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보도연맹원을 비국민으로 인식한 이승만 정부

전쟁 초기 군‧경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신속히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을 소집‧연행․구금했다. 이들은 전쟁 이전부터 경찰이 관리하던 요시찰인으로서 좌익활동 혹은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인물로 분류되어 명부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보도하여 온전한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전했지만 보련원들은 여전히 의심받던 경찰의 주요 관리대상이었다. 정부는 공개적인 자수, 전향 의식을 요구하고 보도연맹에 가입시켰으면서도 보도연맹원을 ‘국민’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 아르메니아 대학살 희생자를 기념하는 추모탑.

각 지역 경찰서 사찰계는 전쟁 전부터 보도연맹원을 ‘요시찰인’으로 분류해 감시하고 통제했다. 정부로부터 통제와 감시를 일상적으로 받았던 보도연맹원은 자신들의 신원에 대해 불안해했다. 일제강점기 비슷한 조직과 예비검속을 경험한 보도연맹원 중에는 조직 가입 당시부터 정부가 유사시에 보도연맹원들을 ‘처리’할 것으로 예감한 사람도 있었다.(주1) 정부 또한 전쟁이 발생하면 이들이 북한 편에 설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었다. 충북 영동경찰서 보안계에 근무했던 참고인 김아무개는 “전쟁이 발발하자 전향이 덜된 사람들이 공산당을 지원한다며 정부에서 사살한 것이다”고 증언했다.(주2)

정부는 언제든지 보도연맹원을 ‘조치’할 수 있도록 경찰을 통해 일상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했다. 경찰의 요시찰인 관리는 그들을 사실상 잠재적인 적으로 분류했다는 이야기다. 전쟁 발발 직후 치안국이 곧바로 ‘불순분자 구속’처리 명령을 내리고 군‧경이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을 신속하게 소집‧연행‧구금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 남한 사회에서 보련원 등 좌익 출신이나 공산주의자는 사회적 배제와 정치적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사상적 차원의 반대를 넘어서 좌익 전체에 대한 광범위한 통제와 가혹한 탄압이 계속됐다. 여순사건 처리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좌익 가담자에 대해서는 어린아이와 여학생을 불문하고 검거하라고 했다. 그는 사건 발생 이후 ‘여학생들과 남녀 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고 지시했다.(주3)

▲ 충북 청원군 만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위치한 보도연맹사건 학살지 유해발굴 현장(진실화해위원회)

이승만 정부는 좌익을 척결하는 데 앞장선 사람을 사면하거나 금전적 포상까지 내리는 등 극단적인 반공정책을 폈다. 이승만 대통령은 좌익관련자를 살해한 죄로 미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김두환을 특사로 풀어주었다.(주4) 선우종원 검사에게는 “공산당을 많이 잡았다고 경무대로 불러 포상금으로 30만원을”내리기도 했다.(주5) 전쟁 당시 남부지구경비사령부에서는 빨치산 한 사람을 생포하거나 사살하면 훈장을 주었고, 경찰관으로 구성된 서남지구 전투경찰대사령부에서는 10만환의 현금 상금을 주었다.(주6)

이처럼 전쟁 이전부터 남한사회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는 정치적 적대세력이면서 심각한 사회적 차별대상이 되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요구해서 들어주지 않으면 빨갱이, 사감(私憾)이 있으면 빨갱이, 같이 사업하다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다른 쪽을 빨갱이, 정치노선이 달라도 빨갱이라고 몰아대어 사람들이 언제 어떤 모략에 걸릴지 안심하고 지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고 개탄했다.(주7) 좌익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은 이념적인 문제를 넘어서 일상적인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정치적‧사회적 반대자에 대해 ‘좌익’이라는 한마디는 상대방을 매장시킬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무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남한 사회에서는 정치적 반대자를 ‘공산주의자’또는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극단적인 행태가 널리 확산되었으며, 공산주의, 좌익 관련자는 국민이 아닌 것(비국민)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와 왜곡된 인식은 좌익사건을 처리하는 군‧경의 인명 살상 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근거로까지 발전했다. 전쟁 이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조장된 좌익에 대한 정치적 증오와 그들에 대한 사회적 배척은 전쟁 때 대량학살을 낳은 바탕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도 피해사실을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 없었다.(주8)

그러나 북한 또한 보도연맹원에 대해서 변절자 또는 사상적으로 의심받은 존재로 취급했다. 남한을 점령했을 때 북한은 보도연맹을 ‘반동단체’로 분류했고, 보도연맹원들을 반동단체 가입자로 규정하여 의용군에 강제징집하거나 자위대에 동원했다. 북한은 1950년 7월 6일 로동당 결정인 ‘의용군 초모사업에 대하여’에서 노동당원으로서 변절자(보도연맹 가입자)를 의무적으로 징집하게 했다.(주9)

▲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실시한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일대 유해 발굴에서는 유해 약 100여구가 출토되었다. 사진은 문산읍 상문리 웃법륜골에서 출토된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 유해 50여구이다. 발굴지에서는 희생자의 고무신과 버클 등 개인소지품들이 발굴되었는데, 이들은 단순히 형무소 재소자가 아니라 민간인이 연행되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충남일대를 점령했을 때, 충남도당 선전부책이었던 김남식은 의용군 소집사업 책임을 맡았다. 충남에서만 2만 3천여 명의 의용군을 뽑았는데, 이들 의용군 중에서 보도연맹원이 가장 많았다. 그는 “보도연맹원들은 ‘변절한 죄를 피로 씻으라’고 해서 우선적으로 모조리 뽑았”다고 증언했다.(주10)

북한은 점령지역에서 전향한 보도연맹원들에게 책임 있는 부서의 일은 주지 않았다. 열성적으로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협력‧보조하는 정도의 부차적인 일을 시켰을 뿐이다.(주11) 보련원은 신입당원 모집에서 세포회의를 통과하지 못해 노동당에 입당도 하지 못했다.(주12) 이처럼 보도연맹원은 남북한 정권으로부터 동시에 감시와 통제를 당하는 처지에 있었다.

전황 악화와 패닉 상태, 그리고 ‘예방적’집단학살

군‧경의 보도연맹원 학살은 전황에 따라 지역 상황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었다. 보도연맹원 뿐만 아니라 좌익관련자와 형무소 재소자, 요시찰인 등이 광범위한 사람들이 집단학살 대상에 포함되었다. 남한 정부의 ‘사상범’예비검속과 학살은 겉으로 드러난 양상만 보면 일제말기 조선인 사상범‧정치범 처리 방침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주13) 다만 일제는 갑작스런 패망과 항복으로 이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지만, 남한정부는 정부 수립 이후 좌익 관련자들을 수시로 예비검속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전쟁이 발발하자 전면적인 연행 후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학살을 실행했다.

▲ 오스만제국(터키)의 아르메니아 대학살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들. 터키는 아직도 대학살을 부인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왜 이 같은 야만적인 학살 행위를 저질렀을까? 군과 경찰은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8일을 전후하여 요시찰인 중에서 중요 좌익관련자나 보도연맹원 간부급 등을 소집‧연행‧구금했다가 7월 초순경 그들을 모두 학살하고 후퇴했다. 이후 전세가 계속 불리해지면서 충청이남 거의 모든 지역에서 군‧경은 이들을 학살했다. 군과 경찰, 그리고 이승만 정부가 처음부터 이들에 대한 전면적인 학살 계획이 있었던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경찰 사찰계 출신 중에서 인민군이 서울 인근 지역을 점령하자 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그것이 한강 이남지역에서 군‧경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 등을 학살한 이유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들이 인민군에 협력할 것을 우려하여 ‘예방적 차원’에서 총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주14)

그렇다면 어떤 주장이 더 타당성이 있을까? 일부 사람들의 주장처럼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울 인근 지역에서 보도연맹원 등이 의용군에 자원하거나 인민위원회에 가담하는 등 북한 당국에 협력한 사실은 있지만, 전쟁 발발 후 2, 3일 사이에 서울과 경기북부지역에서 보도연맹원들이 조직적 행동을 한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인천에서는 경찰이 수원으로 후퇴하자 숨어있던 좌익들이 거리로 나와 인천시청에 인공기를 게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들어온 경찰에 의해 1950년 7월 4일 월미도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그러니까 인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요시찰인들이나 지하에 숨어있던 좌익세력이 인민군 진공 소식을 듣고서 인공기를 게양하는 등 인민군에 대한 환영 준비를 하고 그들의 점령을 보조한 일은 있었지만, 한국 정부를 향해 무장 반란을 일으킨 일은 전혀 없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보도연맹원들은 사상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무장봉기를 일으키거나 이승만 정부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정부가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한 6월 28일 이후 경기, 강원 등 여러 지역에서 일부 보도연맹원들은 인민군에게 협조하는 행위를 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부에 근무했던 강영환은 28일 인민군에게 포위된 걸 알고 한강을 건너 서울을 철수할 즈음에 보도연맹원이 활동하는 것을 목격했다.(주15)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한 주영복은 인민군이 강원도 횡성 인근의 창봉리에 지휘부를 두었을 때, 정치보위부 막사에 보도연맹원이 드나들면서 협조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주16) 또 일부지역에서 보도연맹원들은 인민군을 환영하기도 했다. 충남 예산에서 예비검속된 사람들은 1차로 석방되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예산읍 쌍소무배기 하천에서 ‘인민군 환영’이라는 대자보를 붙이다 잡혀서 경찰에 사살되기도 했다.(주17)

▲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이도영 박사가 찾아낸 관련 자료 속에 들어 있던 사진 중 하나다.

미군자료에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협조하고 있다는 정보보고가 있다. ‘맥도널드 보고서’는 “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앞장서고 있다”며, 보도연맹이 6월 28일 오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재소자와 서울시내 좌익세력을 모아 인민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보고했다. 보고서에서는 전 사회부장관 비서 임태정이 “한국정부가 보도연맹을 조직한 것은 실수였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했다.(주18) ‘핸더슨 보고서’는 “보도연맹이 서울에서 인민재판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기록했다.(주19)

미24사단 441방첩대 1950년 7월 16일 전투일지 및 활동보고서(주20)에는 “보도연맹원들이 여전히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으며 은밀히 공산당 활동을 한다”라고 되어 있다.(주21) 또한 북한군 점령시 서울 상황을 보고한 미국무부 자료에 따르면, ‘국민보도연맹’출신 자원자로 구성된 경찰은 거리를 순시하는 대신 초소나 경찰서에 들어 앉아 있으며 비교적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했다.(주22) 이처럼 인민군이 점령한 남한 내 여러 지역에서 보도연맹원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에게 협력했다.

하지만 이 같은 미군 보고와는 다르게 서울수복 이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지휘부 검사였던 오제도는 ‘보련이나 서대문형무소에 있다 나온 좌익범들은 7월초부터 공산 측에게 배척받았’으며, ‘이런 사람들이 낙오된 군‧경이나 그 가족을 숨겨준 일이 많았다’고 반대되는 증언도 했다.(주23) 일부 보도연맹원들은 오히려 남한 정부에 충성을 다하려 했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후방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이 중심이 되어 전쟁을 독려하기도 했다. 7월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는 많은 보도연맹원이 국군 위문금과 금품을 자진해 거출했고, 남한 정부에 재차 충성을 맹세하면서 군 자원입대를 혈서로 쓰기도 했다.(주24)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각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한강이남 지역에서 보도연맹원 등 좌익들이 어떠한 소요나 무장폭동 등과 같은 집단적인 행위를 일으키지는 않았다.(주25)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28일 이후부터 군‧경이 급히 후퇴한 경기이남과 충청북부지역에서는 검속 후 곧바로 학살되었다. 보도연맹원 중 간부급은 거의 대부분 전쟁 직후부터 7월 초‧중순경까지 검속되어 학살되었다. 당시 후방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었던 경북 남부와 경남 내륙지역, 그리고 부산에서는 7월 초순부터 9월까지 보련원들이 어떠한 반란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차에 걸쳐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다.(주26)

따라서 38도선 바로 이남과 서울 인근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게 협력했거나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들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하고 타당성이 별로 없다. 전쟁 발발 이후 군‧경이 후퇴하자 인천 등 일부 지역에서 이들이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후퇴하지 않은 한국정부를 위협하는 어떠한 집단행동이나 무장저항을 한 증거는 전혀 없다. 서울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정부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보도연맹원들은 검찰과 경찰, 군의 지휘에 순응하며 따랐다.

따라서 보도연맹원들을 일사분란하게 소집‧연행‧구금한 후 극히 형식적인 심사와 분류 절차를 거쳐서 집단학살을 감행한 것은 이들의 ‘구체적인 행위’때문이 아니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전쟁 발발 초기 급격히 후퇴해야 했던 전쟁 상황과 함께 이들이 이미 전쟁 이전부터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감시와 통제를 받아온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예방적 차원’에서 학살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승만 정부가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는 보도연맹원 등 남한의 좌익세력들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이다.(주27)

▲ 극동 국제군사재판(일명 ‘도쿄전범재판’) 모습(1948년)

특히 북한 인민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울산과 김해 등, 대구이남 지역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소집‧연행‧구금‧학살이 이뤄졌다. 이것은 단지 전쟁이라는 극히 예외적인 긴급 상황의 발생이나 보도연맹원의 반란 행동이라는 특별한 조건에 의해서 이들이 구금‧학살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러니까 이미 보도연맹원들이 전국적으로 구금된 상태에서 전황이 더욱 불리해지자 ‘공황(panic)’상태에 빠진 이승만 정부가 장차 남한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들을 집단학살했던 것이다. 결국 정부가 보도연맹원에 대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사상적 의심이 전황 악화와 함께 이들을 전면적으로 학살하는 ‘예방적 조치’로 발전했던 것이다.(주28)

‘전형적인 국가폭력’이자 ‘정치적 집단학살’

보도연맹원 집단학살의 도구가 된 예비검속과 예비구금은 법적 근거가 없는 조치였다. 하지만 전쟁 이전부터 사상범을 미리 검거하여 구속하는 강제연행과 구금이 관행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러한 강제연행과 구금의 전체 과정을 흔히 ‘예비검속’이라고 하는데, 이는 “범죄 방지의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것”을 말했다.(주29)

이는 일제 식민지 유산이었다. 일제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시체제를 구축하면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을 시행했다.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형 집행을 종료하여 석방된 후 동법의 죄를 범할 우려가 현저하거나, 집행유예 언도를 받은 자가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에 의하여 보호관찰을 하여도 죄를 범할 위험이 현저할 때 검사의 청구에 의해 재판소가 해당자를 예방구금에 부치는 제도였다.(주30)

▲ 일본군에 의한 난징 대학살(1937년) 현장

미군정기나 정부 수립 후에 경찰에서 검거, 구금 또는 구속을 의미하는 뜻에서 ‘검속’이라는 개념은 사용했으나, ‘예비검속’은 공식적으로 시행되지 않는 제도였다. ‘예비검속’은 법적으로는 불법이었지만 군이나 경찰 내부에서는 관행적으로 남아있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좌익 관련자들은 수시로 검속되었다.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윤치영 내무부장관은 경찰이 인권을 유린한다고 말하지만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라며 예비검속을 명문화한 ‘공산당취체법’을 제정해서 경찰이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주31) 또한 제주에서도 4‧3사건 여파로 10월부터 대대적인 예비검속이 시행되었다.(주32)

이처럼 해방 후에도 일제 유산인 ‘예비검속’(실제로는 ‘예방구금’)이 경찰에 의해 일상적으로 남용되고 있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형의 집행 또는 그 유예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예방구금’이 정확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민보도연맹원의 소집‧연행‧구금이 ‘예방구금’제도와 연결되어 시행된 것도 아니었다. 과거 좌익 전력이나 사상과 무관한 주민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도 인민군에 협조할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어 소집‧연행‧구금되었기 때문이다.(주33) 이처럼 그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불법적으로 이뤄진 이른바 ‘예비검속’은 결국 대량학살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은 법적으로 어떤 문제를 안고 있을까? 국민보도연맹 사건 가해행위가 1948년에 체결된 ‘유엔 제노사이드협약’의 ‘집단학살죄(genocide)’에 해당되는지 여부는 논란거리이지만 다수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유엔협약의 ‘제노사이드라’는 특정범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주34) 여기서는 이 같은 입장을 받아들여 ‘집단학살’이라고 표현할 때, 유엔협약에서 말하는 ‘genocide’라는 특정범죄를 가리키는 법률용어가 아닌, ‘집단적으로 사람들을 학살한 행위’를 의미하는 일반적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제노사이드 국가범죄가 아니라고 해서 범죄행위가 아닌 것은 아니다. 국가의 핵심무력기관인 군대와 경찰이 과거 좌익활동 경력이 있거나 반정부 활동을 한 경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무장 민간인인 보도연맹원 등 검속자를 법적 근거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사살한 행위는 헌법상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재판을 받을 권리(제헌헌법 제22조)를 침해한 범죄행위인 것이다.

▲ 캄보디아 킬링필드 책임자에 대한 국제재판 광경(ⓒ로이터=뉴시스)

당시 좌익활동 관련자 또는 혐의자를 간첩죄나 이적죄로 처벌하도록 규정했던 법으로는 (구)형법,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등이 있었다. 국방경비법이나 (구)형법, 국가보안법,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위반한 경우는 모두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형벌을 집행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체포‧구금특별조치령」 이전과 이후 예비검속자에 대한 처벌에 관하여 이와 같은 법적 절차가 적용되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주35)

민간인에 대한 국가권력의 조직적 공격으로서의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전국에서 체계적으로 자행되었다. 치안국(경찰) 소속의 경찰관과 CIC, 헌병 등 군인이 보도연맹원 예비검속과 사살에 직접 개입했다. 각 지역에서 약간의 편차는 있으나 보도연맹원의 예비검속과 구금, 심사와 분류, 사살 등이 전국에서 거의 동일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비무장 민간인들이 조직적으로 살해당한 이유는 대체로 과거 좌익활동 관련자라는 것이었다. 현재의 위법한 행위에 대해 법적 근거를 갖고 처벌한 것이 아니라 이전의 행위에 비추어 위험요소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방적 차원에서’처벌한 것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국가에 의해 조직적이고 광범하게 자행된 ‘전형적인 국가폭력(state violence)’이며 ‘정치적 집단학살(politicide)’이라 할 수 있다.(주36)

‘인도에 반하는 범죄’ 행위

‘인도에 반하는 죄’란 법의 일반원칙을 해하는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로서 그 규모나 야만성에서 현대 문명에 의하여 용인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국제공동체의 관심사로 된 범죄행위를 가리킨다.(주37)

‘인도에 반하는 죄’라는 용어가 사용된 예는 수세기 전부터 있었지만, 현대적 의미에서의 인도에 반하는 죄라는 용어가 국제문서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15년이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행위에 대하여 프랑스, 영국, 러시아 정부가 이를 ‘인도와 문명에 반하는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and civilization)’라고 비난하며, 그 관계자는 개인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 뉘른베르크 재판 광경

제1차 대전에 관한 법적 책임을 조사하기 위하여 설립된 15인 위원회는 1919년 3월 29일자 보고서 제2장에서 ‘인도에 관한 법(law of humanity)’을 위반한 적국인은 형사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사후입법에 의한 처벌과 ‘인도에 관한 법’과 같은 도덕적 개념의 삽입은 불가하다는 미국의 반대에 부딪쳐 현실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제1차 대전 후 터키와 체결한 1920년 ‘세르브 조약’에서는 ‘인도주의 법’에 위반된 범행을 자행한 자를 연합국으로 인도할 것을 규정했지만 이 조약은 비준되지 못했다. 1923년 ‘세르브 조약’을 대체한 ‘로잔느 조약’에서 사면조항을 통해 터키인의 형사책임이 면제되었다.

‘인도에 반하는 죄’가 실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뉴른베르그헌장(제6조제C항), 동경극동군사재판소헌장(제5조제C항), 연합국들이 독일 내에서 전범재판을 진행하는데 적용한 연합국통제위원회법(제10호제2조) 등에서 ‘인도에 반한 죄’가 규정되었다.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한 국제사회의 처벌원칙은 1946년 12월 11일 유엔 총회 결의 95(I) 이른바 ‘뉘른베르그 원칙’에서 재확인되었다.(주38)

최근에는 구유고 「국제형사재판소규정」 제5조(주39),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규정」 제3조(주40)에 이어, 1998년 로마회의를 통하여 채택된 「국제형사재판소규정」 제7조제1항 등은 인도에 반하는 죄를 “공격의 정을 알면서 민간인 집단에 대한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 공격의 일부로 저질러진 살인, 절멸, 노예화, 추방 또는 인구의 강제 이전, 감금 또는 국제법의 근본원칙에 위반하는 신체적 자유의 심각한 박탈, 고문, 강간, 성노예화, 강제 매춘, 강제 임신, 강제 단종, 이와 상당한 중요성을 지닌 기타 형태의 성적 폭력”으로 정의하고 있다.(주41)

‘인도에 반하는 범죄’의 객관적인 구성요건은 우선, 민간인 집단에 대한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 공격”이 있어야 한다.(주42) “광범위한”공격이란 피해의 규모나 수적으로 큰 것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목표로 집단적으로 수행된 반복적이고 대규모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반면 “체계적인”공격이란 공통의 정책적 기반 위에서 조직화되고 규칙적인 패턴을 따르는 공격으로 공격행위가 잘 계획된 것으로 우연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는 하나의 행위나 제한된 수의 행위의 경우에도 고립된 것이 아니거나 무작위적이지 않으면 인도에 반한 죄가 성립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주43)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것을 판단하는 요소로는 공격의 결과, 희생자의 수, 공무원의 참가 여부, 범죄행위의 패턴 등이다. 그러나 국제관습법적으로는 정책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국가 정책의 존재여부가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이라는 판단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법적 요건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주44)

전국에서 발생한 보도연맹 사건에서 가해자들은 살해 전에 감금된 자가 보도연맹원임을 확인하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짧은 시간에(주45) 집단총살했다. 그리고 현장의 일부 생존자를 확인 사살했으며, 도피자를 재검속하고 군입대자들까지 색출하여 사살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좌익 위험분자로 분류된 특정한 성격의 민간인 집단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에 해당한다.

▲ 유고(보스니아) 내전 집단학살자 발굴 장면

또한 당시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소집과 살해사건이 군‧경에 의해 매우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단위에서 행해졌다.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공격의 한 부분으로 정당화하여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잔인하게 살해했다. 국가는 정책적 차원에서 보도연맹원을 조직, 관리, 통제, 살해했다. 따라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명백히 ‘인도에 반한 죄’에 해당한다.(주46)

일반적으로 ‘인도에 반하는 죄’의 희생자는 특정 민간인 집단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공격대상이 된다.(주47) 대상자가 주로 민간인이면 이에 해당하며, 일부 비민간인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집단의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보도연맹 사건은 다른 민간인 집단희생사건과는 달리 희생자에 노인, 여성, 아동, 유아가 극히 일부만 포함되었고, 대부분은 20~40대의 청장년 보도연맹원이었다. 이처럼 특정한 연령대의 사람이 주된 희생자였던 것은 이들에 대한 살해행위가 개인적 차원에서 희생된 것이 아니라 보도연맹 또는 ‘요시찰인’이라는 집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주48)

‘인도에 반하는 죄’는 처음 무력분쟁 상황 속에서만 발생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뉴른베르그 헌장과 극동군사재판소 헌장, 그리고 구유고 국제형사재판소 규정은 모두 무력분쟁 중 발생한 사건만을 인도에 반하는 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구유고 국제형사재판소는 인도에 반하는 죄가 반드시 무력분쟁과 연계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국제관습법상 확립된 내용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앞으로는 기존의 판례와는 달리, 무력충돌의 관련성을 요구하지 않고 없이 ‘인도에 반한 죄’를 처벌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해자에 대한 역사의 단죄가 필요하다

‘인도에 반하는 죄’에서 말하는 무력충돌과의 연관성은 무력충돌이 존재하고 지리적으로 시간적으로 범죄행위가 무력충돌과 연결되어 있으면 충족하는 것으로 본다. 또한 무력충돌의 성격은 국제적이든 국내적이든 모두 가능하다. 보도연맹 사건의 배경이 된 한국전쟁은 국내적‧국제적 무력충돌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가해행위 또한 전쟁 발발 직후 내부에서 적에게 협력할 것이 예상되는 민간인을 살해한 것으로 무력충돌의 연관성 속에서 발생했다.(주49)

▲ 국민보도연맹 사건 직권조사결정 기자회견(진실화해위원회)

다음으로는 인도에 반하는 죄의 주관적 요인이다. 인도에 반하는 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범행자가 “공격의 정을 알고”자신의 행위를 행하여야 한다. 즉 자신의 행위가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 공격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범행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행위자가 국가나 조직의 공격에 대한 모든 성격이나 계획, 정책을 상세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고, 상황의 전반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주50)

가해자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과 자신의 행위가 공격의 일부임을 인식해야 하지만공격의 상세한 내용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격의 목적을 공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인도에 반한 죄는 전적으로 개별적 이유에 의해 자행될 수도 있다. 행위자의 이러한 주관적 요건은 사건이 발생한 역사적, 정치적 상황, 범행 시 피고의 역할, 범죄의 성격과 결과의 심각성, 피고의 지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객관적으로 추론하여야 한다. 행위자가 주관적으로 어떠한 동기에서 행동했는가는 이 범죄 성립 여부와 관계없다는 이야기이다. 행위자의 주관적 동기는 형량을 결정하는 데서는 고려대상이 될 수 있다.(주51)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경우, 살해 전에 상부 지시에 의해 소집, 감금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살해의 주체, 방법과 시간의 측면에서 보면, 군‧경 등 국가기관과 국가기능을 사실상 수행하는 조직이 보도연맹을 직접적으로 통제했다. 또한 가해행위가 전국적으로 발생했고,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했으며, 보도연맹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젊은층 남자가 주된 희생자였다. 게다가 가해자들이 짧은 시간 안에 무차별적으로 대상을 살해했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가해자들이 자신의 행위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격의 일부이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도연맹사건은 가해자들이 자신의 행위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격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요건이 충족된다.(주52)

현장에서 사살을 집행한 가해 경찰 등 일부는 이 행위의 위법성을 인지하고 보도연맹원을 풀어주기도 했다. 이후 가해자들은 사건을 숨기려 했을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행위에 대해 자책을 하기도 했다. 나아가 가해자들은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거나 현장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는 등 사건을 은폐하려고 시도했다. 이는 그들이 사건의 위법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인도에 반한 죄의 살해행위와 관련된 구성요건이다. 먼저 행위적 요건인데,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살인행위를 말한다. 여기에는 어떤 행위의 결과로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도 포함한다. 둘째는 정신적 요건인데, 살인행위의 고의성과 행위 결과에 대한 인식이 요구된다. 비무장 민간인인 보도연맹원을 비교전 상태에서 적에 협력할 가능성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소집‧연행‧감금하고, 단시간 내에(주53) ‘집단적으로’살해한 행위는 인도에 반한 죄로서 살인의 행위적 요건과 정신적 요건을 충족한다.(주54)

▲ 울산보도연맹 추모제 모습(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인 민간인 집단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살해 행위로서 몇몇 개인을 희생자로 한 단순범죄가 아니었다. 또한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일관되게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 공격의 일환”으로 벌어진 것으로서 다수 희생자를 목표로 수행된 대규모의 집단적 행위이고, 보도연맹원에 대하여 국가정책에 따라 조직적으로 학살이 자행되었다. 사건 희생자들 또한 개별적으로 선정된 것이 아니고, 보도연맹이라는 특정 집단의 일원으로서 희생자에 포함된 것이었다.(주55)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희생자 규모면에서도 국제사회가 ‘인도에 반하는 죄’로 실제 처벌했던 외국 사례와 비교할 때 그 규모가 뒤지지 않는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의 범죄행위였다. 따라서 제대로 된 민주국가라면 한국에서도 ‘인도에 반하는 죄’의 처벌 문제가 논의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 현실에서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관련자들을 ‘인도에 반한 죄’로 처벌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그렇지만 그들을 역사의 법정에는 세울 수 있다. 형사 법정이 아니더라도 인도에 반하는 죄를 범한 범죄자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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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진실화해위원회, 『포항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진실규명결정서』, 2009, 41쪽

2) 진실화해위원회, 『충북 국민보도연맹 사건(영동‧옥천‧보은‧충주‧음성‧진천‧제천‧단양) 진실규명결정서』, 2009, 25쪽;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08쪽

3) 이승만 여순사건 직후 경고문, 여수수산신문, 1948.11.5; 이승만, “불순배를 철저히 제거 - 반역사상 방지 법령 준비”,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 공보처, 1953, 8쪽.

4) 고정훈 외, 『명인옥중기』, 희망출판사, 1966, 77~81쪽

5) 고정훈 외, 위의 책, 305쪽

6)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39쪽.

7) 조선일보, 1950.4.1;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81쪽 재인용

8)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09쪽

9) 김남식, 『남로당연구』, 돌베개, 1984, 451쪽

10) 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 2』, 중앙일보사, 1983, 99쪽

11)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 16』(1948년~1951년), 1993, 179쪽

12)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 16』 (1948년~1951년), 1993, 197~198쪽

13) 정병준, 「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학살사건의 배경과 구조」,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와 현실』, 통권54호, 2004, 101~129쪽;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4쪽

14)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12쪽

1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1』, 2003, 596~603쪽

16) 주영복, 『내가 겪은 조선전쟁』, 고려원, 1990, 313쪽

17) 진실화해위원회, 『충남 국민보도연맹 사건(∥) 진실규명결정서』, 2009, 60~61쪽.

18) 이 보고서는 주한미국대사관 3등 서기관인 맥도널드(Donald S. Macdonald)가 1950년 7월 11일 대전에서 전 사회부장관 비서인 임태정(林泰貞)을 인터뷰한 후 보고한 것이다(김기진,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푸른역사, 2005, 39~41; 256~257쪽;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16쪽).

19) 주한미국대사관 부영사인 핸더슨(Gregory Handerson)이 1950년 7월 4~5일 부산에서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수집한 정보를 미국 외무부에 보고한 것이다. 김기진,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푸른역사, 2005, 41~43; 258~260쪽.

20) 김기진,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푸른역사, 2005, 43; 266~267쪽

21) 김기진,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푸른역사, 2005, 39~43쪽

22)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15쪽

23) 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 3』, 을유문화사, 1972, 45쪽.

24)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역사비평사, 2002, 89~94쪽.

25)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2쪽.

26)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16쪽

27)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2쪽

28)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16~517쪽

29)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425쪽. 예비검속과 유사하게 예방구금이 있다. 1925년 일제가 제정한 치안유지법은 1941년 3월 개정(법률 제54호)되었는데, 그 골자는 사상범에 대한 형벌을 강화하고 예방구금 제도를 도입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개정된 치안유지법에 대해 사상범 처벌로 이해했으며, 그 이후 사상통제 정책도 동일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30)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조선총독부령 제8호, 1941.2.12 제정), 국가법령정보센터, http://www.law.go.kr/);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19쪽

31)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1』, 역사비평사, 1997, 92쪽

32)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455쪽

33)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1쪽

34) 최호근, 『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 책세상, 2005, 427쪽. 최호근은 국민보도연맹이 유엔 협약에서 정한 전형적인 ‘제노사이드’범죄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단순한 제노사이성 집단학살의 차원은 넘어서고 있다고 본다. 또한 많은 학자들은 제노사이드 규정이 너무 협소하고 제한적이어서 그 개념 규정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는 상황이다.

35)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4쪽

36) 법률용어는 아니지만 이런 행위를 표현하는 사회학적 용어로 ‘정치적 집단학살(politicide);이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politicide’란 피해 규모보다는 대량학살의 정치적 가해동기를 강조하여 지칭하는 용어이다. Helen Fein, Genocide, A Sociological Perspective (SAGE Publications, 1993). 이와 유사하게 사용되는 ‘정치적 학살(political massacre)’이라는 용어는 살상이 “비무장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장소에서 정치적‧의도적으로 살해된 10~10,000명에 이르는 사람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인”을 가리킨다. Herbert Hirsch, Genocide and the Politics of Memory (the Unuversity of a North Carolina Press, 1995), pp. 205~206;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4쪽

37)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4~525쪽

38)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5쪽

39) 이 조항에서 ‘인도에 반하는 죄’를 그 성격이 국제전이거나 국내전이거나 불문하고 무력분쟁 중 민간인 집단에 대하여 범하여진 살인, 절멸, 노예화, 추방, 구금, 고문, 강간, 정치적, 인종적 및 종교적 이유에 기한 박해, 기타 비인도적 행위라고 규정했다(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5쪽).

40) 이 조항에서는 무력분쟁과의 연계요건이 삭제되는 한편, 국민적, 정치적,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이유에 기하여 민간인 집단에 대한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 공격의 일환으로 범하여진 행위로 규정되었다.

41)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5쪽

42) Prosecutor v. T. Blaskic, ICTY, Trial Judgment, para.198.

43)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6쪽.

44) Prosecutor v. Kunarac, ICTY, Appeal Judgement, paras 98-101; Prosecutor v. Simic, ICTY, Trial Judgement, para. 44; Prosecutor v. Blaskic, ICTY, Appeal Judgement , para. 120;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6쪽

45) 국제형사재판소 판례에서는, 제한된 시간 안에 다수 민간인에 대한 살해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의성이 있는 ‘체계적’공격의 증거로 간주했다.

46)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7쪽

47) K. Kittichaisaree, International Criminal Law,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p. 95.

48)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7쪽

49)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8쪽

50)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9쪽

51)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9쪽

52)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29~530쪽

53) 국제형사재판소 판례에서는, 제한된 시간 안에 다수 민간인에 대한 살해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의성이 있는 ‘체계적’공격의 증거로 간주했다.

54)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30쪽

55)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5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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