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성동마을에서 본 개성, 기정동마을, 개성 송악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생겨나 2016년 1월 기준 49세대 207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비무장지대 남측 유일의 마을인 대성동마을.

마을에서 군사분계선까지의 거리는 400m에 불과하다.

한 여름 땡볕이 내려쬐는 7월, 육안으로 보이는 제방 너머에는 과거 인삼농사 지어 팔러 다니던 개성도, 마실 다니던 기정동도 여전하다.

조금만 눈길을 멀리 하면 넘실대는 머릿결처럼 낮은 산자락이 이어지면서 고려 황성을 품었던 개성 송악산도 볼 수 있다.

비록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긴 해도 대성동 마을회관 옥상에서는 부지런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 기정동 젊은 처녀와 논두렁에서 참을 먹고 있는 농군들의 모습도 선명하다.

평범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이 마을에서 아쉬운 건 건너편 동음을 멈춘 개성공단 만이 아니다.

99.8m에 달하는 국내 최고 높이의 대성동마을 국기게양대(태극기 크기 가로 19m, 세로 12m)와, 맞대결하듯 올라간 건너편 기정동마을 165m 높이의 북한 국기게양대(국기 크기는 가로 30m, 세로 15m)는 모두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과는 거리가 먼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대남 확성기 방송 소리, 남쪽을 등지고 북쪽을 향해 지어진 주택들, 논농사를 지으러 나갈 때마다 유엔군사령부 소속의 민정반 군인들과 함께 나가야 하는 특이한 모습 등은 대성동마을에 드리워진 63년의 휴전상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곳엔 전쟁도 없지만 평화도 없고 승리나 패배는 더더욱 없다. 그래서 대성동마을 63년은 정전협정이 규정하고 있는 분단 63년의 역사와 닮은꼴이다.

지난 1960년 지어진 마을 ‘공회당’을 리모델링해 지난 4월 개관한 대성동 마을기록전시관의 문을 열면 첫 머리에 이렇게 쓰여 있다.

“대성동마을은 강릉김씨 집성촌으로 우리나라 여느 마을이 그러하듯 특별하거나 대단하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삶과 기억을 공유하고 마을 공동체의 문화와 가치를 소중히 가꾸어온 전통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인삼 농사 지어 개성으로 팔러가고, 이웃 마을 기정동으로 마실가던 평범한 대성동마을은 1950년 6.25전쟁 이후 ‘DMZ 비무장지대’라는 낯선 분단의 공간속에 갇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특별한 마을’이 되어 버렸다.”

▲ 김동구 이장이 대성동마을기록전시관 내 공회당에 얽힌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953년 7.27 정전과 대성동마을의 시작

1950년 한국전쟁은 개전 후 3년 1개월, 회담 시작 후 2년 17일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그 마침표를 찍었다.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8월 ‘사민(私民)의 비무장지대 출입에 관한 협의’를 근거로 DMZ내 남측 대성동마을과 북측 기정동마을을 각각 ‘자유의 마을’과 ‘평화의 마을’로 명명하고 존속시킴으로써 대성동과 기정동은 DMZ내 남과 북의 유일한 민간인 마을로 남게 되었다.

1953년에 30세대 160명을 시작으로 1972년에 31세대 195명, 1980년에 38세대 236명에 이어 2016년 1월 현재 대성동 마을에는 총 49세대 207명이 거주하고 있다.

주민들은 총 948필지(4,800km2)의 농지에서 벼, 콩, 고추 등을 재배하는 농업활동을 통해 수입을 얻고 있으며, 지금은 마을공동사업으로 인근 임진강에서 잡히는 참게장과 청국장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민의 수에 큰 변화가 없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성동마을은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 부분에 대한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지도록 한 정전협정 제10항에 따라 주한미군사령관이 겸직하는 유엔사의 관할 하에 있으며,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납세와 국방의 의무가 면제된다.

이 때문에 외지 여성이 대성동마을로 시집은 올 수 있는데 남성이 이 마을로 장가오는 것은 안 된다고 한다.

▲ 대성동국민학교 교사와 학생-1966년. [사진출처-대성동마을기록전시관]

또 대성동마을은 거주권 심사가 까다로워서 주민들은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타지로 나가는 경우를 제외하고 연 8개월 이상 거주하지 않으면 주민 자격이 상실된다.

대성동마을에 유일한 교육시설인 대성동초등학교는 인가 이듬해인 1969년부터 최근까지 47회의 졸업식을 거행했다.

일상생활에서도 불편이 적지 않다. 민정중대가 매일 저녁 7시에 가구별 인원을 점검하고, 주민들은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이 금지된다고 한다. 외부인들도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

과거 대성동마을 주민들의 외부 출입. [사진출처-대성동마을기록전시관]

과거 대성동마을 주민들은 DMZ 사령관이 발행한 패스를 발급받은 후 매주 목요일 미 제1기병사단에서 제공하는 트럭 2대를 이용해 파주 금촌시장에 나가 농산물을 팔아 생활용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이 트럭은 매주 목요일에 나가서 다음 주 목요일에야 다시 대성동에 들어왔기 때문에 주민들은 한번 파주로 나가면 일주일이 지나서야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하니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 듯 싶다.

▲ 대성동마을 개발사업 공사-1981년. [사진출처-대성동마을기록전시관]

최근 노후 주택 개보수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대성동마을은 1959년 조성된 이래 1972년과 1979~1980년 1,2차에 걸친 종합개발을 통해 건축물들을 신축했는데, 당시 건축물들을 대장에 등재하지 않아 거주 주민의 주택 소유권이 없어서 주택을 보수할 수 없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통일맞이 첫마을 대성동 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노후 주택 개보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앞의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 MDL) 표식. [사진출처-위키피디아]

DMZ는 폭 4km(남쪽 후방 2km, 북쪽 후방 2km), 길이 155마일(248km), 면적 약 6천4백만평(한반도 전체의 0.5%)의 광대한 구역으로, 서해안 임진강 하구에서 출발해 6개의 큰강과 1개의 광야, 2개의 산맥을 넘어서 동해안 강원도 고성의 동호리까지 이어진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북쪽으로 2km 위의 비무장지대 경계선을 ‘북방한계선’(NLL), 남쪽으로 2km 아래 경계선을 ‘남방한계선’(SLL)이라고 한다. NLL과 SLL에는 철책이 처져 있고 군대가 대치하고 있다.

북측은 '민경대'(民警隊), 남측은 '민정경찰'(DMZ Police)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양쪽 모두 무장 군인들이다.

1963년부터 비무장지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남북 양측의 무장 군인들이 상시 주둔하는 전방 감시 초소(GP)가 곳곳에 설치되었으며, 일부 GP와 GP 사이에는 '추진철책'이라는 이름의 철조망이 세워져 있다.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를 얻고 들어가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군인이나 사민이나 비무장지대에 들어감을 허가하지 않는다.”(정전협정 제1조 9항)

시간의 흐름과 함께 NLL과 SLL은 각각 북과 남으로 이동해 지금의 DMZ 실제 폭은 4km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면적도 적어졌다. 그러나 DMZ보다 두터운 민간인 통제선(민통선)이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10km 남과 북을 갈라놓고 있다.

민간인통제선(Civilian Control Line, CCL, 민통선)은 DMZ 남방한계선 남쪽 5~20km되는 지역에 설치한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선이며, DMZ 남방한계선과 민통선 사이의 지역(바다 제외)을 따라 띠처럼 형성된 지역을 민간인통제구역이라 한다.

민통선은 1954년 2월 미 8군이 군사시설 보안 등을 목적으로 민간인의 경작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설정한 귀농선(歸農線)에서 시작되었으나, 1958년 6월 한국군이 휴전선 방어 임무를 담당하면서부터 군 작전 및 보안상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출입영농과 입주영농이 허가되었고, 귀농선은 민간인통제선(민통선)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민간인출입통제구역 내에서는 군사 작전 및 보안 유지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민간인의 영농을 위한 토지 이용이 허용되지만, 경작권을 제외한 토지소유권의 행사, 지역 내의 출입과 행동 등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이 국가안보상의 필요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2008년 9월 군사기지 및 시설보호법에 의거 민통선은 ‘군사분계선 10km’ 이내로 축소되었다.

인천 강화, 경기도 김포·파주·연천, 강원도 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 등 3개 시·도, 8개 시·군, 213개 리가 민통선 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는 파주 2곳(통일촌, 해마루촌), 연천 1곳(황산리), 강원 철원에 6곳(철새마을, 이길리, 정연리, 통일촌, 생창리, 마현리) 등에 정착촌 등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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