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2014년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서점에서 -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10월 24일(금). 북한 방문 21일째 평양 체류 마지막 날이다. 3주일이 금방이다. 내일 아침 평양 출발이다. 오늘도 6시에 산책을 나갔다. 동지까지는 아직 꽤 남았지만 처음 올 때보다 더 어둡다. 신 새벽, 대동강 변을 천천히 걷는다. 이제 풍경들이 제법 익숙하다.

대동강물이 많이 줄었다.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다. 강 가운데 자그마한 섬들이 보인다. 준설선이 모래를 퍼 올리고 있다. 나이 듬직한 아주머니가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춤을 추고 있다. 잠이 오지 않아 저렇게 새벽부터 강가에 나와 몸을 흔들고 있을까. 학생들이 여기저기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다. 어둠이 물러나기를 기다렸다가 강가로 나왔나 보다.
 
처음 며칠 동안은 막 전학 온 학생처럼 매사에 서먹했는데 제법 낯이 익을만하니 떠날 때가 되었다. 워낙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지만 이곳 호텔 반찬도 입맛에 맞고, 밖에서 사 먹는 점심이나 저녁도 비싸지 않은 값으로 제법 호사 했는데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오늘은 저녁에 해외동포위원회 담당관과 저녁을 먹는 일 외에는 특별한 일정이 잡혀있지 않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어제 노점상에서 사 온 사과를 식당에 가져와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런던 조선족 교회 목사와 함께 먹었다. 영국에도 중국에 살던 조선족들이 꽤 많이 들어와 정착하고 있다고 한다. 제3국을 경유하여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들을 돌보아 직장 등을 알선해 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은 선교사업차 방문했다고 한다. 미국에도 상당수의 조선족들이 들어와 살고 있으며, 그들을 위한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미주 한인사회에서 펼치고 있는데 비슷한 일을 영국에서도 하고 있는가 싶다. 
 
식사를 마치고 2층 책방에 들렀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는 족자가 벽에 걸려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명언, 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새 책 소개 안내판이 붙어있다. 김정일 선집(22권),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로작, 주체사상 원리해설, 등이 있고, 장편소설은 봄빛(충성의 한길에서) 한 권이 올라와있다. DVD도 문수물놀이장, 조선 가요 등 몇 점이 올라와있다. 지난번 모란봉 오를 때 할머니가 보던 책 ‘등애’라는 소설책이 생각나서 물었는데 없다고 한다. 시집, 민요집, 수필, 단편집 등 몇 권을 구입했다. 가격은 권당 2, 3달러 정도다.
 
호텔 프론트에 영자 신문 평양 타임즈(The PYONGYANG Times)가 보인다. 8면 신문인데 1면 톱기사는 새로 짓고 있는 과학자 아파트를 현지 지도하는 김정은 사진과 관련 기사가 올라있다. 정치, 경제, 국제뉴스, 체육, 과학 기사가 골고루 취급되어있다. 주로 평양 주재 외국인을 위한 신문이라고 한다. 
 
김 참사에게 북한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종류를 물었더니 평양에서는 로동신문, 민주조선, 평양타임즈가 발행되고, 각 지방에서도 신문이 나온다고 한다. 민주조선은 보지 못했기에 한 부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사진제공-정찬열]

 

▲ 새 책 소개 안내판. [사진제공-정찬열]

 

전화국에서 - 김소월도 백석도 알지 못한다고

미국 집에 전화를 하러 호텔 3층에 있는 전화국에 올라갔다. 사무실에 여직원 두 명이 앉아서 접수를 받고 있다. 중국인 남자 셋이 먼저와 대기하고 있다. 작은 방에 담배 연기가 가득하다. 전화 받은 칸이 셋인데 어찌나 큰 소리로 전화를 하는지 옆 칸에서 전화를 받을 수 없을 정도다. 
 
그들이 끝내고 나간 다음 전화를 신청했다. 전화국 직원이 전화를 연결시켜주면 전화 받는 칸에 가서 전화를 받는 구조다. 맘만 먹으면 통화내용을 엿들을 수 있을 성 싶다. 집에 사람이 없어 내일 오전에 평양을 출발하여 서울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녹음을 남겨놓았다.
 
통화를 끝낸 다음, 다른 손님이 없어 전화국 여직원과 얘기를 나누었다. 한 분은 결혼하여 여덟 살 딸이 있고, 또 다른 직원은 아직 미혼이라고 했다. 작은 사무실이니 혼자서도 일처리가 가능할 성 싶은데 두 명이 함께 근무하는 거냐고 묻자 대답 대신 웃기만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직원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했다. 불편한 점은 없냐고 물었더니, 직장에 나오는 동안 살림을 맡아 해주니 편한 부분이 더 많다며 웃는다. 일요일이면 시어머니 모시고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문학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두 분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니 알 수 있겠다 싶어 이북 출신 김소월이라는 시인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금시초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혹시 ‘진달래꽃’이라는 시를 읽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그 또한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북한 출신이지만 백석도 김소월도 북쪽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는 시인인 모양이다.

식당에서 - 강냉이 국수가 면도 쫄깃하고 국물도 시원하여 맛있다
 
점심시간이 되어간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다. 시내 나가 볼 일도 있고 하여 밖으로 나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리랑 식당이다. 음식 종류가 여러 가지다. 대체로 알 수 있는 음식들인데 즙친밥, 닭알씌움밥, 도마도고기즙국수볶음, 정도가 생소한 이름이다. 가격은 밥 한 공기에 50센트, 음식은 5달러 정도이다. 대중음식점인 모양이다. 강냉이 국수를 주문해 먹었다. 두 번째 먹어본다. 강냉이가 많이 나는 본바닥 음식이라선지 면도 쫄깃하고 국물도 시원하여 참 맛이 있다. 가격도 다른 음식에 비해 싼 편이다.        
 
그동안 김 참사와 함께 다니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내가 묻는 쪽이었지만, 때로는 북한의 정치체제에 대해 김 참사가 길게 설명하기도 했다. 오늘은 북한의 토지개혁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 토지 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 이었지요.
 
- 지주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했다는 말이네요.
 - 그렇지요.

 - 지주들의 입장에서 보면 토지를 하루아침에 빼앗긴 셈이 되었겠네요.
 - ......
 
- 이남으로 내려온 지주들이 기를 쓰고 북한정권 반대한다는데 그런 이유 때문일까요.
 - ......
 
김 참사가 토지개혁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한다. 전근대적 봉건사회에서 근대적 국민국가로 가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남쪽에서는 어떻게 했을까. 돌아온 다음 자료를 찾아보았다. 이남에서도 1950년 정부수립 초기에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이 아니었다. 우선 한 농가가 가질 수 있는 농지의 면적을 제한했다. 그 면적을 넘는 나머지 농지를 정부가 구입하여,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유상으로 분배하는 방식을 취했다. 정부는 농민에게 일정기간 농사를 지어 토지대금을 분할 납부하게 했고, 그 돈으로 토지구입비를 충당했다.
 
방법의 차이는 있었지만, 토지개혁을 통해 남과 북이 공히 예전과는 다른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 같다.

▲ 아리랑 식당 메뉴. [사진제공-정찬열]

 

만수대 창작사 - 친선적 가격으로 300달러만 내십시오

김 참사와 함께 만수대 창작사에 들렀다. 북한 방문 기념으로 그림이나 수예 작품을 구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길가에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말이 표지석에 새겨져있다. 엊그제 왔을 때는 왜 보지 못했을까. 나는 저 구호를 보고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1990년대 중.후반 먹을 게 없어서 몇 십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그 시절의 구호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대명천지에 어떻게 먹을 게 없어 그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지,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어떻게 사태를 그리되도록 방치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대체 이념이란 게 무엇인가. 인륜은, 핏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전시장에 올라갔다. 진열된 작품을 쭈욱 둘러보았다. 북한의 수예작품은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다고 했다. 안내하는 아가씨 앞으로 수예작품 한 점을 골라왔다. 350달러다. 값을 흥정하려고 하니 자기는 그럴 권한이 없다면서, 다른 사람을 부른다. 나이든 아주머니가 나온다. 전시장 책임자인 모양이다.  

- 좀 잘 해 주세요
- 이건 원래 값이 눅어서 안 됩니다.

-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 에누리가 뭡니까.

- 아, 깎아달라는 뜻입니다.

옆에서 흥정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김 참사가 거든다.

- 미국에서 특별한 일로 오신 작가분인데 좀 잘해주십시오.
- 아, 기러십니까. 친선적 가격으로 300달러만 내십시오.

▲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사진제공-정찬열]

 

심장 속에 남는 사람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아무래도 노래방까지 갈 성 싶다는 생각이 든다. 참석자들이 남한 노래를 부르게 되면 답례로 북한 노래 한 곡쯤은 불러야 할텐데 제대로 아는 북한 노래가 한 곡도 없다. 9년 전 평통 방문단으로 왔을 때 판문점 가는 차안에서 배웠던 노래, <심장 속에 남는 사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인생의 길엔 상봉과 리별 / 그 얼마나 많으랴 ”로 시작하는 노래다. 꽤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는데 부르지 않다 보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래층 찻집에 내려가 아가씨에게 물어보았다. 2절까지 가사를 가르쳐준다. 다른 노래도 몇 가지 함께 배웠는데 이 노래만 일부나마 기억에 남았다. 가사가 좋아서 몇 번 불렀던 노래다. 
 
“인생의 길엔 상봉과 리별 / 그 얼마나 많으랴 / 인생의 길엔 상봉과 리별 / 그 얼마나 많으랴 / 헤여진대도 헤여진대도 /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 아아 그런 사람 나는 귀중해 // 오랜 세월을 같이 있어도 /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 잠간 만나도 잠간 만나도 /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 아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어” 

송별 만찬 - 법을 어기지 않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좀 쉬었다가 저녁식사 자리에 나갔다. 해외동포위원회 미주지역 담당관이 송별회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내가 북한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가 해주었던 부서의 책임자라고 했다. 알고 보니 지난번 방북 때 만났던 분이다. K씨다. 구면인 셈이다. 반갑게 악수를 했다. 서민적이고 사교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던 사람이다. 분위기가 쉽게 화기애애해졌다.  
 
노래방이 딸린 식당이다. 김 참사와 운전사 방 동무, 그리고 해동 쪽에서 몇 분이 함께한 조촐한 저녁 식사다. 밥을 먹으면서 술이 한 순배 돌았다.
 
머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주신데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통일을 위해 남과 북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알고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 오랜 세월동안 적대관계로 있다 보니 그럴만한 사정이 못되었다. 북한을 널리 둘러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 이번 방문이 헛되지 않도록, 돌아가면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미국의 동포사회를 비롯하여 도처에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술이 몇 잔씩 돌아갔다. 취흥이 도도해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술이란 참 좋은 것이다. 음악이란 게 본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서먹했던 자리가 어느새 부드럽게 변한다. 
 
웬만큼 분위기가 무르익고 시간도 지나 파할 때가 되었을 때, 책임자에게 얘기를 꺼냈다.

- 미국에서는 북한에 들어가면 잡혀간다며 사람들이 북한 방문을 꺼리는데 어찌된 일입니    까?
- 이곳에 와서 우리 법을 어기지 않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 지금도 미국인 몇 사람이 잡혀있지 않습니까.
- 법을 어겼으니 그렇게 된 거지요.

- 위법하지 않으면 문제될 게 없다는 말입니까.
- 절대 문제가 없습니다. 미주 동포 중 우리 조국에 오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승인 해드     리겠습니다.

- 정말입니까?
-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식사가 끝나자 K씨가 바래다주겠단다. 깜깜한 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평양 체류 마지막 밤이다. 엎치락뒤치락 잠이 오지 않는다.
 
깜깜한 평양의 거리. 저 거리를 서울이나 뉴욕처럼 환하게 밝힐 수는 없을까. 그 열쇄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남쪽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남쪽이 도약할 수 있는 열쇄는 북쪽이 가지고 있다. 압록강을 건너 실크로드로 가는 길. 그 길이야 말로 남쪽에 희망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길은 그렇게 환히 보이는데, 왜 그리도 오랜 세월을 서로 으르릉거리며 노려만 보고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일이 아니다. 소통이 먼저다. 평화롭게 교류협력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통일의 길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일을 누가 해주겠는가. 남과 북이 해내야 한다. 결국은 자주, 그리고 평화다.

▲ 깜깜한 밤, 멀리 양강도 호텔 불빛이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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