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구 / 전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2016년 새해를 맞아 북의 수소폭탄 시험과 광명성 위성체 발사를 빌미로 한반도가 요동치면서 미국의 대중국 포위봉쇄라는 신냉전 구도가 ‘불가역적’으로 치닫고 있다. 신냉전의 결정판인 사드 한국배치가 기정사실화 되려하자 <환구시보>는 2월16일 사설에서 아래와 같이 결연하게 경고했다. 필자가 199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우려해 오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는 듯하다.(주1)

"베이징은 자기의 진짜 마지노선을 확실히 그어놓고, 그 누구라도 이를 건드리면 단호히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것이다. 또 한반도에 내란이나 전쟁이 발생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한다. 그렇지만, 만약 발생한다면, 우리는 응당 두려워하지 않고 맞상대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다리가 물에 잠기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는 허리, 심지어 목까지 잠기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北京应当把自己的真实底线清晰无误地划出来,谁触碰它我们就坚决让它付出代价。中国坚决反对半岛生乱生战,但一旦生了,我们的态度应当是不怕奉陪。我们相信,当中国淹着腿的时候,必有人淹到腰甚至脖子.)

이렇게 미국의 아태재균형전략이라는 신냉전전략으로 조성돼왔던 한반도 전쟁위기가 구조화되면서,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비극의 역사를 강요당해 왔던 지난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세계의 또는 중화 및 동아시아 질서가 근본적으로 뒤바뀌는 세력교체기 또는 역사전환기에 우리는 능동적으로 이에 대처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희생과 절멸(絶滅)을 강요당해 왔다.

70여 년 전 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시점에서는 미·소냉전 때문에 우리는 주로 미국의 주도에 의해 민족분단을 강제 당했고, 전쟁까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조건을 강요당했다. 그 결과 4백만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한국전쟁이라는 민족 최대의 비극을 겪었다.

120-30여 년 전 중화질서가 무너지고 서구제국주의가 동양을 지배하는 역사전환의 시점에서 조선은 갑신정변이나 갑오농민전쟁에 실패하고 일본의 식민지라는 치욕의 길을 강요당했다. 그 결과 민족절멸을 강요당하면서 수없이 많은 조선 사람은 일본군의 성노예, 총알받이, 보국대, 창시개명 강요 등등으로 형극의 길을 겪었다.

400여 년 전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세력교체기에 그 불길이 조선에까지 번지지 않게 균형외교를 구사해 오던 광해임금을 서인 인조반정 무리들이 몰아내고는 오매불망 명나라에 맹목적인 충성을, 곧 요즘 말로는 종명(從明)을 하면서, 병자호란을 자초했다. 그 결과 50만의 조선 여인들이 청나라에 성노예로 끌려가고, 수십만 조선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역사전환의 변곡점 시점에서 지도자는 모름지기 여러 가지 구조적 속박 속에 놓인 역사행로를 벗어날 수 있는 역사지향을 민(民)에게 제시하고 설복하고 소통하여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민의 자발적 지지를 이끌어내어 그 동력으로 역사방향을 완전히 또는 어느 정도 바꾸어 민족의 안위와 민족사의 밝은 미래를 개척하는 게 최고지도자의 역사적 책무이고 존재이유다.

그러나 지금 중·미세력교체기를 맞아 이 땅에 최고위 정치지도자라는 이명박과 박근혜는 과연 이런 역사적 흐름이나 책무를 알기라도 하는가?

2010년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고 의혹투성이인 천안함사건 이후 미국의 앞치마에서 벗어나자는 동북아중심론을 펼쳤던 일본의 하토야마정권이 무너지고, 천안함사고를 빌미삼아 대북 한미연합전쟁연습이 기승을 부리면서, 미국은 겉으로는 북을, 속으로는 중국을 겨냥하는 칼날을 갈게 되었고, 드디어 그 다음해인 2011년 노골적으로 중국을 포위봉쇄하는 아태재균형전략을 공개화 및 공식화했다. 이명박이 신냉전의 멍석을 깔아 준 셈이다.

또 이명박은 국회 국방위원에게 “연평도 포격 때 (북한을) 못 때린 게 천추의 한이 된다”며 “(군통수권자로) 울화통이 터져서 정말 힘들었다”(『동아일보』2011.6.24.)고 마치 전쟁광의 모습을 보였다. 그가 암시하는 비행기에 의한 폭격은 필시(必是) 남북 전면전으로 비화되었을 테다.

북의 4차 핵시험과 광명성 발사를 빌미로 신냉전구도를 확장 및 고착화하려는 미국에 제동을 걸기는커녕 오히려 선봉장 노릇을 하면서 스스로 묘혈을 파는 게 박근혜정부인 것 같다. 이 바탕에는 필시 남북전쟁으로 귀결될 무력불사흡수통일론인 그녀의 ‘통일대박론’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2013년 연말 국가정보원장이 "2015년에는 자유 대한민국체제로 조국이 통일돼 있을 것"이라면서 이를 위해 "다 같이 죽자. 한 점도 거리낌 없이 다 같이 죽자"고 운을 띠웠다. 박근혜는 2014년 신년대담에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 모든 시나리오에 대해서 철저하게 대비를 해 나가겠다...”라더니 곧 이어 "스스로 변화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변화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나가야 한다."(2014년1월20일)면서 (흡수)통일대박론을 노골화했다.

이를 위한 채비 조직인 통일준비위원회의 정종욱 부위원장은(2015.3.10.) “여러 가지 통일 로드맵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통일 로드맵 가운데는...비합의적인 통일, 그러니까 체제 통일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저희 위원회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정부의 다른 부처에서 체제통일에 대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연구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흡수통일 ‘기획’을 확인해 주었다. 이제 다시 그녀 스스로 2월16일 국회 연설에서 “이제는 북한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근본적 해답을 찾아야 하며, 이를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라고 ‘가면’을 벗어 버렸다.
 
인간의 고귀한 생명권을 통째로 앗아가는 전쟁, 이것만은 절대 불용이라는 철칙을 기조로 삼았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지도력이 계승되었더라면 오늘의 한반도가 이렇게 암울한 전쟁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고 신냉전의 격전지로 치닫고 있을까?

또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인 생존권을 중시하고 인류보편의 규범인 평등권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지도자가 선택되었더라면 연애·결혼·출산 포기의 3포, 일자리와 내집 마련 포기의 5포, 인간관계와 희망 포기의 7포, 건강과 외모관리 포기의 9포를 거쳐 다 포기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헬조선 속에 우리 젊은이들이 이렇게 피폐(疲弊)하고 있을까?

또 자살률 10만 명당 29.1명으로 OECD 34개 회원국 중 1위이고 (2012년 기준) 연령별 자살률은 2011년 기준으로 50대 남자 25.9명, 60대 남자 37.7명, 70대 남자 81.3명, 80세 이상 남자는 120.9명으로, 이 같은 노인 자살공화국이 되었을까?

지난 7-8년 동안 우리 사회에는 최소한의 기본윤리나 진실과 규범에 대한 최소강령마저도 무너지고 말았다. 최고위층인 대통령을 필두로 정치권 중심의 정상배들, 이들을 대변하는 언론매체들은 장기 거시적 역사 전망, 이에 따른 대비 전략과 정책 등을 제시하기는커녕 자고나면 거짓말 선동과 무조건 몰아붙이기 물귀신 작전 등 ‘정상적인 것의 비정상화’에만 혈안이 되어 상식마저 저버린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한국 GDP와 수출의 약 25%를 차지한다는 어느 재벌가 천상(天上)의 어린애, 그 할아버지 할머니는 9년 만에 겨우 그 손자를 처음 만날 수 있었다 한다. 그 애는 지상(地上)의 보통사람이 먹는 라면이나 떡볶이를 9년 만에 처음 시식할 수 있었다한다. 한국사회의 천상과 지상, 공주와 백성, 금 수저와 흙 수저 사이는 넘을 수 없는 분리장벽이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 처져 있다. 이러한 재벌과 성골(聖骨)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 일반 서민들의 설자리는 시궁창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지난 10년에 가까운 한국의 현실은 그야말로 나라를 팔아먹어도 35%의 콘크리트 지지라는 구도 속에 매몰된 위아래의 특정 부류들에 의해 나락(奈落)으로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더 이상 추락할 수는 없다. 이제 더 떨어지면 끝장이다.

바로 여기서 지도자론에 대한 깊고 폭 넓은 천착(穿鑿)이 절실히 요구되고, 곧 다가올 권력교체기에 지도자다운 지도자를 발굴하고 발현시켜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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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그러나 오늘의 통일조건은 4월혁명 당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구촌의 상황은 탈냉전으로 기존의 동서 냉전체제가 가졌던 강력한 규정력이 약화되고, 남한이 세계체제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상승되어 이제 통일은 남과 북이 하기 나름이라는 점이다. 다른 한편 20여년 이내에 미국과 중국 사이에 동북아신냉전의 도래 우려가 있어 이 사이에 남과 북이 부분통일이라도 이루지 못할 경우 기존의 양대 냉전체제와 같이 외적 규정력의 강화에 의해 통일이 장기적으로 지연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곧, 통일의 길은 열려 있지만 오랜 동안 지연시킬 경우 또다시 통일의 문은 닫힐 우려가 높다”. 강정구, “4월혁명과 현단계 자주·민주·통일의 과제” 한국산업사회학회, 󰡔경제와 사회󰡕 1998년 가을호, 통권 39호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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