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처럼 외교도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핵안보정상회의(3월 31일-4월 1일)는 이번에도 역시 그 거창한 제목에 어울리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10년 회의를 제안하고 주도하기 시작한 직후부터 거꾸로 미국이 신형 핵무기 개발과 생산에 열을 올리고, 세계 핵무기의 90%를 미국과 양분한 러시아가 미국과의 마찰로 올해 회의에 불참했으며, 의장국 미국 자신이 역사상 최대 규모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창을 들고 똑같은 창으로 맞서는 북과 핵전쟁 직전의 피 마르는 긴장을 유지하는 등 상황은 핵안전 반대방향으로 얽혀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장이 서면 그 안에서 각자 능력껏 전을 깔고 거래를 엮는 법. ‘핵안보정상회의를 계기’로 벌어지는 정상회담이 핵안보정상회의 관련 보도의 거의 전부인 이유다.

3월 31일 하루 동안 한미, 한미일, 미일, 한일, 미중, 한중 등 동북아 4개국 간 물고 물리는 정상회담이 이어졌다. 무슨 얘기가, 어떤 협상이 오갔을까? 관객 보기 좋으라고 눈부신 조명을 척척 비춰주는 연극 무대가 아니라 암전 중에 또는 무대 뒤에서 자기들끼리 다 끝낸 다음, 온갖 분장에 색색 화장으로 기자회견에 나타나는 정상외교인지라 속아 넘어가기 쉽다. 그래서다. 그냥 지나치면 우리만 손해다.

10분과 75분

먼저 한미일 관련 회담을 보자. 한 가지 상식을 확인하자. 중요한 회담일수록 길고 그 역일수록 짧다. 한미 정상회담은 10분, 한미일은 75분 걸렸다. 통역이 반을 잡아먹는데, 10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안녕하세요?” 인사다. 미국 대통령 만나는 걸 국내 정치에 크게 써먹는 쪽에서 “10분만 합시다”했을 리는 없다. 이건 미국 입장이다. 중요한 얘기는 한미 간이 아니라 한미일 3국이 같이 하자는 것이다.

무슨 얘길 했을까? 회담 직후 세 정상이 기자회견에서 강조한 것을 보자. 박근혜 대통령은 “이제 중요한 것은 북한이 핵 포기 없이는 생존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끝까지 밀어붙여 북을 굴복시키자’가 초점이다. 미일도 같을까?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미·일의 안보는 연결돼 있다. 3자 안보 협력이 북한의 핵 확산과 핵 위협을 억제할 수 있다는데 합의했다”고 했고, 아베 일본 총리대신(국민이 아니라 일왕의 신하)은 “지금 3국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봤을 때, 한미일 협력을 안보 분야에서 추구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국방이라든지 또는 외교부 이런 여러 차원에서도 3자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합의했다”고 했다.

가지는 쳐내고 주어와 목적어를 보면 미일의 발표는 명확하다. “한미일 3국은 안보협력 강화를 합의했다”는 것이다.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는 곧 한일 안보협력 강화다. 미국이 가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 진출할 수 있고, “제3국이 위험한 경우”에는 선제공격,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일본, 핏빛 일본과 우리가 안보협력 강화, 즉 군사동맹을 맺어 나가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정부는 아니란다. 회담 내용 해석은 미일이 알아서 하는 것이니까 신경 쓰지 말란다.

<박근혜 대통령은 “3국간 협력을 가능한 분야에서 진전시켜 역내 국가로 확대해가자”며 ‘안보’라는 표현을 쏙 뺐다. 한일 정보보호협정(GSOMIA)의 군사적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에 따른 정치적 부담감이 얼마나 큰지 시사하는 대목이다.(한국일보 4월 2일)> 정치적 부담감은 총선 이후 사라진다. 그리고 일본군이 나타난다.

75분과 80분

한중 정상회담은 80분 걸렸다. 원래 약속은 60분이었는데 늘어났다. 처음부터 길게 잡은 게 아니라 하다가 길어진 점에서, 이건 중요해서가 아니라 이견이 많아서라고 봐야 한다.

세 가지 얘기가 오간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첫째는 대북 관련이다. <시 주석은 대북 제재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전면적으로 완전하게(fully and strictly) 이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시 주석은 “북한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 안보리 결의의 충실한 이행이 중요하다”는 박 대통령의 발언에 이같이 답했다고 청와대가 밝혔다.(중앙일보 4월 2일)>

비춰주는 대로 눈이 가면 여기서도 또 속는다. 자, 보자. 박 대통령이 “충실한 이행이 중요하다”고 말하니까 시 주석이 “전면적이고 완전하게 이행해 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충실하게 하자”면 “알았다. 충실하게 하자”하면 되는데 왜 굳이 “전면적이고 완전하게”라고 받았을까? “충실한”과 “전면적이고 완전하게”는 하늘과 땅만큼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유엔안보리 대북 제재 2270호는 우리에게 너무 파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결의는 서문에서 “제재는 목적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또 49항에서 “한반도, 동북아의 평화 와 안정이 중요하다는 점”, 50항에서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을 지지한다는 점” 등을 분명히 했다. 시진핑 주석의 유엔안보리 결의의 “전면적이고 완전한 이행”은 하나, 제재를 시작하는 동시에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그런데 아직도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각 국이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것.

둘, 대화는 9.19공동성명에서 이미 합의한 것처럼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와 북미관계 정상화,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체제 실현 등을 내용으로 해야 한다(그런데도 한국과 미국은 여전히 북이 먼저 변해야 한다며 대화를 회피한다!)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의 1일 발표를 보면, 시 주석은 박근혜 대통령과 한 정상회담에서 “대화와 협상은 문제를 해결할 유일하게 올바른 방향”이라며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대화 재개를 추동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는 구체적 설명 없이 박 대통령이 “최근의 반도 정세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고만 덧붙여, 한·중 정상 사이에 북핵 대응 방안을 두고 상당한 이견이 있었음을 내비쳤다. (한겨레 4월 2일)>

둘째는 사드 관련이다. 시 주석은 이번에 오바마 대통령 면전에서 직접 “사드 배치를 단호히 반대한다”고 쏘아 붙였다. 그러니, 그 단호히 반대하는 사드를 어서 배치하겠다고 적극 나서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그가 할 말이 무엇일까? 그런데도 정부는 “한·중 정상회담에서 사드 배치 문제에 관해 양측의 기존 입장에 대한 의견 표명이 있었고 앞으로 그 문제에 관해 소통을 계속하기로 했다(김규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고 한다.

청와대를 돕는답시고 이런 말을 하는 신문도 있다. <주변수는 미국이고 우리나라는 종속변수이기 때문에 시 주석이 미국에 더욱 강력한 톤으로 사드 배치에 대해 반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앙일보 4월 2일)> 각설하고 “앞으로 소통을 계속하기로 했다” 즉, 중국이 우리에게 또 하나 코를 걸었다.

셋째는 정상회담 발표문에 박힌 “양 정상은 한반도 미래 문제에 대해서도 상호 의견을 교환했다”는 대목 관련이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원칙에 근거한 평화통일을 지향한다.(한미동맹 60주년 공동성명)”처럼, 지금까지 ‘한반도의 미래 문제’는 미국이 독점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중국이 자기주장을 들이댔단다.

그러니까 생각나는 게 있다. <우다웨이 특별대표는 일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한중관계를 과거에는 정치와 경제 부문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이제는 안보 이익의 차원도 포함해 봐야 한다”면서 “미국을 안보 동맹, 중국을 경제협력 대상으로만 보는 기존 ‘안미경중(安美經中)’ 시각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3월 4일)>

자, 이제 예정시간보다 20분이나 길어진 이유를 알 것 같다. 미국, 일본과 75분 동안 나눈 얘기와 약속에 대하여 중국은 80분 동안이나 항의하고 수정 요청한 것이다.

반쪽만 살 수는 없다.

1894년 조선 조정은 농민군 진압을 위해 일본군을 빌렸다. 그걸로 끝이었던가? 다음 해 일본군은 왕궁에 쳐들어가 조정의 핵심실세 왕비를 살해한다. 외세는 우리 안의 분열을 활용, 한쪽을 죽인 다음 나머지도 죽이고 ‘한반도의 미래’를 집어 삼키려 한다. 민족은 더 큰 운명공동체이므로, 한쪽은 죽고 한쪽만 살 수는 없다.

 

 

전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

전 6.15남측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전 반전평화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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