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의 중심인물로 60년대 초반까지 북한 내각 문화상과 교육상 등을 지내다가 숙청됐던 월북작가 한설야씨는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의 직접 지시로 몇 년전 복권된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의 대표적 시인인 김 철씨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월간지 「조선문학」(8월호)에 기고한 수기 `20세기의 추억-작가의 참모습`에서 `우리는 한설야에 대해 퍼그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으나 장군님께서만은 잊지 않고 계셨다. 그가 쓴 작품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한설야가 문예부문의 책임간부임에도 불구하고 고기보다 채소를 좋아했고 호텔 침대보다 온돌방을 택하는 소박한 사람이었으며 비행기안에서도 글을 쓸 정도로 글과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시조를 써내고 판소리의 탁성을 허용하면서 복고주의적 경향에 빠져들었고 당조직 생활을 게을리하고 당의 영도체계와 어긋나게 행동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언젠가 김씨가 그의 집에 찾아 갔을 때 전기온돌까지 깐 요란한 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탁성을 내고 곱사등이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그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한설야의 작품집이 도서관 등의 서가에서 사라진지 오래고 그의 사진이 앨범에서 뜯겨나간지 오래됐으나 누구도 그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러나 몇해전 김 노동당 총비서가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리 애국열사릉의 돌사진들을 여겨보다가 한설야의 이름을 외웠다면서 김 총비서가 `추억의 말씀을 해주신 날 한설야는 영생하는 생명을 다시 받았다`고 그는 밝혔다.

김씨는 이어 한설야가 생전에 「황혼」「승냥이」「대동강」「개선」「력사」등 사상예술적으로 우수한 수많은 소설을 창작했으며 김 주석이 준 임무를 잘 수행하려고 애를 쓴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그의 열성과 재능, 통틀어 우리 당 문학건설에 기여한 그의 공로, 그의 작품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김 총비서가 기억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한설야가 8.15광복 이후부터 60년대초까지 김일성 주석의 지극한 사랑과 믿음속에서 초대 `북조선문학예술가동맹`(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평화옹호위원장 등을 역임한 사실을 언급했다.

그의 사망과 관련해서도 `수령님께서 친서를 보내주신 날 감당키 어려운 흥분을 눅잦히지 못해서 심장의 고동을 멈추고 말았다`고 전했다.

그는 노동당에서 한설야의 작품을 되살려 준지는 이미 오래됐다고 덧붙였다.

김씨의 주장처럼 김일성 주석과 그 일가족에 관한 소설만을 전문 창작하는 4.15문학창작단에서 처음 내놓은 장편소설「만경대」는 한설야의 작품을 원전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김 주석의 어린시절을 형상한 소설로 당시 작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집체창작`으로 출간됐다.

또 「조선문학사」(91년)「문학예술사전」(93년)「문예상식」(94년) 등 북한에서 출간된 문예관련 도서에서「황혼」등 한설야의 우수한 작품이 집중 조명됐으며 지난 98년에는 50편으로 제작되는 예술영화「민족과 운명」에서 그의 일대기를 취급하기도 했다.

한편 김 철 시인은 50년대부터 북한 시단을 대표한 유명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60년대 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정 러시아 장교의 딸과 결혼한 것이 문제돼 황해남도 한 탄광에서 약 20년간 노동을 했으며 70년대 후반 북한 최고의 시로 꼽히는 당을 형상한 시 「어머니」로 다시 문단에 설 수 있었다. (연합/200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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