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이번 시리즈는 총 20회에 걸쳐 북한의 ‘범 기독교 교회’들을 탐방한 ‘북한교회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남한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54회부터는 남측이 북측과의 협의하에 북측 영토내에 설립한 개성교회, 금강산교회, 신포교회, 금호성당, 평양과기대교회 등 특수목적 교회들을 다루고자 합니다. / 필자 주

 

분단 이후 북측 영토에 최초로 세워진 남측 교회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이하KEDO)’라는 단체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3월 9일, 미국의 주도로 남측과 일본 등 3개국이 설립한 한시적 국제기구였다. KEDO의 핵심 역할은 1994년 북측이 영변 원자력발전소에서 진행하는 개발 연구의 봉인을 유도하고 마그녹스형 발전소 건설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이었다. 결국 북미간의 협상에 따라 북측을 보상하기 위해 함경남도 신포지역에 2기의 경수로(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신포 금호지구(琴湖地區)에 새로운 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원래 신포지역은 과거 소련의 기술력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이미 지반상태 등 입지조사를 완료한 지역이었는데 소련체제의 붕괴로 계획이 무산된 바 있는 곳이다.
    
북미협상 결과에 따라 북측은 금호리 주변 일정 구역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위해 ‘금호지구’라는 이름의 특별구역을 만들어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KEDO 측에 조차(租借)하기로 체결하고 한국, 미국, 일본의 대표가 KEDO라는 국제기구의 대사 자격으로 그 지역에 상주하고 있었다. 건설관련 종사자들도 원래의 국적이 아닌 KEDO 소속으로 그 일정 구역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으며 북한 현행법에 저촉되는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해도 KEDO의 승인 없이 연행 또는 구속할 수 없도록 협약되었다.
       
1994년 10월 21일, 북미간의 합의문이 체결된 1년 후인 1995년 12월 15일에 경수로 공급협정이 체결되었고, 2년 후인 1997년 7월 28일 KEDO 사무소가 함경남도 신포시 금호지구에 개설되었다. 다음 달인 8월 19일에는 신포 금호지구에서 경수로 원전 착공식을 거행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2001년 8월 31일, 금호지구에 270만평을 확보해 현장 부지 정지를 완료하며 본격적인 시설 공사에 들어갔으며 9월 14일은 원전 본관 기초 굴착 착수식을 거행했다.
      
당초 계획대로 2003년까지 1000메가와트 원전 2개를 완공할 목표로 총 부지면적 8,937,000㎢(270만평) 위에 다음과 같이 경수로 관련 3가지 관련 시설들이 들어섰다. 첫째로 6,633,000㎢(200만평)의 발전소 지역, 650,000㎢(20만평) 생활관 숙소지역, 1,654,000㎢(50만평)의 골재, 용수원 등 어마어마한 면적의 부지가 조성됐다. 특히 직원들과 근로자들의 숙소와 생활 편의시설들이 들어선 20만평 지역에는 훗날 교회, 성당, 사찰이 들어선 종교동(宗敎棟)이 세워졌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KEDO 요원이나 근로자 외에 어느 누구도 종교지도자의 자격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KEDO 금호지구 경수로 직원 및 근로자 생활관 타운 내에 위치한 종교시설 중에 가장 큰 규모의 종교 건축물은 ‘신포교회(新浦敎會)’였으며 교회가 위치한 곳은 ‘함경남도 신포시 강상로동자구 금호리’이다. 교단 소속은 장로교(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측)이며 교회 설립일은 근로자 숙소에서 첫 예배를 드린 시점으로 볼 때 1997년 7월이다. 또한 1998년에는 힘든 조건에서도 컨테이너를 구입해 정기예배를 드리고 4년이 지난 후 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한 날은 2002년 4월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2006년 1월 7일, 직원과 근로자들이 완전 철수하며 교회운영은 완전 중단되고 교회당도 무기한 폐쇄되었다. 한 때 1천 5백 명의 남측 직원들과 근로자가 생활관에서 숙식하며 매 주일이 되면 수백 명의 신자들이 출석한 교회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2002년 5월 1일에 KEDO가 주계약(TKC) 변경 계약을 발효하고 같은 해 8월 3일, 드디어 제1호기 콘크리트 타설을 시작했으나 북핵 문제와 관련한 국제정세와 정치적인 문제로 2004년 8월말부터 경수로 사업이 주춤하더니 그해 12월 1일부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윽고 2004년 12월 말부터는 철수가 시작되었으며 마지막에 철수한 팀은 이듬해인 2005년 1월 28일이며, 최소 인력과 근무자들마저 완전 철수를 한 날은 2006년 1월 7일이다. 이때부터 남측에서 설립한 기독교 신포교회와 가톨릭 금호성당은 문을 닫고 지금까지 폐쇄된 상태에 있다.

▲ 컨테이너교회 시대를 마감하고 새롭게 건축한 신포교회당 전경(2002.4). [사진제공 - 최재영]

 

▲ 공사 초기의 KEDO 숙소 생활지역 입구 진입로와 간판. [사진제공 - 최재영]

 

▲ 원전 본관 기초 굴착 착수식을 거행하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됐다(2001.9.14.). [사진제공 - 최재영]

 

▲ 1호기 원전 콘크리트 타설식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금호지구의 행정구역과 지역적 현황
      
KEDO 발전소 입지는 금호지구의 일부 구역으로 강상리와 속후리 사이의 금호마을과 어인산 능선에 위치했으며 금호리의 대부분은 발전소 건설을 위해 거의 이주되었고 그중 일부만 북쪽 경계 울타리에 근접해 남았다. 또한 주변에는 평라선(평양-나진) 철도가 해안을 따라 달리고 있으며 철로와 더불어 평행한 도로가 있어 함흥-평양-청진으로 연결되었고 신포항을 중심으로 해상교통편이 운행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과 지형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북측의 행정구역 개편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KEDO 경수로 건설을 위한 발전소 건설지역과 생활숙소 지역이 위치한 신포시 일대는 함남 동북부 해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 123㎢, 인구 150,800명(1991년도 기준) 정도, 동남쪽은 동해가 가깝고 서쪽은 홍원군, 북쪽은 북청군과 인접해 있다. 특히 북청군은 골재원 및 용수원 부지가 위치한 지역이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북청군 신포면, 양화면, 속후면과 홍원군 용원면 일부가 분리되어 신포군이 신설되었고 1960년 10월 신포군이 신포시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9개리가 홍원군으로 편입되었다. 1974년 1월에 신창군이 폐지되면서 남대천 서쪽의 8개리가 신포군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어항, 포항, 해산, 해암1, 해암2, 광복1, 광복2, 신흥1, 신흥2, 동호1, 동호2, 마양, 풍어, 연호, 육대1, 육대2등 16개동과 용중, 신풍, 보주, 부창, 양화, 호남, 남흥, 서흥, 광천, 금호, 오매, 호만포, 강상, 속후, 신호, 양지 등 16개리로 이루어져 있고 주산업은 수산업이다. 지금은 ‘강상로동자구’라는 1구와 ‘광천리, 금호리, 남흥리, 서흥리, 속후리, 오매리, 호남리, 호만포리’ 등의 8리로 구성된다.
     
당시 남측 영토에서 북측의 KEDO 경수로 공사장이나 생활관 부지를 방문하려면 북측과 합의가 된 경우에 한해서 비행기, 기차, 자동차, 선박 등의 교통수단이 모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측 사정상 오히려 철로나 육로는 통행이 제한적이며 허락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기 때문에 공사장비나 물자 등을 운반하는 방법은 주로 해상 선박과 대형 바지선을 이용하였으며 이때도 극소수의 운송 관련 인원만 선박에 탑승할 수 있었다. 특별한 경우에는 선박으로 직원이나 근로자들을 운송했으나 대부분의 KEDO 직원들과 근로자들은 항공편을 통해 공사현장을 방문했다.
    
필자는 당시 자료를 보충하기 위해 박재권 목사, 서훈 박사 등 당시 KEDO 현장에서 근무했던 관료들과 책임자, 한전 신우회원들을 비롯한 목회자들을 만나 현장 영상자료를 입수하고 당시 종교적인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KEDO 금호지구 내 교회와 성당 등을 설계한 김정신 교수를 비롯해 1997~2004년까지 약 7년간 KEDO 사진실 소속으로 건설현장에서 근무한 사진작가 석임생(필명 리만근) 선생의 사진자료도 도움을 받았다. 아울러 KEDO와 한국전력회사의 홍보책자와 자료를 참고하였으며 건축시공기술사였던 이광중(李光重) 선생이 KEDO 현장에서 16개월간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현장 보고서’도 참조하였다.

▲ 신포지구와 북청군이 포함된 함경남도 행정 지도. [사진제공 - 최재영]

 

▲ 구글 인공위성으로 내려다 본 신포시 중심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KEDO 발전소 건설부지 인근 소나무 방풍림과 방파제 공사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 사진 하단부의 울타리는 금호리 마을과 KEDO 현장과의 경계선. [사진제공 - 최재영]


신포교회가 세워지기까지
      
1997년 7월, 근로자 숙소에서 3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린 신포교회는 그 이듬해인 1998년, 컨테이너를 구입해 첫 예배를 드린 시점부터 그 후  2002년 4월, 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한 이후로 교회당이 북측 영토에 있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본격적인 종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2006년 1월 7일, 마지막 잔류 인원들이 완전 철수하며 교회가 폐쇄되기까지 8년 동안 신포교회는 담임목회자를 두지 못하고 그 대신 목회자에 버금가는 교역자급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교회를 이끌어왔다.   
     
신포교회가 태동된 계기는 KEDO 신포지구 원자력발전소 건설본부의 의무실장으로  부임한 외과의사 출신의 김상현 박사가 컨테이너 교회에서 새벽기도회와 각종 예배를 인도하며 시작됐다. 의무실장으로 부임할 당시의 김 박사는 이미 경기도 수원에 있는 합동신학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공부를 하던 전도사 신분이었기에 예배 인도가 가능했다. 그는 1974년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연이어 대학원을 졸업한 의학박사로서 전주 예수병원, 인천 길병원, 울산 해성병원 등에서 외과과장으로 재직한 경험이 있었기에 의무실장으로 발령받은 것이다.
    
부임할 당시 40대 중후반의 젊은 나이였던 김상현 전도사는 1974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전주 예수병원에서 외과 코스를 밟은 후 외과의사가 되었는데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1980년 군의관으로 복무할 때 유영기 목사(OMF 소속 일본 선교사)를 만나 성경공부를 하던 중에 회심하고 사역자로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중국 선교의 비전을 가지게 되었고 1991년 서울 할렐루야교회(당시 김상복 담임목사)의 파송을 받아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 연변대학과 합작해 병원을 세우고 원장으로 사역하다가 1996년 합동신학대학원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하던 중 1997년 9월부터 1999년까지 방북해 약 3년 동안 함경남도 신포 KEDO 의무실장을 맡게 된 것이다.
    
의무실장을 그만둔 뒤 귀국해 1999년 합동신학원을 20회로 졸업한 후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측 경기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2002-2005년까지 제자교회를 담임하였으며 2002년 5월 4일, 제자교회를 담임하면서 당시 54세의 나이로 인천 간석동에 100병상 규모의 외과병원인 광연병원을 개원했다. 그 후 또 다시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중사모 장애인학원을 2005-2010까지 운영했으며 2010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섬서성 나환자 재활병원인 상락인애원에서 원장으로 근무 중이다.
     
아무튼 김 박사가 초창기에 컨테이너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오랫동안 북한교회 재건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 하던 보수교회들은 북녘 땅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독교 신자들이 신포 경수로 공사장 근로자로 지원하기까지 했다. 1994년 이후 북측이 대가뭄과 홍수, 냉해 등으로 식량난을 겪게 되자 한기총을 비롯한 보수 기독교 교단에서는 소위 ‘북한교회 재건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런 그들에게 가장 먼저 들려온 소식이 함경남도 신포에 원자로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이에 발맞춰 신포 경수로 공사를 주도하는 한국전력 그룹에 근무하는 기독교신자들로 구성된 ‘한전 신우회’가 앞장서서 자신들의 일터인 신포에 교회당을 설립하기로 하고 서울 남포교회(담임 박영선 목사)와의 협력을 통해 교회 설립을 합의하고 컨테이너를 구입해 신포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한기총 등 남측의 보수 기독교에서는 당시 신의주 경제특구와 나진선봉 경제특구에 교회를 세우려고 추진했으나 북측 당국이 경제적 이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교회 설립을 반대해 무산된 상태였는데 이때 신포교회가 성공적으로 설립된 것에 대해 큰 관심과 의미를 두었던 것이다.
 

▲ 컨테이너로 된 응급실, 외과, 내과병동 등이 입주한 KEDO병원에는 앰뷸런스가 상시 대기하며 만일의 현장사고에 대비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역대 사역자들과 컨테이너 교회시절
      
신포교회는 1997년 7월에 경수로 건설현장 생활관 타운 내에서 기독교신자인 남측 기술자와 근로자들 몇 명이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KEDO 건설현장에 한전 기술관으로 파견 근무 중이었던 이수근 집사(서울강동노회 은성교회)의 증언에 의하면 첫 예배는 근로자 숙소에서 세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신포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후 점차 확대되다가 1998년 1월에 드디어 현장에 컨테이너 박스를 설치하면서 예배처소를 확보했고 이에 고무된 신자들이 본격적으로 정식 예배를 드리면서 정식 설립되었다.
      
당시 컨테이너 예배는 20여명의 근로자들이 예배를 드렸으며 교회조직을 살펴보면  운영위원회가 있고 산하에 총무부, 예배부, 관리부, 봉사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건설현장 지명에 따라 교회명칭을 ‘신포교회’라 이름을 지었으며 주일 오전 9시와 저녁 7시 30분에 예배를 드리며 화요일과 금요일엔 성경공부, 수요일엔 수요예배(삼일 기도회)를 드렸다. 또한 새벽기도는 매일 새벽 5시 30분에 드렸으며 새벽예배 인도와 설교는 의무실장으로 부임한 김상현 전도사가 담당했다. 한국기독공보의 1998년 3월 28일자 보도에 의하면 그 후 신포교회는 매주 화요일 전도 폭발 훈련을 하기도 했으며 1998년 1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부흥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처럼 북측 영토에 세워진 컨테이너 교회당에서도 남측교회에서 하는 방법대로 각종 예배와 모임을 활발히 가졌으며 예배인도자(사회자)는 교회 집사들이 돌아가면서 순번대로 했고 설교는 국내 유명 목사들의 비디오 설교를 듣는 것으로 대신했다. 또한 새벽기도회 때 마다 집사들이 돌아가며 성경 통독을 매일 인도하기도 했다. KEDO 현장에는 공식적으로 목회자나 종교인이 들어올 수 없기에 드러내 놓고 설교자를 세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첫 담임교역자로서 당시 KEDO 건설본부 의무실장(1997-99년)을 맡았던 김상현 전도사가 사역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50-60명의 신자들이 출석했다. 이는 당시 신포교회를 담당한 입양교회(후원교회)였던 서울 잠실 남포교회(박영선 목사 시무)의 적극적인 후원에 힙 입은 결과였다. 또한 김상현 전도사 외에도 서훈 박사도 컨테이너 교회를 섬긴 사역자로서 큰 기여를 했다. 그 후 서훈 장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시절에 대북 휴민트(HUMINT, 인적정보망)의 선두주자로서 남북을 가장 많이 오가며 유능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았던 인물이며 당시  KEDO 경수로사업 지원단장으로 부임해 신포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서훈 장로가 평신도 지도자로서 신포교회를 섬긴 것처럼 현재 캐나다에서 침례교 목사로 사역하는 박재권 목사도 그 당시 신포교회 예배를 이끌며 헌신했던 인물이다. 당시 평신지도자 시절의 박 목사는 신포교회당이 건축된 직후인 2002년 10월부터는 2년간 KEDO 현장 요원으로 근무했다. 그가 경수로 현장에 부임할 때는 남측의 강원도 양양공항에서 KEDO의 VIP 요원들과 함께 북에서 보낸 특별 전세기를 타고 함흥 인근의 선덕공항에 도착해 현장으로 부임했으며 임기를 모두 마치고 다시 남측으로 귀국할 때는 선박으로 갔다고 하는데 이처럼 방북을 위한 입국과 출국 과정에서 그는 많은 종교적인 간증거리를 갖고 있다고 고백했다.
    
특히 박 목사는 신포교회 신자들의 영적 생활과 올바른 성경해석을 위해 직접 성경공부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신포교회 청년회에서도 특강을 하기도 하는 등 열심히 섬겼으나 교회규칙에 따라 예배시간에는 항상 설교 테이프를 이용해 설교를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극보수 성향의 침례교 교파 중에 하나인 ‘말씀보존학회(대표 이송오 목사)’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현재 캐나다에서 사역하고 있다.
     
KEDO 현장 요원으로 파견된 김상현 박사, 서훈 박사, 박재권 목사 등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의 사역 협력뿐 아니라 KEDO 장비관리부장으로 발령받은 이호평 집사나 KEDO 시공단장으로 부임한 최대일 집사 등은 신포교회를 열심히 섬긴 사역자들이었다. 또한 한전신우회(한국전력그룹 선교회)의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서울 잠실의 남포교회 측의 전적인 후원의 결과로 북녘 땅에 세워진 신포교회는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8년동안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했다. 
 

▲ 좁은 컨테이너 교회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신포교회 신자들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종교 간의 화합과 조화를 이룬 종교활동
     
금호 생활관 타운 부지에는 학교만 빼놓고 모든 시설물을 다 갖추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활 속에 필요한 모든 시설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심지어 각 종교 분야까지 이곳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KEDO 생활관 타운에 건축된 종교동(宗敎棟)은 남북이 통일된 이후에도 북녘 땅에서 펼쳐질 각 종교 간의 현실 세계를 미리 보여주는 좋은 케이스가 되었다. 종교 화합의 장으로서 붉은 벽돌로 지어진 종교동에는 기독교 예배당과 천주교의 성당 그리고 불교의 법당이 나란히 지어져 사이좋게 입주했다.          
     
KEDO 측은 타종교와의 형평성과 행정 편의상 종교구역에는 기독교 교회당뿐 아니라 천주교 성당과 불교 법당까지 일시에 건축한 것이다. 2002년도에 완공된 이 종교동 건축물들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출신인 김정신 선생이 설계했는데 그는 KEDO 금호지구 내 교회당, 법당, 성당을 설계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도에 제10회 가톨릭미술상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정신 선생은 일반 건축물 설계도 했으나 국내외에 30여개의 종교건축물을 설계하는 등 평소 종교건축물에 남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지어지도록 교회와 성당을 설계했다.
      
4년 동안의 컨테이너 생활을 청산하고 교회당을 건축한 신포교회는 종교동 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커 중심 건축물이 됐으며 대단히 큰 규모의 신포교회당은 일반 예배당처럼 각종 부속실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기독교에 비해서 천주교 신자들과 불교 신자들의 활동은 저조했다. 그러나 세 종교가 함께 모여 ‘한 지붕 세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각 종교 간의 공생, 공존 그리고 협력관계를 모범적으로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통일 이후에도 이웃종교와 서로 경쟁하기보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종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우선적으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모습은 종교적 허영심과 과욕이며 종교의 기본 본질과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그 동안의 남측 사회는 기독교와 천주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통일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부터 2백 년 전에 조선 땅에 천주교가 들어왔고, 1백 년 전에는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기존의 조선 불교와 유교 등과 더불어 각 종교가 서로 큰 불협화음 없이 적절한 숫자의 신자들을 확보하며 조화롭게 상생하며 지내왔다. 기독교를 필두로 종교동에는 천주교, 불교를 믿는 인원들의 예배, 미사, 법회가 제공되어 왔으며 기독교처럼 타종교의 행사나 의식들도 거의 일요일에 이루어졌다. 또한 생활타운 주변에 위치한 금호마을 등 북측 주민들은  종교시설에 방문할 수도, 접근할 수도, 이용할 수도 없었으며 북측 근로자들 또한 종교활동에 합류할 수 없다.
    
각 종교 모두 목사, 신부, 스님 등 성직자나 종교지도자를 별도로 두지 않았으며 타종교보다 다소 인적자원이 풍부한 개신교회(신포교회)는 선교사나 전도사급 혹은 신학생이나 장로급의 사역자들이 확보되어 큰 지장은 없었다. 천주교나 불교도 자체적으로 대표자를 선발해 그 대표자가 종교 활동을 주도했으며 시기별로 차이가 있으나 참여인원을 종교별로 대략 살펴보면 기독교 90-100명, 천주교 및 불교 각각 30-40명의 규모였다. 

▲ 2002년 4월에 완공해 입당하게 된 신포교회당 외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2002년 4월에 완공해 입당하게 된 신포교회 예배당 내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주일예배에 대표기도를 드리는 박재권 목사. 당시 그는 침례교 평신도 지도자였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추수감사주일 예배시간에 비디오로 남측의 유명 목사의 설교를 듣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주일예배를 인도하는 침례교 박재권 목사. [사진제공 - 최재영]

 

▲ 주일예배에 특별찬양을 하는 남성 신자들. [사진제공 - 최재영]


기독교인들과 신앙생활
     
생활타운 인근의 금호리 마을측은 밤 8시만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확성기를 통해서 라디오방송을 뉴스로 내보냈다. 북측 당국과 금호리 마을측은 8시 이전에는 대부분 군가풍의 노래를 틀어주다가 8시 정각이 되면 시보가 울리면서 뉴스를 들려주는 것이다. 동네 공용 스피커로 뉴스를 방송하는 것이 북측 전체 농어촌 마을의 상황은 아닌 듯 했다. 이 방송은 아마도 KEDO 타운에 거주하는 남측 직원들과 근로자들을 의식해 일부러 금호리 마을에서만 방송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이 되면 기독교인들은 어김없이 예배당에 나와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새벽예배를 드렸다.
      
종교동을 건축하거나 각종 종교 의식 등을 거행하는 것들은 북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승인한 부분이었으며 신포교회가 속한 지역은 KEDO 생활관 영내에 있었기 때문에 치외법권 지역이었으며 북측 당국에서 시비를 걸 수 없는 곳이며 개인의 신앙생활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주일 아침에는 오전 9시에 예배를 드렸으며 저녁에는 근무자들이 퇴근해 숙소로 복귀하면 샤워 후 곧바로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저녁 7시 30분에 또 한 차례의 예배를 드렸다. 주중에는 화요일과 금요일에 정기적으로 성경공부를 했으며, 수요일에는 수요 저녁예배(삼일 기도회)를 드렸다. 그러나 규칙상 생활 타운 울타리 밖 주민들 혹은 북측이 운영하는 영업장소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행위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전도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또한 근로자들이 현장에서 일할 때 북측의 동료 근로자들에게 전도하는 것도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북측 주민이나 근로자에게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면 안 된다고 못 박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으며 북측 근로자들은 항상 2인 1조로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기 때문에 사적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박재권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어느 날 북측 노무자 한 명이 다가와 종교에 대해 묻기에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그분을 믿는다고 했더니 북측 근로자가 박 목사를 향해 하는 말이 “박 선생은 공부도 많이 한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무지몽매합니까?”라고 반문하면서 자신들이 믿고 존경하는 대상은 오직 김일성 수령이라며 북 지도자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박 목사가 남측으로 귀국하기 며칠 전에는 한전 직원 소속의 신포교회 집사 한 명이 대표기도 시간에 사용하기 위해 메모를 해 둔 기도문이 적힌 종이를 무심코 상의 주머니에 넣고 귀국하다가 몸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밝혀져 4시간 동안 취조를 당하는 곤욕을 치른 후에 풀려났다고 한다. 그가 장시간 취조를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기도문 내용 중에는 북측을 자극하는 비방 내용들이 가득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 남과 북의 근로자가 작업 후 다정하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진한 곤색은 남측 근로자, 하늘색은 북측 근로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생활관을 관통하는 아스팔트 도로 좌측의 철조망은 골프연습장, 우측은 기능인력 숙소. [사진제공 - 최재영]

 

▲ KEDO 대표들과 한전 직원들의 숙소. [사진제공 - 최재영]

 

▲ 후생편의 시설동. [사진제공 - 최재영]

 

▲ 시뮬레이터 건물동.[사진제공 - 최재영]

 

주말을 맞는 근로자들의 생활상
    
파견 공무원이나 한전 직원들은 법정시간인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의 근무시간을 지켰고, 토요일에는 오전 근무를 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합동 시공단과 건설관련 협력 업체 직원, 기능직 인력들은 매일 아침 7시에서 저녁 6시까지 근무하면서도 토요일에도 휴무가 없이 격주 일요일에만 휴일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근무형태는 경수로 완공의 특수성이나 조기 단축의 조급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건설 분야의 노동법이 개선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격주에 한번 돌아오는 일요일은 매우 귀중한 날이므로 근로자들은 저마다 보람되고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다. 격주 휴일의 전날인 토요일 저녁은 대부분 회사별로 회식을 하거나 친한 동료나 혹은 같은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시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특히 합동시공단에서는 과음으로 발생되는 타운 내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당직자를 근무하도록 했으며 그와는 별도로 순찰조를 편성해 운영하였다. 순찰조는 저녁 10시 이전까지는 북측 시설물들을 포함한 전 지역을 순찰하였고 10시 이후에는 생활숙소 지역 내에서 벌어지는 술자리 위주로 순찰을 했다. 휘황찬란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요란하고 흥겨운 토요일을 밤을 보낸 다음날 일요일은 대부분 늦잠을 자거나 TV시청, 독서, 빨래 등의 개인생활로 하루를 보냈다.
    
특별한 계획이 세워진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대로 무리 없이 보냈다. 바닷가로 나가서 솔밭을 거닐거나 해변에서의 야유회를 하기도 했으며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다낚시는 물론 현금호에서 민물낚시도 즐겼다. 또한 어인산 등반과 테니스, 농구, 족구, 축구, 소프트볼 경기 등으로 여가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신자들은 이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으며 대부분의 종교인들과 신자들은 하루 종일 각자의 종교 처소에서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주말을 보냈다.

▲ 2000년 여름부터 KEDO 인원들에게 개방된 동해 바닷가. 좌측 산이 어인도. 바다 중앙에 보이는 섬이 개암도. [사진제공 - 최재영]

 

▲ 인공위성에서 내려다 본 20만평 규모의 생활관 타운. 우측이 동해 바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좌측 작은 단층 건물은 옥류관. 우측 3층짜리 건물의 1층에는 북 화가들의 그림을 파는 매장이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KEDO 직원들과 근로자들이 옥류관에서 회식하는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전력 생산 그 이상의 의미
      
1994년 10월 북미간의 제네바 합의로 탄생한 KEDO는 2001년 함경남도 신포시 금호리 등 9개 마을을 통합해 개편한 금호지구에서 백만 KW경수로 2기를 짓는 공사를 시작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남측이 70%가량의 비용을 지원했기 때문에 남북 협력의 상징적 사업으로 평가됐으며, 2003년이면 경수로 1기가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결국 중단되고 모든 근로자들은 2006년에 완전 철수했다. 남측 정부의 경수로사업 지원기획단은 2007년 11월에 해체됨으로써 남측 지원단은 13년 만에 공식 해체된 것이다. 
    
그러나 금호지구 KEDO 경수로 단지는 완공만 됐다면 전력 생산 이상의 의미를 가졌을 것이며 그야말로 평화통일의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국제 외교 차원에서의 북핵 문제가 잘 풀렸다면 북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물론이고 고정적인 외화 수입도 생길 수 있었다. 경수로 부지 총 270만평에는 남측과 외국의 기술인력 약 3,600명이 살 수 있도록 20만평의 생활부지가 조성됐기 때문에 완공됐다면 상시적인 외화수입 창구가 생기는 것이다.
    
북측이 당시 경수로 부지를 통해 남측과 외국 기술인력으로부터 벌어들인 수입과 그 과정에서 북 근로자들이 벌어들인 임금과 여러 가지 통신운영, 차량, 비행기, 주변의 7개의 봉사소와 식당 등에서 벌어들인 수입도 매우 컸다. 그러나 2002년 10월, 북측이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경수로 건설 공사는 중단됐다. 1997년 8월 19일 오후 2시 경수로 착공식을 한 이후 2006년 1월 8일 KEDO 직원과 남측 공사관계자 등  57명이 강원도 속초항으로 모두 철수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다.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라 시작된 경수로 건설사업이 11년 3개월 만에 종료된 것이며 이는 KEDO가 2005년 11월 집행이사회를 열어 사업종료 원칙에 합의함에 따라 12월에 방북해 결과를 통보하자 북측이 이를 수용해 더 이상 잔류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됨에 따라 결행된 일들이다. 경수로 원전 공사는 그 동안 총 34.5%의 공정률을 보였으며 총사업비는 15억 6200만 달러가 투입됐고 이중 남측이 11억 3700만 달러(1조 4000억원), 일본이 4억 700만 달러, EU가 1800만 달러를 부담했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된  경수로 원자로는 현재 고철 덩어리가 된 상태에 있으며 근로자들이 철수한 금호지구 현장에는 93대의 중장비와 190대의 일반차량, 공사자재 등 455억원 상당의 자재와 장비가 북측의 반출거부로 남겨지게 됐다.
      
KEDO 직원들 가운데는 많은 크리스찬들이 있어 금호지구에서 예배를 드리며 근무했는데 평소 그들의 언어와 기도, 찬송을 비롯해 신자로서의 향기 등이 북녘의 주민들과 근로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사뭇 궁금하다. 그러나 그들은 북녘에 두고 온 장비나 쏟아부은 자금보다는 그 아름다운 자연과 정감 넘치는 북녘 동포들과 나눴던 정들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입하며 피땀 흘려 이룩하고자 했던 남북 화합의 일들을 허무하게  중단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인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속히 남북 관계가 개선되어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되면 북핵문제와 상관없이 가장 먼저 경수로 건설이 재개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곳에서 생산된 불빛이 북녘 땅 곳곳에 비추고 그곳에서 생산된 전력이 북의 공장들을 힘차게 가동시키는 그날을 두 손 모아 기도한다. (게속)

▲ 총사업비 15억 6200만 달러를 투입해 34.5%의 공정률에서 중단된 원자력 1호기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총사업비 15억 6200만 달러를 투입해 34.5%의 공정률에서 중단된 원자력 2호기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수정, 29일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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