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1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가슴 떨리는 선언이다. 그런데도 몇 해 전에 적지 않은 시민들이‘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치며 집회를 하였다가 처벌받았다.

이 나라는 과연 민주공화국일까? 모든 권력이 선거일에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맞다. 그 날 이후 국민에게 권력이 남아 있지 않으니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이 명제는 공허하다. 이 나라에서 선거는 권력의 출처를 표시하는 인류학적 제의와 같다.

어쨌든 이번처럼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 심드렁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지난 몇 달 사이에 이 나라 정치계급들의 행태로부터 받은 상처가 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야권은 대권의 욕망 때문에 분열하였고, 여당은 유신시대에 보급된 통일벼처럼 단일품종의 진박 정치를 구현한다며 법석을 피웠다. 물론 현 정권은 그 전에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키는 폭거를 헌법의 이름으로 자행하였다.

이 와중에 정치계급들은 서로 당을 바꿔가며 대표와 선대위원장을 맡고 있으니 과두파들의 보직순환구조를 보게 된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세 정당들이 이념적으로 급격하게 평준화된 결과라고 여겨진다. 세 당이 좋은 정책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경쟁하는 대신에 상대의 과오를 심판해달라거나 저쪽은 오래 해먹었으니 나로 바꿔달라거나 느닷없이 무릎을 꿇고 읍소하는 것까지도 같다.

국민은 헌법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공화주의 사상가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영국인들은 투표일 하루만 주인이고 나머지 날들은 노예라고 규정했다. 이 말은 대의민주체제의 시민들의 정치적 지위를 일반적으로 겨냥한다.

나는 이번 선거까지 포함하면 30년 이상을 거르지 않고 투표하였다. 물론 내가 지지한 후보들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그 개혁파 대통령들은 바라던 일을 성취하기도 했지만, 이 나라의 권세가들의 시선에서 개혁의 논리를 꾸리고 그 논리를 보통사람들에게 강요하였다.

한국사회에서 파멸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분들이 그 두 개혁파 대통령이었다. 그 후 보수파 대통령들은 그 포장도로를 얼씨구나 하며 내달렸다. 자살율 1위는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업적만은 아니다.

선거 앞에만 서면 현실주의와 근본주의가 머리 속에서 사투를 벌인다. 현실주의는 말한다. “정치는 가능한 자와 끝없이 연대하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말한다. “불가능해 보인 것을 선택해야만 가능한 것이 된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이번 선거에 주요정당의 세 후보만이 출마하였다. 내 고민은 매우 헐거워진다. 그럴 때에도 ‘연탄재의 원칙’(시인 안도현이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 한다. 인생에서 한번이라도 뜨거운 적이 있었느냐며)이 작동한다.

학창시절 대의를 위해 투쟁한 적이 없고 타인의 희생에 기대어 편안히 살아온 나로서는 한번이라도 연탄처럼 뜨겁게 타올랐던 사람에게 경외감을 갖는다. 그만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답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동네에 이러한 원칙을 적용할만한 인물이 출마했다면 그 유권자는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선거를 넘어 주권 문제로 논의를 확전시키고 싶다. 노예 아닌 시민은 공적인 일이라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한다. 대표선출이나 헌법개정 투표가 경험의 전부인 우리로서는 심화된 주권체험의 기회가 매우 미미하다.

마키아벨리나 루소는 고전시대의 그리스, 로마나 중세 자치도시를 배경으로 자유롭게 공화정치의 구상을 전개하였다. 어쨌든 그 나라의 역사가 이 나라의 역사가 될 수는 없지만 그 역사를 우리의 정치적 자산으로 이체하여 우리 현실에 다양하게 접맥시킬 수는 있겠다.

우리의 정치제도를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물론 정치계급들이 지배하는 헌정구조를 근본적으로 수술해야 한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헌법은 말하지만 그저 대표를 뽑아대기만 해서는 국민은 주권자가 아닌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정체를 과두정이라고 불렀다. 의사소통과 권력의 문제를 통치자의 기술이 아니라 시민의 권한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철학자 아렌트는 이미 의사소통적 권력(communicative power)이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한갓 철학자의 상상력이 빚어낸 개념이 아니라 공론장에서 소통하고 결정하는 시민의 지위에 대한 정치적 통찰이다. 역사적으로 민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아테네와 로마의 정치를 반영한 것이다. 당시 시민들은 모여서 결정하는 동안에만 주권자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흩어졌을 때에는 지속적으로 몰락을 강요당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출처표시만으로는 공화국이 아니다. 그 권력은 마땅히 모여서 소통하는 국민들 가운데 있어야 한다. 나는 헌법 제1조를 이러한 의미로 재충전해야 한다고 본다.

현재에도 지방자치의 차원에서 주민 참여가 시행되며, 국민참여재판도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실례들은 보통사람들도 전문공직자 못지않게 능히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지역적 차원에서, 사법적 차원에서 주민의 참여뿐만 아니라 더 큰 정책결정의 차원에서 국민 참여가 실현되어야 한다. 중요성이 덜한 집행사무 이외에도 정책결정권과 중요한 권력들이 국민에게 이양되어야 한다.

선거와 관련해서 나온 집권자나 집권정당의 공약에 대한 국민의 이행청구제도를 구상해볼 수 있다. 특히 소수당이 집권하였을 때에는 그 정권의 기능부전을 막기 위해서 필요하다. 다수파 집권정당이 공약 이행을 게을리 할 때에는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나아가 정당간의 정치적 교착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일정수의 의원들이나 일정수의 국민들에게 정치적 쟁점법안을 국민투표에 회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와 별도로 일정수의 국민이 국민발안의 방식으로 주요 정책이나 법률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경우 거국적인 국민투표 대신에 추첨을 통해 구성된 국민배심제(민주적 하원)를 통해 현안에 대해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의제를 유지하면서 국민이 일정한 정치권력을 직접적으로 분점하는 헌정구조가 마련되는 것이다. 매년 10여건 정도의 주요정책을 국민참여(국민투표나 국민배심)로 결정한다면 국가권력과 국민권력 사이에, 과두파들과 보통사람들 사이에 힘의 균형이 만들어질 것이다.

국민은 어리석은 대중이 아니라 전문적 식견을 가진 개인들로 구성된 지성적인 청중이다. 더구나 이들은 공동결정 과정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이미 터득하고 있다. 사실 보통사람들이 그러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던 날이 인류사에 하루라도 있었던가! 국민은 모든 권력을 엘리트들에게 이양한 헌정구조 아래서 그저 선거 노예로 전락한 것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정치적인 것, 어쩌면 헌법적인 것을 재조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대의민주주의가 최고의 정치제도도 아니고, 흠결 없는 시스템도 아니므로 우리는 과거에 존재했던 것들, 우리의 고유한 제도들, 그리스 로마뿐만 아니라 외국의 변주와 실험들을 분해하여 보통사람들의 이상과 열망에 부합하는 제도로 재구성해야 한다.

우리는 공동생활의 기반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제도를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혁신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곁에 두고 공화적인 실험들을 다각도로 접맥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은 내일로 닥친 선거에서 국민대중의 이익에 헌신할 가능성이 높은 대표를 뽑아야 한다. 그러나 대표를 뽑는 것만으로는 배가 고프다. 보통사람들을 정치공간에서 박수부대로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서울대법학박사

전 국민대, 전남대 교수
현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1년 <국가범죄>로 임종국상 수상

로베르토 웅거 <주체의 각성(2012)> 야스퍼스 <죄의 문제(2014)> 번역
국가폭력 및 인권문제에 관한 논문을 민주법학에 규칙적으로 투고함


(수정, 11:25)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