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59회부터는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크게 드러나지 않으면서 신앙의 계보와 맥을 이어오고 있는 북측 가정교회(처소교회, 가정예배처소)를 다룰 것이다. 또한 북측 기독교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두 기관인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과 ‘평양신학원(평양신학교)’을 참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북측 기독교의 실상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남측이나 서구식 기독교의 일방적 관점이 아니라 ‘북조선식 사회주의 교회’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 필자 주 

 

왜, 재학생을 12명선으로 유지할까?
     
필자가 평양신학원 건물을 방문해 2층에 위치한 널찍한 강의실에 들어서자 모여 있던 열댓 명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은 일제히 “목사님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라며 반가워했고 민망하리만치 환영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진지하게 학업에 임하고 전념하는 모습들이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강의실, 도서관, 교육관 내부 벽면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성구(성경구절)들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령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약 2:25)”라는 신약성경 구절들은 물론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깊이 아는 것이 슬기이다.(잠언 9:10)”라고 씌여진 구약성경 구절이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 글씨로 새겨 있었다. 붉은 글씨로 씌여진 북 특유의 정치적인 구호에 익숙했던지라 막상 성경구절을 대할 때마다 움찔거리며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내게 또 한 가지 큰 의문과 함께 의미를 부여해준 것은 바로 현재의 재학생 숫자이다. 왜 하필 12명일까?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12제자를 연상시키려고 고집하는 것일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학생들의 숫자를 1972년 설립 이래 줄곧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물론 학업 기간 중간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변동이 생겨 때로는 9명 혹은 10명, 11명일 때도 있었지만 항상 12명이 기준선이었다. 필자가 볼 때 이런 조그련의 조치는 현재 1만 5천명의 기독교 신자를 보유한 북측의 형편으로 볼 때 가장 적정선이라고 보여진다.
    
목사 후보생들을 무분별하게 모집하거나 남발하지 않고 신자들의 숫자와 비례하면서 수위를 조절한 것이다. 현 평양신학원의 12명의 재학생에게는 선배나 후배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현재의 기수가 입학해서 5년간 학업기간을 모두 마치고 졸업을 해야 다시 다음 기수의 신입생을 모집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평양신학원은 그 동안 세 번째로 옮긴 장소이다. 1972년 설립될 당시에는 평양시내에 신설된 조그련 본부 건물에 부설기관으로 입주해 있다가 그후 1988년 11월, 평양시내 보통강 서편 만경대구역 건국동에 터를 잡은 봉수교회 마당 3층짜리 조그련 청사가 세워지면서 신학원도 그곳 3층으로 이전했으며 1층은 식당과 강당, 2층은 사무실, 3층에 신학원이 입주했다. 그후 다시  2003년 9월이 되어서야 현 봉수교회 건물 우측에 있는 동산에 캠퍼스를 조성하고 신학원 단독건물을 건축하며 이전한 것이다.

▲ 삼삼오오 강의실로 향하는 평양신학원 학생들.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을 가는 오솔길. 학교를 향하는 여러 개의 길이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강의실 내부 모습. 정면에는 예수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조그련 서기장을 겸하고 있는 평양신학원 오경우 교수와 함께. [사진제공 - 최재영]

 

▲ 대형 성화가 걸려 있는 교육관 세미나실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저희들도 주일학교 ‘꽃주일 례배’가 있긴 합니다
     
평소에도 북측 교회를 대할 때마다 필자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교회 안에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장년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세례식(침례식)과 성만찬식 혹은 기독교식의 결혼식과 장례식 등이 아직 정착하지 못한 부분들이다. 그러나 봉수, 칠골교회, 각 가정교회에서도 간혹 기독교 의식이 거행되는 것을 목격할 수는 있으나 보편화되거나 활성화되지는 않았다.
   
또한 국가사회의 특성상 북측 교회는 1년에 한두 번씩 치르는 부흥성회를 비롯해 주중에 드려지는 새벽예배, 금요철야예배나 수요예배 등이 없다. 반면 각 교회들의 성경공부와 성가대, 찬양팀은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보완해야 할 부분들을 신학원 교수들과 학생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개선되거나 여건이 향상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북에서는 자아성이 정립되지 못한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에게는 종교를 포교하거나 강요할 수 없는 사회규약이 있지만 봉수교회는 설립초기부터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드리는 고유한 예배 전통이 있다. 필자가 평양신학원 교수들과 조그련 지도부에게 질문을 해보니 북측 목회자들도 어린이 전도에 대해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 교회가 ‘어린이 날’을 기점으로 해마다 5월이 되면 ‘어린이 주일’을 지키듯 이북의 교회들은 매년 6월 둘째 주일에 ‘꽃 주일’을 지킨다. 신학원과 조그련은 각 교회들과 협력해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교회로 이끌기 위해 ‘꽃 주일’이라는 제도를 마련해 각종 간식과 과자 등을 나눠주기도 하는데 정작 실제로 교회당에 나오는 어린이 신자가 거의 없어 아직도 주일학교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전국의 가정교회 신자들의 80%가 40대 이상 여성신자들이고 전반적으로 고령이다 보니 청년 대학생이나 고등중학교에 다니는 청소년, 유초등부 어린이들이 거의 없다. 각 교회들은 주일학교를 운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대가 끊겨 단절될 염려가 있다.

보이지 않게 북측 기독교를 이끌고 있는 졸업자들 
   
평양신학원이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동안 이 학교를 졸업한 인물들 가운데는 고위직이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교역자들이 의외로 많다. 김용거, 변소정, 박창선, 조귀남, 최옥희, 김혜숙, 김근영, 리성숙 등이 중추적 역할들을 하고 있으며 이들과 함께 드러나지 않게 활동을 하고 있는 김철훈, 송진사, 백근삼, 김성호, 안경호, 황해윤, 박기찬, 백봉일, 조흥수, 김영일 등의 교역자들도 있다. 이밖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교역자들이 각자의 역할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신학원을 정식 졸업하면 목회 현장으로 투입되며 이후 절차를 밟아 모두 조그련 소속의 전도사나 목사가 된다. 전국의 520개 가정교회 예배모임을 이끌거나 전도에도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선교와 전도의 여건이 황무지 같은 상황에 있는 북측 사회에서 교역자 노릇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실제로 결실도 맺어야하는 부담감도 수반된다. 각계각층의 북 인민들은 어려서부터 주체사상을 교육받은 세대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파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북 사회에서는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공통적으로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이슈와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조국통일 완수’의 대업이다. 민족의 통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주체사상과 기독교신앙이 일맥상통하다고 보는 조그련과 신학원 측은 가급적 젊은이를 대상으로 통일문제로 고민하며 교회와의 접촉을 고려하기도 한다.
   
평양신학원을 설립한 이후 많은 업적이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지난 1983년에 최초로 신약성경을 인쇄한 것과 해방 전 장로교에서만 사용하던 4백곡이 수록된 찬송가를 제작한 사업이었다. 또한 이듬해인 84년에는 구약성경을 1만부 찍었으며 연이어 신구약 합본으로 된 성경과 찬송가책도 1만부를 발행하면서 북측 기독교내에서 모두 소비시켰다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남측의 문익환 목사는 통일운동가가 아닌 구약성서 학자로서의 신구교가 합동으로 참여한 공동번역 성경 제작에 관여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을 북측 조그련에서 가져가 이 책을 참고해 신구약 합본 성경을 출판했다. 

▲ 1990년대에 컴퓨터로 발행된 평양봉수교회 주보. 그러나 북측교회들은 2000년대 들어서 주보 발행을 중단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상당한 실력을 보유한 봉수교회 성가대원들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과 조그련 합작의 북한판 성경책.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과 조그련 합작의 북한판 찬송가. [사진제공 - 최재영]


이북에서의 목사란 어떤 직업인가?
     
1987년 일본 기독교를 대표해 방북했던 ‘일본교회협’ 대표단 목사들은 “이북의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도 있고, 시도의원에 선출된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 모두를 합치면 90명에 달한다”고 증언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북 교회 목사들 중에는 정당의 고위직과 간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각시도 인민위원회 간부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많다고 했다.

일본 목사들의 증언처럼 국가부주석과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강량욱 목사를 비롯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강영섭 목사,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을 지낸 고기준목사, 평양시 지도위원과 적십자회담 북측대표를 지낸 김성률 목사를 비롯해 김득룡 목사, 고학진 목사, 임현달 목사 등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목사들이 정치권과 중요한 사회단체 직함들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가 만난 조그련 오경우 서기장은 “우리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성실해서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매우 번영한 삶을 살고 있는데 요즘은 이런 신자들을 보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려고 하는 인민들이 많습니다”라며 여러 번 강조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일반 인민들의 생각은 아직까지 별로 호감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 내린 반기독교, 반미정서 때문에 목사는 사회적으로 그다지 호감 있는 직업은 아니다.
    
북에서의 목사의 지위와 역할은 종교적인 면보다는 국가적, 사회적인 특수성을 띤다고 보면 된다. 그러면서도 어느 때에는 사회적으로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위치이며 사회의 부정적 시각을 극복해야하는 직업이다. 목사가 아닌 일반 교역자들이나 신자들도 직장이나 일터에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하고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의무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목사가 되려면 평양신학원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전적으로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공부해야 한다. 남측 신학교에도 주경야독을 하는 신학생들이나 야간신학교가 있는 것처럼 이곳 사정도 비슷하다. 또한 신학원을 졸업하면 조그련에서 주도하는 인사이동 원칙에 따라 각자의 달란트대로 가정교회나 조그련 본부나 지방 연맹에서 상당기간 충실하게 봉사해야 한다. 
    
목사가 된 이후의 생활패턴을 보면 연맹에서 일하는 경우와 각 가정교회에서 일하는 경우 외에도 일반 직장을 다니면서 목사 일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런 경우에는 생활비가 직장에서 지급된다. 또한 연령이 높아 국가의 노후 사회보장을 받는 목사들도 있으며 아직까지 북의 교회 상황이 남측 교회와 달라서 대개 연맹에서 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그러나 일단 전문적으로 목회를 하거나 연맹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일반노동자와 비교해 월등한 월급을 받는다.
    
또한 조그련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외교적인 업무를 비롯해 해외방문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특혜와 의무도 주어진다는 점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능통하거나 통역, 번역 업무를 한다거나 외교적 협상, 각국 교회협의회 대표단과의 교류 협력, 각종 국제회의 참석과 발표 등의 업무 등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엘리트 출신 목사들이 대거 기용되기도 했다.
   
평양신학원 졸업한 여성 목사들
    
평양신학원을 졸업한 지 10년이 넘어도 아직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전도사들도 상당히 많은데 아마 30명은 넘는 듯했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조그련 지도부의 의도는 현직 목사들의 적정선을 항상 40명이 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남측 교회와는 달리 목사들을 쉽게 배출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목사직을 너무 남발하거나 반대로 목사가 턱없이 부족하지 않도록 수위조절을 하고 있었다. 조그련의 전임 위원장이었던 강영섭 목사 시절부터 목사안수를 쉽게 허락하지 않고 있으며 현재 강명철 위원장 시대도 마찬가지다.
     
현재 조그련 소속 목회자들 중에는 여성 목사가 여러 명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안수를 받은 여성은 2016년 현재 68세인 리성숙 목사이다. 원래는 당시 최옥희 전도사가 첫 여성 목사 후보였으나 사정상 리성숙이 이북 최초의 여성목사가 되었다. 그후 리성숙은 봉수교회 부목사를 지냈고 평양신학원에서 성서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도 활동했다. 2006년 5월 23일 안수 받은 리성숙은 당시의 나이가 58세였는데 1987~89년까지 평양신학원을 함께 다녔던 제 6기 동기생 네 명과 함께 안수를 받았다.
     
이날 4인의 전도사들이 목사안수를 받기까지 10년 동안 목사 안수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날 4인의 안수식은 그 의미가 매우 컸다. 리성숙 외에도 평양신학원 교무처장을 맡고 있던 백봉일 전도사, 조그련 선교부장을 맡고 있던 백근삼 전도사, 조그련 국제부장을 맡고 있던 리정로 전도사 등 모두 네 명이 조그련을 통해 목사안수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리성숙 목사는 서방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김일성 주석이 하나님’이라고 언급하거나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발언을 해서 한동안 남측 우익 기독교세력들에게 큰 이슈가 됐던 인물이다.
    
안수를 받은 4인을 포함해 조그련 소속 목사는 모두 35명의 목사를 공식적으로 보유하게 됐으며 이들은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조그련 등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한편 리성숙을 뒤이어 안수 받은 여성 전도사들 중에는 김혜숙과 최옥희 등이 있다. 김혜숙은 전도사 시절부터 국제회의 때마다 외국에 나가 통역관으로 참석해서 그 동안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는 1986년 1차 글리온회의 때까지만 해도 “나는 통역을 할 뿐이지 기독교 신자는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으나 여러 차례의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을 접촉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에 대해 감동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고 1987년에 세례를 받았다고 간증했다.
   
또한 안수 받은 김혜숙은 2014년 9월 한국교회협의회(NCCK) 대표단이 평양봉수교회를 방문해 ‘8.15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문’을 발표할 때 남측의 세종대 이은선 교수와 함께 기도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또한 최옥희 목사도 미국이나 국제회의에 자주 참석하거나 대외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간증집회를 했던 전도사였으며 리성숙보다 더 먼저 목사안수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던 인물이다.
  
최옥희는 그동안 국제회의에 나왔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활달한 성격과 뛰어난 발표력, 굳은 소신 등으로 언론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았던 인물이다. 1990년 열린 북미 기독학자회의에 신학생으로 소개된 최옥희는 어렸을 적 모친에게서 신앙을 물려받아 성경암송과 기도능력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고 했다. 또한 최옥희는 전도사 시절이던 1991년 6월에 과거 미국의 카터 대통령의 방북을 추진하는 역할에 참여하기도 했다.
    
통일운동을 하는 미국교포 조동진 목사가 고려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북측의 한시해, 김구식, 박승덕, 로철수, 고기준, 최성봉, 김혜숙 등 북측 통일관계 전문가와 학자들을 미국으로 초청할 때 최옥희도 같이 방문했었는데 6월 6일에는 조동진 박사가 한시해와 함께 조지아주의 지미 카터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해 김일성 주석의 평양 초청문을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이처럼 현재 조그련 소속의 여성 목사들은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실력 있고 식견을 갖춘 인물들이며 현재도 평양신학원의 재학생 중에는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어 앞으로도 여성목사가 더 배출될 것으로 보였다.

▲ 조그련 김혜숙 목사가 봉수교회당에서 세종대 이은선 교수와 '8.15 평화통일 남북 공동기도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리성숙 목사가 서방 세계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남측 감리교 서부연회 방문단과 함께한 북측 목사들 일행. 앞줄에 북측 리성숙(우측 세 번째), 최옥희 목사 등이 서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평양신학원의 유래
    
현재의 평양 봉수교회 뒷편 동산에 조성된 평양신학원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우리나라의 초대 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최초의 신학교는 ‘평양신학교’였다. 평양신학교는 1901년에 미국의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으나 1938년 신사참배 문제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으며 이 학교의 원래 명칭은 ‘조선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이다. 이 학교를 일반적으로 ‘평양신학교’라 불렀으며 원조 평양신학교다. 이후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지 2년이 지난 1940년 4월 11일 친일파 채필근 목사의 주도로 또 하나의 신학교가 설립됐는데 그 이름이 또 ‘평양신학교’로 불려졌으며 개교하면서 제1회 입학생을 모집했다.
    
그런가 하면 해방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와 대립각을 세우던 보수우익 목사들이 조직한 ‘이북 5도 연합노회’에서 직영 신학교를 세웠는데 그 학교 이름도 역시 ‘평양신학교’라 불렀으나 정식 이름은 ‘장로회 신학교’였으며 초대 교장에 김인준 목사가 선출됐다. 이처럼 해방 공간을 전후로 ‘평양신학교’라는 이름의 학교가 여러 개 등장했다.
    
그렇다면 마치 방금 언급된 여러 개의 ‘평양신학교’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재의 ‘평양신학원’의 뿌리는 어디인가? 그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해방 후인 1946년 6월 감리교 서부연회 측이 평양 남산현에서 세운 ‘성화신학교’를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 성화신학교는 한국전쟁 발발 4개월을 앞둔 1950년 2월에 폐교된 5년짜리 단명 학교였으나 현재의 평양신학원과 무관하지가 않았다.
    
북조선 인민정부의 교육성에서는 ‘이북 5도 연합노회’서 세운 장로회신학교 교장에 이성휘 목사가 부임하자 신학교 운영에 관여하기에 이르렀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이 성화신학교가 설립된 지 3년 후에 ‘장로회신학교’와 통합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인민정부에 의해 두 신학교가 통폐합 되고 몇 달이 지난 1950년 2월 결국 폐교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현재 평양신학원의 모체는 ‘성화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통합해 세운 신학교의 계보를 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1972년이 되자 조선기독교연맹의 강량욱 위원장의 주도로 평양신학원이 개교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인해 현재의 평양신학원이 건축되는 과정에서 남측의 감리교(기감) 서부연회와 장로회신학대학이 소속된 예장 통합 교단이 관여하게 된 것이다. 예장 통합은 신학원 건축 담당을, 기감 서부연회는 신학원 운영을 각각 담당하며 지원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1950년 2월, 이 두 신학교가 통합되자마자 폐교된 이유를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 사진. 뒷줄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송린서, 길선주, 이기풍, 한석진. [사진제공 - 최재영]

 

▲ 해방 전 평양 남산현감리교회. 이곳에서 성화신학교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반세기가 흐른 후 만난 평양 성화신학교 스승과 제자들. 당시 교감이었던 박대선 연세대 총장(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이 한가운데 앉아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장로회신학교와 성화신학교의 합병
   
먼저 성화신학교가 태동된 배경을 알아보도록 하자. 성화신학교는 1946년 6월에 감리교 서부연회에서 직영한 신학교로서 당시 평양 수옥리(남산현, 지금의 인민대학습당 자리)에서 개교했다. 성화신학교가 설립된 배경은 이북지역 감리교회 지도자들이 분단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3.8선의 고착화를 직감해 3.8선 이남인 서울에 있는 감리교신학교를 왕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구책의 일환으로 태동했다. 당시 평양에는 장로교 신학교는 남아 있었지만 감리교 신학교는 전무한 실정이어서 이북지역에 감리교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절실하다는 판단에서 설립이 추진된 것이다.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이북지역의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와 신자들을 속이고 월남 대열에 합류했고, 이로 인해 북에 남아 있던 신자들은 월남한 목회자들에 대해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로 비유하며 비방하기도 했다. 아무튼 성화신학교 설립을 주도한 감리교 배덕영 목사는 북에 잔류해 이북지역 교역자 양성을 위한 감리교단 직영 신학교 설립을 모색해 결국 성화신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입학생을 모집하고 보니 감리교신학교였으나 장로교 소속 학생들이 더 많이 입학했는데 그 이유는 이북지역에는 감리교보다 장로교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장로회신학교가 있었으나 그곳은 30~40대 연령의 현직 조사, 전도사들이 목사안수를 받기 위한 과정을 밟기 위한 코스였고, 성화신학교는 젊은 학생들 중에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성향으로 입학한 학생들이 의외로 많았다.
    
초대 교장에 취임한 배덕영 목사를 보필할 교감은 박대선 목사가 맡았고 이사장에는 송정근 목사, 교수에는 이재면, 김두성, 김용련 윤창덕 등이 맡았다. 재학생 숫자는 본과, 예과, 고성과 등 모두 합해서 무려 600명이 공부했다. 3년제로 승인받은 성화신학교의 제1회 학생들은 소정의 과정을 모두 마치고 1949년 7월 6일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제1회 졸업식을 했는데 이때 20명의 졸업생들이 배출됐다. 그 후 학교 지도부는 1950년 2월에 폐교가 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제2회 졸업식 일정을 한 학기 앞당겨 미리 12명을 졸업시켰다.
     
성화신학교는 1946년 설립 직후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나 북조선 정부와의 갈등과 마찰을 빚는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해 협력하기도 했다. 한편 성화신학교의 배덕영 교장의 실종으로 성화신학교는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해방 이후 5년간 북측 지역의 모든 교회가 폐쇄되거나 예배가 중단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1949년 12월 16일(금) 저녁, 평양 남산현 감리교회에서 ‘헨델의 메시야 연주’ 공연이 성대하게 펼쳐졌는데 당시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으나 공연은 성공리에 끝났다.
    
김용옥 목사가 오랜 기간 성가 연습을 시켰으며 실제 공연에서는 이재면 목사가 메시야 전곡을 지휘했으며 그날 참석한 목회자들과 학생들과 신자들은 크게 감격하여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배 교장은 이날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정치보위부 요원에게 연행을 당한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교육성은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 교장 이성휘 목사에게 성화신학교와의 합병 서명을 받은 직후였는데 그 직후에 배 교장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이에 교육성은 교장 대리역할을 맡은 박대선 교감을 불러 평양신학교와의 합병을 전격 통보한 후 두 학교는 합병됐다. 장로회신학교와 성화신학교가 합병된 원인 중에 하나는 당시 성화신학교가 ‘반공신학교’라는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진한 신학생들은 신앙과 이데올로기를 구별하지 않았고 반공이 곧 신앙이고, 신앙이 곧 반공이라는 인식을 가졌으며 이런 이유들이 인민정권과 교육성을 자극했던 것이다. 결국 성화신학교가 폐교된 직후 넉 달 후 전쟁이 발발하자 성화신학교 학생들과 교수 출신들 대부분은 월남했고 그 후 월남한 재학생들은 남쪽의 다른 신학교를 편입학해 거의 목사가 다 됐다.
    
아무튼 1950년 정초부터 두 학교를 합병한 후 전교생 중에서 120명만을 따로 선별해 새로운 신학교를 만든다는 정보를 알아차린 박대선 교장대리(훗날 연세대 총장)는 1950년 가을학기에 졸업할 학생들을 한 학기 앞당겨 졸업시켰고 그 후 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결국 성화신학교 졸업생은 1회 20명, 2회 11명 모두 31명뿐이었고 나머지 수백 명은 남쪽의 다른 여러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가 됐는데 1, 2회 졸업생 중에는 이응교, 김익두 목사 등이 있고, 유명한 부흥사 신현균 목사와 감리교신학대학장을 지낸 김영옥 목사, 변선환 박사 등이 있고 동양인으로는 처음 미국교회협의회 회장과 미국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이승만 목사 등이 있다. 

북 기독교계의 거목, 강량욱 목사
     
그 후 20년의 잠복기가 흐른 후 정치인이자 목회자인 강량욱 목사에 의해 1972년부터 북측 기독교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며 평양신학원이 설립됐고 가정교회들을 통해 교회들이 응집되고 신자들의 신앙을 회복시키는데 주력했다. 강 목사는 1950년대부터 해외순방을 통한 외교에도 공헌을 했으며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으로서 대표단을 이끌고 해외순방을 하거나 때로는 부수상으로서 통일아랍공화국, 남예멘 등을 방문하기도 했고, 때로는 사절단을 이끌고 캄보디아, 버마, 싱가포르, 파키스탄 등을 방문하는 등 종교분야 외에도 정치, 외교, 사회, 예술분야에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그러던 중 강량욱 목사는 1972년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과 국가부주석의 신분으로 대표단 9명을 이끌고 남북조절위원회에 참석했는데 이때 남측의 최규하(훗날 대통령)는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해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오던 시절이다.
   
분단된 지 27년만인 1972년 8월 31-9월 2일까지 제1차 남북 적십자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을 때 당시 남측의 이범석 KBS 보도부장과 정도현 신아일보 편집국장이 멀찌감치 있던 강량욱 목사를 알아보고 함께 다가가 인터뷰를 하며 녹취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강 목사는 두 기자들의 예리한 질문들을 간결하게 답변했는데 이때 보도된 기사가 서방세계 언론에 다시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북한에 성경책은 부족함이 없는지요?”
“많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집에서 예배를 보시며 기도를 하시는지요?”
“집에서 아침과 저녁에 기도합니다.”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계신지요?”
“내가 목사인데 안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몇 마디 질의응답을 통해 강 목사의 기독교 신앙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들이었다. 이때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이어 1972년 10월 12일부터 11월 30일까지 3차례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가 서울과 평양에서 진행되었는데 이 당시 적십자회담이나 남북조절위원회 등 모든 남북 간의 민감한 회의에 실무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 바로 강량욱 목사였다. 당시 강 목사의 위치와 지위가 남북 정세에 큰 변화를 주었으며 이 무렵 평양신학원도 설립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7.4남북공동성명 등 변화된 정세와 남측 종교인들의 민주화투쟁 등도 이런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평양신학원을 개교하던 무렵 강 목사가 ‘북남종교인회의’ 개최를 주장하는 등 여러 요인이 어우러진 결과물로 탄생된 것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강량욱 목사는 당시 장로교 노회장이던 이창호 목사에게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는데 평소에도 북측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역경과 상관없이 온 가족들과 함께 언제나 가정예배를 드린 사실들이 알려졌다. 심지어 그는 전쟁 직후에도 당시 인민학교에 다니던 강 목사의 막내아들 강영승이 급우들로부터 “너는 목사 아들이라고 하는데 왜 너희 아버지는 아직도 목사 일을 하는가?”(평양신문 보도)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목회에도 전념했다. 그러나 지금도 강량욱 목사는 남측 우익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한반도의 가룟 유다’라는 비판을 받는 동시에 북에서는 ‘혁명가로서 사회주의 기독교를 정착시킨 모범적인 목회자의 상징’으로 존경받는다. 그러나 호불호의 평가를 떠나 강 목사의 민중신학적 목회관이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민족사적 의미를 준 것만은 틀림없었으며 지금도 조그련을 통해 그의 유지는 계승되고 있었다.
    
강량욱 목사가 씨를 뿌렸다면 그의 아들 강영섭 목사가 물을 주고 자라게 했고 그의 손자 강명철 목사가 열매를 보는 중이다. 특히 생존시 강영섭 목사는 고기준 목사, 김운봉 목사, 박춘근 목사 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며 북측 교회의 평화지향적인 사회주의 신학을 형성했으며 이들은 주체사회주의 체제 속에서의 기독교신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됐다.      이들이 선택한 사회주의 주체사상과 기독교 신학이 현재 조그련 지도부를 통해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에 기여하고 있으며 남북 교회 간 교류가 본격화되면 이들이 추구하던 일들이 민족화해의 씨앗으로 싹이 틀 것으로 기대한다. 

▲ 목사직 외에도 외교에도 총력을 기울인 강량욱 목사가 외국을 방문해 지도자들과 환담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 보통강호텔 로비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사진제공 - 최재영]


올해가 평양신학원 설립 44주년, 조그련 설립 70주년
    
조그련은 해마다 11월 28일이 되면 어김없이 창립 기념행사를 갖는다. 특히 올 2016년 11월에는 창립 70주년을 맞아 큰 행사를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1996년에는 고난의 행군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창립 50주년 행사를 크게 치렀다. 북의 우방인 중국의 교회가  ‘기독교 혁신선언(삼자선언)’이라는 성명서를 ‘인민일보’에 발표한 1950년 9월 23일을 기점으로 중국 공인교회(삼자교회)가 시작된 것으로 기념하는 것처럼 이북의 경우에도 조그련이 조직된 날을 북측 기독교의 새 출발로 보는 것이다. 아울러 평양신학원도 올해 설립 44주년을 맞아 새로운 변화와 도전 앞에서 통일의 파트너인 남측교회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할 의무를 안고 있다.
    
필자가 평양신학원을 방문했던 어느 날 교장을 겸임하고 있는 조그련의 강명철 위원장은 다른 일정으로 분주해서 만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영국에서 방문한 손님들을 만나 일정에 동행중이었는데 이처럼 조그련과 평양신학원은 평소에도 서구나 영국의 기독교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다. 또한 그 이전인 2010년 11월에는 영국 의회 방문단이 평양신학원을 방문했는데 이 자리에서도 강영섭 목사가 이끄는 조그련과 평양신학원 지도부는 서방세계, 특히 영국 장로교단과 교류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심지어 종교인협의회와 가톨릭협의회에서는 평양에 주재한 외국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서 북 최초로 자생적인 가톨릭 신부를 임명해 장충성당에 사제로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말도 전해주기도 했다.
    
조그련이나 평양신학원, 그리고 북측의 모든 공인교회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분단 후 북측에서 발생한 기독교 역사에 관한 부분이다. 많은 이들이 분단 직후 한국전쟁 이전을 제외하고 북측에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북측에도 살아있는 교회의 역사가 존재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북측 기독교는 해방공간과 전쟁, 그리고 반미주의와 반종교 열풍이 불던 역경을 겪으며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며 시기별, 시대별로 변천하며 ‘사회주의 기독교’, ‘북조선식 맞춤형 기독교’로 제도화되며 토착화되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과 분단이 동시에 이뤄졌다. 기독교를 극렬하게 탄압했던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일제가 짓밟아 놓은 피폐한 상태에서 또 다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다. 그 후 해방 정국에서의 좌우의 대립으로 기존 교회들마저 좌우로 갈라지며 진공상태가 됐다. 북측지역 교회들을 이해함에 있어 이런 역사적 과정을 무시하고 성급히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항일무장 투쟁을 하던 김일성 장군은 해방 직후인 9월 9일 원산으로 환국해 10월 14일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의 ‘조국해방전쟁 기념 및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공식 등장하면서 북측 지역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통치기구로 조직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활동을 통해 친일 매국노와 부역자, 매판자본주의자와 지주계급 등을 정리하는 친일 청산작업에 들어갔다. 
    
일제강점 말기, 일본은 조선의 기독교 교회를 겉과 속까지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에 친일청산 과정에서의 우익 수구세력의 핵심인 친일 친미 사대주의에 빠진 일부 기독교 신자들과 목사들과의 마찰이 불가피했다. 당시 장로교는 ‘이북 5도 연합노회’를 중심으로, 감리교는 서부연회를 중심으로 북측지역 우익 교회들을 이끌어 나가는 도중에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와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하게 빚어졌고 반면 인민정부를 따르는 ‘북조선기독교연맹(조그련 전신)’이 설립되며 기독교 교단이 좌우로 분열되었고 결국 인민정부를 반대하는 교회들은 모두 월남하여 남측 기독교 교단에서 반공세력을 형성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한편, 한국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북 인민들에게 기독교는 곧 미국과 동일시되다시피 인식되며 미국에 대한 증오는 곧 교회에 대한 증오로 연결되었다. 전쟁을 계기로 반기독교 정서와 탈교(脫敎) 현상이 유행처럼 조성되어 ‘종교도시 평양’,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으로 불리는 북측 교회에 속한 신자들과 목회자들은 거의 월남하는 바람에 북측지역의 기독교는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남아있는 교회들은 힘을 잃었으며 인민정부와 함께했던 교회들마저 일반 인민들에게 형성된 반미감정과 반기독교정서로 인해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위축되었고 결국 지금까지 조그련과 평양신학원 그리고 520개 가정교회와 봉수, 칠골교회로 유지되고 있다. 한국 교회와 서방세계 교회들은 북측의 이런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와 통전적 역사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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