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2014년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만수대 창작사 방문

10월 23일(목). 북한 방문 20일째다. 오늘 오전은 만수대 창작사를 방문할 예정이다. 운전사 방 동무가 사정이 있어 나올 수 없다고 한다. 김 참사와 둘이서 택시를 타고 갔다.
 
창작사 앞에 도착했다. 정문 넓은 공터에 단체관람 온 학생들과 인솔자가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있다.
 
안으로 들어가 걸어가는데 오른쪽으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말 탄 청동상이 보인다. 그 앞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홍일점인 여학생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예쁘다. 한복이 우리 여인들에게 어울리는 옷이라는 걸 다시 확인한다.
 
청동상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앞발을 든 말 엉덩짝의 근육이나 말 탄 사람의 표정에 생동감이 넘친다. 스페인 여행 중 꽤 많은 청동상을 보았는데 그것들에 못지않게 잘 만든 작품이다. 화가 이중섭이 그린 ‘황소’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사실감이 전해온다. 좋은 예술 작품은 저렇게 미적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동상 가까운 곳에 새 건물을 건축 중이다. 3층까지 올라갔는데 더 높이 올릴 모양이다. 군인들이 맡아 건설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도 감독관도 군인이다. 험산에 길을 내는 일도 군인들이 맡아 했다고 들었는데 북한에서는 대부분의 건설을 군인들이 해내는 지도 모르겠다.  
  
전시관을 먼저 방문했다. 정문 앞에 호랑이 조각을 세워놓았다. 이 조각은 어느 음식점 앞에 서 있던 조각처럼 조악한 느낌이 든다.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아래층 꽤 넓은 전시장 벽에 그림들이 차례로 걸려있다. 언젠가 미대 교수인 친구가 그림을 보는 요령을 설명하면서, 전시장에 가면 어떤 게 내가 가져다 집에 걸어놓고 싶은 그림일까 생각하면서 그림을 보라고 얘기해 준 적이 있다.
 
‘소꼽동무’라는 그림 앞에 섰다. 안금성 화가가 2012년에 그린 그림이다. 두 아이가 무릎치기를 하고 있다. 어릴 적 저 놀이를 해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빨강 모자를 뒤로 눌러쓰고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아이의 표정이 실감이 난다. 장난기 섞인 웃음을 웃으며 만면에 홍조를 띄었다. 상대방 아이는 옆얼굴만 보이지만, 그 또한 만만치 않겠다는 느낌이 전해온다. 두 아이 사이에 서서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손을 무릎에 얹고 심판을 보는 아이. 웃을락 말락 하면서도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함께 바라보는 개의 시선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옆에 서 있는 나무. 푸릇푸릇 싹 터오는 이파리, 그리고 파릇한 잔디밭이 풋풋한 아이들과 잘 어울린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인 듯 책가방이 나무 옆에 놓여있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 짓을 했던 일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다.
 
다음은 ‘고전무용 탈춤’이라는 제목이 붙은, 김승희 화백이 2008년에 그린 그림이다. 탈바가지를 쓴 무용수가 금방이라도 “얼쑤, 조오타” 하며 그림으로부터 몸을 흔들며 뛰어 내려올 것만 같다. 짚신을 신고 한 발을 든 채 양손을 허공에 두고 너울너울 춤을 추는 모습에 나도 춤판에 뛰어들어 한바탕 노닐고 싶다. 탈춤의 본고향 황해도 봉산 출신 춤꾼인 모양이다. 한복 위에 걸친 저고리 색동끝자락이며 휘날리는 남색 허리띠하며, 고동색 가면까지 색감 또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맨다.
 
다음 그림. 제목을 적어오지 못했지만 ‘고향 가는 길’쯤 이면 어떨까. 소나무 세 그루가 보이고 그 옆에 염소가 풀을 뜯고 있다. 포장되지 않는 길을 따라가면 시냇물이 나온다. 저 냇물을 건너면 우리 마을이다.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돌다리를 건너다 발을 헛딛어 미끄러지기도 했다. 비가 오면 물이 불어나 바지자락을 걷어 올리고 신발을 벗어 들어 건너던 냇물이다. 저 냇가 둑을 따라 산모롱이를 돌면 우리 동네다. 마을 입구 텃밭에서 하얀 수건을 쓰고 밭을 매면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던 우리 어머니. 오늘도 나를 보자 수건을 벗어 옷을 탈탈 털면서 걸어 나와 “아이구 내 새끼, 공부하느라 애썼네” 하시며 나를 보듬어 꼬옥 껴안아주실 것만 같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나도 고향을 떠났다.
 
사실 나는 그림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대저 예술이란 게 별거든가. 음악을 듣거나 문학작품을 읽고 나서 우리의 가슴을 조용히 흔들어 놓은, 감동이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림을 보면서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좋은 작품이 아닐까.

▲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말 탄 청동상 앞에 섰다. [사진제공-정찬열]

 

▲ 전시관에 걸려있는 그림 1. [사진제공-정찬열]

 

▲ 전시관에 걸려있는 그림 2. [사진제공-정찬열]

            

▲ 전시관에 걸려있는 그림 3. [사진제공-정찬열]

 

도자기 명인, 우치선 선생을 만나다

그림 몇 점을 더 감상하다가 2층으로 올라갔다. 도자기 전시관이다. 입구에 흰 와이셔츠에 푸른색 넥타이를 맨 분이 의자에 앉아 도자기를 감상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도자기에 심취해 있는 중인가 싶어 곁으로 다가 갔지만 여전히 꿈쩍도 않는다. 뒤따라 올라온 김 참사가 빙긋이 웃는다. 그때서야 자세히 보니 밀랍상이다. 얼굴에 있는 몇 개의 작은 점을 포함하여 흰머리가 섞인 머리카락, 작업으로 닳아졌을 손바닥의 얇은 보푸라기까지도 드러나 있다. 실제 인물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각품이다.
 
우치선(1919∼2003) 선생 밀랍상이라고 한다. 도자기 분야의 대가로서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분이라고 했다. 열세 살부터 도예를 시작하여 고려청자 발전에 신기원을 세운 분으로 인민예술가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라 한다. 인민예술가는 북한에서 미술, 사진, 작곡 등 예술 분야에서 공훈을 인정받은 예술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명예 칭호란다. 무대 공연 분야의 인민배우와 동급이라고 한다.
 
전시되어있는 도자기 몇 점을 살펴보았다. 흙덩이를 주무르고 구워서 저렇게 고운 빛깔의 자기를 만들어 냈다. 학이 날개를 펴고 청아한 세상으로 날아간다. 나는 저 그릇 하나하나에 쏟아 부었을 인간 노력의 층위를 어림할 수가 없다. 나 같은 도자기의 문외한에게 저 작품들은 돼지 앞에 던져진 진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북한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도자기를 아는 분에게 얘기를 듣고 관련 자료도 찾아보았다. 우치선은 임사준과 함께 북한에서 청자분야 최고의 도예가로 인정받았던 인물로, 수세기동안 맥이 끊겼던 고려청자를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 일본은 고려청자를 재현할 욕심으로 개성에 요업실험소를 세웠다. 그곳에서 후에 남과 북에서 고려청자의 선구자가 된 우치선과 황종구 등이 도자기 제작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치선은 북한에서, 황종구 지순택 류해강 등은 남한에서, 각각 고려청자를 재현해 내는데 심혈을 기울려 그 분야의 독보적인 업적을 쌓았다.
 
황종구는 일본에 유학하여 도자기를 더 배워서 해방 된 조국에 돌아와 이화대학에 근무하게 된다. 서로 헤어진 지 45년 세월이 흐른 1990년 어느 날, 황종구는 북한의 우치선으로부터 도예 작품 한 점을 받는다. 일본의 한 교포가 황종구의 작품 한 점을 북의 우치선에게 가져갔는데 그가 황종구에게 본인의 작품 한 점을 전달하며 우정을 표시하게 된 것이다. 황종구 선생의 생몰 연대는 우치선 선생과 같다. 1919에 태어나 2003년에 죽었다.   
 
우치선 선생이 재현한 고려청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고려청자 수준을 능가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남한에서는 1995년 9월 광주비엔날레에 처음 소개됐고, 2000년 3월 서울 명동 한국 관광 명품점에 작품이 전시됐다. 그리고 최근 강원도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에 도자기 한 점이 전시되어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한국의 명공이라 불리는 류해강 선생. 경기도 이천 도요지에 가면 1대 도공 류해강 선생이 99세까지 고려청자를 재현해 놓은 기념관이 있다고 들었다. 2대 도공 류광열 씨가 가업을 계승하여 전통자기를 만들고 있단다. 
 
오직 한 길을 고집하며 전통을 되살려 그 맥을 이어가는 분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옷깃이 여미어 진다.

▲ 우치선 선생의 밀랍상 옆에서. 실제 인물과 구분이 안될 만큼 정교한 조각품이다. [사진제공-정찬열]

 

이곳 창작사에서 7백여 명의 예술가들이 그림, 도자기, 수예 등 각 분야를 연마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화 교실을 방문했다. 먹 냄새가 향긋하다. 나이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누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려 놓은 그림들이 벽에 걸려있다. 계곡 바위를 타고 물이 흐르는 경치다. 무슨 말을 붙인다는 게 결례가 될 성 싶어 그냥 그림 그리는 모습만 살펴보았다.  
 
조각, 수예 등 각 분야를 차근차근 돌아볼 예정이었는데 오늘이 마침 예술인 체육대회 날이라고 한다. 모두 응원을 나가야 하는 모양이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세계 제일을 자랑한다는 수예교실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시간이 되면 다시 와 보기로 했다
 
걸어 나오면서 보니 탁아소가 보인다. 창작사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나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이들을 맡기는 곳이라고 한다. 꽤 큰 3층 건물이다. 건물 높은 곳에 “미래를 사랑하라”는 글씨가 보이고, 현관 위에 “경애하는 김정은 장군님 고맙습니다”는 글이 써 있다.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다. 미국에서 온 92세 할머니를 만나다

점심때가 다 됐다. 옥류관 냉면을 먹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나오는 길에 보니 아파트 골목에 나이든 아주머니가 앉아 고구마 배추 무 등을 팔고 있다. 건축현장에 붙어있는 “천년책임, 만년보증” 이라는 구호가 눈길을 끈다.
 
옥류관에 도착. 지난번처럼 2층으로 안내한다. 이층은 달러로 음식값을 지불하는 사람을 위한 별실이라고 했다. 냉면을 주문했다. 냉면은 메밀로 만든 국수라고 했다. 지난번 먹었던 쟁반국수와는 맛이 다를 거라며 김 참사가 구미를 돋운다.  
 
옆 테이블에는 미국에서 왔다는 할머니가 10여명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 모습이다. 할머니를 모시고 미국에서 온 따님과 얘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92세, 따님도 알고 보니 70가까운 할머니다. 미루고 미루다 더 이상 미루면 죽어서도 한이 될 성 싶다고 해서 어머님 건강이 좋지 않아도 할 수 없이 모시고 왔다고 한다.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진즉 모시고 오지 못했나 싶어 후회가 된다고 한다. 고향이 뭔지, 핏줄이 뭔지 모르겠다고 눈물을 보인다. 92세 할머니에게 몇 년 만에 고향을 찾아오셨냐고 물었더니 “하매 70년은 됐지 싶어” 하신다.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조카들이라고 한다. 그 오랜 세월을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살아온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감자 부침개 하나가 접시에 담겨 나온다. 그리고 냉면이 나왔다. 식초와 간장, 겨자가 탁자 위에 놓여있다. 국수 위에 고기 몇 점, 그리고 고명을 얹은 다음 찐 계란 반쪽을 담았다. 국물 맛이 독특하다. 감칠맛 나고 시원한 육수다. 안내원에게 냉면 국물을 어떻게 만드는 거냐고 물었더니 “미안합네다”하며 그냥 웃으며 지나간다. 바쁜 시간이라 대답을 할 수가 없다는 얘기인지, 육수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뜻인지,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모르겠다.
 
냉면을 먹으면서 메밀국수는 이렇게 차게만 먹는 음식일까 생각하다보니, 광주 충장로 ‘청운 모밀집’ 메밀국수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시절 많이 들렸던 곳이다. 평양냉면처럼 찬 육수가 아닌 뜨거운 멸치국물에 말아먹는 메밀국수였다. 가난한 청춘들은 더운 메밀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곤 했다. 국토횡단을 하면서 강원도 지방에서 먹었던 춘천막국수도 메밀로 만든 특별한 음식이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 백석 시인의 <백화>라는 시에도 메밀국수 얘기가 나온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문학작품을 통해 음식 풍속이나 생활양식이 전해진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메밀국수는 남과 북에서 똑같이 즐겨 먹는, 우리 민족의 애환과 함께한 음식이다.  
 
음식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낯선 지방을 여행할 때 그 지방의 특색 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가 없다. 국토종단과 횡단을 하면서 두루 맛보았던 각 지방의 음식이 혀끝에 남아있다. 전남 장흥의 매생이국, 강진의 토하젓, 영암의 짱뚱어탕, 그리고 전주 콩나물국밥과 남문시장 순대가 기억에 남는다. 안동 간고등어, 평창시장의 메밀 부침개, 속초의 물회, 강원도 고성 대진항에서 맛봤던 숭어회 등.
 
이번 북한 방문 중에도 옥류관 냉면을 비롯, 비빔냉면 원조 함흥 신흥관, 개성의 13첩  한식, 원산 송도원 식당의 매운탕, 그리고 해금강에서 소주 안주로 올라왔던 낚시꾼에게 얻어왔다는 연어회. 이런 음식과 함께 풍경과 사연들이 기억된다. 

 

▲ 옥류관 냉면, 지난번처럼 ‘위생저가락’을 가져왔다. [사진제공-정찬열]

 

용악산 법운암을 관람하다 

김 참사가 오후에는 용악산을 올라가보자고 한다. 그 산이 어떤 산인지 그곳에 가면 어떤 볼거리가 있는지 설명이 없다. 따져보면 이번 북한 방문이 문화재 답사라던가, 무슨 물건을 사러 왔다던가 하는 한정된 목적이 아닌, 일반 주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러 온 것이니 어디를 가면 또 어떻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방북하기 전 읽었던 자료를 떠올리자  용악산에 가면 무슨 서원, 그리고 김구 선생이 거처했던 암자가 있다더라는 얘기가 생각났다.  
 
운전사 방 동무가 도착했다. 용악산까지 15km쯤 될 거라고 한다. 시내를 빠져나가자 이내 단풍으로 덮인 산이 보인다. 산자락 끝에 이르니 맑은 호수가 있고 뒤편으로 아파트 몇 채가 서 있다. 아파트와 산 풍경이 어울리지 않는다. 내 고향 영암 월출산 산자락에 지어놓은 우뚝한 아파트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것처럼 생뚱맞다. “워~매, 좋은 산을 완전히 배래뿌렀네 잉!” 끝내 못마땅해 하던 친구의 말이 생각나 혼자서 웃었다. 
 
단풍 숲으로 덮인 꼬불꼬불한 좁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주차장이 나온다. 안내판이 서있다. 법운암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기인 392년에 세워진 유적으로써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으로 이루어졌다, 고 한다. 관람요금은 어른 100원, 어린이 30원, 외국인은 1유로라고 적혀있다. 요금을 받는 사람도, 관람객도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돌계단을 올라가니 법운암이 보인다. 암자 앞에 서서 저 건물이 지어진 때를 생각한다. 392년이라... 대체 몇 년이 흘렀단 말인가. 셈을 해보니 그 무량한 세월 앞에 입이 딱 벌어진다. 숱한 사람이 오고 또 갔지만, 암자는 천 년 세월을 저렇게 앉아 오늘도 말없이 사람을 반기고 있다. 참으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허리 높이의 낮은 담장 너머로 평양 시내가 멀리 보인다. 암자 뒤켠으로 돌아가니 칠성각이 보이고 그 앞에 버티고 선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절집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옆 큰 바위 사이에 지은 산신각을 돌계단 따라 올라가는데 댓돌 위에 남자 신발이 놓여있다. 주춤했다. 한 말들이쯤 될까싶은 방이 가득 차도록 한 남자가 큰 대자로 누워 코를 골며 낮잠을 즐기고 있다. 가만히 발길을 돌려 내려왔다. 
 
독성각 바로 옆 나무 아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무어라 말을 건네고 싶어 그쪽으로 가려는데 남자한테 전화가 왔는가보다. 손전화로 한참을 얘기한다. 손전화란 게 편리하지만 때론 없으면 더 좋겠다 싶기도 한 물건이다. 
 
발길을 옮기니 용악산에 관한 설명이 바위에 새겨져있다. 산봉우리가 마치 용이 금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같이 기묘하게 생겨 용악산이라 했고, 산의 높이는 290미터라고 한다.     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산과 들 사이로 흘러가는 강이며, 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들. 그리고 논밭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을 공동작업장으로 보이는 넓은 마당에는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작게 보인다. 평양시의 높고 낮은 건물들도 보인다. 사람들이 저 안에서 아옹다옹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고 있다. 
 
큰 바위 부근에서 “김일성 주석께서 어린 시절에 저 바위 사이를 건너뛰며 담력을 길렀다”고 김 참사가 설명한다. 도처에 ‘위대한 수령’의 발자취가 남아있다는 얘기다.
 
백범 김구 선생 얘기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법운암 안내원이 아니라서 아마 이곳 암자에 선생이 머물렀다는 사실을 모르는 성싶다. 지난 번 원산 가는 길에 멀리 보이는 대동강 쑥섬을 가리키며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설명해주었는데, 그 얘기를 들으면서 북녘 사람들도 김구 선생을 좋아하는가 보다 짐작을 했다. 남북이 함께 존경하는 지도자를 가졌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젊은 날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두 가지가 가슴에 남았다. 하나는 골상불여심상(骨相不如心相)이라는 말이었다. 17세에 과거에 낙방한 김구 선생이 아버지의 권유로 ‘마의상서’라는 책으로 관상학을 독학하게 된다. 자신의 관상을 아무리 살펴도 얼굴에 좋은 점은 없고 천격, 빈격, 흉격 밖에 없어 비관에 빠졌다. 그런데 그 책에서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 얼굴 좋은 것이 신체 좋은 것만 못하고, 신체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는 구절을 발견한다. 이에 큰 깨달음을 얻어 수양에 힘써 결국 심기일전 한다는 부분이었다.
 
두 번째는 <백범일지> 끝 부분에 나오는 ‘내가 원하는 나라’ 라는 문장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 법운암 본전 앞에서. [사진제공-정찬열]

 

▲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용악산에서 내려다본 풍경 1. [사진제공-정찬열]

 

▲ 용악산에서 내려다본 풍경 2. [사진제공-정찬열]

 

용악산을 천천히 내려왔다. 들판을 가면서 차창을 통해 보니 한 아주머니가 등에 짐을 진 채로 책을 읽으며 걸어가고 있다. 책을 읽으며 걸어가는 시골 아주머니. 사진을 한 장 찍어두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논바닥에 오리를 풀어놓았다. 오리들이 흘린 이삭을 찾아 논바닥을 후비고 있다. 오리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곳이 있다. 남녘땅 국토횡단 중에 보았던, 강원도 화천군 토고미 마을이다. 오리를 풀어 독특한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 마을이었다. 모를 심은 다음 9백 평 정도에 오리 30여 마리를 풀어 놓으면 논을 휘젓고 다니며 해충과 벌레를 잡아먹는다. 오리 한 마리당 논 3평의 비율이다. 주둥이로 바닥을 긁기 때문에 저절로 논매기가 되고, 오리 똥은 거름이 된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쌀을 찾는 사람이 많아 값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오리와 벼를 함께 기르는 일석이조의 농법이라고 했다.  

목요일 오후에 본, 사람 살아가는 모습들 1 - 떡장수 할머니

숙소에 돌아와 좀 쉬었다가 밖으로 나왔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데 잔디밭 주변 의자에 모녀가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어머니가 딸에게 “야, 엄마도 책 좀 보자이, 니는 니 공부좀 하래이” 눈을 곱게 흘긴다. 무슨 재미있는 소설책쯤 되는가 보다.
 
국립 연극극장 앞을 지나면서 보니 포스터가 바뀌었다. 새 연극을 공연하는가. 성황당, 3인 1당, 등이 붙어있다. 하교 시간인 모양이다. 학생들이 무리지어 걸어간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백팩을 맸다. 백팩의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이다. 여학생의 머리모양은 모두가 단정한 커트머리다.  
  
젊은 엄마가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를 간편하게 업었다. 엊그제 강변에 놀러 나온 할머니처럼 포대기를 둘러 아기를 업은 게 아니다. 멜빵끈으로 간단히 아기를 둘러맸다. 아기도 편하고 나들이 가는 엄마도 홀가분해 보인다. 젊은 엄마들의 생각은 저렇게 다르다.
 
길을 건너려고 지하도를 내려가는데 할머니가 계단에 앉아서 떡을 팔고 있다. “떡이요, 떡” 은밀하고 조용한 말투다. 지나가는 젊은이가 두리번거리며 얼른 돈을 꺼내더니 떡을 산다. 주고받는 돈이 북한 화폐다. 떡장수 할머니도 떡을 사먹는 젊은이도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남한의 지하철 계단에도 먹거리를 파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곳은 거리에서 떡을 파는 게 불법인 모양이다. 작은 바구니에 떡이 담겨있다. 다 팔아보았자 몇 푼 되지 않을 성 싶지만, 할머니에게는 저게 전부일 수도 있겠다. 나도 떡을 한 봉지 사드리고 싶은데 북한 돈이 없다.  
 
숙소에 들어와 씻고 잠깐 누워있는데 생각 하나가 머리를 친다. 부랴부랴 옷을 걸쳐 입고 지하도 계단으로 갔다. 떡장수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할머니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지나간 일이 되어버린 것을.  

▲ 아이를 간편하게 업고 나들이하는 젊은 엄마. [사진제공-정찬열]

 

목요일 오후에 본, 사람 살아가는 모습들 2- 유치원 종례시간

유치원 앞을 지나간다. 종례시간인 모양이다. 학부형들이 정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운동장은 잔디를 깔았는데 아이들이 설 자리를 일렬로 표시해 자리마다 시멘트 블록을 놓았다.
 
60명 정도 아이들이 교실에서 우르르 나온다. 그대로 집에 보내는가 싶었는데 선생님이 아이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앉힌다. 아이들 몇을 불러내 앞에 세운다. 7,8명 남자아이들이다. 앞에 나온 애들이 쭈빗쭈빗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그 와중에도 장난치는 녀석이 있다. 아이들을 앞에 세워놓고 선생님이 묻는다. 앉아있는 아이들이 대답한다.

 - 낮잠시간에 잠을 안자면 됩니까, 안 됩니까.
 - 안 되요! 
 - 이 동무들이 낮잠을 자지 않고, 옆에 동무 잠까지 방해했단 말입네다. 그러면 되나요.
 - 아니요! 

잘못한 아이들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훈계하고 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아이들 각자에게 받고 종례를 끝낸다. 아이들이 달려 나온다. 선생님이 몇몇 아이 손을 잡고 교문까지 나와 부모들에게 인계한다.
 
아직 부모들이 오지 않는 아이들 여럿이 교문 앞에 서 있다. 이름이 뭐냐고 차례로 물었더니 또렷또렷 대답한다. 사진을 찍어줄까 물었다. 소리를 지르며 좋아한다. 사진을 찍고 나자 꼬마들이 “사진 보여주세요, 사진 보여주세요” 하며 내 주위에 모여든다. 요, 요놈, 이쁜 녀석들!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보여주자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
 
저만치 지켜보던 교사가 다가와 “선생님, 누구십네까” 말을 건넨다. 그 분과 얘기를 나누었다. 학교는 아침 여덟시에 시작하고, 남은 아이들이 돌아갈 때까지 교사가 책임지고 돌봐야 한단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데리러 왔다. 70대로 보이는 분이다. 인사를 건네며 여차여차하여 산책을 나왔다고 했더니, “우리 공화국에서는 5.6살 때 유치원을 보내고, 그 전에는 탁아소에 보냅니다. 교육체계가 아주 잘 되어 있습네다”고 묻지 않는 말씀을 하신다. 유치원은 맘에 들게 아이들을 가르칩니까, 라고 물었다. 부모들이 걱정 없이 일을 나갑네다, 하고 대답하신다. 할아버지는 누구하고 지내시냐고 묻자, 부부가 은퇴하여 지내고 있다고 한다. 한 집에서 3대가 함께 산다고 했다.

▲ 잘못한 아이들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훈계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요, 요놈, 귀여운 녀석들! [사진제공-정찬열]

 

목요일 오후에 본, 사람 살아가는 모습들3 -가로등 불빛 아래 책 읽는 대학생들

유치원 모퉁이를 돌아 좀 더 걸어가니 공원이 나온다. 여학생 세 명이 공부를 하고 있다. 함께 숙제를 하는 걸까. 몇 학년이냐고 물어도 저희끼리 얘기하느라 눈길도 주지 않는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한 아이가 중학생이라고 대답한다. 3학년쯤으로 보인다. 한껏 멋을 낸 차림이다. 책가방이 의자에 놓여있는걸 보니 학교가 끝나 집에 가는 길인가 싶다. 날씨가 쌀쌀한데 돌의자에 앉아 돌탁자에서 공부하는 게 춥지도 않는가 보다. 허긴 저맘때는 추위가 또 추위던가.     
 
골목 어귀 노점상에서 사과 1kg을 샀다. 사과 네 개, 1.5달러다. 아주머니가 처음에는 북한 돈 아니면 받지 않겠다더니, 이제는 얼굴이 익어 거래가 자유로워졌다.
 
호텔에 들어오니 로비에 있는 TV에서 중앙방송 아나운서가 정부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휴전선에서 풍선을 쏘았던 일에 대한 방송이다. 남측에서 풍선을 다시 띄운다면 그 즉시 응사하겠다는 내용이라고 호텔 안내 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강의 내용을 전해 준다. 

김 참사와 함께 고려호텔 부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천천히 걸어서 숙소에 돌아오는 길. 고려호텔 부근 가로등 불빛에 기대어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한 두 명이 아니다. 중앙국립극장 점조등 아래 이곳저곳에서도 학생들이 서서 혹은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전력사정이 좋지 못해 집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참 동안 서서 책 읽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가슴이 시려온다. 짠하다. 
 
오늘은 밤늦게까지 책 읽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오늘만이 아니다. 묘향산과 신평 휴게소에서 만났던 안내원도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고, 아침 산책길에도 책 읽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책 읽는 사람이 많은 나라. 그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하다.

▲ 공원에서 여중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국립극장 점조등 아래서 책을 읽고 있는 대학생들. [사진제공-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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