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제31차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한 북한 선수단. 총 9개 종목 31명이 참가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제31차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5일 막을 올렸다. 오는 21일까지 207개국 1만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해 실력을 겨룬다. 여기에 북한은 총 9개 종목 31명의 선수가 참가한다. 북한은 1972년 뮌헨올림픽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8회 출전했다. 북한의 올림픽 출전사는 어떠한가.

'DPRK' 인정받기 위한 북한의 올림픽 불참

북한의 올림픽 출전은 국호와 관련이 있다. 올림픽은 국가 간 경기라는 점에서 북한은 국제무대에서의 국호를 중시여겼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냐 '북한'(North Korea)냐에 민감했던 것. 물론, 이들 국호가 뭐 큰 문제냐고 할 수있지만 대한민국을 국제대회에서 '남한'(South Korea)라고 하지 않는 이유와도 같다.

북한은 1964년 도쿄올림픽에 총 13개 종목 144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개막 직전 선수단을 철수시켰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북한의 공식 국호를 'North Korea'라고 지정했기 때문. 당시 IOC는 북한의 DPRK 사용요구에 "올림픽 국호는 정치적 명칭이 아니라 지리적 구역을 뜻할 뿐"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물론, 당시 철수는 국호에 국한되지 않았다. 도쿄올림픽 한해 전인 1963년 10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제1회 신흥국대회(GANEFO)에 북한이 참가한 이유도 작용했다. 신흥국대회는 1962년 제4회 아시안게임을 개최한 인도네시아가 대만과 이스라엘 선수들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은 데서 시작됐다. IOC는 인도네시아를 제명했고, 이에 인도네시아, 중국, 아랍연합공화국 등을 중심으로 1963년 제1회 GANEFO가 열렸다.

이에 IOC는 정치와 스포츠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밝힌 GANEFO를 인정하지 않고 이에 참가한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를 불허했다. 결국 북한은 이 대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출전 선수들에 대한 IOC 불허로 철수했다. 여기에 대표적인 인물이 여자육상 신금단 선수다.

▲ 북한 육상 간판스타 신금단 선수. 1963년 제1회 GANEFO 출전을 이유로 IOC로부터 도쿄올림픽 출전권을 박탈당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신금단 선수는 제1회 GANEFO에 출전해 400m 세계신기록을 수립했지만, 대회 자체에 대한 국제스포츠계의 불인정으로 비공인기록이 됐으며, ICO 블랙리스트에 올라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귀국 직전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부친 신문준 씨와 10분 상봉하는 일도 있었다.

올림픽에서의 국호문제는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에서도 불거졌다. 당시 IOC 총회에서 한국이 '한국은 코리아, 북한은 노스코리아'로 명시할 것을 요구해 통과됐고, 1972년 뮌헨올림픽부터 'DPRK' 사용 타협안이 제시됐다. 그러나 쿠바에 머물던 북한 선수단은 철수했다.

IOC에서 북한 국호 논란은 분단 상황과 맞물려 있다. 한국은 1947년 6월 IOC 정식회원국이 됐는데, 북한은 1963년 정식 가입했다. 이는 북한이 스포츠외교의 중요성을 늦게 깨닫게 된 점도 있지만, IOC가 1개국 1개 국가올림픽위원회(NOC)를 둬야 한다는 규정때문이었다. 당시 IOC는 남북을 하나의 국가로 봤다. 이는 북한의 국호를 둘러싼 논쟁으로도 이어졌다.

▲ 1972년 뮌헨올림픽으로 향하는 북한 선수단. 북한의 첫 올림픽 참가대회로 여기서 첫 금메달이 나왔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북한의 올림픽 도전기..역도.유도 종목 강세

1969년 IOC 총회에서 'DPRK'라는 정식 국호사용을 승인받은 북한은 한국전쟁 전후 16년만인 1972년 뮌헨올림픽에 10개 종목 37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당시 올림픽에서 북한의 첫 금메달 선수가 탄생했다.

주인공은 50m 소총 복사경기에 출전한 리호준 선수로 60발 사격에 600점 만점에 1점 뒤지는 599점을 기록해 세계신기록, 올림픽기록을 수립했다. 이는 한국 레슬링 양정모 선수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딴 첫 금메달보다 앞선 것으로, 리호준은 "적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쏘았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역도 은메달 1개, 레슬링 동메달 1개, 여자배구, 레슬링, 유도 등 동메달 3개로 종합 순위 22위라는 성적을 거뒀다.

이어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는 복싱 구영조 선수가 미국선수를 상대로 우승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복싱 리병욱 선수는 은메달을 따 종합순위 21위에 올랐다. 이를 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우리나라는 적들과 직접 맞서 있는 나라이므로 사격, 권투 같은 종목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사격과 권투는 우리 인민의 혁명적인 투쟁정신과 우리 민족의 기개를 보여주는 체육종목"이라고 말했다.

냉전시대는 정치와 스포츠를 분리한다는 올림픽의 정신이 무색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이 불참해 북한은 은3, 동2개로 26위를 기록했다. 1984년 로스엔젤레스올림픽은 사회주의 진영의 보이콧으로 북한도 참가하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미.소 양 진영이 모두 참가했지만 남북분단 정치사는 북한의 불참으로 작용했다.

북한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참가했다. 불참 12년만이다. 레슬링 김일, 리학선, 남자체조(안마) 배길수, 복싱 최철수 등이 금메달을, 탁구 여자복식 리분희,유순복, 개인 리분희, 복싱 리광식 등이 동메달을 따 종합순위 16위에 올랐다.

12년만에 만에 거둔 큰 성적이었고, 배길수는 정신력을 내세운 북한 스포츠의 상징이 됐으며, 이후 여자체조 김광숙과 함깨 '선수권보유자들'이라는 북한 기록영화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 북한 유도영웅 계순희 선수를 다룬 우표. [자료사진-통일뉴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서 레슬링 김일 선수는 금메달을 따 2회 연속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대표적인 선수는 계순희다. 당시 17세 무명선수인 계순희는 국제무대 84연승으로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일본 유도영웅 다니 료코를 꺾어 파란을 일으켰다.

북한은 이 대회에서 금2, 은1, 동2개로 종합 33위를 차지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계순희 선수는 동메달을 따는 등 은1, 동3개로 종합 60위에 올랐고,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계순희 선수 은메달 등 은4, 동1로 종합 57위를 하는 등 과거 성적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남북 동시입장은 세계에 큰 감동을 선사했다.

북한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부터 재도약했다. 여자체조 홍은정 선수와 역도 박현숙 선수의 금메달, 유도 안금애 선수의 은메달, 역도 오정애, 유도 박철민, 원옥임 선수의 동메달로 종합 33위에 올랐다.

그리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 11개 종목 56명 선수가 출전해 역도 엄윤철, 김은국, 림정심 선수, 유도 안금애 등이 금메달을 따는 등 금4, 동2로 종합 20위라는 성적을 거뒀다.

▲ 북한 역도 엄윤철 선수. 2012년 런던올리픽에 이어 리우올림픽에서도 2연패를 달성할지 주목된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시상대의 높이는 곧 조국의 높이다"

북한이 지금까지 딴 메달은 총 47개로 금14, 은12, 동21개이다. 이 중 역도종목에 금4, 은4, 동5으로 전체 28%를 차지한다. 이어 레슬링(금3, 은2, 동5), 복싱(금2, 은3, 동3), 유도(금2, 은2, 동4) 등이 뒤를 이었다.

2016 리우올림픽에서 북한은 역도를 메달밭으로 보고 있다. 세계적인 선수인 엄윤철, 림정심 외에도 김국향, 최전위, 김명혁 등이 금메달 유력후보로 떠오른다.

여기에 남자체조 간판스타인 리세광 선수는 예상대로 예선 1위로 통과했다. 그리고 레슬링 양경일, 여자체조 홍은정, 여자다이빙 김국향 등도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하루빨리 체육강국의 지위에 올려세우려는 것은 당의 확고한 결심이다. 시상대의 높이는 곧 조국의 높이라는것을 깊이 명심하고 체육인들을 백두의 넋과 기상을 지닌 사상과 신념의 강자로, 승리의 금메달로 조국의 영예를 떨치는 당의 체육전사로 튼튼히 준비시키자." 북한의 체육강국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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