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조엘 위트(JOEL WIT) 존스홉킨스대 방문연구원
역자: 장창준 한신대 외래교수
원제: “You Can Negotiate Anything – Even North Korea”
출처: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 2016. 4. 27

3월과 4월 한반도를 엄습했던 위기 국면은 해소 조짐 없이 5월을 맞고 있다. 북한은 유례없는 ‘속도전적 무기 공개’로 미국을 압박하고 있고, 미국은 중국과의 공조 아래 역시 ‘유례없는’ 대북 제재를 강행하고 있다. 한반도 위기는 미국 고위 관리조차 인정하는 분위기다.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4월 21일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대학에서 “전쟁은 엄청난 일이며 한반도에서 전쟁을 피하는 것은 우리(미국)에나 한국에나 일본에나 지역에나 여전히 절대적 우선순위”임을 토로했다.

위기 국면을 해소하자는 다양한 의견들이 미국에서 제시되고 있다. 1999년 ‘페리 프로세스’를 내놓았던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장관은 2016년 3월 2일 <미국의소리> 방송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무기를 추가하지 않고, 핵무기 성능을 개선하지 않으며, 외국에 핵무기와 기술 이전을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3 No 원칙'에 입각해 북한과의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한 바 있다. 대북 협상파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3월 27일, 미국의 대외정책을 다루는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는 “You Can Negotiate Anything – Even North Korea”라는 조엘 위트의 글을 실었다. 조엘 위트는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서 채택 당시 대북 협상에 직접 참여했던 미국 외교관이다. 연일 언론에 등장하는 <38노스>(38 north)라는 북한 전문 웹사이트 운영자이기도 하다.

조엘 위트는 이 글에서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이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성과를 낸 반면 현재의 오바마 정부는 1990년 북미 협상의 교훈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여전히 미국은 북한과 협상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가 지금처럼 '포용 불가, 교훈 불가' 원칙을 고사한다면 그 같은 기회는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 역자 주

원문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s://foreignpolicy.com/2016/04/27/north_korea_negotiations_kim_jong_un_agreed_framework/?utm_content=buffer34872&utm_medium=social&utm_source=facebook.com&utm_campaign=buffer 


북한이 지난 1월 4차 핵시험을 실시하고 그 이후 우려스러운 상황이 전개되면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멈추려는 미국 정부의 정책이 실패했다는 논쟁이 확산되고 있다. 더욱 최근에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배치로 진전할 것이 확실해 보이는 로켓 장치를 시험하고, 새로운 SLBM(see-based rocket, Submarine Launched Ballistic Missiles: 잠수함발사미사일-역자주)까지 발사했다. 평양이 5차 핵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설까지 나돌고 있다.

점증하는 위협을 중단하려는 지난 20년간의 미국의 노력은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실패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지난 20년 동안 미국 정부의 관리로, 싱크 탱크 연구원으로 그리고 학자로 일해 오면서 나는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중단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대해 끝없는 논쟁에 개입해왔다. 그 논쟁에는 실패의 주장도 있지만, 나와 같이 미국이 효과적으로 일을 한다면 여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보다 낙관적인 견해도 있다. 만약 미국이 이 같은 도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도모하고자 한다면, 북핵 외교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미국 정책이 실패했다는 너무나 명백한 현실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에 심각한 이해관계를 갖기 시작했을 때, 북한은 핵무기도, 핵무기의 재료인 핵분열 물질도, 그것을 운반할 장거리 미사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까지 그 같은 상황은 계속되었다. 오늘날, 북한은 20개 정도의 핵무기를 갖고 있고, 더 많은 무기를 만들어낼 분열 물질을 생산하고 있으며, 4차례 핵시험을 실시했다. 이 같은 무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로켓 시험도 6차례 했다. 호전적인 김정은 정부는 수만 명의 주한, 주일 미군을 포함해 동북아시아에 위협이 되고 있으며, 미국과 국제사회까지 위협하고 있다.

왜 이 같은 상황이 발생했는가? 북한은 이해할 수 없는 “은둔국”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질문에 답이 될 수 있는 저서들이 존재한다. 전직 미국 정보분석관 로버트 칼린에 의해 개정된 돈 오버도퍼의 『투 코리아』는 북핵 문제의 고전이다. 부시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정책을 다루고 있는 마이크 치노이와 글렌 케슬러의 저서도 있다. 그리고 내가 다니얼 폰먼과 로버트 갈루치와 함께 작성한 『북핵 위기의 전말』이라는 책도 있다. 이 책은 1990년대 초반 미국과 워싱턴의 대결을 이해하는 데 단초를 제공한다. 우리의 책은 아직까지도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미국 정부의 문서를 집중적으로 검토한 것이었다.

북미 협상을 더 잘 이해하는 데서 필요한 증거물 A는 1994년 북미 기본합의서이다. 나 역시 이 합의서를 내오는데서 일정한 역할을 했는데, 이 합의서는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포기하고, 경제적 지원과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대가로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기본합의서는 불량국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반면교사로 평가되기도 한다. 기본합의서의 실패를 명분삼아 이란과의 핵협상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기본합의서를 채택했던 빌 클린턴 대통령의 아내라는 이유로 힐러리 클린턴을 공격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당시 중간급 관리에 지나지 않았던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2015년에 일리노이 주의 마크 커크는 존 케리 국무부장관에게 내가 15억 달러에 달하는 원자로 프로젝트의 자금을 내 개인 계좌로 돌렸다고 말한 바 있다. 케리는 어리둥절해 했다.

북한이건, 이란이건 혹은 소련이건 간에 불량국가와의 대화는 안 된다는 정치적 아젠더가 존재한다. 그러나 워싱턴은 냉전시기에 소련과 충분한 대화를 하지 않았고, 오늘날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은 상식에 해당한다. 최근 이란과의 핵협상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이 실수였는지 아닌지를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러나 그 정치적 아젠더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북한의 경우에 있어,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더라도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비판적-역자주) 전문가들은 기본합의서로 이끌었던 장기간에 걸친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제네바 기본합의서는 북한의 핵폐기에 모든 수단을 사용했던 클린턴 정부의 노력의 결과였다. 동맹국과 긴밀히 협력하고, 우리의 노력을 지지하라고 중국에게 요청하고, 국제적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하고,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고, 북한과 진지한 협상을 하고 그리고 심지어 북한이 플루토늄을 재처리하려할 때 북핵 개발의 주요 시설을 크루즈 미사일로 외과수술식 타격을 가할 준비까지 했다.

제네바 기본합의서 그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그 합의서의 효력은 작동하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가동되고 있었던 북한의 플루토늄 생산 프로그램은 1990년대 초반 중단되었다. 클린턴 정부 초기 미국 정보당국은 북한이 2000년대 초반에 나가사키 급의 30배에 달하는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리는 이 같은 결론을 뒷받침하는 인공위성 정밀 사진을 포함하여 신뢰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취합했다. 그러나 북한 영변의 주요 핵시설에 대한 상업용 위성의 사진은 북한 핵문제의 일면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미국의 정부 관리로서, 1996년 행한 첫 번째 방문 이후 미국 시민으로서 2008년 방문까지, 나는 북한의 핵 시설을 5차례 방문했다. 북한의 시설들은 내가 예전에 소련에서 보았던,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기술에 기초한 시설과 비슷해 보였다. 그것은 분명히 사용 후 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축구장 크기만 한 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이었다.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흑연감속로-역자 주)의 통제실은 저렴한 1950년대 헐리우드 SF 영화 세트를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외관과는 다르게, 이 같은 모든 시설들은 작동하고 있었고, 경고 효과를 갖고 있었다.

1994년 합의 때문에, 미국은 미 정보국이 예견했던 위험한 미래를 회피할 수 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합의서의 이행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북한은 흑연감속로의 작동을 멈추고 미국이 플루토늄을 안전한 장소에서 관리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 아니라 핵시설을 추가로 건설하던 작업도 중단시켰다. 북한은 핵시설을 추가하려는 작업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본합의서에 의해 그것들은 결국엔 해체해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이 같은 시설들은 필요 없는 쓰레기 더미가 되었고, 결국 포기되었다.

그 합의가 2002년 완전히 이행되기 전에 붕괴되었을 때, 평양은 단지 소량의 분열물질을 확보하고 있는 정도였다. 만약 합의서가 없었다면 전혀 달랐을 것이다(즉 다량의 분열물질을 확보했을 것이라는 뜻-역자주). 이것은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마도 북한이 전력 생산용으로 그러나 또한 가동된다면 핵무기를 만드는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도 있는 1994년 건설 중이었던 북한의 원자로는 1990년대 후반까지 완공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참으로 그것은 사용할 수 없는 쓰레기 더미가 되었다(제네바 합의 때문에 그 건설이 중단되었고 결국 제네바 합의로 인해 그것이 쓰레기 더미가 되었다는 의미-역자주).

북한이 기본합의서를 어기면서 무기급 우라늄을 비밀리에 생산해 왔다면서 기본합의서가 북한의 핵프로그램을 중단시키는데서 실패했다는 비판은 사실관계의 측면에서는 맞지만 결과적 측면에서는 맞지 않다. 그렇다. 북한은 1990년대 우라늄을 확보하기 위한 자그마한 노력을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 북한은 농축 우라늄을 확보하기 위해 파키스탄으로부터 소량의 농축 우라늄을 수입했다. 그러나 왜 그들은 더 많은 핵무기를 생산하는 데 이미 갖추어 있는 진전된 플루토늄 생산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분열 물질과는 거리가 먼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작했는가? 우라늄 개발이 제네바 실패의 근거라는 주장은 안 된다. 북한은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붕괴된 이후 10년이라는, 단지 최근에 와서야 무기급 우라늄을 생산했다.

물론 미국은 오늘날 1994년의 상황보다 더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프로그램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지도자는 대화에 관심이 없으며 더욱 예측 불가능하다. 이 같은 사실은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중단하고 현재의 위기 상황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클린턴 정부가 완벽하지 않았다면 오바마 정부는 심지어 1990년대의 교훈 즉 거친 조치와 진중한 외교를 사용하려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여전히 일할 기회를 갖고 있다. 불행하게도, 만약 미국의 정책이 ‘포용 불가, 교훈 불가’(no hugging, no learning, 북한을 포용하지도 않고, 과거의 북핵 협상에서 어떤 교훈도 찾지 않겠다는-역자 주) 원칙에 지배받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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