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65회부터는 남측 교회와 해외교회가 주도해 북측 영토에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건축사업이 중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그 원인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자 한다. 이중에는 ‘평양조용기심장전문병원’내에 마련될 30평 규모의 ‘병원교회’와 평양 대동강변 IT단지에 설립될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 예장 합동 측의 ‘평양장대현교회’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현재 추진 중인 미국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의 주도로 지어질 ‘평양국제외국인교회’도 다루고 평양 조선영화촬영소 산속에 지어진 ‘형제산교회당’과 거기 딸린 목사관을 방문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며 나진선봉교회도 다룰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분류된 ‘통일교’가 평양보통강호텔 앞에 설립한 ‘국제평화센터’와 평화자동차 공장 방문이야기들을 다룰 것이며 안식일교와 몰몬교의 대북사역 등도 심도 있게 다룰 것이다. / 필자 주 

               

평양순안공항은 안식교 ‘의명학교’가 있던 자리
     
필자가 몇 년 전 평양을 방문 할 때의 일이다. 중국 심양을 떠난 고려항공 여객기가 순안공항에 내려앉자, 이전의 낯익은 오래된 공항청사는 보이지 않고, 새로운 임시 공항역사가 서 있었으며 그 부근에는 건축 장비들의 굉음과 함께 수많은 건축 노동자들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새 공항 신축공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국제공항역사를 새로 짓는 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로 통하는 북의 길목이 넓어진다는 뜻이어서 나는 매우 기쁘고 뿌듯하게 생각던 적이 있었다.
     
평양 중심부에서 24Km나 떨어진 곳 그러나 이곳이 바로 ‘평양의 관문’이자 북 유일의 공항인 ‘평양 순안국제공항’이며 필자가 방북할 때마다 이용하는 고려항공의 허브공항이기도 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2011년 9월부터 시작된 순안공항 제2청사 건축 공사는 여러 차례에 걸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도로 4년만인 2015년 7월 1일 준공식을 거행하고 정상 운영을 시작했다. 아쉽게도 나는 하필이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기간에 여러 차례 방북하느라 불편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순안공항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안식교와 관련된 역사와 여러 사연들이 서려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김대중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직후 남한의 대학가에서는 북 대학과의 교류를 추진하려는 프로젝트들이 유행처럼 봇물을 이룬 적이 있었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들을 비롯해 지방 여러 대학들까지 서로 앞 다투어 북 영토 안에 제2 캠퍼스를 설치한다거나 학술교류를 통한 유적답사와 공동연구, 농촌봉사활동 등 6.15 정상회담의 열기를 타고 다양한 접촉들을 시도했는데 이때 안식교가 설립한 삼육대학교에서는 평양에 분교 설립 추진을 시도했다.
     
왜냐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첫발을 내딛은 순안공항 자리가 삼육대 전신인 순안(順安) ‘의명학교(義明學校)’가 있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평양에 제2 캠퍼스 건립 추진을 밝혔던 삼육대학교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1906년 미국의 안식교 선교사들이 지금의 평양 순안비행장 터인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 석박산’기슭에 기와집으로 된 학교를 건축하면서 시작됐다. ‘의명(義明)’이란 뜻은 ‘밝은 진리’혹은 성경에 등장하는 ‘의로운 태양’즉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기독교적 교육의 가치와 이상을 실천한다는 이름이다.
    
분단 이후 남북의 정상이 처음 만나는 감동적인 장면을 통해 순안공항의 모습은 마치 오래 감춰졌던 베일이 벗겨지듯 온 세상에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그 당시를 떠올리면 공항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고 아담했으며 낙후된 듯 보였지만 깨끗하고 질서 있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과거 이 공항터전에 자리잡은 의명학교는 일제 강정기 체제하에서 여러 우여곡절과 변천과정을 통해 결국 서울 태릉에 마지막 둥지를 틀어 발전을 거듭하며 오늘날의 삼육대학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1906년 10월 10일 현재의 순안공항 터전에서 출발한 의명학교는 그것을 계승한 ‘조선합회사역자양성소’(교단 신학교)를 모체로 ‘삼육신학원’과 ‘삼육신학대학’으로 발전해 현재 안식교의 메카인 삼육대학교가 된 것이다. 평소 이런 역사를 대략 파악하고 있던 필자는 평양순안공항을 이용할 때 마다 옛날의 의명학교 터전을 의식해서 그런지 자꾸 공항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또한 순안공항을 바라 볼 때마다 필자와 함께 미주에서 통일운동과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동참하고 있는 동곡 권용섭 화백을 떠 올리곤 한다. 그는 이미 한국에 거주할 때부터 ‘서중한’(안식교가 지역별로 구분한 교구명칭) 지역의 민락교회를 다니던 안식교 신자였는데 미국에 이민 온 후에도 계속해서 독도 알리기와 통일운동, 평화운동에 주력하고 있는 분이다.

국내외에서 독도화가로서 매우 명성이 높은 그는 과거 2000년대 초반 남측의 경제협력단과 함께 평양을 공식 방문하던 중 순안공항에 도착해 수묵화로 공항을 직접 그린 적이 있는데 필자도 그 그림을 본 적이 있다. 흑백으로 그려진 공항건물에는 과거 의명학교가 은은하게 오버랩 되는 듯한 인상과 영감이 느껴지도록 그려진 것이 인상 깊었다.
 

▲ 공사가 진행 중인 평양순안공항에서 관제탑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하는 필자. 관제탑 위치가 바로 해방 전 안식교가 운영하는 의명학교 캠퍼스 자리였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예전의 순안공항 모습. 1959년부터 개항한 이래 2007년 가을부터 관제탑 우측 청사가 헐리고 제2청사 공사가 시작됐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독도화가로 명성이 높은 동곡 권용섭 화백이 2003년 방북해 수묵화로 직접 그린 평양순안공항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1907년 현재의 순안공항 터에 ‘양성학교’라는 이름으로 세워져진 후 1909년에 ‘의명학교’로 개칭된 1920년대 의명학교 캠퍼스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신사참배 결정 파동 후 지역사회에 양도된 ‘의명학교’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 정각,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차 도착했던 평양순안공항의 관제탑이 서 있던 그 자리가 바로 의명학교의 교사(校舍)와 안식교 교회당, 교사들과 선교사 숙소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있었던 장소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부터는 순안공항 관제탑을 바라볼 때마다 마치 십자가 종탑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며 의명학교 건물이 연상되면 자꾸 오버랩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순안공항은 지금부터 5년 전인 2011년 가을부터 국제적인 신청사 준공을 위해 연일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대규모 공사가 벌어지는 바람에 이제는 과거의 흔적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과거 의명학교 담장 등 유적들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번 방북기에는 의명학교가 어떻게 설립됐으며 어떤 변천과정을 거쳐 학교가 문을 닫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했다. 또한 안식교가 신사참배와 친일혐의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사실 여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곳에서 시작된 의명학교가 우리나라의 국운이 기울어 가던 구한말 개교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수난을 거쳤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한국전쟁의 비극과 전후 복구사업 그리고 근대화와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세계화의 과정 등 긴 세월 동안, 민족교육의 횃불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최근 필자는 국제적인 초현대식 공항으로 변모한 평양순안공항을 바라보며 비록 이 장소가 과거 재림교회(안식교)와 관련된 학교였지만 개화기와 초창기 조선 민중들에 대한 교육의 산실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명학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1906년 최초로 개교할 때의 이름이 ‘양성학교’였으며 그 후 발전을 거듭하며 ‘의명학교’라는 이름으로 거듭났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제 강점기를 맞아 신사참배의 수락 여파로 후유증을 겪다가 결국 1937년 7월, 학교가 순안지역 안식교 신자들로 조직된 이사회로 무상으로 인계되는 결과가 초래됐다. 그리고 그 해 9월 1일, 안식교 교단으로부터 독립된 지역학교로 거듭나며 학교 명칭도 ‘순안아카데미(Soonan Academy)’로 변경돼 순안지역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새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학교는 비록 안식교 교단으로부터 행정적으로 분리되었지만 이사진들이 모두 안식교 교인들이었기 때문에 한 동안은 안식교의 고유한 교육이념인 ‘삼육교육’에 따른 방침을 벗어나지 않았으나 1938년에 개정된 ‘제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마침내 1943년도에 이르러 학교 명칭이 ‘순안중학교’로 개칭되고, 종교적인 색채에서 완전히 벗어난 일반 중학교로 탈바꿈하며 의명학교 시대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의명학교의 설립과 변천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순안사숙’에서 ‘순안국제공항’까지
    
‘의명학교’가 일반 중학교인 ‘순안중학교’로 바뀌면서 훗날 다른 곳으로 이전되고 그 자리에는 군부대가 들어섰다. 한국전쟁 중에 이 부대 안에서 군 비행장이 건설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1959년 2월에 들어서 드디어 ‘순안비행장’이라는 이름의 공항이 탄생한 것이다. 북 역사상 최초로 국적항공이 취항하며 민간공항으로서의 첫 운항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의명학교’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의명학교는 조선 최초의 안식교 파송 선교사였던 스미스(W. R. Smith) 목사에 의해 1906년 10월 10일에 ‘양성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 ‘의명학교’의 전신은 ‘양성학교(養成學校)’이며 이 양성학교의 모태는 ‘순안사숙(順安私塾)’이다. 순안사숙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학교의 변천사는 순안사숙-양성학교-의명학교-순안아카데미-순안중학교 등의 순서로 변천과정을 거친 후 군부대가 들어선다.
    
그럼 ‘순안사숙’이 태동하게 된 계기부터 알아보자. 1905년 11월 미국 안식교 선교사로서 조선 땅에 입국해 진남포에 머물던 스미스 목사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 안식교를 받아들인 지 얼마 안 된 신자로서 순안지역의 유지였던 김두형이라는 관리가 있었는데 그는 진남포에 베이스를 두고 있던 스미스를 찾아가 여러 이유로 인해 선교본부를 진남포에서 순안으로 이전할 것을 건의했던 것이다.

그 후 김두형의 건의와 선교부의 승인으로 선교본부가 순안으로 이전하면서 스미스는 이때부터 순안지역에서 왕성한 선교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06년 5월경 순안에서 22명에게 침례를 베풀었고 늘어난 신자들을 위해 그해 10월경 ‘순안면 남창리’에 초가 한 채를 구입해 교회당을 만들고 서당식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남창리 교회당에 출석하는 어린이들과 주변 마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김병엽이라는 인물이 한문 위주로 공부를 가르치며 서당식 학원으로 출발한 것이 바로 ‘순안사숙’이다. 순안사숙이 처음 개교한 날이 바로 1906년 10월 10일이라서 안식교에서는 이 날을 ‘의명학교’가 태동한 날로 보고 있으며 오늘날 삼육대학교를 비롯한 삼육계열의 모든 학교들의 연혁에는 이날을 개교일로 기념한다.
     
그렇다면 순안사숙 이후 ‘양성학교’가 개교한 계기를 알아보자. 남창리교회를 통해 사숙을 운영하던 스미스 목사는 정식으로 학교를 인가받아 건축을 하기 위해 당시 순안지방 유지였던 김두형을 통해 평안남도 관찰사에게 학교 설립 계획을 설명했고 그 결과 관찰사로부터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 석박산’기슭에 위치한 나라 소유의 땅 45에이커(55,000여 평)를 무상으로 제공 받는데 성공했다. 학교가 위치한 당시의 ‘순안(順安)’은 평원군(平原郡)내에 속한 하나의 면(面)단위 이름이었으며 평양중심부에서 60리나 떨어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포정리’는 안식교(재림교회) 본부와 사택이 위치한 남창리 맞은 편 지역이라서 학교를 세우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1907년, 교단지원금과 동료선교사 등을 통해 무려 693엔의 건축자금을 모집한 스미스목사는 이 자금으로 기와집 형태의 7칸(60合피트) 규모의 교사(校舍)를 짓고 1907년 6월 18일 건축 허가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해 9월 12일 드디어 보통과(4년제)와 고등과(3년제)의 학교설립에 대한 승인을 받고 이때부터 학교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개교 당시 첫 입학생은 9세부터 29세까지 다양한 연령을 지닌 학생들이 모집됐는데 남학생 5명, 여학생 6명이 입학을 했다. 교사로는 교장 스미스를 비롯해 샤펜버그, 임기반, 하동협 등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스미스가 학교를 건축한 의도는 안식교 복음전파와 교육사업을 짊어 질 청소년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사역자 양성과정(Korean Workers Training Course)’개념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학교이름도 ‘양성학교(Training School)’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양성학교’에서 언제 ‘의명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는가? 양성학교는 개교 5년만인 1909년에 12개 학교, 18명의 교사, 179명의 학생이 공부하는 규모로 발전하면서 학교 이름도 ‘의명학교’로 변경됐다. 이때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 스미스 목사는 교장직에서 물러나고 제2대 교장에 러셀 목사가 부임했다. 이듬해인 1910년 경술국치 한일합방이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일반학교들이 폐교됐지만 의명학교만은 남았으며 그런 와중에 미국에서 안식교 선교사로서 이희만(Howard M. Lee) 목사가 러셀의 후임으로 부임하기 위해 입국했고 이듬해 1911년 4월부터 3대 교장에 이희만 선교사가 취임해 학교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는 이희만의 열정으로 발전을 거듭해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는 12개 학교, 286명의 재학생으로 발전했고, 1925년에는 31개 학교, 1081명으로 증가했다.
      
1926년부터는 학제를 보통과 6년, 고등과 5년으로 연장해 일본인 학교와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으나 1930년대 들어서 일제에 의한 ‘제2차 조선교육령’때문에 학교는 중대한 기로에 들어서게 됐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일제는 조선민족의 말살과 식민지 정책을 영구화하기 위해 폭압적 동화정책의 하나인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그 수단으로 미션스쿨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격적인 신사참배 강요는 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지사 야스다케(安武)에 의해 도내 공사립학교 교장들에게 내려진 지시에서 시작되었다.
    
이희만 교장이 이끄는 의명학교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36년 1월 17일 이희만, 우국화(E. J. Urquhart), 변손(H. F. Benson)과 정성걸 등 안식교 지도자 4인이 평안남도지사를 방문해 신사참배 수용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기독교 미션스쿨의 정체성에 치명적 위기를 맞았다. 신사참배가 시행되자 내부의 논쟁과 분열에 휩싸이던 의명학교는 결국 존폐위기에 놓이게 됐다. 아무리 자의가 아닌 일제의 강압에 의해 결정했다고 해도 신사참배 수용 결의는 학교 교직원들과 전국의 안식교 교인들과 목회자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또한 안식교 안팎의 도전과 비난을 받으며 진통을 겪다가 분열을 겪게 된 것이다.
      
결국 23년간 의명학교 교장직을 맡아 온 이희만 목사는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교장직을 사임하고, 1936년 12월 2일 조선 땅을 떠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대책으로 본부에서는 그의 후임으로 이성의 목사를 교장에 임명했으나 학교와 지방의 일부 관계자들의 반대로 교장에 취임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벤슨 목사를 교장에 취임시켰으나 그 역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이는 의명학교에서는 신사참배 수용 이후 목사들의 지도력과 권위가 크게 약화됐기 때문이다. 이런 내외적인 이유들로 인해 안식교는 의명학교를 순안 지역주민들에게 양도하기로 결정하고 의명학교 시대를 마무리 짓게 된다.
     
새로운 학교 운영자들은 학교 명칭을 ‘순안아카데미(Soonan Academy)’로 결정하고 순안지역의 새로운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출발을 했는데 의명학교가 지역사회에 넘어간 계기는 1937년 7월 초에 개최된 안식교의 ‘조선합회 평의원회’에서 당시 지역인사 이경일 선생에게 무상으로 양도하기로 결의하면서 시작됐다. 의명학교 운영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상황이 안식교 교육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안됐기 때문이었다. 의명학교가 양도될 당시 245명의 학생 중에 144명이 비기독교인이었는데 이처럼 비기독교인 학생비율이 절반을 넘으면 미션스쿨로서의 교육이 힘들게 된다. 아울러 고학력 출신의 교사들이 증가하면서 안식교 특유의 교육 방식에 대한 도전과 갈등도 큰 요인이 되었다. 또한 1936년 신사참배 결정 이후 더욱 강력해진 일제의 간섭과 황민화 교육정책은 안식교 재단의 의명학교에 큰 부담이 되었다.
     
마침 이런 상황에서 순안지역의 안식교 산하 병원과 학교 등이 서울로 이전하면서 지리적으로 외진 농촌지역에 있던 의명학교에 대해 소홀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안식교의 조선합회 지도자들은 의명학교 구성원들의 요구를 더 이상 물리치지 못하고 1937년 7월, 학교를 그곳의 교인들로 조직된 이사회에 무상 인계했고 9월 1일, 순안지역의 주체였던 이경일 교감이 교장에 취임함으로써 교단으로부터 독립된 지역학교로 변신했다.
     
한편 ‘순안 아카데미’로 새 출발 할 당시의 학생 수는 모두 373명, 교사는 21명이었으며 학교 규모와 교육 과정, 그리고 기타 모든 시설 면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중학교였다. 학교는 비록 안식교 교단으로부터 행정적으로 분리되었지만 이사회 이사들이 모두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삼육교육이념에 따른 기독교교육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38년 일제에 의해 개정된 ‘제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1943년에 학교 명칭이 ‘순안중학교’로 개칭됐다. 이때부터 더 이상 삼육교육이념을 구현하지 못하고 완전히 일반중학교로 탈바꿈하고 말았으며 이로서 순안지역은 명실상부한 중등교육 기관이 새로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순안중학교에 어떻게 현재의 평양순안공항이 들어서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 설립된 의명학교 주변에는 1911년 포정초등학교, 1927년 순안중견농민학교, 1939년 농민학교(공립학교)가 각각 설립되어 면단위 지역이지만 골고루 학교들이 들어섰다. 안식교로부터 탈피해 일반중학교가 된 순안중학교는 발전을 거듭하다가 40년대 후반 들어 군부대가 들어오는 것 때문에 인근 지역으로 이전하게 된다. 옮긴 주변에는 이미 순안소학교, 남양중학교 등이 이웃하고 있었다. 그후 순안중학교는 지역사회에서 사회주의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굳혀오다 2003년 10월 31일, 북 교육성에 의해 학교이름이 ‘영웅순안중학교’라는 이름으로 변경됐다. 일반중학교가 영웅중학교 호칭을 부여받는 경우에는 북 최고지도자나 국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하며 전국의 학교들 보다 모범을 보이거나 공로가 있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일이다.
    
한편 순안중학교가 있었던 자리에 들어선 군부대는 한국전쟁(조국해방전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혀온 UN군 장병들이 동원돼 군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해 이때부터 이곳이 공항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전후 복구작업이 마무리될 무렵인 1959년 2월 ‘순안비행장’이라는 이름으로 공항으로써의 업무가 최초로 시작됐는데 가장 먼저 평양과 모스크바 노선이 개설됐다. 그러다가 1898년 제13차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활주로를 대폭 확장하고 일부 개건공사를 해 사용하다가, 20011년 가을부터 제2청사 공사가 시작돼 2015년 7월 1일 준공식을 갖고 현재 국제규모의 최신 시설을 갖춘 공항으로 변모했다.
 

▲ 2015년 7월 1일 준공된 평양순안국제공항 제2 청사의 야경. [사진제공 - 최재영]

 

▲ 과거 순안공항 터에 세워졌던 순안 ‘의명학교’ 캠퍼스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의명학교 설립자이자 초대교장 스미스, 2대 교장 러셀, 3대 교장 이희만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상공에서 내려다본 서울 공릉동에 자리잡은 안식교 재단 사립대인 삼육대학교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안식교와 의명학교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수용한 내막
    
의명학교의 신사참배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적 정황을 비롯해 일반 개신교에서 있었던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움직임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만주사변 이후 조선인에 대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는데 조선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된 첫 번째 사례는 1932년 1월에 전남 광주지역 기독교계 학교에서 자행한 ‘황군기원제’로 출발해 3월 21일 평양의 ‘춘기황령제’, 9월 21일 평양의 ‘만주출정 전몰전사위령제’등의 관제행사에서 기독교 정체성을 훼손시키며 노골적인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 학교들은 교리상의 이유를 들어 정면으로 거부함에 따라서 신사참배 문제가 사회전면에 불거지며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5년 11월 14일 일본인으로서 평안남도의 도지사에 재직 중이던 ‘야스다케(安武)’가 도내 공사립학교 교장들을 소집해 노골적인 신사참배 지시가 내려지면서 사태는 본격화됐다. 야스다케는 공사립중등학교 교장회의 석상에서 각 교장들을 향해 교사와 학생들에 대한 평양신사 참배 지침을 하달했다. 이미 한 달 전에 서울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가 신사참배를 수용하며 굴복한 사례가 있었는데 여기에 힘을 받은 일제가 평남도지사를 통해 평양지역 기독교 학교들마저 굴복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서울지역 미션스쿨보다 더 보수적이며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평양지역을 굴복시키려는 총독부의 모략은 적중해 학교들은 갈등하며 들끓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도지사의 예상과는 달리 이날 참석한 평양숭실학교장 맥큔(윤산온, G. S. McCune) 목사와 숭의여중학교장(대리) 정익성 선생, 의명학교장 이희만 목사 등 3명의 지도자들은 기독교재단의 학교설립 취지와 성경 교리 상 신앙적으로 수용할 수 없음을 알리고 이에 불응했다. 평양지역의 대표적인 미션 계통의 학교장들에게 신사참배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보여주려는 일본의 의도가 빗나간 것이다. 그러나 회의를 마친 직후 도지사는 서면을 통해 “신사참배는 국민교육상의 요건이므로 금후 참배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단호한 제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해당 학교에 공문으로 전해왔고 이 통고문에 따라 각 교단과 학교들은 나름대로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숭실학교와 의명학교가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숭실학교 측은 평양신학교의 박형룡 박사,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 등 교단 신학자와 목회자들과 많은 협의를 거친 후 드디어 1936년 1월 18일, 교리적인 이유를 들어 도지사에게 신사참배 거부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 결과 일제 총독부에 의해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자중학교는 1937년 10월 29일, 강압적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그러나 안식교 재단의 의명학교는 장로교 재단의 숭실학교와 동일한 입장에 처했으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희만 교장은 도지사가 학교장을 소집해 신사참배를 요구하자 반대의사를 표명한 날로부터 사흘 뒤인 1935년 11월 17일, 도지사의 통첩을 받자 그해 12월 초순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원동지회(Far Eastern Division) 추기 평의원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논의 후 최후 결정을 하기로 결의했다. 다행히 야스다케 도지사는 “교단의 상부 지도자들과 논의한 후 내년 1월 중순에 다시 와서 최종 결정안을 통보해 달라”며 최종적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그러나 마닐라에서 열린 ‘원동지회’회의에 참석한 결과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답변만 듣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 돌아온 후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지도자들은 12월 하순 합회본부에서 평의원회를 개최해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대책을 구체적으로 강구하였는데 결국 이 회의에서 신사참배를 승인하는 것으로 최종 가결한 것이다. 평의원회의에서 신사참배 결정을 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의명학교측이 조선합회를 통해 마닐라에서 열리는 원동지회의 지도와 답변을 요청했으나 신통한 답변이 없자 신사참배에 대한 사안은 결국 안식교 최고의결기관인 ‘대총회’까지 올라가 논의됐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관해 사전 지식이 전혀 없던 대총회는 일본 측에 자문을 구하면서 일이 더 복잡하게 됐다.
    
대총회는 미국에서 일본으로 파송된 안식교의 미션 책임자인 필드목사를 비롯해 ‘안식교 일본합회’에 자문을 구했던 것이다. 일본합회는 자신들의 정부(일제) 방침과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한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에 해당한다”고 자문해주었다. 결국 의명학교는 이러한 대총회의 지도와 원동지회의 미지근한 결정, 이를 취합한 조선합회 지도자들의 최종 결정에 따라 마침내 1936년 1월 17일 신사참배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의명학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치욕적인 결론으로 모두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틀 후인 1936년 1월 19일자 매일신문 2단 1면에는 신사참배에 서약한 안식교와 의명학교에 대한 수치스런 기사가 보도됐다. 큰 사진에 선명하고 커다란 글씨의 제목으로 기사화됐는데 기술된 기사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소화 10년인 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 각종 사립학교 중학교장 회의 후 회의에 출석하였던 각 학교장들이 평양신사에 참배하려 할 때에 맥퀸 평양 숭실학교장과 숭의여자중학교장 오. 알. 스왈렌과 순안 의명학교장 이희만 3인이 참배를 거절한 바 있었다. 이로 인하여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가 불거져 수개 월 동안 평안도 당국과 학교 당국의 관계가 악화되던 때에 의명학교장 이희만 씨가 안식교조선연합회로부터 우국화 씨와 의명학교 벰손 씨와 정성걸 씨와 함께 17일 오전 11시 반에 평남도청에 안무지사를 방문하고 신사와 종교와는 전연 다른 것임을 깨달았다고 하여 국민교육상 필요하다고 신사참배를 수락한다는 전갈을 전하고 문서로 서약을 하여 안무지사(야스씨)로 하여금 만족케 하여 서로 악수하는 일이 생겨났다. 이때에 영문으로 된 서약서도 함께 제출하였다. 이로 인하여 평양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도 수일 내로 원만히 해결하게 되리라고 관측한다.”

의해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불응한 것이 분명한데 어처구니없이 교단 상부 지도부의 신사참배 수락 지침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그 결과 안식교(재림교회)가 평양지역 개신교계에서는 최초로 신사참배를 실행에 옮긴 교단으로 낙인이 찍혔고 그로 인해 기독교계와 교육계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안식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하는 과오를 남겼다.
   
신문기사에는 이희만, 우국화(E. J. Urquhart), 변손(H. F. Benson) 등 3인의 선교사와 더불어 정성걸이라는 인물이 눈에 띄는데 그는 3인의 외국인 선교사들과 동행해 도지사와 함께 기념사진 촬영까지 찍었다. 그가 동참한 이유는 안식교 조선합회가 신사참배를 수용하기로 결의했다는 통고문과 외국출신 선교사 일행들의 통역을 담당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정성걸의 동생 정원걸은 일본에서 안식교의 복음전파와 문서전도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시청으로부터 불온사상을 지닌 반체제 인물로 지명되어 감시를 받아 오던 중 혹독한 조사를 받거나 핍박을 당하는 동안에 형님 정성걸은 배교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두 형제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당시 우국화 목사는 당시 조선안식교연합회장(조선합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전에도 시조사 편집국장, 서선대회장 등으로 조선에서 폭 넓게 일한 미국인 목사이며, 벤슨 목사 역시 의명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이희만의 후임으로 잠시 교장에 취임했던 인물이다. 이처럼 이희만 교장은 대총회와 원동지회 그리고 조선합회의 지침과 결정을 받들고 자국인 동료선교사들과 합심해 이런 과오를 실행에 옮긴 주범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다.
 

▲ 23년간 의명학교 교장을 지낸 이희만(Howard M. Lee) 선교사가 신사참배 수용에 대한 책임을 지고 조선을 떠나기 전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맨 뒷줄 한가운데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이가 바로 조선에 부임한 젊은 시절의 이희만 교장. [사진제공 - 최재영]

 

▲ 조선합회장의 직책으로 이희만 교장과 함께 평남도지사를 찾아가 신사참배 수용결의를 통보했던 우국화(E. J. Urquhart) 목사. [사진제공 - 최재영]


‘의명학교’의 신사참배 결의 후 개신교단들의 잇따른 수용
    
한편 숭실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숭실학교가 소속된 미국 북장로선교회 측에서는 두 가지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1935년 12월 13일 밤, 숭실학교장 맥큔(G. S. McCune)을 중심으로 북장로교 선교회 실행위원회 위원장 허대전(J.Cordon Holdcroft), 소열도(T.S. Solau), 노해리(H. A. Rhodes)는 맥큔(윤산온) 집에 모여 심야까지 심의한 후 마침내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과감하게 결정했다. 윤산온은 “신사의 제식에 있어서 종교적인 여러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또한 신사에서 신들을 경배하고 있는 사실이 확실하므로 기독교 신자인 나로서는 신앙 양심상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간 장문의 답신을 평안남도 지사에게 보냈다.
   
하지만 언더우드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진영은 신사참배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순응하더라도 미션스쿨을 유지하는 것이 조선교회 미래를 위해 더 바람직한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렇게 두 진영으로 나뉘어져 신사참배와 교회학교 운영 문제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하던 조선의 북장로선교회는 뉴욕선교부와의 논의 끝에 1936년 7월 1일에 학교를 폐교하고 철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한편 일제는 안식교 교단지도자들과 의명학교 관계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압력을 가했길래 신사참배를 수용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알아보자. 당시 안식교 관계자에 의하면 “일제는 수다한 정사복 경찰들이 일일이 회의에 참석해 감시했고 평의원 각자 한 사람에 대한 사전 방문을 통해 반대의견을 내놓지 못하도록 위협해 놓았다”고 증언했다. 그동안 숭실학교 맥큔 교장 사택에서 벌어진 심야토론 후에 신사참배 거부 결정을 내린 사실을 묵과했던 일제는 안식교에 대해서는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확인된 것이다. 일제는 이 무렵부터 강력한 정책과 조직적 개입으로 개신교 교단과 미션스쿨을 집중 공략했는데 의명학교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인 후 연이어 감리교, 성결교, 장로교, 성공회, 가톨릭 등도 교단적 차원에서 잇따라 신사참배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한편 북장로선교회 측과 숭실학교장 맥큔의 신사참배 거부 결정에도 불구하고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9월 9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수용을 만장일치로 가결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이에 앞서 일제는 장로교의 신사참배 수용을 관철하기 위해 우선 평북노회를 강제로 설득해 1938년 2월에 이 노회가 신사참배 수용을 결정하도록 유도한 후 총회 전까지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총회 당일 강압적 수단이 동원된 긴급절차에 의해 만장일치로 신사참배 수용을 가결하도록 이끌었다. 이때 결정된 장로교의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이름으로 가결된 내용이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독선여향하고 추후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통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함.”

그리고 이날 참석한 총대(각 교회에서 총회 회원으로 파견된 목사와 장로들)들은 총회가 끝난 후 남산에 올라가서 신사참배를 하였다. 이처럼 안식교와 의명학교를 비롯해 개신교단의 신사참배 수용은 자의가 아닌 일제의 강압과 회유공작에 의해 결정된 만큼 의명학교 구성원들은 물론 전국의 재림교인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 주었다.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은 신앙적인 이유로 신사참배 자체를 용납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괴로워했고 교단지도자들의 결정을 무효화하는 반발움직임도 있었다.
 

▲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수용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총회장 홍택기 목사와 김길창 목사 등 지도부 일행들이 총회가 끝난 후 남산에 올라가서 신사참배를 하는 장면(사진출처: 조선일보 1938년 9월 10일자 보도).

 

▲ 남산신궁에 모여 신사참배 의식에 참석하는 수천 명의 평양지역 학생들. [사진제공 - 최재영]


신사참배를 인정하는 용기와 정직함이 필요하다
    
안식교는 보수적인 교리와 근본주의적인 신학 그리고 철저한 교단 신조(信條) 등을 볼 때 결코 신사참배를 허용하거나 수용 할 교파가 아니다. 그러나 의명학교는 1936년 1월 17일 마침내 신사참배를 수용하면서 평양지역의 미션 스쿨 중에서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기는 학교와 교단이 되고 말았다. 독립협회 회원으로써 초기 안식교의 기초를 닦은 임기반을 비롯한 안식교 출신 선각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은 결코 신사참배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교직자와 교인들도 정서상으로 신사참배를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안식교 재림복음을 최초로 받아들인 평안도 지방의 교인들은 일제 강점기에서는 교회와 신앙보다도 일제에 의해 고통 받는 조국의 독립을 가장 먼저 염원하며 자신들을 희생한 사람들이 많았다. 여타 개신교 교단처럼 안식교 신자들 중에는 개인적으로는 교회활동을 중지당한 채로, 교역자들은 목회활동을 중지 당한 채로 독립 운동에 뛰어든 항일인물들이 다수 존재하는 교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안식교는 과거 신사참배에 대한 과오를 은폐하거나 다른 개신교단들과 비교하며 합리화하는 모습들을 간혹 볼 수 있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관철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회유와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혹은 “신사참배를 앞장서서 추진한 이희만 교장은 미국 선교사라서 당시 조선인의 정서를 잘 파악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다”라는 주장이나 “이희만 교장은 신사참배를 종교가 아닌 단순한 국가의식의 대상만으로 여겼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평양지역의 다른 미션스쿨 지도자들과 의명학교 지도자들이 동일한 상황에서 선택의 기로에 있었고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결국 다른 미션학교들은 학교를 폐쇄하면서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해 끝까지 신앙의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여기에 대해서 의명학교와 안식교 교단에서는 어떤 변명의 여지는 있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안식교의 신사참배문제가 어디까지나 최고의결기관인 ‘대총회’에서 내린 결론이었고 더 나아가 전 세계 안식교 조직을 오대양 육대주로 구분한 아시아지역의 의결기관인 ‘원동지회’가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의 자율적 의사에 맡겨 결정하도록 지침을 주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다.
     
또한 “의명학교장 이희만 목사는 이氏 성(性)을 가진 조선인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조선인이 아닌 미국 사우스 랭캐스터 아카데미 교수 출신의 미국인이라서 조선인의 정서가 부족했다”라는 항변도 별 설득력이 없다. 그는 23년간 조선에서 근무하며 오히려 일제치하에서 고통 받는 조선 민족의 정서와 아픔을 이해하는 데 다른 외국선교사들 보다 더 정확한 판단력과 통찰력을 지닌 교육가이자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이희만은 단순히 안식교 재단에서 세운 학교의 책임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당시 조선의 안식교 교회 전체를 상징하는 실무자로 볼 수 있는 위치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에 대한 책임이 표면적으로는 이희만 교장과 그리고 동행한 우국화, 변손, 정성걸 등에게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원동지회’지도자들과 관계자들의 무력함, ‘대총회’지도자들의 사려 깊지 않은 판단과 무지함, 그리고 ‘조선합회’의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의 안일하고 단순한 역사의식등이 결합되어 빚어진 총체적 불의가 그 원인이었으며 외국 지도부들의 비신앙적인 선교관이 그 한 몫을 했다. 선교의 목적만을 성취하고자 무리한 정책을 추진해오던 선교부 지도자들의 무모한 결정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으며 결국 신사참배 수용은 이득보다는 많은 손실을 보게 됐다. 
   
일제 강점기에서는 기독교는 물론 천주교와 불교 등 종교계 전반에 걸쳐 신사참배를 시행했기 때문에 어느 특정 교파를 대상으로 지적하는 것은 도긴개긴으로 볼 수도 있다. 순서와 시기는 다르지만 모두 다 신사참배에 참여했기에 “가장 먼저 수용했다”라는 말은 사실 큰 의미도 없으며 꺼낼 필요도 없다. 시대적 정황을 볼 때 신사참배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식교(재림교회)를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안식교는 신사참배 사건 외에도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경술국치로 불리는 1910년 당시 합일합방을 기념하는 행사들을 안식교 교회들이 앞장서 개최한 일도 있었으며 안식교에서 발행하는 ‘교회지남’잡지를 통해 당시 편집자들과 책임자들이 황국신민 발언과 함께 일제에 충성을 하라는 글을 여러차례 기고하기도 했다. 기고자들과 편집자들은 외국 선교사들이 아니라 조선의 안식교 지도자들의 말과 글에서 친일을 주장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안식교의 신자들과 목회자들
    
신사참배가 결의되자 오히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장로교에서는 평양의 주기철, 주남선 목사를 중심으로, 신의주에서는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경남지방에서는 한상동, 손양원, 이인재, 손명복을 중심으로, 만주에서는 한부선 선교사를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일제의 탄압에 의해 개신교 200여교회가 문을 닫고 2000여 신자가 투옥되었으며 약 50명의 목회자들이 순교를 당한 것으로 통계가 나왔다.
    
이 시기에 일반 개신교 교회는 물론 안식교 교단도 두 가지 상반된 행동 양태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편승해서 저지른 친일행각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민족정신과 순수 신앙을 지키기 위한 항일행적이다. 대다수의 개신교 지도급 인사들과 제도적 교회들, 기독교 기관들은 친일행각을 보여준 반면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몇몇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신사참배 거부운동이나 항일운동 등 저항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신사참배를 결행한 안식교에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이나 신사참배에 불응해 고초를 겪거나 순교를 감당한 목회자들도 소수 존재했다. 안식교의 배경수 목사나 이응현, 손흥조 등을 비롯해 이명준 전도사, 강태봉 전도사는 신사참배에 불응했을 뿐 아니라 항일 투혼을 발휘한 목회자들이며 비록 국가기관의 공적인 검증과 교회로부터 순교자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혀 있으나 언젠가는 올바른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또한 신앙과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경의 체포 고문으로 감옥에서 순교한 최태현 목사가 있으며 평신도로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최경선 선생이 있다. 대표적으로 최태현 목사와 최경선 선생 2인의 항일 행적을 마지막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 국가보훈처 기록에 의하면 안식교 신자 최경선(1898년생)은 3.1만세운동의 여파를 몰아 1919년 3월 2일,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소재 안식교회당에서 500명의 시위대를 인솔해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재차 시위운동을 계획했지만, 일제의 감시로 여의치 않자 같은 해 6월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평안남도 청년층들 위주로 조직된 일종의 별동대로써 단원을 200명으로 한정하고 임시정부 교통국과 긴밀한 연락 관계를 유지하며 국내 연락망과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또한 최 선생은 군자금 모집에도 노력하였는데 대한독립청년단의 기관지 ‘청년혈(靑年血)’을 발행하였고 1919년 8월 임시정부의 ‘애국금수합위원(愛國金收合委員)’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의 지시로 국내로 들어와 황해도, 평양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20년경 일경에 붙잡혀 10개월여의 옥고를 치루는 등 여러 가지 독립운동의 근거가 인정돼 정부는 2007년도에 그의 공훈을 기려 국가보훈처를 통해 ‘국민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최경선의 부친은 평양 ‘칠골안식일교회’를 설립한 주역 중에 한 명이며 가족 모두가 독실한 안식교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최경선은 한국전쟁을 겪는 도중 1.4후퇴 때 부인과 자녀들 절반을 남기고 월남했다고 한다. 아들 한 명과 딸 두 명만을 데리고 월남한 그는 자녀들 뒷바라지로 평생 고생을 하면서도 끝내 부인을 잊지 못한 채 독신으로 지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큰 딸은 안식교 신앙생활을 하다 중풍으로 쓰려져 자신의 선친이 독립유공자로서 추서가 된 기쁨을 전달받지 못하고 운명했으며 아직도 생존해 있는 나머지 딸은 안식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다. 또한 최경선의 장남은 의명학교 전신인 2년제 ‘양성학교’를 졸업했으나 세상에 빠져 술로 탕진하다가 부친 보다 먼저 운명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이번에는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일제의 요구에 불응해 고문당하는 도중 감옥에서 순교한 최태현 목사(1888년 11월 4일)의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며 조선의 정세도 급변하게 되어 조선에서 근무하던 외국선교사들도 대총회의 지시로 철수하는 상황이 됐다. 당시 합회장이었던 미국인 원륜상 목사는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자 1941년 2월, 회의를 열어 최태현 목사를 합회장으로 선출했는데 최 목사의 선출은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합회장에 선임되는 기록이다. 그동안 조선합회는 대총회의 지원자금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지원금이 끊겨 최 목사는 어려운 살림살이로 합회와 선교사업을 이끌어 나가야만 했다. 
   
그 후 최 목사는 합회장의 직무상 여러 교회를 탐방하는 과정에서 일경과의 접촉과 교제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때문에 전격 사임 하고 그의 후임으로 이선의 목사가 선임됐다. 이런 와중에 1943년에 접어들어 신임 합회장으로 오영섭 목사가 피선되고 최태현 목사는 한국연합회 고문으로 추대 되었다. 1개월 동안 신구 회장간의 업무 인수인계를 하는 도중이던 1943년 2월 4일, 갑자기 종로 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들이닥쳐 합회 지도자 여섯 명을 구속한 것이다. 제 13회 조선합회가 끝난 지 불과 3주 후의 일이었으며 이날 체포된 목사들은 최 목사를 비롯해 오영섭, 김상철, 박창옥, 김예준, 이성의 등 6인이다.
   
이들이 체포된 것은 내막은 어처구니없게도 안식교 내부에 있던 신자 김덕기(金㥁基)를 비롯해 고희경(高喜京), 정모(鄭模), 강진하(康鎭夏), 李모씨, 金모씨 등 모두 여섯 명의 밀고자들이 일경에 신고해 발생한 사건이다. 이들 6인은 훗날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에 이 밀고죄로 체포되어 회부돼 1949년 8월 재판을 받기까지 했다. 이들의 밀고로 결국 두 명의 아까운 목사들이 숨졌다.
   
한편 이들 안식교 지도자들이 구속된 이유는 신사참배와 관련해 명목상으로는 “천황 폐하 대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었으며 진짜 구속한 목적은 안식교 지도부를 구속해 교회들을 자발적으로 해산하게 한 다음 교회들을 무력하게 만들어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위함이었다. 일경들은 최 목사와 나머지 구속된 목사들에게 미국 스파이 혐의와 안식일 교리문제 그리고 신사참배 문제 등에 관해 취조하며 무자비하게 고문하였다. 특히 취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최 목사에 대해서는 더욱 잔악한 고문을 가했는데 1주일에 걸친  극심한 고문 때문에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6월 2일 아침, 최 목사는 고문에 의해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져 급히 경성요양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치료를 실행하였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저녁 8시경 숨지고 말았다.
   
한편 안식교 조선합회는 신구 합회장을 포함해 6명의 지도부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구속되자 즉시 합회장 대행위원 3인을 세웠는데 이들 대행위원들은 선교사업을 지속하면서 구금된 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제는 오히려 구속된 6인을 ‘전시보안법’위반으로 몰아 붙였으며 안식교(재림교회)를 ‘적성기관(敵性機關)’으로 처리해 교회재산까지 몰수하려 했고 최태현목사를 고문으로 살해했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 최태현 목사가 순교한지 반년이 지난 1943년 12월 27일, 일제는 1년 가까이 구금돼 극도로 지친 나머지 5인의 지도급 목사들과 3인의 대행위원들을 경성요양병원에 소집해 교단 해산성명서에 서명 날인하도록 강요했으며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일경의 요구에 순응해 다음날인 28일 교회해산 성명서를 발표하고 각 교회에 공문을 발송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최태현 목사는 원래 침례교 출신으로서 침례교신학교에서 신학을 마친 후 함경남도 안변에서 침례교 전도사로 봉직하던 중 1910년 원산에서 안식교 전도회를 통해 안식교를 받아들이며 개종한 인물이다. 그 후 황해도와 평안남도에서 안식교 전도사로 봉직하다 중국 북간도(연변)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그 후 안식교의 중진 목회자가 되어 중한대회장을 역임하고 순안 의명중학교에서 성경교사로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또한 서선(평안남북도 지역)과 서한(황해도 지역)대회장으로 봉직 후 조선연합회장을 지내다가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6월 2일, 55세로 숨진 것이다. 한국 정부는 국가보훈처를 통해 최태현 목사의 항일행적과 독립운동 업적이 인정돼 ‘건국훈장 애국장(원본과 메달)’을 수여했다.       
    
그런데 안식교에서 순교자로 존경받는 최태현(崔泰鉉) 목사에 대해 현재 인터넷 상이나 세간에서 간혹 친일논란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두 명의 다른 최태현(崔台鉉, 崔泰顯)과 동명이인이라서 생긴 오해에서 발생한 해프닝이다. 최태현(崔台鉉)은 일제시기 경기도 안성군수, 여주군수,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지냈고 황해도 봉산군수, 평산군수와 황해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 평산군교육회 회장을 지내는 동안 친일행각으로 한국병합기념장,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장,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장, 훈6등 서보장을 수여받은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또 다른 최태현(崔泰顯)은 일제시기 함경남도 원산경찰서 경부, 안변경찰서 경부, 북청경찰서 경부, 혜산진경찰서 경부, 함경남도 경찰부 경무과(경시), 함경남도 경찰부 순사교습소 소장을 지내는 동안 친일부역 혐의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친일파이다.
    
최태현 목사는 이안나 사모와의 슬하에 장남 최옥만, 차남 최승만, 막내아들 최희만 등을 두었으며 장녀 최옥선과 4녀 최옥화 등 자녀들 모두가 미국에 거주해왔다. 그러다 안식교 신자였던 장녀 최옥선 집사는 2011년 6월 21일에 미국 조지아주 달톤 시에서 향년 98세로 소천했고 2년 후에는 로즈미드 안식교회를 출석했던 막내아들 최희만 장로가 2013년 2월 23일(월) 새벽에 향년 84세로 소천했다. 최 장로는 안식교의 ‘남가주연합전도회’회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그 결과로 70명에게 합동침례를 베푸는 성과를 내는 등 미주지역 한인 안식교계의 원로로서 목회협력과 선교사역, 방송사업에 공헌을 해왔고 북한 의료지원사업 등에 큰 공헌을 했던 인물이다. (계속)
 

▲ 옥중에서 일경의 고문으로 순교한 안식교의 최태현 목사. [사진제공 - 최재영]

 

▲ 고문으로 순교한 안식교의 최태현 목사의 막내아들 최희만 장로. 미주 안식교 발전에 공헌했으며 왕성한 대북사역 활동 중 최근 타계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최태현 목사와 함께 체포 구금됐던 5인의 안식교의 지도자들. 좌부터 박창욱, 이성의, 김예준, 오영섭, 김상철 목사.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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