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소송을 타결한 세계적인 인권변호사 배리 피셔(Barry A. Fisher) 인터뷰

이 글은 12.28 한일'위안부'합의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과제를 짚어보고자 2016년 1월말 나치 전범기업에 대한 홀로코스트 소송을 타결했던 세계적인 인권변호사 배리 피셔 변호사와 했던 인터뷰를 정리한 것으로 4월말 출간된『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제국의 거짓말과 위안부의 진실』(도서출판 말)에 게재되었다.

▲ 12.28 한일합의를 비롯해 최근 '위안부'문제에 대하여 대담을 나누고 있는 배리 피셔 변호사와 필자. 2016년 1월, 로스앤젤레스 인근 센츄리시티에 소재한 Fleishman & Fisher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진제공 - 정연진]
 

□ 정연진 : 작년말 12월 28일발표된 한일 외교장관 합의는 일본군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지금까지 애써온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허탈한 소식이었습니다. 미주지역에서도 올 연초부터 반대집회가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많은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애써오신 국제인권변호사로서 12.28 한일합의를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일본군성노예 문제가 ‘타결’되었다고 여기시는지요?

■ 배리 피셔 변호사 : 일본이 터무니없는 금액에 한국의 침묵을 돈으로 사려고 한 결과라고 봅니다. 피해자단체, 변호단, 정부 3자가 협상에 참여한 홀로코스트소송과는 대조적으로, 이번 경우에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대변되지 않은 정부 간의 일방적인 타결입니다. 이러한 합의는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역사의 진실이 날치기당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특히'위안부'제도의 불법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본군'위안부'제도를 운영한 것은 당시 국제법적으로도 국가가 민간인에게 저지른 명백하고도 중대한 전쟁범죄입니다. 인류 역사를 위해서도 이러한 전쟁범죄에 대해 ‘불가역적’이라는 합의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독일은 나찌의 전쟁범죄에 대해 계속 지속적으로 사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아시아정책으로 인해 또 다시 미행정부가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주고 수많은 일본 전쟁범죄 피해자들이 희생되는 케이스가 되었습니다. 2차대전 후 냉전체제로 세계가 재편되면서 미국은 공산주의 확대를 막는데 급급하여 일본의 전범처리를 최대한 축소시키고 말았습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미국의 안전핀 역할을 하게한 셈입니다.

이번에는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일본이 안전핀 역할을 하기를 원했고, 따라서 아시아 전역에 걸친 일본전쟁범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묵살하면서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 정 : 변호사님은 1990년대 중후반 나찌독일의 전쟁범죄 피해자들이 전범기업들 상대로 대규모 집단소송을 전개했던 일명 ‘홀로코스트’ 소송에서 큰 활약을 하셨는데, 홀로코스트 소송이 타결될 수 있었던 배경을 좀 설명해 주시지요. 나찌에 의한 유대인들의 피해와 일본제국주의 피해자들의 경우와 얼마나 달랐는지요?

■ 피셔 : 네, 1999년 타결된 홀로코스트 소송에서 다국적 협상팀의 대표 변호사의 한 사람으로 최종 합의문에도 서명을 했었지요.

홀로코스트 소송의 배경은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동구권과 소련에서 그 때까지 비밀문서로 되어있었던 나찌 전범기업 관련 문서가 대거 비밀해제가 되면서 유대인 박해에 관여했던 전범기업들의 역할도 드러나게 되었지요. 그래서 1990년대 후반부터 피해자들이 유태인들의 휴면계좌로 큰 이익을 보았던 보험회사와 은행, 또한 강제노동으로 이익을 본기업 등을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집단소송형태로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지의 유대인피해자들이 미국법정에서 강제노역 등의 피해에 대해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기업들을 상대로 제기한 일련의 집단소송은 2년여에 달하는 협상을 거쳐 1999년 12월, 독일정부와 기업들이 반반씩 분담해 70억불(약 52억유로)에 달하는 배상기금을 조성하기로 최종적인 타결이 되었습니다.

미국법정에서의 집단소송은 배상금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기업의 사활이 달려있을 정도라서 기업들이 긴장할 수 밖에 없지만, 무엇보다도 독일정부가 합의를 원했습니다. 타결된 배상기금으로 ‘기억, 책임, 미래 역사 재단’이 설립되어 일부는 피해자를 위한 보상에, 일부는 후세를 위한 역사교육 등에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송은 재판이 아니라 법정밖합의(settlement)를 거쳐 타결된 것인데 피해자 대표, 변호인단, 정부대표가 참여한 다국적 협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무엇보다도 잘못된 과거사의 책임을 통감하고 협상을 통해 시급히 문제해결을 하고자 했던 독일정부의 의지가 큰 역할을 했고, 미국무부도 피해자들과 소송당사자들의 합의가 이루어지도록 매우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전후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전범재판을 통해 많은 사실이 밝혀지고 책임자들이 처벌을 받았으나, 일본의 전쟁범죄 대한 전범처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극소수의 인물만 처벌받았고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2차대전 전후처리를 매듭지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의 배상책임을 면제해준 미국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것입니다.

▲ 2008년 10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 국제평화회의 103주년 기념 컨퍼런스’에 참석한 배리 피셔 변호사, 바른역사정의연대 대표로 참석한 필자, 독일의 ‘기억, 책임, 미래에 대한 역사 재단’ 균터사토프 사무총장(왼쪽부터). [사진제공 - 정연진]
 

□ 정 : 홀로코스트 소송에 이어 아시아계 피해자 특히 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동원피해자들을 위한 소송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습니까. 홀로코스트 소송과 일본전쟁범죄 피해자들의 소송 경험을 비교해 본다면 어떠한 말씀을 하시고 싶은지요?

■ 피셔 : 홀로코스트 소송이 타결되자, 나찌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의 전쟁범죄 피해자들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1999년 캘리포니아주에서 나찌 및 나찌동맹국에 의해 징용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징용기업을 상대로 피해보상소송을 할 수 있다는 특별법(헤이든 법)이 발효되면서,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국제소송팀이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한국계 징용피해자의 소송(Jaewon Jeong v. Onoda Cement, 정재원 씨를 원고로 오노다 시멘트를 피고로 하는 징용소송)에 대표변호사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오노다시멘트를 시작으로 미쯔이, 미쯔비시와 같이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강제노역사용 기업을 상대로 한 다국적 피해자들의 소송을 추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징용소송을 먼저 시작하긴 했지만 성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소송은 꼭 시도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일본군 성노예 제도는 인류 어떠한 전쟁사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나찌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만행아닙니까.

일본은 중국, 한국인을 비롯한 수백만 아시아피해자들을 강제노동과 성노예 피해자로 만들었습니다. 아시아 전역에서 징용자와 성노예를 실어나른 2차대전 당시일본의 해상수송 규모는 인류역사에서 아프리카흑인을 대서양으로 실어나른 노예수송 다음으로 큰 규모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1990년대 후반부터 국제인권변호사로서 나찌 전쟁범죄 뿐 아니라 일본의 전쟁범죄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여러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해 왔었기에 각국의 학자, 피해자단체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소, 나눔의 집 등 민간단체들이 벌여온 피해자 증언 확보, 일본의 시민활동가들과의 국제적 연대가 힘이 되었습니다.

2000년 5월에는 재미한국인 변호사들과 나눔의 집을 방문해 한국의 피해자들에게 미국소송에 동참할 것을 직접 설명하기도 했었습니다. 마침내 2000년 9월 18일, 만주사변일 기념일을 기해, 한국피해자 6인을 포함한 중국, 대만, 필리핀 15인으로 구성된 원고단이 참여하는 일본군성노예 집단소송을 미국 워싱턴DC 법정에 제소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 2000년 5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나눔의 집 거주 피해자들에게 미국 소송 준비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배리 피셔 변호사, 재미한인변호사 한태호 변호사, 필자. 맨 오른쪽은 혜진 스님. 우리 소송팀은 피셔 변호사의 제안대로 변호사비를 피해자배상금에서 나누지 않고 변호사들이 일한 시간을 계산하여 피고인 일본측에 따로 청구하기로 했었다. [사진제공 - 정연진]
 
▲ 2000년 9월 18일 일본군'위안부' 소송 제소를 기해 워싱턴DC의 National Press Club에서기자회견을 연 한국측 원고대표 고 황금주 피해자와 배리 피셔 변호사. 왼쪽부터 소송팀에 참여했던 재미한인변호사인 한태호 변호사, 마이클 하우스펠트, 배리 피셔, 황금주 피해자, 필자. [사진제공 - 정연진]
 

□ 정 : 독일정부는 어떻게든 전쟁범죄 문제를 해결지으려는 입장이지만, 일본정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홀로코스트 소송과는 달리 아시아계 피해자들을 위한 소송은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 같은데요, 어떠한 어려움이 있으셨나요?

■ 피셔 : 미국법정에 위안부소송을 제소할 수 있었던 근거는 외국인불법행위 배상청구법(Alien Tort Claims Act)에 근거한 것으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었습니다. 이 소송에 대해 일본은 주권 국가로서 미국법정에서 피소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주권면책특권’을 내세우면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한국피해자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측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대형법률회사를 투입하고 치밀한 로비를 통해 소송을 와해시키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는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예상하기 어려웠던 것은 미행정부의 태도였습니다.

홀로코스트 소송에서는 피해자 편을 적극 도와 피고기업과 협상이 이루어지게끔 촉매역할을 했던 미국무부가 아시아계 피해자들의 소송에서는 180도 다른 입장을 취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오히려 일본과 같은 편이 되어 미국무부 변호사들을 소송에 개입시켰습니다. 미국무부는 미국의 외교정책과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같은 조약상의 이유로 일본전쟁범죄 소송을 할 수 없다고 재판부를 설득하면서 지속적으로 소송기각을 위한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2001년 뉴욕 트레이드센터 테러 직후, 미국 내에서 비행기 운항이 한동안 어렵던 시기에도 워싱턴 DC의 미국무부 변호사가 캘리포니아 법정까지 날아와 소송반대를 위해 법정에 출두할 정도였습니다. 징용소송을 맡은 캘리포니아 재판부 판사는 미국무부의 이러한 입장이 '인종차별적' 아니냐며 판결문에 쓸 정도였습니다.

미국무부의 집요한 방해로 인해 결국 일본군'위안부'소송 재판부도 행정부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1심 재판 판사는 일본정부의 반인륜적인 행위, 성노예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 그리고 배상의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본 소송이 ‘정치, 외교적 사안’이어서 사법부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며, 국가의 면책특권을 주장하는 일본측 입장을 수용하고 말았습니다.

연방항소법원에 항소, 기각후 2005년 10월에는 연방대법원에 항고했으나, 2006년 2월 18일 연방대법원은 최종적으로 심리를 거부하여, 6년에 걸쳐 진행되었던 '위안부' 소송은 결국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재판에서 진 것이 아니라 심리를 거부당한 것입니다.

▲ 2000년 9월 18일 워싱턴연방지법에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다개국소송을 제소하던 날, 미국무부 앞에서 시위에 나선 피해자들의 모습. 오른쪽 끝부터 고 황금주 피해자, 고 김순덕 피해자, 고 문필기 피해자. [자료사진 - 정연진]
 

□ 정 : 재판해서 진 것이 아니라 심리를 거부당했다는 것이 시사점이 큰 것 같습니다. 결국은 정치적인 이유로 기각이 된 셈이었는데요, 그래도 소송 과정에서 성과와 의미를 찾는다면 어떠한 것이 있었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 피셔 : 위안부 소송은 일제 성노예 피해자들을 위해 미국 법정에 제소된 최초의 소송이었고,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4개국 피해자들이 자기나라 피해자들을 대표하여 제소한 집단소송이라는데 역사적 의의가 있었습니다.

또한 소송문서를 통해 그 때까지도 일본이 부정해오던 '위안부'제도에 관한 많은 역사적 사실을 공적 문서화할 수 있었고, 소송팀과 4개국의 피해자단체들과의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국제무대에서 피해자들의 정의회복을 위한 역사인식과 정치인식을 한 단계 높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민간단체의 연대와 결집된 노력은 2005년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저지를 위한 서명운동, 2007년 미하원 위안부 결의안 추진운동 등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배리 피셔 변호사가 참석한 2005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사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3차회의. [사진제공 - 정연진]
 

□ 정 : 일본의 과거사 문제는 한국 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큰 관심을 보인 문제로 알고 있는데요, 남북을 포함하는 아시아 10개국 시민단체네트워크인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위한 국제연대협의회’의 결성과정에도 참여하셨지요?

북한의 피해자들도 미국 소송에 참여시키기 위해 애쓰신 것으로 압니다. 북한과의 협력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 피셔 : 2000년 상하이에서 열린 일본과거사 청산에 대한 국제컨퍼런스에서 북측 대표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고 북한사람들도 이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2003년에 상하이에서 남과 북을 포함하여 일본의 전쟁범죄 피해국 10개국의 시민단체가 결성한 국제 네트워크인 ‘국제연대협의회 International Solidarity Council’가 출범했는데 여기에 창립멤버로 참여했습니다.

2004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북한의 관계자, 피해자들이 대규모로 참석해서,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았었고 2005년 가을에는 평양에서 국제대회가 열렸는데, 미국에서 저를 비롯한 6명, 남한에서는 30여명이 참석했었지요.(당시는 노무현정부 시기여서 남북민간교류가 활발했었습니다.)

당시 대일배상문제는 북의 중대한 관심사였지요.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일수교를 위해 회담을 가졌던 시기였어요. 북한은 이미 미국의 징용소송과 위안부 소송에 동참하기를 원하여 조선법률가협회 주최로 2000년과 2002년 저를 평양에 초청하여 회의를 했었고 북한 피해자들의 진술서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역사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볼 때, 남북한 피해자들이 공동으로 미국 법정에서 일본을 상대로 제소할 수 있었더라면 상징적인 의미가 컸으리라 봅니다.

▲ 당시 세계인권변호사협회 수석부회장이던 배리 피셔 변호사의 방북을 1면에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한 2000년 11월 20일자 <로동신문>. [사진제공 - 정연진]
 
▲ 2002년 5월 평양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아시아지역 토론회’에 참석한 배리 피셔 변호사. [사진제공 - 정연진]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가 일제의 전쟁범죄 청산에 관해 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연방의회 또한 행정부 차원에서 매우 적극적이었던 반면 부시행정부는 이러한 활동을 중단, 차단시키기를 원했습니다.

북한의 피해자들이 소송에 동참하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미 간 수교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점은 두고두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또한 12.28 밀실타결로 인해 남북이 국제무대에서 함께 일본 과거사 청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소멸되어 버리고 말은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 정 :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 일본군성노예 소송에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미국법정 소송에서 일본 측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개인 피해자들이 제기할 수 있는 모든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했었고 현재 아베 수상도 이러한 입장 아닌가요? 1965년 청구권협정과 12.28 한일합의를 비교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피셔 : 미국소송의 재판부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을 듣기 원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을 방문하여 외교부 담당자들과 만나기도 했었습니다만, 한국정부가 입장표명서를 제출하지 않아 우리 소송팀이 오랜 기간 애태우다가 극적으로 받아낸 문서에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당시 '위안부'문제가 논의된 적이 없다. 그러나 배상 대신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 정부입장”이라고 했었습니다.

즉, 외교부 입장의 핵심은 '위안부'문제는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킨 한일청구권협정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12.28 합의는 기존 외교부의 입장과도 정면 배치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근래 국제인권법 동향을 보면 국가 간의 협정이 있었더라도 개인의 피해보상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고 계속 살아있다는 해석을 따르고 있습니다.

미국의 위안부소송팀이 2001년 7월 19일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해 한국 외교부로부터 받은 답변의 일부. 정부가 1965년 청구권협정을 피해나가면서 나름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사진제공 - 정연진]

□ 정 : 2007년 미하원 ‘위안부’결의안(HR121) 통과에도 워싱턴을 방문하여 연방의원을 설득하는 등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셨지요? 글렌데일시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일본계가 철거해달라는 소송에서도 역할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요, 그 소송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 피셔 : 2007년 미하원 ‘위안부’결의안 통과를 위해서 워싱턴DC의 정치인들을 만나 설득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또한 2013년 7월에 LA 인근 글렌데일시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나서, 미국의 일본계 우익들은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이고 외교문제는 미연방정부 소관이어서 글렌데일시 정부가 관할할 문제가 아니므로 소녀상을 철거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철거소송을 제소했습니다.

저는 소녀상을 방어하기 위해 중국계 단체 글로벌 얼라이언스(Global Alliance to Preserve the History of World War II)의 법정조언서를 제출하고 이 소송을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글렌데일시의 변호사들과의 업무협조가 잘 이루어지고 있고, 6월에 캘리포니아 항소 법원에서 심리가 있게될 예정입니다.

□ 정 : 2008년에 노근리 국제평화상(봉사부문)을 수상하셨는데, 노근리사건 피해자들과 같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전쟁범죄 피해자들와 일본의 전쟁범죄 피해자들을 어떠한 측면에서 연계해 볼 수 있을까요?

■ 피셔 : 전쟁을 반대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해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노근리 문제도, 일본 전쟁범죄 문제도 평화를 위한 시민사회의 연대와 실천을 모색해서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정확한 사실조사와 피해규모에 대해 정확한 진상규명이 되어야할 뿐더러 이러한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역사교육을 제대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 캘리포니아 교과서에 '위안부'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자는 청원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무척 고무적인 시민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 정 : 미국법정의 소송도 기각되고 한국정부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묵살해버린 시점에서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은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요? 앞으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느끼십니까?

■ 피셔 : ‘12.28 한일 외교합의’는 지금까지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이십여년 간의 국제공조 노력을 헛되이 만드는 일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만이 피해자가 아닙니다. 아시아 전역의 피해자들과 그들을 위해 활동해온 전 세계 시민들에게도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독일의 경우와 판이하게 다르게 일본의 전범처리를 하지 않은 미국이 이번에도 아시아정책상의 이유로 한일합의에 압력을 넣은 것에 대해 우리는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합니다. 세계여론, 특히 미국의 여론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국 내 한인커뮤니티가 결코 침묵해서는 안됩니다.

나찌의 유대인박해 문제가 미디어를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된 것과 같이 아시아의 피해, 특히 20세기에 한국인들이 당한 수난에 대해 세계가 잘 알 수 있도록 결국은 미디어 활용이 중요한데, 세계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할리우드급 영화가 나와야한다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침 '위안부' 문제가 꾸준히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고, 한국계 인재들이 할리우드에도 진출을 많이 하고 있으니 앞으로 기대해 봄직합니다.

■ 정 : 징용소송, '위안부' 소송을 추진하던 당시 “우리는 세계 제 2차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있다 We are fighting the last battle of the World War II”라고 늘상 하시던 말씀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21세기 시점에서 2차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아직도 계속해야 하는 현재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피해자들은 배리 피셔 변호사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에 큰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고생하셨지만, 앞으로도 한국, 아시아계피해자들 편에서 정의회복을 위해 계속 애써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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