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인 이성재 선생이 24일 오후 8시 30분경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고인은 1925년 2월 12일(음)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현재는 고덕동 암사동)에서 한음 이덕형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1946년 서울대 재학 중 전국건설학생총연맹 부위원장으로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에서 활동했으며, 1948년 좌익계 전향자 박일원의 밀고로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3년 재학 중 제적당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에는 사회대중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일했으며, 혁신정당 통합을 위해 활동했다.

고인은 1974년 발생한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로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1982년 형감형 조치로 석방된 후, 2008년 법원의 재심을 통해 33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한때 병 치료차 일가족을 이끌고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돌아온 고인은 귀국 후 (사)민족화합운동연합에서도 활동했다.

지인인 김영옥 선생은 “고인은 성품이 온화하면서도 아주 원칙적이셨다”면서 “말을 많이 하시지 않았지만 행동을 통해 가르침을 줬으며 그릇된 길에 한 번도 들어서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성일, 딸 혜성 혜원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삼육병원(구 위생병원) 장례식장 205호이며, 발인식은 27일(금) 오전 9시다.

26일(목) 저녁 7시에는 서울삼육병원 영결식 행사장에서 ‘민족민주통일인사 고 이성재 선생 추모의 밤’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 생전의 이성재 선생

1925. 2.12.(음)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현재는 고덕동 암사동)에서 한음 이덕형의 후손으로 태어남  구천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성중학과 중동중학교 재학중 민주학생연맹에 가입하여 활동중 종로서에 연행
1945. 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
1946. 서울대 본과 정치학과에 다니면서 전국건설학생총연맹 부위원장으로,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에서 활동중
1948. 좌익계 전향자 박일원의 밀고로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3년 재학중 제적당함.
1951. 7. 부산 피난 시절 숙명여대와 서울농대 강사를 맡아 생계를 유지함.
1955. 이승만 대통령 암살사건 관련자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구속됨
1957. 8. 8.15특사로 석방됨
1960. 9. 사회대중당 중앙집행위원 및 혁신정당 통합 활동
1961. 5.20. 반국가행위자로 구속(혁명재판소 징역 5년)
1963. 12. 특사로 석방
1966. 10. 신설동에서 장석구선생과 동방전기공업사를 경영
1969. 3. 서울 견지동에서 김자동선생과 사무용품 납품업체인 태고양행 경영
1972. 전창일 이수병 우홍선 박중기 등과 혁신계 활동 재개를 위해 암중 모색
1973. 6. 충무로 2가에 동천(東遷)지압연구소 경영
1974. 6.17.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터지자 성남에 피신해 있던중 구속됨
1975. 4.8.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무기징역 선고받음. 이후 1982년 3월에 20년형으로 감형받음.
1982. 12.24. 형집행정지로 전주교도소에서 출소
1995. 4. 후 병 치료차 일가족을 이끌고 캐나다로 이민감.
2006. 1.23.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2006.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이 시작되자 귀국함.
2008. 9.18.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심을 통해 33년 만에 무죄판결 받음.
2016. 5.24. 숙환으로 운명. 

(자료제공-4.9통일평화재단)

(추가 - 오후 1시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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