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타자다(랭보)


 매우 가벼운 담론
 - 조말선

 한 쌍의 질문을 새장 속에 가둔다. 시금치를 먹고 크는 질문 한 쌍. 멸치를 먹고 크는 질문 한 쌍. 모이를 줄 때마다 궁금한 얼굴로 묻는다. 우리는 언제 날 수 있죠? 언제 대답이 되죠? 새장은 날마다 작아지고 있다. 질문은 구슬프게 노래 부른다. 질문의 깃 속에 질문을 파묻고 잠든다. 질문들은 성숙해진다. 질문들은 스스로 대답을 낳는다. 새장 속에 한 개의 둥근 대답이 있다. 스무 날 품은 대답. 의혹이 품은 대답. 대답 속에서 촉촉한 질문 하나가 태어난다.


 ‘대화가 부족해!’

 우리는 항상 대화에 굶주려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대화가 정말 대화일까?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대화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고진은 그런 대화는 독백(monologue)이라고 말한다. ‘하나(mono)의 말의 법칙(logue)’만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이 맞는 대화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독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도 많은 대화를 했건만 돌아서고 나면 마음이 허전했던 것이다.

 대화(Dialogue)란 ‘둘(dia)의 말의 법칙(logos)’이 만나야 가능했던 것이다.

 대화란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는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꾸만 마음이 맞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 할까?  

 편하게 살고 싶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편하게 사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행복은 자신의 ‘이성(理性 logos)’을 탁월하게 가꾸어야 가능하다.”

 자신의 이성을 탁월하게 가꾸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충만해 오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성을 탁월하게 가꾸어가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남(타자)과 대화를 해야 한다.  

 ‘말의 법칙(理性 logos)’이 다른 사람과 만나 서로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만나고 싶은 것은 유아(乳兒)의 유아(唯我) 심리일 뿐이다.

 오로지 자신밖에 모르는 아기는 끊임없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만 좋아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의 아기와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

 전혀 다른 우주를 가진 사람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성숙한 한 인간이 된다.

 하나의 알 속에서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독백만하는 삶.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허무하기만 했던 것이다. 

 우리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리고 날아올라야 한다.

 나와 네가 만나 무궁무진하게 생성해내는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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