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 / 동국대학교 북한학 박사 졸업

 

 ‘북한의 산’ 연재는 일단은 백두산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백두산을 단 몇 자로 끝내는 미흡함도, 더 많은 북한의 산을 찾아가지 못하는 아쉬움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자 한다. 수백 년 우리는 산에 기대고 의지하고 살았다. 험하면 험한 데로, 깊으면 깊은 데로, 얕으면 또 그렇게... 굽이굽이 많은 산자락처럼 아직 못다한 이야기도 많고, 또 앞으로도 그만큼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사람은 지역과 공간을 변화시키지만, 지역과 공간 역시 사람을 변하게 한다. 이후 기회가 된다면 사람과 공간, 그리고 시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

 

白頭山石 磨刀盡(백두산 바위는 칼을 갈아 없애고)
豆滿江水 飮馬無(두만강 수는 말이 마셔 없애리라)
男兒二十 未平國(남아 이십에 나라 평정치 못하면)
後世誰稱 大丈夫(후세에 뉘라서 대장부라 일커를까)
- 남이 ‘북정가北征歌’-

 
  백두산은 함경도와 중국의 길림지역이 접하는 용암지대에 높이 솟아있고, 산백산 소백산, 북포태산, 남포태산, 백사봉 등 2,000m 이상 연봉을 한품에 가지고 있는 웅장함을 가지고 있다. 또한 북쪽으로는 장백산맥을, 동남쪽으로는 마천령산맥을 뻗어 보내고, 동쪽으로 물을 보내어 두만강을, 서쪽으로 물을 보내어 압록강을 이루게 하는 산하의 시작점과 같은 신비함을 가지고 있다.

▲ ‘장백산 천지’로 표시된 중국 측 백두산 표지판.

  한반도와 저 멀리 북만주까지 굽어보고 있는 최고봉.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산. 한반도 맨 위에서 이 땅을 굽어보고, 이 땅의 등줄기, 산줄기를 내보내는 산. 민족의 정기가 내려온다는 백두산의 무게는 너무 무겁다. 그 무게만큼 백산, 태백산, 불함산, 개마대산 등 백두산의 이름도 다양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통해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했을 때의 이름은 ‘태백산’이었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은 조선 건국 초 편찬된 『고려사』에 991년 고려 성종 10년에 ‘압록강 바깥의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곳에 거주하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처음 나타났다. 

  백두산의 무게는 비단 한민족에게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북위北魏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北史에는 백두산의 또 다른 이름인 ‘종태산’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에 의하면 “말갈국 남쪽에 종태산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황이라 하며, 세상 사람들은 이 산을 받들어 모셨다. 사람들은 산상에서 오줌을 누어 더럽힐 수 없다하여, 산에 오르는 자는 용변을 본 뒤 그릇에 담아갔다. 산에는 곰, 범, 이리가 있는데 모두 사람을 해하지 않고 사람 역시 감히 죽이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만주족 기원신화의 중심지도 백두산으로 나타나고 있어 청淸대에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이렇듯 백두산은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의 영험한 산으로 숭배되었고 사랑받았다.

▲ 백두산 천지.

   그러나 백두산은 변방의 높고 척박한 곳에 백성들이 살기 어려운 산으로 조선 후기 이전까지 그리 친근한 산은 아니었다. 백두산이 오롯이 한반도의 역사에 편입된 조선시기 이후 남이장군의 시에서야 그 흔적을 찾을 수 있고, 영조 대에 와서 실학파 학자인 박종朴琮이 백두산을 여행하여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을 남겼다. 비슷한 시기 서명응徐命膺도 영조시기 유배를 떠나면서 백두산에 오르고 난 후 백두산을 둘러본 후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를 작성했다. 서명응은 천지에 올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위에 오르니 사방의 여러 산이 모두 깔고 앉은 자리 아래에 있어 하늘 끝까지 바라보니, 한눈에 모두 들어왔다. 다만 시력이 한계가 있음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봉우리들을 내려다보니 더러는 높고 더러는 낮으며 더러는 뾰족하고 더러는 둥근 것이 마치 파도가 치고 운무가 끼어 아득히 만 리에서 서로 이끌고 와서 받드는 것 같았다. 몸을 돌려 두 봉우리 사이 비어있는 곳에 서니 봉우리 아래 땅까지의 거리가 500~600길이나 되었는데, 텅 비고 평평하였으며 큰 못이 가운데 있었다. 둘레가 40리인데 물이 매우 푸르러서 하늘빛과 위아래로 한 가지 색이었다.”

  이처럼 조선시기 백두산의 웅장하고 장엄한 이미지는 일제시기에도 지속되어 나라 잃은 식민지의 굴하지 않은 민족정기의 표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와 저 멀리 만주를 굽어보는 백두산의 위풍당당함은 남북 분단 이후 갈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애절함,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는 산이 되었다. 시인 고은 선생은 백두산에 올라 그동안 부르지 못했던 16개의 산봉우리 이름을 하나하나 절절하게 불러야 했다. 그때 백두산은 웅장하다기보다 차라리 애처롭게 보인다.
 
  우리가 가지 못하는 사이 억눌린 많은 이들의 희망과 바람, 그리고 여러 가지 명분으로 백두산의 무게는 점점 더해지고 있다. 잠시 화산활동이 휴식기에 접어든 휴화산이지만 그 내부에 가득 찬 용암처럼 수많은 이야기와 관계, 욕망 등으로 들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지의 맑은 물빛, 정말 파도가 밀려오는 듯 첩첩히 쌓여있는 봉우리,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식생과 들꽃, 산짐승만으로도 백두산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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