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4.28 평화협상과 5.1 오라리 방화사건
 
4.3무장봉기 후 제주도당은 4월 15일 당대회를 개최하고 조직을 개편했다. 단선저지와 통일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무장조직을 정예화했다. 군사부는 우세한 토벌대의 집중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전투적 능력이 있는 전사들을 모아 ‘인민유격대’를 조직했다. 3개 연대로 편성된 유격대 대장은 김달삼이 맡았다. 또한 정찰임무를 맡은 특공대와 우익단체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별동대를 조직하는 한편, 각 지대와 소대에 ‘정치소조원’을 배치하여 정치교육을 시켰다. 당과 유격대, 그리고 민중과의 연대를 강화하여 투쟁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주1)

한편, 4.3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때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던 경비대 제9연대는 이를 치안 상황으로 판단, 군이 개입할 사건은 아니라고 보았다. 하지만 경찰력만으로 사태 제압에 한계를 느끼자 미군정 수뇌부는 4월 17일 미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을 통해 경비대 제9연대에 진압작전에 참여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딘 군정장관은 맨스필드에게 “대규모의 공격에 임하기 전에 소요집단의 지도자와 접촉해서 그들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는데 모든 노력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의 평화협상. [사진제공-임영태]

맨스필드 중령은 딘 소장의 지시대로 무장대의 귀순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유해진 지사, 김정호 제주비상경비사령관,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그리고 제주도 민족청년단장에게 책임자로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은 겁이 났는지 모두 핑계를 대고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맨스필드 중령은 김익렬 연대장에게 무장대와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라고 지시했고, 김익렬 연대장은 무장대와 접촉, 김달삼과의 4.28평화협상이 열렸다.

협상 전 맨스필드는 김익렬에게 “1) 제9연대장 김익렬은 폭도와의 평화회담에 필요한 일체의 권한행사에서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을 대리한다. 폭도들의 살인 방화 등 범법자에 대한 재판에서 극형을 면할 수 있는 사면의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며 기타 범죄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친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서면으로 조인된 모든 약속의 이행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이 책임진다. 2) 요구조건은 즉시 전투중지, 무장해제, 범법자의 자수와 범법행위의 장소‧일자‧범법자 명단의 작성 제출” 등의 권한과 요령에 대해 알렸다.(주2)

김익렬 연대장은 4월 28일 정오 모슬포 연대본부를 떠나 회담 장소인 대정면 구억리로 가서 김달삼을 만났다.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다음과 같은 내용에 합의했다.

1)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2)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3)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또한 귀순 절차는 회담 다음날에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각각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고 점차적으로 서귀포‧성산포 등지에도 수용소를 세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한다고 합의했다.(주3)

하지만 김익렬이 주장하는 이 합의 내용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든다. 왜냐 하면 4.3봉기의 주된 목적이 단선저지와 통일정부이었던 무장대가 무장해제와 하산을 수락한 점이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장대의 김달삼은 전술적인 차원에서 경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회담에 응했고 실행 불가능한 요구조건을 내걸기보다는 경비대를 중립화시킬 수 있는 수준에서 협상을 성사시킨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4.28회담 후에도 무장대는 5.10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결국 제주도의 두 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선거구는 과반수 이하로 투표가 되어 무효가 선언되었다.

그럼에도 4.28 평화합의가 이행되었다면 제주도의 상황 전개는 달랐을 수 있다. 평화협상대로 진행되었다면 경비대의 개입과 미군의 강경진압 명분이 약했을 것이고 대량학살의 가능성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벌어진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이 파기되면서 미군정의 강경진압 정책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미군의 지원 아래 경찰과 우익청년단(서청‧대청)이 조작한 것으로(주4) 평화협상을 결렬시키고 강경진압의 명분을 확보하는데 명분으로 작용했다.

▲ 불타는 오라리 … 물거품 된 평화협상. [사진제공-임영태]

5월 3일 딘 군정장관 등 미군 수뇌부는 무장대를 총공격해 제주사건을 단시일 내에 해결하라고 경비대총사령부에 명령했다. 무장대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어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귀순공작’ 대신 무력에 의한 강경진압책을 선택한 것이다. 미군정 수뇌부는 5월 1일 메이데이 사건과 상관없이 이미 무력진압 방침을 결정했고 따라서 평화협정은 어차피 파기될 운명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주5)

한편 5월 3일 같은 날,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에 따라 ‘귀순’을 위해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무리로부터 총격을 받으면서 평화협상이 완전히 깨졌다. 경비대 조사에 따르면 이날의 총격은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을 방해하기 위한 경찰 특공대의 짓’으로 밝혀졌다. 미군정의 강경진압방침과 함께 경찰이 무장대와 경비대 사이의 평화협상을 깨기 위해 쐐기를 박은 것이다.

미군정의 강경진압책과 유격대의 5.10선거 저지

1948년 5월 5일 딘 군정장관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사령관(준장) 등을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는 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경찰감찰청장 최천과 딘 군정장관의 전속통역관 등 모두 9명이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사태의 성격과 원인을 두고 경찰과 경비대의 의견이 엇갈렸다. 먼저 최천 제주감찰청장이 4.3사건을 두고 ‘국제공산주의자들이 사전에 계획한 폭동’이라며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군‧경 합동작전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익렬 연대장은 폭동이 복합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고 입산자들이 늘어난 것은 경찰의 실책에도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적의를 가진 폭도와 일반 민중 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도민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무력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김익렬은 경찰의 행동을 의심할만한 물적 증거물과 사진첩을 제시했다.

이에 딘 장관이 조병옥 경무부장을 향해 “닥터 조, 당신의 보고내용과 다르지 않소”라고 질책을 하자, 조병옥은 그 증거물과 사진첩이 모두 조작된 것이라며 김익렬을 공격했다. 조병옥은 김익렬을 향해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라고 외친 다음, ‘김익렬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로서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주의 간부로 활약하고 있으며, 김익렬은 자기 아버지의 지령을 받아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격분한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면서 몸싸움이 벌어졌고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주6)

회의 뒤 바로 서울로 돌아온 딘 장관은 다음날(5월 6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이번 폭동에는 도외(道外)에서 침입한 소수의 공산분자들의 모략에 선동되어 양민들이 산으로 들어가서 현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제주도는 평온하고 이 사건도 경찰과 경비대의 노력으로 곧 회복될 것이다”라고 했다. 군정 수뇌부는 이때 처음으로 사건의 배후가 ‘도외에서 침입한 공산분자’라고 지적했다.(주7)

▲ 김익렬 연대장 전격 해임. [사진제공-임영태]

이와 함께 5월 6일 제9연대장을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했다. 박진경은 일제 말기 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취임연설에서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말할 정도로 강경한 진압책을 표방했다. 박진경은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무조건 연행하는 강경책을 폈고 6천여 명이나 체포되었다. 이러한 강경진압은 딘 군정장관의 찬사를 받았고, 그 덕분에 박진경은 6월 1일자로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박진경 연대장은 강경진압책에 반발한 경비대 내의 군인들에 의해 6월 18일 암살되고 말았다.(주8)

김익렬 본인도 모른 채 이뤄진 연대장 교체는 결국 미군 수뇌부가 5월 5일 회의 이전에 이미 무력진압 방침을 결정한 상태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회의는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안재홍 민정장관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기 위한 절차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5월 5일의 제주도에서의 수뇌부회의와 5월 6일의 김익렬 연대장 교체를 통해 미군정은 제주도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기 위한 강경방침을 확실하게 내비쳤다. 이와 함께 미군정은 미군과 경비대, 경찰, 향보단까지 총동원해 5.10단독선거 참여를 독려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강력한 대처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서는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5.10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남한에서 5.10선거가 저지된 것은 제주도가 유일했다.

5.10선거가 저지된 이후 미군정의 물리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군경 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5월 중순경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며 자신의 목적을 간단히 밝힌 브라운 대령이 광주로부터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수립, 시행되었다. 그는 민경관계의 악화, 미군정 현지부대의 통제 실패, 군경합동작전의 미흡 등을 지적하며 단호한 강경진압전술을 전개했다.(주9) 무장대는 간헐적으로 지서 습격 등 경찰과의 전투를 벌이면서도 경비대원이 나타나면 대응하지 않고 도주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한편, 경비대 총사령부는 1948년 5월 4일 수원에서 창설된 제11연대를 5월 15일 제주도로 이동시키면서 기존의 제9연대를 제11연대에 합편시켜 박진경을 초대 연대장에 임명했다. 박진경 부임 직후인 5월 20일 경비대 병사 41명이 집단으로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진압작전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제주도 출신 병사들이 진압작전에서 소외되면서 강경작전을 더욱 부추겼다.

그와 같은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마침내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 사건으로 이어졌다. 박진경 암살 이후 최경록 중령과 송요찬 소령이 연대장과 부연대장을 맡았는데, 이들은 모두 일제 때 전투경험을 쌓은 일본군 준위 출신으로 미군정 시기에 나란히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다. 이들은 부임 후 박진경 암살범 색출에 주력하는 한편, 전임 연대장과 같은 강경 진압작전을 계속 추진했다.(주10)
7월 15일에는 경비대 제9연대를 부활시키면서 연대장에 부연대장인 송요찬 소령을, 부연대장에는 서종철 대위를 각각 임명했다. 최경록의 11연대는 제주출신인 본래 9연대 병력만을 계속 제주도에 남겨둔 채 7월 24일 연대 창설지였던 수원으로 철수했다. 이는 정부 수립을 앞두고 제주 상황을 확실히 마무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군은 부연대장 송요찬의 “강인하고 용감한 점”을 높이 샀다. 최경록에 대해서는 주변의 신망을 받기는 하지만 온건하다고 본 것이다. 7월 12일자 미군 비밀문서는 제주도 상황에 대해 “반란이 계속됐으나 6월 하순 접어들면서 평정이 가시화되고 있”다고 보았으며, “작전이 더딘 것은 경비대가 학살이라는 수단으로 반란을 진압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주민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최경록은 ‘학살을 꺼려 작전이 지연되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9연대 고문관 피쉬그룬드에 따르면 송요찬은 ‘매우 터프한 사람’이었다. 9연대 참모들의 증언도 이와 일치했다.(주11)

경비대의 이러한 무차별적인 토벌 작전은 국방경비대에 대한 유격대와 일반 민중의 호의적인 태도를 적대적으로 변화시켰다. 유격대는 강경토벌 작전에 산속으로 이동하여 교전을 피하는 한편, 앞으로의 투쟁에 대비하여 조직을 재편했다. 박진경이 암살된 6월 18일부터 7월 15일에 걸쳐 조직을 개편했는데, 이는 경비대의 강경토벌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그동안 유격대를 지휘하던 도 군사령부가 당조직에서 독립하여 본격적인 무장태세를 갖추었고 최고사령관, 정치부원, 작전참모의 3인으로 최고 지도부를 구성했다. 이후 제주도에서는 도 군사령부의 주도하에 투쟁이 전개되었다. 유격대의 산속 이동과 교전 회피, 남북한 정부수립을 앞둔 상황에서 내부적인 정치적 준비 등으로 7월과 8월에는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소강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강경진압작전을 위한 폭풍전야의 고요

제주4.3사건은 길게는 1948년 4월 3일의 무장봉기로 시작해서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빨치산 오원권이 생포될 때까지 만 9년에 걸쳐 전개되었다. 하지만 실제적인 사건 전개는 1948년과 1949년 봄까지 집중되었다. 4.3사건은 전체적으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기는 4.3봉기에서부터 5.10단선 반대투쟁이 전개되던 때까지이다. 둘째 시기는 남한에서 단선이 실시되고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된 시기이다. 단선 이후 미군정과 군경의 강경한 토벌작전으로 유격대가 방위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때이다. 이때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은 인민공화국 정부수립으로 투쟁 방향을 정했다. 셋째 시기는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제주도에서 초토화 작전과 함께 대토벌 작전이 시행되어 무장투쟁이 사실상 종말을 고한 시기이다.(주12)

4.3희생자의 대다수는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 사이에 발생했다. 그와 같은 대량학살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 있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군 통수권자였고,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주13)

제주도라는 고립된 섬에서 한라산을 근거로 한 수백 명 수준(가장 많을 때에도 500명을 넘지 못했다)의 무장 세력이 국가 전체를 위협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고를 한다면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무장대원뿐만 아니라 엄청난 수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그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명백한 범죄행위이다.(주14)

7, 8월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제주도에서 9월부터 다시 사태가 악화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8월 29일 전국 각 경찰관구에서 차출된 응원경찰대 800명이 제주도 들어온 데 이어 또 다시 대규모 응원경찰이 증파되었다. 정부는 경찰 증파에 이어 제주도 근해 괴선박 출몰설, 무장대의 재출현과 한림서장 살해사건과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 등의 해주 남조선인민회의 참석 등을 유포하며 긴장 분위기를 조성했다.

▲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의 해주대회 참석은 남한 정부를 자극하는 요인이 됐다. [사진제공-임영태]

그동안 유격대는 ‘8.25 지하선거’ 준비와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김달삼 등 핵심지도부가 제주도를 떠남에 따라 공세를 늦추었고, 토벌대 또한 정부 수립을 앞두고 있는데다가 우기로 인해 진압작전이 지연되면서 소강상태가 유지됐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평화적인 해결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기대를 높여주었지만 정부와 미군은 강경 방향으로 몰아갔다.

정부가 이런 강경입장으로 나아간 것은 남북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지면서 남한 내부의 저항을 북한과 연계해서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도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남한 정부를 출범시킨 미국 또한 같은 사고를 하고 있었다. 남과 북에 두 개의 적대적인 정부가 수립되면서 남한 내부의 “아무리 정당한 저항일지라도(예컨대 부정, 부패, 탄압, 착취에 대한 저항일지라도) 모두 적대적인 상대방과 연계된 붕괴음모라고 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마련되었다. 이는 제주도에서의 진압이 미군과 정부군에게 북한의 도전에 대응하고 소련․북한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아가 “그러한 명분은 얼마든지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진압해도 정당화된다는 논리”로까지 발전했다.(주15)

이제 남한정부에게 제주도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다. 또 주한미군 철수를 앞두고 있는 미국에게는 냉전 초기 자신들이 만들려는 세계질서에 가장 큰 걸림돌로 등장했다. 따라서 정부와 미군사고문단은 제주도를 평정하기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갖추어 가고 있었다.

8월 25일 비상경비사령부의 ‘최대의 토벌전이 있으리라’는 포고문에 이어 8월 28일 수도관구경찰청 소속 경찰관 800명이 제주도를 향해 출발했다. 8월 30일에는 제주도 제9연대를 예하에 두고 있는 광주 제5여단 참모장 오덕준 중령이 여단장을 대리하여 “사태를 조속히 해결코자” 제주도를 순시했다. 이처럼 그동안의 소강상태는 향후 다가올 대규모 진압작전의 준비기간이었고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은 것이었다.

제주도경비사령부 창설과 포고문 발표

강경진압작전은 10월 들어 전격적으로 단행된 제주경찰감찰청장의 교체와 제주도경비사령부의 창설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중앙정부는 제주도 출신으로 그동안 온건책을 지향해 온 김봉호 감찰청장을 10월 5일자로 사퇴시키고 그 후임에 평남 출신인 경무부 공안과장 홍순봉으로 교체했다. 이는 주요 관리들을 제주출신으로 등용해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겠다던 중앙의 방침이 변경됐음을 의미했다.(주16)청장 경질에 이어 제주도민에게 극도의 원성대상이었던 서북청년회도 대거 들어왔다. 서청을 지원하며 강공책을 채택했던 홍순봉 청장은 10월 6일자로 부임한 이래 이듬해인 1949년 7월 28일까지 10개월간 최대의 유혈사태 한복판에 서게 된다.(주17)

▲ 4.3사건의 한 원인이 된 서북청년단의 입도. [사진제공-임영태]

10월 11일 경비대총사령부는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사령관에는 광주주둔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이, 부사령관에는 제9연대장인 송요찬 소령이 각각 임명됐다. 제주도경비사령관에게는 제9연대와 부산에서 온 제5연대 1개 대대, 대구에서 온 제6연대 1개 대대, 해군함정(해군 소령 최용남 부대), 제주경찰대(홍순봉 경찰청장)를 통합 지휘하는 권한이 부여됐다. 또한 경비대총사령부는 제5연대 예하부대인 여수 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를 증파하도록 명령했다.

이와 함께 제9연대 미군사고문단은 진압전 때 가장 중요한 정보와 작전 부문에서 제주 출신을 철저히 배제했다. 나아가 진압당국은 폐지했던 여행증명제를 부활시켜 제주와 육지간의 왕래도 차단했다. 제주도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22개 정당사회단체들이 모여 구성한 제주도사건대책위원회가 ‘제주도 현지 조사단’을 파견했으나, 이들은 8월 28일 목포에 도착한 이후 목포항에서 끝내 승선이 거부돼 제주행이 좌절되었다. 제주도는 점점 고립무원의 섬이 되어갔다.(주18)

제주경비사령부 창설 6일 만인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것은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포고를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며,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한다고 했다. 드디어 진압당국이 본격적인 강경진압작전을 위한 내부준비를 끝내고 대량살상을 가져올 대토벌 작전을 대외적으로 예고한 것이었다. 

이 포고문에서 말하는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은 한라산 등 산악지역만이 아니라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 마을(주19)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통행금지란 결국 거주를 금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중산간마을에서 사람이 눈에 띄기만 하면 ‘폭도배로 인정해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전시상황에서도 어려운 즉결심판권이 발동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주20)

이 포고는 정부의 ‘최고 지령’에 따라 내려졌다고 했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통상 군에 ‘최고 지령’을 내릴 수 있는 기관으로는 대통령이나 군 수뇌부를 지목할 수 있지만 발령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같은 강경방침은 4.3발발 초기에 이미 가닥을 잡은 상태였다. 김익렬 장군은 회고록을 통해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 제주도폭동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고 언급했다. 김익렬 연대장 시절 9연대 정보참모였던 이윤락도 “CIC 소령이 김익렬 연대장과 나에게 해안선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를 적성(敵性)지역으로 간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다. 5월에 미군이 제안했던 작전이 5개월 만에 실제 상황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주21)
 
포고문이 발표된 다음날인 10월 10일 제주해안이 봉쇄됐다. 해군은 7척의 함정과 수병 203명을 동원해 제주해안을 차단했다. 이와 함께 여수 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가 제주도에 증파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19일 파병될 예정이던 제14연대가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강경작전은 더욱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여순사건’으로 위기를 느낀 정부와 미군은 여순에 대한 강력한 토벌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제주도 사태에 대해서도 기존의 강경토벌 방침을 가속화했다.

제14연대 반란 사건으로 김상겸 대령이 제주도경비사령관에서 파면되고 그 자리를 송요찬 9연대장이 겸임하게 되었다. 이로써 송요찬은 경비대와 제주경찰, 그리고 해군함정까지 지휘하는 명실상부한 진압군 총 책임자로 등장했다. 미군이 칭찬한 ‘터프한’ 송요찬이 지휘하는 초토화작전과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되면서 제주도는 ‘피의 바다’가 되어 갔다.(‘제주4.3사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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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양정심, 『제주4.3항쟁』(선인, 2008), 94~95쪽

2) 김익렬, 실록유고「4.3의 진실」,『4.3은 말한다』②(제민일보 4.3취재반, 전예원, 1994)315~317쪽); 제주4.3사건보고서, 193쪽

3) 김익렬, 실록유고, 위의 책, 326~329쪽

4) 5월 1일 오라리마을 부근에서 전날 무장대에게 살해된 여인의 장례식을  치른 뒤, 경찰은 떠나고 서청․ 대청 단원들이 오라리마을에 진입하여 좌파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집 10여채에 불을 질렀다. 이에 무장대가 우익청년단 추격에 나섰고, 소식을 들은 경찰이 출동했을 때는 이미 무장대가 마을을 떠난 뒤였다. 경찰은 마을 어귀에서부터 총을 쏘고 진입했고 이때 하늘에서 미군 비행기가 오랫동안 맴도는 것을 주민들이 목격했다. 소식을 듣고 경비대가 출동하자 경찰도 철수를 했다. 경비대의 조사결과와 달리 경찰은 방화가 ‘폭도들의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미국문서기록관리청(NARA)에는 오라리 방화사건을 찍은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라는 제목의 무성영화 필름이 보관돼 있다. 미군 촬영반은 오라리 방화사건을 입체적으로 촬영했다. 미군 비행기에 의해 불타는 오라리마을이 공중에서 찍혔는가 하면, 지상에서는 오라리로 진입하는 경찰기동대의 모습이 함께 촬영되었다. 긴박하게 돌아간 당시 상황들이 촬영됐다는 것은 미군이 미리 준비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군은 이 필름에서 오라리 방화사건이 무장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처럼 편집해 놓았다. 따라서 이 필름은 미군이 강경진압의 명분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결국 이 그 시점에서 미군의 강경진압책이 이미 결정돼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5) 제주4.3사건보고서, 201쪽

6) 김익렬, 실록유고, 위의 책, 338~342쪽

7) 제주4.3사건보고서, 204쪽

8) 박진경 암살사건에는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양회천 상사, 이정후 하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등 총 6명이 관련되었다. 사건 관련자들은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정에서 김익렬 전 연대장과 박진경 연대장의 작전을 비교하면서 자신들이 박진경을 암살하게 된 동기를 ‘무고한 토벌전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박진경 연대장을 저격한 손선호 하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은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했다. … 사격 연습을 한다고 하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난살하였으며 폭도의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장태욱, “우리나라 고급장교 살해사건 1호는?”, <오마이뉴스> 2008.5.9.)

9) 허상수, 앞의 책, 334쪽

10) 제주4.3사건보고서, 233쪽

11) 제주4.3사건보고서, 233~235쪽

12) 양정심, 위의 책, 85~86쪽

13) 미군사고문단은 형식적 측면에서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원을 한다’고 규정되었으나 실제로는 한국군을 지휘, 감독, 관리하고 있었다. 미군사고문관들은 미군의 명령 실행 여부를 감독할 뿐 아니라 사기 진작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을 동원했다. 나태하거나 군기가 빠진 한국군 장교를 면직시키는 것도 수시로 했기에 한국군 장교는 미군 고문관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작전 활동과 관련한 지침을 하달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과의 관계는 수직적 위계관계였다.(허상수, 앞의 책, 357쪽)

14) 제주4.3사건이 1948년에 만들어진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에 준거한 제노사이드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나뉜다. 유엔협약은 국가범죄에 의한 집단학살 일반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1949년 12월 9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92개국의 찬성으로 체결된 제노사이드 협약 제2조는 제노사이드를 “국민․인종․민족․종교 집단 전체 또는 부분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행위를 제노사이드 범죄라고 적시했다. ①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② 집단 구성원에 대해 중대한 육체적․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③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 조건을 집단에게 고의로 부과하는 것 ④ 집단 내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해 의도된 조치를 부과하는 것 ⑤ 집단의 아동을 강제적으로 타 집단에 이동시키는 것(최호근 지음, 『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책세상, 2005), 35~36쪽).

15) 박명림, 『제주도 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고려대 석사학위논문, 1988), 143~144쪽

16) 제주도 미국공보원장이었던 알버트 필립슨이 “제주도 소요 원인은 악질경찰의 폭행 때문이다. 그러나 김봉호 경찰청장 부임 후는 그런 일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김봉호 청장의 온건책이 민심수습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런 마당에 그의 경질은 강경책을 선택한다는 상징적 인사이자 민간인 대량학살의 신호탄이었다.

17) 제주도경찰국, 『제주경찰사』(1990), 489쪽

18) 제주4.3사건보고서, 263쪽

19) 제주의 마을은 ‘해변마을’과 ‘중산간마을’로 나뉜다. 행정상 중산간이란 ‘표고 200m 등고선에서 표고 600m 등고선 사이의 지역’을 의미한다. 그런데 통상 해변에서 5㎞이상 떨어진 지역의 마을을 ‘중산간마을’이라고 부른다. 5㎞미만 지역의 마을이라 하더라도 해변을 따라 형성된 일주도로변의 마을보다 산쪽에 위치해 있으면 보통 ‘중산간마을’이라고 한다.(제주4.3사건보고서, 264쪽)

20) 제주4.3사건보고서, 264쪽

21) 제주4.3사건보고서, 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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