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수(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 sooya@klsi.org)


이 글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월간지 <노동사회>(2001년 10월호, 통권 58호)와 동시 게재됩니다.(편집자 주)


`어떻게 온 평양이던가`. 지난 8월 15일 12시께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시간 가량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도 평양의 순안공항에 당도했을 때 머리 속을 스친 생각이 그러했다. 숱한 곡절을 거쳐 오게된 연유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오매불망에 가까울 정도로 와 보고 싶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유일한 땅, 분단의 벽을 걷어내고 하나로 통일해야 할 조국 영토, `혁명`과 `주체`의 나라, 한 핏줄을 지닌 사람들이 `고난의 행군`을 겪는 지역, 바로 그곳에 발을 딛은 감회는 실로 벅차면서 착잡했다.

어떻게 온 평양인데

공항에는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붉은 꽃술을 들고 `조국통일`을 연호하며 남쪽에서 온 사람들을 환영했다. `2001년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오는 남녘 동포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고 적힌 붉은 색 대형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연합취주악대의 연주가 계속되기도 했다. 이런 환영행사에 남쪽 사람들은 적잖이 당혹해 하는 기색을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광경일 뿐만 아니라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환영 인파 속에는 사회단체 대표들이 나와 남쪽 대표들을 영접했고, 얼굴이 익은 `조선직업총동맹` 리진수 부위원장은 특히 노동조합 쪽 사람들을 반갑게 맞았다.

공항에서 평양 시내를 거쳐 고려호텔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반이 넘어서였다. 고려호텔은 1985년 8월에 준공되었고, 총 건평은 8만4천 평방미터이며 쌍탑식 2개 호동 45개층의 여러 가지 편의시설을 갖춘 특급 호텔이다. 객실 내부도 잘 정돈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공간도 널찍했다. 그러니까 이 호텔에 묵게 된 남쪽 손님들은 귀빈 대접을 받게 된 셈이다. 1주일 동안의 일정을 통해서도 드러난 바이지만, 대축전에 초청 받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칙사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듯하다.

점심 식사를 마친 `방북단`은 `2001년 8.15 민족통일 대축전` 행사 `참관`을 둘러싸고 복잡하면서도 혼돈에 찬 논의를 장시간 동안 벌였다. `2001년 민족공동행사 남측 추진본부`의 집행부 주류는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거행하는 민족통일 대축전 행사에는 `참관` 형식으로라도 가지 않겠다는 각서를 집행 책임자들이 정부당국에 제출하고서 방북 승인을 얻었기 때문에 행사에 참관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양대 노총을 비롯한 사회·민족민주운동 진영의 `통일연대`는 "각서를 제출한 사실은 여기 올 때까지 듣지도 못했으며, 통일축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번에 여기 올 어떤 명분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어디 관광을 목적으로 어렵게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당연히 참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노동계 대표들은 이미 북측의 조선직업총동맹(직총)과 통일대축전을 참관하기로 합의한 바 있고, 이를 통일부에 신고했으며 별도 초청장까지 제출하였으므로 별다른 조건 없이 방북이 승인된 것으로 판단하여 참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방북단 340여 명 가운데 통일연대 소속 단체에서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200여 명이 축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7개 종단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에 속한 사람들도 상당수가 행동을 함께 했다. 이 통일축전 참관이 남쪽의 일부 반통일적 시각에서는 `돌출행동`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돌출행동`으로 비친 통일축전 `참관`

2001년 8.15 민족통일 대축전이 열리는 3대헌장 기념탑까지 2킬로미터 가량 되는 연도에는 남녀노소가 어울린 수만 명이 `조국통일`을 연호하는 가운데, 중간 중간에서 학생들과 청년들은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노래를 합창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열광에 찬 모습들이었다. 남쪽 대표단의 맨 선두에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간부들이 깃발을 앞세운 채 `남북 노동자 앞장서서 조국통일 앞당기자`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그 뒤를 이어 남쪽 대표단이 환호를 받으며 걸어 들어갔다. 식장에는 4천여 명이 모여 있었다. 통일축전에 참가한 북쪽 사람들은 오전부터 따가운 햇빛을 받으며 내내 남쪽 대표단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민족통일 대축전 개막식은 7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다. 김령성 민족화해협의회(북측 민화협) 부회장이 개막을 선언했다. 아리랑 노래 가락이 연주되는 가운데 한반도를 그린 깃발이 높이 게양되었다. 식장 위에 떠오른 대형 풍선에는 `조선은 하나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통일 이룩하자`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연단에는 김영대 민족공동행사 북측 추진본부 대표,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용순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해외동포 참가단 대표 등이 자리했다. 식장에는 남쪽에서 북송된 장기수 선생 60여 명이 남쪽 대표단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김영대 준비위원장은 축하연설을 통해 "이번 축전이 민족사에 특기할 대경사"라며 "자주성은 민족의 생명이며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민족의 최고이익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6.15 남북공동선언을 철저히 이행해 민족의 주체적인 힘을 더 크게 합쳐나가자"고 밝혔다(연합뉴스, 8월15일자).

공식행사가 끝난 뒤에는 기념식수가 있었고, 여성 4중창과 가야금 연주 등 문화공연이 이어졌으며, 마지막에는 참가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늦게까지 춤판을 벌였다. 첫 번째 `돌출 행동`은 이렇게 해서 끝이 났다.

그렇다면, 과연 `조국통일 3대 헌장`은 무엇이고, 왜 이를 기념하는 탑 앞에서 진행하는 행사가 문제되는가. `조국통일 3대 헌장`은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과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그리고 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을 통칭하여 말한다.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에서 합의한 통일 원칙이다. 연방제 통일방안은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제시된 통일방안이다. 이 방안은 조국통일 3대 원칙에 따라 남과 북이 현존하는 사상과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쌍방이 연합하여 하나의 연방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방정부 구성의 3대 전제조건은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분단고착화 정책 중단 등이 제시되고 있다.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은 1993년 4월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서 발표된 것이다. 자주·평화·중립의 통일국가 창립, 민족애와 민족자주 정신에 기초한 단결, 공존·공영·공리 도모와 조국통일 위업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원칙, 일체의 전쟁 중지, 승공과 적화의 의구 불식과 신뢰와 단합, 민주주의 존중, 개인과 단체 소유의 재부 보호, 접촉과 왕래 및 대화를 통한 이해와 신뢰, 전민족적 연대성 강화, 조국통일에 공헌한 사람에 대한 높은 평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런 3대헌장을 기념하여 세운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은 통일거리 끄트머리 고속도로 입구 양쪽에서 남과 북의 두 여인이 한반도 지도를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으로, 높이는 30미터이고 가로는 6.15 공동선언을 상징해 61.5미터며 탑신에는 60킬로그램이 넘는 화강석 2,560개가 붙어있다. 본체 주변에는 4개의 부제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부제상에는 3대헌장의 내용이 담겨 있다.

남한 정부가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근방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방북 대표들이 참관 형태라 할지라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고집한 명분은 북측의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고무·동조`와 `찬양` 행동이라는 논거에서다. 그렇다면 6.15 남북공동선언이 담고 있는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여전히 국가연합은 바른 제안이고 연방제안은 `불순`하다는 말인가. 또 묻자. 3대헌장 기념탑 부근 말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어떤 곳에서 축전을 벌이면 남쪽 대표들이 참관을 해도 괜찮다는 얘기인가. 참으로 궁색하면서도 구태의연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방북 대표들만 해도 통일축전에 참여하지 않을 바에야 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부문별 교류라면 금강산에서도 훨씬 더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야말로 칙사대접을 받으면서 관광이나 유람을 할 요량으로 방북을 한 셈인가. 따지고 보면 `돌출`의 실체는 허공에 떠돌고 만다.

이런 가운데서도 밤늦게 11시 조금 전에 예정대로 경축연회가 열렸다. 장소는 두 군데였는데, 그 한군데가 만수대 예술극장이었다. 여기에는 남쪽에서 온 사람들 말고도 해외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노래와 춤 공연이 있은 뒤 만찬이 시작됐다. 이 자리에서 초청자인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 위원장의 연설이 있었다. 그는 "통일을 지향하는 겨레의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합쳐 막을 올린 오늘의 통일 대축전은 민족의 통일염원과 혈육의 정이 뜨겁게 분출된 민족대화합이었다"면서 "우리 민족은 언제나 자기의 존엄을 굳게 지키고, 6.15 공동선언의 기치 밑에 통일 성업의 실현에 더욱 박차를 가해 나가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연합뉴스 8월 16일자).

연회가 열린 만수대 예술극장은 1976년에 준공된 대형건물로서 연 건축면적이 6만 평방미터에 이르고, 무대 면적은 2천 평방미터로 수 천명이 한꺼번에 출연할 수 있다. 극장 안에는 소극장을 비롯하여 대휴게실, 방송설비 등 각종 부대시설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극장 벽에는 대형 벽화 `구룡연 계곡`을 비롯하여 조선화, 조각, 공예품 등이 장식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대형 연회장에서 남과 북 그리고 해외 참가 대표들은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나누며 얘기꽃을 피웠고, 여기저기서 "조국의 자주통일을 위하여"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방북 첫날은 숱한 논란의 여지를 남긴 채, 이렇게 끝이 났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통일을`

둘째 날인 8월 16일 오전 행사로 평양 대동강 구역 청년중앙회관에서 `새 세기 청춘들의 통일련대 무대`가 연출되었다. 청년중앙회관은 `평양축전` 준비시설의 하나로 1989년 5월 건립된 종합적인 사회교육·문화시설이다. 건물은 2천 석 규모의 대극장과 수백 석 규모의 소극장 부분, 다목적 중앙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소극장에서는 가극, 음악 및 무용공연은 물론 회의도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 중앙홀은 군중집회를 비롯해 심포지움과 공연, 전시회 등의 목적에 따라 자유롭게 변형이 가능한 특수시설이다.

이날 행사를 위해 남측에서는 한총련과 한국청년단체연합 대표들이 참가했고, 북측에서는 조선학생위원회,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범청학련 북측본부 대표들이 참가했으며, 해외 대표로는 재일본조선청년동맹, 재일한국학생협의회, 재중조선청년연합회 등이 참가했다. 청년·학생들은 준비해온 각종 노래, 사물놀이 등 공연과 연설을 통해 친선을 다졌다. 젊은이들이 펴는 무대는 나름대로 생기 넘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들이 장년이 되기 전에 민족통일이 기필코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차마 떨칠 수가 없었다. 공연장 벽에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걸렸는데, `붉은 기는 달려야 펄럭인다`는 글귀였다.

이날 점심 식사 때는 그 유명한 옥류관에서 냉면을 맛보게 되었다. 옥류관은 1960년 8월 15일 문을 연 식당으로, 대동강 기슭 옥류바위 위에 합각식 지붕을 하고 있었다. 이 식당은 본관과 별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관의 연건축 면적은 5800평방미터이고 좌석수는 2200석이며, 1988년 9월 확장된 별관의 연건평은 7천 평방미터라고 한다.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옥류관 냉면은 메밀로 반죽한, 면질이 서울 냉면에 비해 부드럽고 육수 맛도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일행 가운데는 두 그릇을 먹는 사람들도 더러 눈에 띠었다.

오후에는 인민문화궁전에 들려 `일제 만행 및 역사왜곡 책동 공동 사진전`을 관람한 뒤, 거기서 부문별 회의를 열었다. 인민문화궁전은 `근로자의 사상·문화교육 및 문화적 휴식을 위한 대전당`으로서 크고 작은 방들이 5백 개에 이른다고 한다. 연 건축면적은 약 6만 평방미터이고 3천 석 규모의 대회의장과 약 7백 석의 대연회장 등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통일운동의 주축으로 나선 노동세력

1층의 한 널찍한 회의실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그리고 직총 대표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그 동안 진행된 노동계 교류와 사업을 확인했으며 앞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연대조직인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 노동자회의`(통노회) 운영을 중심으로 토의했다. 여기서는 통노회 1차 대표자회의를 빠른 시기에 소집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었고, 남북 노조의 연대와 단합을 산별과 지역조직에까지 폭넓게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민족통일을 추진하는 데서 노동자계급의 역할과 책무가 막중하게 규정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노동자는 사회의 유지·발전과 역사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자 선도자이고,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나갈 주체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은 광범한 역량을 지닌 조직되고 단결된 자주적 세력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런 특성을 지닌 노동자가 조국통일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통일시대`를 여는 데서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오후 5시 조금 넘어 봉화예술극장에서 노래와 무용 등 공연을 관람했다. 봉화예술극장은 1982년 준공된 극장으로 2천 석의 대극장과 8백 석 규모의 소극장을 갖추고 있다. 이 극장에는  직경 10미터의 이동식 회전무대를 비롯하여 악사승강무대, 방창이동무대, 수평이동무대 등이 있어 무대를 교체하기가 편리하게 되어 있다. 이 극장에서는 연극, 음악, 무용 공연을 주로 하고 있으며 평양예술단의 주된 활동무대다.

이날 공연에는 남과 북 그리고 해외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남쪽에서 온 가수의 노래가 공연되었고, 임수경씨의 시(문익환 목사의 통일에 관한 시) 낭송도 참석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마지막에 공연된 `눈이 내린다`는 무용은 눈 내리는 장면을 영상으로 기묘하게 처리하여 그것을 배경으로 삼아 `붉은 여 전사`가 압제에 저항해 이를 이겨내는 내용을 형상화한 것으로 깊은 인상을 던져주었다. 이 무용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연출했다는 설명이다.

저녁에는 통일축전 폐막식 참여를 둘러싸고 다시 논란이 일었다. "3대헌장 기념탑에서 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통일거리 낙랑구역 통일다리에서 행사에 합류하기로 한다"는 방안이 추진본부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으나, 통일연대 소속 인사들은 밤 9시 넘어 폐막식장으로 향했다.

폐막식은 간단히 끝났고, 경축 연회 예술공연이 뒤이어 열리고 폭죽이 터지는 가운데 `조국통일 만세`, `통일된 조선민족 만세` 등을 외치는 모습이 여기 저기 목격되었다. 마지막에는 군중들이 `통일 아리랑` 노래에 맞춰 기차놀이를 하면서 `조국통일`을 연호하기도 했다.

`만경대 정신`의 왜곡과 편파적 매도

원칙과는 거리가 먼, 내용 없는 토의가 지루하게도 오전 내내 계속되었다. 셋째날인 8월 17일 오전의 방북단 일정이 그러했다. 통일축전 개·폐막식 참관을 둘러싼 이른바 `돌출 행동`에 대한 남쪽 언론 보도 대응과 수습책에 관한 논의는 분명한 결론을 이끌 수도 없으려니와, 설사 결론이 난다 해도 남쪽에 돌아가 현실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오후 2시께 일정이 시작되어, 먼저 배를 타고 대동강을 유람하면서 평양의 여러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4시 반 무렵에는 만경대에 들려 김일성 주석 생가를 방문했다. `만경대 고향집`은 오래 전 평양의 어느 지주가 묘지기를 위해 지은 집으로, 김 주석의 증조부가 말년에 지주의 산과 묘지를 지키며 살았던 집이다.

"김일성 동지께서 1912년 4월 15일 이 집에서 탄생하시여 어린 시절을 보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찍이 10대의 나이에 고향집을 떠나 혁명의 장도에 오르시였으며 조국광복의 새봄을 안고 개선하시여 이 력사의 집에서 조부모님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시였다." 생가 들머리에 놓인 표지석에 새겨진 글귀다. 생가에는 조상들의 사진이 방안에 걸려 있고, 부엌과 곡간에는 가재도구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여기서 또 하나의 `돌출 행동`이 벌어졌는데, 다름 아닌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 "노동자계급이 앞장서서 조국의 자주적 통일 앞당기자" 등의 서명란 기록 관련 일이다. 결국 서명자에 대한 구속으로까지 사건이 확대되었는데, 이것은 서명자의 본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언론과 반통일 수구세력의 반격으로 진실이 왜곡되고 편파적으로 매도된 데서 빚어진 사악한 결과다. `공화국`을 방문한 처지에서 보면, 이런 일은 예사로운 것일 뿐 결코 `튀는` 행동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경대 생가를 나와 광복거리에서 남포까지 42킬로미터 10차선 고속도로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이 도로를 건설할 때 젊은 사람 5만여 명이 참가했다는 설명에서 건설 장비의 빈약함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공화국`이 겪는 `고난`이 에너지와 식량 문제를 핵심으로 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오후 6시 무렵, 방북단 일행은 동명왕릉과 전릉사를 찾았다. 이 능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분묘로서, 동명왕 탄신 2,291주년인 1993년 5월 개축되었다.

분묘는 높이 11.5미터로 160여 개의 큰돌을 32미터 사방으로 쌓아올려 만들어졌다. 1993년 5월에 개건(改建)된 동명왕릉의 기단(基檀)은 한 변 길이가 32m, 분묘 높이는 11.5m다. 묘앞의 좌우 양편에 호랑이·문무관·말 등의 석조상이 나란히 서 있고 능 앞에는 돌제단이 놓여 있다. 동명왕릉 묘역에 들어서는 입구 오른쪽에 개건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제당에는 시조왕의 생애를 그린 회화, 풍속화, 고구려인의 군사적 위용을 나타낸 회화들이 새겨져 있다.

1970년대 초 동명왕릉 내부구조가 다시 조사되었는데, 이때 벽면을 덮고 있던 석회를 씻어내리면서 벽화가 발견됐다. 벽화는 지름 12㎝의 연꽃무늬를 4.2㎝간격으로 해 사방연속무늬로 무려 6백여 개를 덮은 것으로 발굴보고서는 전하고 있다. 무늬의 바탕은 보라색이고 연꽃은 붉은 자색이었다고 한다. 

왕릉 아래쪽에는 정릉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1만 평방미터의 넓은 부지에 8각7층탑을 중심으로 보광전, 용화전, 극락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릉사는 동명왕의 명복을 빌고 동명왕릉을 지키기 위한 나라의 원찰(願刹)이었다고 한다.

이날 마지막 일정은 인민대학습당 방문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것은 8시가 넘어서였다. 이곳에는 밤늦은 시간인데도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천장이 높은 데 비해, 조명은 밝지 못해 안타깝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인민대학습당은 중앙도서관 또는 종합사회교육시설 개념의 건축물로서 1982년 김일성 주석의 70회 생일을 기념하여 평양 남산에 건립되었다. 10층 규모로 북한 최대의 `조선식 건물`인 학습당 내에는 3천만 부의 장서를 자랑하는 서고를 비롯해 6천 석 규모의 열람실, 강의실, 통보실, 문답실, 음악감상실, 시청각학습실 등이 있으며, 1일 수용 인원은 약 1만 2천명이나 된다고 한다.

묘향산도 백두산도 조국의 산하인데…

18일과 19일의 일정은 묘향산과 백두산 `탐승`이었다. 평양에서 버스로 두시간 남짓 걸려 묘향산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 조금 넘어서였다. 묘향산(妙香山)은 행정구역상 평안북도 향산군과 자강도 희천시, 평안남도 영원군의 경계상에 위치하고 있다. 묘향산은 산세가 기묘하고 수려하며 장엄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인용되는 서산대사의 표현은 이렇다. "금강산은 수려하나 장엄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엄하나 수려하지 못하지만, 묘향산은 장엄하고도 수려하다."

묘향산 어구 향산천 기슭에 있는 보현사는 `공화국`에서 가장 큰 절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총림 격이라고 한다. 보현사에는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이 일직선의 축선을 이루고 있고, 만세루의 뒤뜰 안에 유명한 8각13층탑이 서 있다. 대웅전 왼쪽으로 관음전, 영산전, 서산대사와 사명당, 그리고 처영 스님의 영정을 모신 수충사가 별채로 있다.

또 묘향산에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외국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전시해 놓은 국제친선전람관이 자리잡고 있다. 1978년 8월 건립된 국제친선전람관은 김주석이 받은 선물을 전시하는 6층 규모의 한식건물과 김국방위원장이 받은 선물을 전시하는 2층짜리 양식건물(1989년 3월 건립)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전람관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당과 국가 수반, 여러 국제기구들과 단체, 정치계와 사회 각계 지도자와 인사들이 보낸 수많은 진귀한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람관을 대강 대강 둘러보는 데만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점심 식사는 향산호텔에서 했는데, 음식은 매우 정갈했다. 이 향산호텔은 세모뿔 모양의 15층 건물로, 이는 주변의 산세를 막지 않도록 고안한 것이라 한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는 만폭동까지 짧은 등산을 하면서 묘향산의 한 자락을 밟을 수 있었다. 고려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8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19일 일정은 백두산 등정이었다. 오전 8시 15분 순안공항을 출발하여 1시간 가량 걸려 삼지연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소형버스로 출발하여 백두산 꼭대기까지 올랐다. 백두산은 해발 2,750미터로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백두산은 약 100만 년 전 깊은 땅 속으로부터 분출한 용암으로 형성된 화산체다. 총면적은 5,350평방 킬로미터다. 서기 1117∼1167년에 화구에서 흰 부석(浮石)이 분출하여 백두산 일대를 덮었으며, 그 뒤 화구에서 물이 솟아 오늘의 천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자연호든 화산호든 간에 백두산 천지처럼 고지대에 위치하고, 이처럼 크고 깊은, 독특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는 호수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천지의 둘레 길이는 14.4킬로미터고, 평균 수심은 213.3(최대 깊이 394)미터다.

방북단이 백두산에 올랐을 때, 하늘은 화창하게 개어있었고 천지는 온몸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 구름이 몰려와 비바람을 몰아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들 사진 촬영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한시간 반 가량 머무는 동안 신기하게도 날씨는 변화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광경은 정말 드문 일이라는 것이 백두산을 여러 번 찾은 사람들이나 안내자들의 공통된 얘기였다. "조국 통일을 위해 애쓴 사람들에 대한 하늘의 은총이다"는 말이 실감을 자아내는 대목이었다.

백두산을 내려오는 길에 풀밭에서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백두밀영 고향집`과 삼지연을 둘러볼 수 있었다. 백두밀영은 김일성 주석이 1936년부터 1943년 봄 무렵까지 사용한 밀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가라 하며, 당시 사용하던 물건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삼지연은 백두화산과 그 주변 화산의 분출물이 흘렀던 천을 따라 물이 모여 이룬 호수로, 3개가 나란히 있어 삼지연으로 불린다. 삼지연 호반에는 김일성 주석이 1939년 5월 21일 `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이끌고 무산지구에 진출하여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건립한 기념비가 있다. 여기에는 김일성 주석동상을 중심으로 많은 대형 조각들이 설치되어 있다.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8시 반을 지나서였다. 어제 둘러 본 묘향산과 오늘 오른 백두산도 분명 조국의 산하인데,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인지에 생각이 미치자 아득하다는 느낌이 다가왔다.

`애국렬사릉`에 잠든 `남조선혁명가`

평양에서 보내는 날 오전에 `애국렬사릉`을 찾았다.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는 묘비구역 입구 정면 추모비에 새겨진 문구는 이곳에 잠든 인물들의 면모를 대강이나마 짐작케 한다. 여기에는 5백여 개에 이르는 하얀 비석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묘비의 상단에는 묻힌 이의 `돌사진`이 부착돼 있고, 그 아래로 이름과 생전의 신분, 생몰 연월일이 차례로 새겨져 있다.

`조국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해방을 위하여 영웅적으로 싸운 혁명렬사` 100여 명은 대성산 혁명렬사릉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과거 김일성 주석과 함께 항일빨치산 투쟁을 했거나 그와 직간접으로 연계를 맺고 활동한 인물이 묻혀 있다.
 
애국렬사릉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안치돼 있다. `남조선 혁명가`에 해당하는 김삼룡, 리현상, 김달삼, 리덕구, 방준표, 박영발, 최백근 등의 묘비가 있고, 남쪽에서 북으로 올라간 사람들 가운데는 허헌, 홍명희, 리극로, 백남운, 리기영, 김석형 `선생`의 묘비가 있다. 그리고 비전향 장기수로 북쪽에 송환되어 올해 죽은 `불굴의 통일애국투사` 윤용기, 리종환의 묘도 있다.

애국렬사릉을 뒤로하고 내려오면서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민족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여기 묻힌 사람들의 `위훈`은 과연 어떻게 평가될까 하는 것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이룩되든, 다른 나라 경우처럼 다양한 형태의 사적(史跡)으로 보존될 수 있을지를 떠올리는 것은 허망한 일일까.
 
다음으로 찾은 곳은 대동강변에 높이 솟아 있는 주체사상탑이다. 이 탑은 김일성 주석 탄생 70주년인 1982년 4월15일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주체사상탑은 150미터의 탑신 정상에 높이 20미터  무게 45톤의 봉화 형상이 올려져 있다. 봉화는 주체사상의 진리성과 그 빛나는 승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탑의 정면에는 높이 30여 미터의 3인상이 건립되어 있는데,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지식인이 망치와 낫, 붓을 맞잡고 추켜든 모습이다.

기단 전면에는 `누리에 빛나라 주체사상이여`라는 헌시가 새겨져 있다. "만민의 념원이 하나로 모여/ 여기 탑으로 솟아오르고/ 인류가 맞이한 새 시대를 밝히며/ 주체의 홰불은 누리에 타오른다"로 시작하는 이 헌시는 중간에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사람, 가장 힘있는 존재도 사람, 사람이 세계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임을 인류에게 밝혀주신 주체의 위대한 태양 김일성 동지!"라는 구절을 담고 있다. 탑신 좌우에는 6개의 부주제 군상이 화강암 조각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의 꼭대기까지 승강기로 오르면, 이곳은 평양 시내를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 구실을 한다. 대동강과 강변의 공원, 푸른 숲, 고층건물, 대형 분수 등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풍광을 펼쳐 보인다.

주체사상탑을 둘러본 뒤 방문한 곳은 쑥섬이었다. 쑥섬은 김일성 주석이 1948년 5월 2일 남북연석회의(4월 개최)에 참가한 김구선생을 비롯한 남측 대표들과 협의회를 조직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섬에는 아직도 당시의 원두막, 회의 장소, 나룻배가 원상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높이 13.5미터의 통일전선탑이 높이 서 있다. 탑의 뒷면에는 쑥섬 협의회 참가 정당, 사회단체 이름이 새겨져 있고, 참가 대표들이 명시되어 있다. 김일성 주석을 비롯하여 김책, 김구, 김규식, 홍명희, 백남운, 조소앙, 엄항섭 등이다.

오후 일정은 평양학생소년궁전 방문이었다. 이곳은 학생 소년의 과외교육의 전당이라는 설명이다. 1963년 9월에 창립된 이 건물은 연 건축면적이 약 5만 평방미터이고, 여기에는 200여개의 각종 연구실과 서클 활동실을 포함하여 500여 개의 방이 있으며, 도서관, 실내 체육실, 대형 극장 등이 갖추어져 있다. 시내 각 학교의 소년 소녀들이 방과후 이 곳에 와 서클별로 과외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방마다 노래, 가야금, 수예, 붓글씨 등의 과외활동을 하고 있는 소년 소녀들이 많았고, 실내 수영장에서는 수영을 하고 있었다. 과외활동을 둘러본 뒤,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 학생 소년들의 노래와 연주 그리고 춤은 매우 경쾌하고 씩씩하여 청중들을 매료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만수대창작사였다. 만수대창작사는 1959년 11월 17일 창립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의 창작단체이다. 여기에는 조선화창작단, 유화창작단, 벽화창작단, 조각창작단, 수예창작단, 보석화창작단, 만년화창작단, 공예창작단, 도자기창작단, 출판화창작단, 부동산개발창작단 등 각 분야별로 세분된 20여 개의 창작단과 제작단에 100여명의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가 있고, 4,500여 명의 성원(창작가와 지원인원, 만수대해외개발회사그룹 및 고려무역상사 포함)들이 소속되어 회화, 조각, 공예, 출판미술, 산업미술, 건축장식미술 등 각종 순수예술과 공예 예술품을 창작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만수대창작사에는 조선화를 비롯해 그림, 수예, 조각, 도자기, 공예 등이 전시되어 판매하고 있었다. 방문자들은 그림, 수예품, 도자기 등 각자 몇 점씩을 구입하고는 바쁘게 돌아왔다.

이날 밤에는 남측 추진본부가 주최한 만찬이 대동강 양각도 호텔에서 열렸다. 여러 가지 곡절과 논란을 빚기도 했지만, 1주일 동안의 빠듯하고 분주한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그 동안 줄곧 함께 지냈던 남쪽 대표들과 북쪽 관계자들 사이에도 친숙함이 익은 듯 했다. 노동계의 경우는 `동지`라는 호칭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만찬은 밤늦게 마무리되었다.

통일운동의 새 장을 열어가기 위해

8월 21일, 방북단 일행은 남으로 내려갈 채비를 서두르면서 그다지 홀가분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전 회의에서도 그 동안 부문별 회의에서 합의한 사항들을 강조하는 한편, `공동보도문`에 상당한 기대를 거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2001 민족통일대축전 공동보도문`의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적극적 실천, 자주적 평화통일 실현과 민족의 안전·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민간단체들의 연대, 2002년 광복절 57돌 서울 행사에 북측 대표단의 서울 방문, 다방면적인 협력 교류 활성화, 일제 만행 및 역사왜곡에 대한 공동대응 등이 그것이다. 마지막 회의에서 확인된 부문별 성과는 남북 종교인들 사이의 대화와 교류, 비무장 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평화촌 개최,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 노동자회의(통노회)의 조속한 개최, 남북 여성통일대회 개최, 농민단체의 교류협력 확대, 남북 청년학생 통일대회 개최, 김정일 위원장 답방 환경 조성을 위한 민간단체의 노력 등에 걸친 합의 등이었다.

2001년 민족통일 대축전 참여를 위해 `조선인민공화국`을 방문한 남측 대표 340여 명이 이날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대표 16명에 대한 연행 사태가 벌어지고, 극우 반통일 세력들이 목소리를 한껏 높이고 있었다. 결국 범민련 남측본부 간부들과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구속되고,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해임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퇴행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통일축전 방북은 그 규모가 300명을 넘고, 신조와 사상, 이념을 달리하는 다양한 부문과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동행했을 뿐만 아니라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모두가 뜻을 모았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조국통일은 결국 이런 과정들이 이어지고 쌓이며, 차원을 높여나감으로써 그 실현의 구체적 방도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쪽에서 머무는 동안, 평양의 8월 하늘은 드높고 푸르렀다. 이것이 통일축전에서 분출된 조국통일에 대한 소망이 기어코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상징한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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