특히 9월 28일 서울수복이 될 때 안식교 교단 지도자들과 책임자들은 서울 수복의 기류를 타고 이북의 신자들과 접촉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큰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이북지역에 실사 방문단을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이때 방북단 단장은 오영섭 목사가 맡았고 이해성 목사를 비롯한 이북에 고향을 둔 몇 사람들이 동행했다. 이들은 이북지역을 시찰하는 오 목사의 임무를 도와주었으며 이들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전시 교회 현황을 파악한 후 무사히 사울로 귀환했다

해방 후의 이북지역 안식교 신자들과 일반 개신교 신자들의 근황을 파악하기 전에 먼저 주지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외국에서 입국한 선교사들이 입국해 시행했던 선교방식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사회 참여를 하려는 조선의 신자들을 비신앙적인 것으로 몰아갔으며 특히 일제의 침략과 조선 강점기의 근본 문제를 회개와 기도로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로 인해 신자들은 맹목적인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다. 결국 이때부터 개신교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당면한 역사문제와 사회적인 문제들을 등한시하거나 외면하는 내성을 길러 주었으며 이로 인해 신자들이 지니고 있는 의식의 폐해가 심각했다.

그들의 이러한 선교방식은 제국주의적 선교 논리를 기초로 하였으며 교리적으로 볼 때도 일반 개신교 선교사들은 신자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이루어가야 하는 ‘오는 천국’보다는, 육체가 죽어서 가는 ‘내세 천국’에만 집중하거나 몰입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신비주의 신앙과 근본주의 신학이 뿌리 내리며 조선교회를 묶어 나갔다. 따라서 이런 실정을 간파하고 있는 북 인민정권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후 복구사업을 마치자마자 종교자체를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구이며,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로 리용”해 왔음을 선포하며 본격적인 반종교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에 잔류한 안식교 신자들은 북 인민정부 하에서의 신앙생활 유지를 위해 자구책 마련과 적응 대안이 필요했다. 특히 안식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안식일(토요일)을 지키는 일은 목숨처럼 소중한 일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구약성경에서 강조한 ‘안식일’은 정확하게 말해 토요일만 해당되지 않고 금요일 해 질 무렵부터 토요일 해 질 무렵까지 해당되기 때문에 안식일 교회에서는 지금도 금요일 저녁예배와 토요일 예배를 연속으로 드린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안식일 예배를 언급할 때는 토요일 낮 예배를 지칭한다. 주중에 드리는 수요예배도 일반 개신교는 일요일부터 계산해서 셋째 날이 되는 수요일에 예배를 드리지만 안식일교회는 토요일부터 계산해서 세 번째 되는 날 화요일에 예배를 드려왔다. 이런 전통을 예로부터 지켜왔던 이북의 안식교 신자들은 철저하게 안식일 예배를 지키기 위한 과정에서 초기에는 북 당국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특히 부모가 안식교 신자인 자녀들 혹은 학생신자들은 매주 토요일이 되면 학교를 결석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었으며 동시에 안식교를 믿는 직장인들이나 노동자들도 토요일이 돌아오면 자신들의 직장과 일터에 결근하는 문제들이 사회문제화 되었으며 결국 인민정부에서는 안식교신자들을 특별 종교인그룹으로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대다수 이북 인민들의 직업은 공장이나 농장에 출근해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후(戰後) 복구작업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안식교 신자들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에 이들도 매주 토요일이 돌아올 때 마다 종교적인 문제로 빈번하게 갈등이 발생하자 이를 파악한 북 당국에서는 내각 차원에서 관여하며 신자들에 대한 문제를 정책적으로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안식교 신자들은 토요일이 돌아오면 일터로 출역할 때 아예 처음부터 안식일을 선언하고 일절 노동을 거부해왔기 때문에 이들을 정책적으로 배려하여 토요일은 휴무토록 원만한 방법으로 해결했다. 처음에는 상급자들과 책임 일꾼들이 신자들과 종교적인 문제로 갈등과 마찰을 빚었으나 신자들의 신념이 워낙 확고해 결국 꺾이고 말았다. 신앙의 주관과 고집이 완강하면 북 당국자들도 별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노동문제에 있어서 노동성과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토요일에 휴무하는 대신 일요일(주일)에도 작업을 하는 다른 작업장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안식교 신자들은 평소 요령을 피우거나 태만한 경우가 거의 없고 대개 성실하고 근면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런 모습들이 평가를 받아 참작이 된 것이다.
    
반종교정책을 추진하는 냉엄한 상황에서도 안식교 신자들의 이런 ‘노동각성(勞動覺醒)’이 정상 참작돼 배려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도 안식교 신자들은 대개 경건하고 자기 생활을 청교도적으로 꾸려나가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터나 직장에 출근하면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는 풍토가 있어 당국이 안식일(토요일) 예배를 허용한 것이다. 또한 이 문제와는 별도로 북에 남은 안식교 신자들은 간혹 ‘공민증거부(公民證据否)’라는 특이한 죄목 때문에 논란거리가 발생하기도 했다. 북 정부 당국은 초창기부터 모든 인민들에게 공민증을 부여했는데 당시 안식교 신자들은 주로 예수재림과 종말신앙을 갈망하는 교리적 속성 때문에 “성경책만 소지하면 되는 것이지 이런 증명서는 별로 필요가 없다”는 반응과 인식을 지녔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다.
     
이처럼 이북에 남은 안식교 신자들은 북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기독교 종말론적 사관과 근본주의적 교리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북지역의 안식교 신자들은 6.25전쟁 무렵부터 안식일 준수의 시련과 함께 비무장 전투원의 신념에 대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첫 사례는 청년 신자들이 북 당국으로부터 여러 차례 인민군 지원 입대 요청을 받고도 끝내 순응하지 않으면서 벌어졌다. 평안남도 강서군과 대동군에 거주하는 이창수, 김봉락, 박영락, 최순영 등 청년들은 정상적인 징집 통보를 거부하는 바람에 이들은 결국 1950년 3월, 다시 재강제 징집을 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징집된 후 훈련소에서도 끝내 집총 훈련을 거부하는 바람에 일단 귀가 조치를 당하였으며 그 중에서 김봉락은 전쟁 발발과 함께 인민군에 재징집되었는데 인민군대에 입대한 이후에도 계속 집총을 거부하는 바람에 인민군 당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피복창에 근무하도록 배치시키는 등 이북에 잔류한 안식교 신자들은 병역 문제와 안식일 성수 문제로 인해 사회적인 갈등을 빚었다.
 

▲ 분단 이후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이북 안식교 신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조직된 방북단 단장을 맡은 오영섭 목사(오 목사의 조선합회신학교 졸업사진). [사진제공 - 최재영]

 

▲ 안식교 교단 총회라고 할 수 있는 ‘제13회 연합회 총회’후 참석자들의 기념촬영. [사진제공 - 최재영]


안식교가 처음 이단으로 몰린 곳은 이북지역
      
미국의 안식교 선교사가 1904년 평안남도에 도착해 활동을 시작한 이래 진남포와 순안에서 시작된 안식교는 순식간에 평안남북도와 평양지역 그리고 전 이북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첫 교회당이 세워지면서 교회간판을 달아야 하는데 당시 조선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선교사들은 개종자들과 조선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교단명칭을 ‘예수재강림 제7일 안식회’로 번역해 한 동안 사용해왔다. 이런 와중에 안식교 보다 앞서 뿌리 내리고 있던 개신교의 장로교, 감리교 교단들은 안식교의 빠른 확산 때문에 큰 위협과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안식교와 일반 개신교 양측이 교리적, 신학적 논쟁을 벌이며 반목과 대립이 심화되는 오늘날의 한국교회 상황과는 달리 당시에는 ‘기존 신자들 빼내기 식’의 집단개종 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로 이단시비가 촉발된 경우가 많았다.
     
안식교가 이단 논란에 휩싸이게 된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보면 첫째, 기존 개신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무더기 혹은 삼삼오오 안식교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비롯됐다(입석리교회 사태). 둘째, 미국에서 파견된 안식교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국민적 분노를 유발할 만한 사회적 사건을 발생시켜 안식교에 대한 사회적 불신과 도덕적 신뢰가 약화되며 이단시비가 심화되었다(허시모 선교사 사건). 셋째, 일제 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압에 못 이겨 평양지역 미션스쿨 중에서 안식교와 의명학교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시행함으로서 신앙적으로는 배교행위, 민족적으로는 친일혐의를 받아 사회적인 비난과 함께 이단시비도 강화됐다(이희만 교장의 신사참배 수용 사건).

넷째,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안식일교리와 예수재림교리, 구원론과 종말론 등 성경의 민감한 교리부분을 해석함에 있어 기존 개신교파들과 상당한 견해차와 간극이 있어 일반 개신교회들이 수용 내지 타협이 어려워 기존 개신교회들로부터 지속적인 견제와 배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뿐 아니라 안식일 성수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토요일 등교거부, 토요일 직장 출근거부, 병역의무 거부와 집총거부, 음식에 대한 편견 등 교리적인 문제로 인해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며 물의가 지속되어 이단시비가 지속되어왔다. 
    
1. ‘집단 개종사건’으로 인한 이단시비 촉발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안식교 교회가 전파되고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존 개신교 교회들로부터 이단으로 비판 받아오던 안식교 선교본부는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주로 의료사업과 낙농사업, 농장과 농업분야 사업, 교육사업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에 힘을 쏟으면서 폭넓은 선교의 그물을 던졌다. 안식교가 확장되면서 앓게 되는 성장통(成長痛) 중에 가장 큰 아픔은 이단논란이다. 이단으로 몰리게 된 첫째 요인이 바로 집단 개종사건들이었다. 1904년 평남 진남포를 필두로 순안지역과 평양지역 등에 안식일교회당이 세워지자 기존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신자들이 안식교로 개종하는 사태가 속속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최초의 안식교 선교사 스미스 목사는 일본의 ‘쿠니야 히데(國谷秀)’라는 목사를 초청해 진남포지역에서 특별 집회와 전도를 가졌으며 나흘 후에는 또 다른 일본 책임자인 미국인 선교사 ‘필드’목사가 방문해 50일간 안식교를 전파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였고 71명이 침례를 받는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입석리(선돌)교회, 강대모루교회, 용동교회, 바매기교회 등 무려 네 개의 교회당이 연속으로 세워졌는데 그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가 바로 ‘입석리교회’였다. 1904년 9월 17일 ‘평안남도 용강군 입석리(선돌)’에 세워진 입석리안식교회는 이미 설립될 당시부터 32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안식교 순회 전도단은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비신자를 대상으로 전도하면서도 이미 기존에 개신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접촉하며 안식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기존 개신교 신자들이 동요를 일으키며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를 탈퇴하고 안식교로 개종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게 됐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선돌교회 교인들 중 대다수가 이웃에 있는 감리교회 신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일본에서 온 순회전도단의 영향을 받고 개종한 것이었다. 감리교 측에서는 자신들의 멀쩡한 신자들을 갑자기 빼앗겼다는 생각에 감정적으로 접근하며 개종문제를 해결하였고 그 과정에서 안식교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감리교 신자들이 무더기로 개종하자, 감리교 평양연회 측은 비상회의를 열고 황정모, 이인승 목사와 노블(Noble, William Arthur) 선교사 등을 급파해 개종자들을 대상으로 설득작업을 벌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개종자들은 연회목사들에게 “현재 예배를 드리는 일요일이 왜 주일인지를 성경적으로 답변해 달라”며 항변했으나 설득하려던 목회자들은 아무도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 채 돌아가고 말았다. 연이어 다른 감리교 선교사인 모리스(C.D. Morris) 목사가 설득 차 찾아왔으나 모리스 역시 교리적으로 속 시원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개종자들에게 역정을 내며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사태를 수습하고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면 현장에 있던 안식교 교역자는 차분하고 온유한 모습으로 성경적으로 토요일이 안식일이라는 증명을 논리적으로 답변하자 그 모습을 본 개종자들은 오히려 더욱 확신을 굳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편 교회 중직자들을 안식교에 빼앗긴 선돌감리교회는 그 후 힘을 잃고 자립하지 못하다 결국 4, 5년 후에 ‘진지동 감리교회’와 합병하고 말았다. 이처럼 교인들을 억울하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기존 개신교회들의 입장에서는 안식교에 대해 반목과 질시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그 사건 이후 연이어 전국적으로 발생한 집단 개종문제로 인해 결국 기존 개신교와 안식교는 이단시비 논쟁에 휩싸인 것이다.

2. 안식교 선교사 허시모 사건 등으로 인한 이단시비 강화
      
두 번째 요인은 외국에서 입국한 선교사가 유발한 비도덕적 사건으로 인해 안식교의 이단시비가 사회적으로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안식교가 부정적인 교파로 몰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사건으로서 1925년 여름에 발생했다. 조선에 개신교 선교사가 최초로 입국한 것은 1884년이며 미국 북장로교를 시작으로 미국 감리교, 호주 장로교, 영국 성공회, 미국 남장로교, 미국 남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등 다양한 교파들이 20여 년 간 약 500명(499명) 정도가 활약했다. 이들 선교사들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볼 때 순기능과 역기능 등 다양한 면이 존재하나 당시 1920년대 중반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소위 ‘문명국가의 종교’라는 기존의 이미지를 잃어버리고, 그저 하나의 보수적인 세력으로 추락하며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기 시작했던 시기였으며 더구나 허시모 사건은 사회주의 계열의 반기독교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시점에 터졌다.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 순안병원(위생병원)을 운영하던 안식교 선교부에서는 농업선교의 일환으로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1925년 여름, 과일이 익어갈 무렵이 되자 동네 아이들이 과수원 담장을 넘어 사과를 훔쳐가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자 당시 순안병원 의사였던 허시모(H. Heysmer) 선교사는 이 사실에 분노해 범인을 잡기 위해 망을 보던 중 동네 남자 어린이 한 명이 사과를 훔쳐 달아나는 것을 목격하고 현장에서 붙잡았다.
      
허시모는 이 날 자신이 붙잡은 12살 된 김명섭이라는 남자 어린이 양 볼에 초산은(硝酸銀)으로 ‘됴뎍(도적)’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고, 이로부터 사건이 시작됐다. 피부에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화학약품으로 어린이 얼굴에 주홍글씨를 각자(刻字)한 이런 엽기적인 사건은 1년 뒤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며 사태가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전국적으로 안식교 반대 운동과 함께 이단시비 논쟁 그리고 선교사 추방운동을 유발시켰다. 당시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신문이 바로 조선일보였는데 지금과는 달리 당시 진보적인 기자들이 많이 근무해서 그런지 이 사건을 ‘전 조선 민족에 대한 모욕’이라며 대서특필했고 기사내용들은 온 독자들과 국민들에게 공감대를 이끌며 다른 신문들도 연일 합세해 보도함으로써 결국 1년 반이 지나 허시모는 검찰에 고발됐다.
   
결국 본부 선교부에서는 사건 당사자인 허시모를 병원에서 면직 해임했고 그는 일제치하에서 운영되는 재판정에서 징역 3개월의 실형을 받아 감옥생활을 마친 후 그해 12월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사태가 크게 벌어지자 당시 순안 선교부에서는 국제선교본부에 서신을 보내 허시모를 소환하고 책벌하라는 격문을 보내는 등 사태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으며 피해보상은 얼마든지 하겠다는 약조까지 했다. 한편 안식교 선교사뿐 아니라 조선에 있던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까지 합세하며 철저히 해결할 것을 선교부에 통보하고 인류 앞에 사죄하는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일반 선교사들도 이 문제가 자신들에게 미칠 악영향을 걱정했던 것이다.
   
이처럼 허시모 사건은 조선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져다주는 매우 자극적인 사건이었고, 외국 선교사에 의해 사회적 파장과 물의가 빚어진 엄청난 사건이었다. 허시모(許時模)라는 이름은 당시 조선에 체류하던 외국인들에게는 영어본명과 함께 조선식 이름을 함께 부여하던 풍습에 따라 붙여진 ‘헤이스머(C. A. Haysmer)’의 조선식 이름이었다. 이제부터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기독교사에 실린 사건의 개요부터 살펴보자.

“1925 여름에 자기 집 과수원에 들어와 사과를 따먹은 그 지방 어린이(12세) 김명섭의 뺨 좌우에, 염산으로 ‘됴적’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서 한 시간 동안이나 볕에 말린 후 풀어놓았으니, 이로 인해 됴적이라는 두 글자는 영원토록 그 아이의 뺨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되었다.”

미국 선교사가 우리나라 어린이의 얼굴에 범한 이 사건은 각 시대별로 회자되었고, 그 결과 해방과 함께 분단 된 이북의 각종 출판물이 미제 선교사를 비난할 때 마다 중심소재로 활용 되었다. 1982년 12월에 발행된 ‘천리마’잡지를 확인해보면 이 사건이 사실보다 과장되거나 덧붙여진 것을 볼 수 있다.

“지난날 선교사의 탈을 쓰고 조선에 기어들었던 미제 승냥이 놈이 조선의 한 어린이가 사과밭에 떨어진 사과 한 알을 주었다고 하여 그 이마에 청강수로 도적이라고 새겨놓는 천인 공로할 만행을 감행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것이 미제 침략자들의 승냥이의 본성입니다.”

이뿐 아니라 허시모 사건은 이북 학생들의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어린아이 한명이 선교사의 과수원에서 떨어진 사과 한 개를 주웠는데 그것을 목격한 선교사가 사나운 개 한 마리를 풀어서 아이를 추격했으며 결국 아이는 개에게 잡히면서 심하게 물어 뜯겼다. 그것도 모자라 선교사 놈은 아이를 나무에 묶어 놓고 ‘청강수(염산)’로 이마에 ‘도적’이라고 새겨놓았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북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삼았던 이슈는 반미운동이었으며 그러한  반미는 그 뿌리를 반기독교에 두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 대한 미움과 증오의 상징물인 황해도 ‘신천 학살 박물관’에 방문해 전시실을 둘러보면 벽에 걸려있는 대형 유화에 사과나무에 묶어놓은 어린아이를 사냥개가 물어뜯는 섬뜩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십자가를 목에 걸고 목사 가운을 입은 매부리코 미국 선교사가 청강수(염산)로 이마에 ‘도적’이란 글자를 새기고 있는 모습인데 이는 바로 허시모 선교사 사건을 근거로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신천군민 학살에 가담했던 인물 중에 한 명으로 십자가 목걸이를 한 참전 미군 ‘Chaplain(군종장교)’목사를 지명해 그려 놓기도 했는데 미군 군목은 북 당국으로부터 당시 신천 서부교회와 동부교회신자들 그리고 신천성당과 각 면 단위에 있던 교회 신자들을 학살한 혐의를 지금까지 받고 있다.
    
이처럼 당시 전 조선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에 대해 훗날 남과 북은 서로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해 왔으며 필자가 확인한 결과 과장되거나 잘못 알려진 내용들이 많아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왜곡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허시모가 ‘도적’이라는 글자를 새긴 것은 이마가 아니라 양쪽 뺨이며, 독극물인 ‘염산(鹽酸)’이 아니라 ‘초산은(硝酸銀)’을 사용한 것이다. ‘초산은’이라는 화학물질은 염산에 비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는 특성이 있으며, 옛날에 납땜하는 땜쟁이들이 사용하던 청강수(靑剛水)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지워지는 물질이다. 사건 당사자였던 허시모도 아이에게 교훈을 주기위한 의도로 글자를 아이의 뺨에 일시적으로 남겨 두려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어린이를 잡았을 때 허시모는 그 부모를 동시에 불러 오도록 해 과수원 피해 보상금으로 당시 화폐로 5원을 부모에게 요구했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자 벌금 2원을 내고 2주간 노동을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납부할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을 부모에게 확인한 허시모는 결국 양 볼에 ‘도적’이라는 문자를 새기기로 부모와 합의한 것이다. 그 대신 글자는 몇 주 후에 소멸될 것이라는 단서를 달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허시모의 행동은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어린이의 뺨의 새겨진 글자는 잘 지워지지 않아 실제로 1년이 다 되어가도 흉측한 모양의 상흔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허시모는 “아이가 자꾸 흙 뭍은 손으로 얼굴을 비비는 등 이물질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라며 발뺌을 하거나 합리화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허시모는 처음부터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나중에 문제가 불거지며 확산되자 사과문을 내기는 했으나 재판 진행 중에 피해자 어린이 측과 몰래 합의를 보면서 사건을 대충 무마시키려 했던 사실도 발각됐다. 이 사건은 1925년 9월경에 발생했으나, 언론에 의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이듬해인 1926년 6-7월경이었다. 이 때 조선일보를 포함한 일반 신문들이 대서특필함으로써 재판이 진행되었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사회적으로 부각되는 바람에 안식교가 들어 온 이래 최대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허시모 사건은 서구사회의 죄에 대한 개념이 당시 조선사회의 ‘서리 문화’와 충돌한 사건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허시모는 사건 당시는 물론 미국으로 추방된 이후에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수용 안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는 절도라는 범죄는 당연히 불법이며 응징의 대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범인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상응하는 배상을 해야 하며, 그 배상이 돈으로 지불되지 않을 때는 다른 방법으로라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미국적 사고를 실천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뺨에 각인된 주홍글씨 상처에 덧이 나며 흉터가 생기면서 일이 크게 확산된 것이다.
    
허시모의 세계관은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서리 문화’에서 나타나는 다른 형태의 ‘죄(罪) 개념’과 충돌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절도(竊盜)’라는 개념은 고조선시대부터 존재했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적용되는 방식과 또한 거기서 나타나는 유연성(유도리)은 전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어느 국가이든 ‘죄’라는 것은 절대적인 도덕 명제이기에 앞서 사회적인 합의에 기초한다는 것을 허시모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그런 것을 떠나 허시모는 의료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과 인격, 자질 등에도 다소 문제를 지녔으며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로서의 자질과 소명의식 등이 부족했던 인물로 보이며 파송되기 전에 받아야 할 필수적인 선교사 훈련도 부재한 것으로 보였다.
    
당시 일반 개신교는 이 사건을 호재로 여기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자신들의 교단에 속한 외국인 선교사들을 앞세워 이 사태에 대해 격분하는 메시지를 보냈으며 이전보다 더 본격적으로 안식교를 이단시하고 배척하는 분위기를 드러냈던 것이다.
 

▲ 안식교의 의료선교사 허시모가 어린이의 양 볼에 ‘도적’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긴 혐의로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매일신보 1926년 7월 31일자 기사). [사진제공 - 최재영]

 

▲ 황해도 신천학살박물관에 전시되었던 그림. 미국선교사가 불에 달군 시뻘건 불판으로  어린이를 잔인하게 살해한다는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 신천학살 당시 미군 Chaplain(군종장교)이 담당한 신천군내 기독교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학살 실행 조직표. [사진제공 - 최재영]


3. 신사참배와 친일 논란으로 인한 사회적 지탄과 비난
    
세 번째로 한국에서 아직도 안식교가 이단으로 배척받은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역사문제와 관련한 신사참배와 친일논란이다. 일제 강점기 안식교 교단과 안식교단에서 운영하는 의명학교는 평양지역에서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수용했다는 이유로 기존 개신교회들로부터 지탄을 받아왔다. 숭실학교를 비롯한 평양지역의 다른 미션스쿨 지도자들은 학교를 폐쇄하면서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해 끝까지 신앙의 지조와 절개를 지켰으나 의명학교와 안식교 교단 지도자들은 굴복하고 만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안식교의 신사참배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의한 것은 어디까지나 최고의결기관인 ‘대총회’에서 내린 결론이었고 더 나아가 전 세계 안식교 조직을 오대양 육대주로 구분해 조직한 아시아지역 의결기관인 ‘원동지회’가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의 자율적 의사에 맡겨 결정하도록 지침을 주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방북기 중편(中篇)에 상세히 수록돼 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는 기독교는 물론 천주교와 불교 등 종교계 전반에 걸쳐 신사참배를 시행했기 때문에 어느 특정 교파를 대상으로 친일논란을 지적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대부분의 종교들이 신사참배와 친일부역혐의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순서와 시기가 다를 뿐 모두 다 가담했기에 “안식교단이 가장 먼저 수용했다”라는 말은 큰 의미가 없으며 시대적 정황을 볼 때 신사참배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안식교는 불행하게도 신사참배 사건 외에도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10년 당시 합일합방을 기념하는 행사들을 안식교 교회들이 앞장서 개최한 일도 있었으며 안식교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교회지남’을 맡은 편집자들과 책임자들은 각자의 기고문을 통해 황국신민 발언과 함께 일제에 충성을 하라는 글들을 여러 차례 기고하기도 했다. 당시 기고자들과 편집자들은 외국 선교사들이 아니라 바로 순수한 조선 토박이들이었으며 이들의 말과 글에서 친일을 주장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실들이 진보세력들과 민족주의 세력을 기반으로 한 진보적 개신교인들에게 빌미가 되어 그동안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4. 일반 개신교와의 신학적, 교리적 괴리로 인한 이단논쟁 심화
    
특히 기존 개신교인들의 안식교로의 집단 개종사태는 이북지역뿐 아니라 이남지역에서도 연달아 발생했는데 이남에서의 초기 사건은 울릉도에서 발생했다. 울릉도 장로교회 신자 40명이 안식교로 집단 개종하는 사건을 필두로 전국적으로 유사 사건이 확산됐고 결국 1915년 조선예수교장로회(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안식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이단논쟁이 본격화되었고 그 후 1995년에 장로교 통합 측 교단은 안식교교리 중 영혼멸절, 영원지옥부재설의 이유로 이단으로 규정했으며 그 여파로 장로교 고신 측 교단은 2009년에,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014년에 각각 이단으로 규정했다.
    
아직도 개신교 교단들 중에는 안식교회를 이단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고 일반인들도 안식교를 선입견부터 가지고 보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이런 성경적, 교리적, 신학적 문제 외에도 사회적으로 야기되는 여러 문제 때문에 백년이 넘는 한국 안식교가 지금도 이단시비에 시달라고 있다. 안식교 신자들의 무조건적인 토요일 휴무 선언에서 비롯된 토요일 직장 출근 문제, 토요일 등교 문제 그리고 병역의무 거부와 집총거부 등의 문제가 사회 이슈화돼 이단시비에 더욱 휘말리게 계기가 됐다. 이런 일들은 안식교의 고유한 성격해석과 교리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서 앞으로도 개선될 전망은 없을 것으로 보이며 한국사회에서의 이단논쟁은 갈수록 심화되어가고 있는 양상이다.
     
앞서 밝힌 대로 병역문제는 이북지역과 마찬가지로 이남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발생했는데 춘천안식일교회 신자 박재식이 6.25전쟁 중이던 1952년 4월 해병대 입대 중 상관명령 복종 불이행으로 구타를 당해 6개월여의 입원치료를 받는 고초를 겪었고, 2개월 후에는 전북 김제의 김인용 청년이 제주도 모슬포 육군제일훈련소에 입대 후 구타를 당하던 중 미군 고문관의 개입으로 구조되기도 했다. 이후 정전협정 직전인 1953년 6월 30일 안식교 한국연합회장은 국방부에 안식교 신자들이 군복무시에 집총훈련을 면제하고 비전투병과에 배치시켜 줄 것과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키도록 허락해 줄 것을 진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이어 1956년 7월 영남 삼육중고교의 교사 박해종, 김옹호 그리고 김옹호의 동생 김창호 등 3인이 육군군법회의에서 집총거부 문제로 3년형을 언도 받은 경우가 발생했는데 이들은 예비역 소집에 응했다가 집총 거부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는데 실형이 언도 된 후 70여일간 복역하다가 집행유예로 출옥하였다. 그 후 1956년 12월에는 충청북도 진천 출신인 허승희 씨가 역시 집총 거부로 6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6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58년 이후 논산 훈련소에서는 집총 거부자에 대하여 구타와 고문 대신 무조건 6개월 이상의 징역의 형을 가하기 시작했고 그 후 집총 거부자에 대한 실형선고와 함께 최고 10년형까지 언도한 사례가 있었다.
     
현재는 안식교 군복무자들의 집총거부가 ‘여호와의 증인’신자들처럼 심각하게 대두되지는 않고 있다. 그동안 양심적 병역거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안식교(재림교회)도 자주 언급이 되어왔으나 최근에는 교단 차원에서 병역 거부를 주도하거나 신자들에게 병역 거부를 유도하거나 설파하지 않는다. 교리 상 토요일에는 쉬어야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 사건들로 2000년대 초반까지 군 교도소에는 안식교 출신 장병들이 단골손님이었고 징계사유는 대부분 상관명령과 지시에 대한 불이행이었다. 현재는 입영통지서를 받은 대다수의 재림교회 청년들은 정상적으로 군에 입대해 군복무를 잘 마치고 있다.
    
다만 2010년부터는 안식교 본부와 국방부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논산훈련소 영내에 안식일교회당을 별도로 세우고 자대에서 토요일에 교회 가는 것을 간부들이 허락해 주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다만 안식교의 종교활동은 입대 전 등록된 신도들에게만 가능하도록 했다. 이처럼 초기 이북지역에서 시작된 안식교에 대한 이단시비 논쟁은 이후 이남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현재까지 한국교회에서 지속되고 있는데 그렇게 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현재 전 세계의 1800만 명 장로교 신자 중에 무려 600만 명이 한국교회에 분포하고 있으며 그들이 한국 장로교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장로교의 신학과 교리는 안식교와 마찬가지로 매우 확고하고 단호해 이단문제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서로 팽팽한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러나 ‘이단(異端)’과 ‘이설(異說)’, 그리고 ‘사이비(似而非)’는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초기 안식교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 자녀들을 희생했다
    
그러나 안식일교회(재림교회)는 이런 여러 가지 이단시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서 출판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농업분야, 건강분야사업 등으로 자신들이 속한 지역사회에서 시민들과 지역민들을 섬기며 봉사하는 헌신적인 교파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기존 일반 개신교를 향해 주일성수 문제에 대한 이슈를 던지거나 예수의 재림에 대한 신앙을 점검하는 계기를 제공해왔다. 뿐만 아니라 조선 개척 초기의 안식교 선교사들은 척박한 조선 땅에 와서 자신은 물론 그들의 가족들이 각종 질병과 풍토병으로 인해 갖가지 고통을 겪으며 희생해왔다. 지금도 서울 마포 합정동 한강변에 자리 잡은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가면 안식교 선교사들의 묘지 몇 개가 일반 선교사들의 묘지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몇몇 안식교 선교사와 가족들은 이곳에 묻혀 있지만 아직도 초기 선교지였던 이북 땅에 묻혀있는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는 의외로 많다.
   
조선 안식교 역사상 가장 최초의 선교사였던 스미스(W. R. Smith) 목사는 어린 딸과 십대 아들이 죽어 순안 언덕에 묻어야만 했고, 23년간 의명학교 교장으로 봉직한 이희만(Howard M. Lee) 목사도 아들 한 명이 사망해 순안언덕에 묻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안식교 초대합회장을 지낸 전시열(C.L. Butterfield) 목사는 두 아들 중 한 명이 사망해 조선에 묻어야만 했으며 오벽(H.A. Oberg) 목사는 조선연합회장으로 17년간 재임했는데 그의 딸도  한 명이 죽어 쓸쓸히 조선 땅에 묻어야만 했다. 또한 안식교 월간지였던 시조사 편집책임자로 일한 클로우스(J.C. Klose) 목사도 딸 한 명이 죽어 조선에 매장해야만 하는 등 선교사들의 희생과 경건한 삶이 오늘날의 한국 안식교의 토대가 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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