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이번 시리즈는 총 15회에 걸쳐 북한의 ‘범 기독교 교회’들을 탐방한 ‘북한교회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남한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마치 초대교회 형태처럼 정착한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 필자 주

   

내가 다각도로 확인한 바로는 평양에 체류하고 있는 러시야정교회 신자들과 각국 신자들은 2006년 8월 준공 이후 지금까지 꾸준하게 평양 정백교회당을 찾아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북측 신자와 외국 국적의 일반 신자들이 드리는 매주일 예배는 정교회의 엄격한 법도와 규정대로 원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으며 설립된 지 10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현 시점에서는 이미 토착화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순수한 북측 신자들도 꽤나 확보되었으며 그 구성원들을 보면 라관철, 김회일 신부들의 부인과 가족들을 비롯해 성가단원들 그리고 러시아 대사관에 근무하는 북측 직원들은 고정 멤버들이다. 이들을 포함해 30-40명 정도의 조선인(북측) 신자들이 교인으로 등록되어 출석하고 있었다. 나는 평일에 한번, 주일에 한번 이곳을 방문해 종교의식을 참관하거나 조선의 토종 신부인 라관철, 김회일 신부와 니콜라스김 성가단장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정백교회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 정백교회 니콜라스김 성가단장과 함께 한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정백교회 공동 담당사제인 라관철(우), 김회일(좌) 신부의 손을 잡은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정백교회당의 외관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정백교회 부지 내에 세워진 조선정교연맹 본부와 사제관으로 쓰는 건물. [사진제공 - 최재영]


아름다운 성화들과 성물들에 매료되다
      
러시아정교회 특유의 이국적 양식으로 지어진 정백교회당을 자세히 살펴보면 동서남북 사방을 축으로 해서 십자가 모양으로 디자인 되었으며 두 개의 지붕은 전통적인 돔으로 지어졌다. 나는 교회당 외관과 사제관 그리고 정교연맹 청사 등 전체 건물들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교회당 내부를 자세히 둘러보기 위해 다시 입장했다.

성당 내부는 외부와는 다르게 첨단 모던 기법과 전통 기법이 한데 어우러져 풍기는 아름다움에 한 동안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온통 순백의 벽면으로 이뤄진 내부는 가장 깊은 안쪽 은밀한 곳에 모셔진 성소를 비롯해 성서 독경대, 기도단, 설교단과 성상, 종, 촛대, 성화와 성물들 하나하나가 조화를 이뤘으며 모스크바의 문화재급 정교회 성당에 버금갈 정도였다.
      
내부를 둘러보다 ‘이콘(IKON)’이 보이길래 문득 과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물 받은 ‘이콘’은 어디에 모셔졌는지를 김 신부에게 물었다. 당시 김 국방위원장은 평양에 정교회 성당을 준공하면 이곳에 보관하겠다고 약속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콘성화는 현재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어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 본당 제단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제단 정 중앙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성소를 들어가면 모셔져 있는 성물이 성보에 덮혀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제단에서 바라본 2층 예배당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키릴로스최, 라관철 신부가 러시아 사제와 함께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러시아주교와 라관철 신부가 정교회 절기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라관철 신부가 제실에서 성물들을 준비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최 목사님은 벌써 우리 뒷조사를 다 하신 것 같습니다”
      
나는 라관철 신부가 쓰는 ‘요한(John)’이라는 세례명은 나름 익숙했으나 김회일 신부가 쓰는 ‘표도르(Fyodor)’라는 세례명이 궁금했다. 혹시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Peter)를 러시아식 표기로 발음하는 것인가 물었더니 ‘그렇다’라고 답했다. 나는 이 두 신부가 러시아에 유학가게 된 동기를 비롯해 신학생 시절과 사제서품을 받기까지의 여러 과정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방북하기 전에 이미 내가 확보한 자료들을 숙지했고 궁금한 사항들만 집중적으로 물었다.

“조선(북한)에서는 세례를 안 받으셨을 테고 언제 세례를 받으셨나요?”

“저희들이 한참 유학공부 중이던 2004년 1월 성탄절 미사를 마치고 모스크바 다닐로프 수도원 성당에서 받았습니다(러시아정교회는 서방세계 교회와는 달리 매년 1월 7일이 성탄절이다).”

“두 분 모두 영어와 러시아어를 아주 잘하시던데 신학교 공부는 어려움이 없었는지요?”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2003년 봄(3월)입니다. 규율에 따라 기숙사에서 꼼짝 안하고 공부만 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영어와 로씨야말(러시아어)은 어려움이 없는데 례전할 때(예배나 미사를 집전하는 예식) 사용하는 슬라비어(슬라브어)가 좀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교리공부와 신학공부 할 때 알아야하는 라친어(라틴어), 그리이스어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며 집중교육을 받으셨는데, 그렇다면 모두 몇 년을 공부하셨나요? 저도 신학공부 할 때 영어는 뭐 그럭저럭 했는데 히브리어, 헬라어가 좀 힘들었습니다. 남조선(한국)의 장로교신학대학은 학부 4년 과정과 신학대학원 3년 과정을 모두 마쳐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목사 되는 과정이 무척이나 힘들게 보여집니다. 저희는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별배려와 로씨야(러시아)정교회와 조선정교련맹 간의 상호 협정에 따라 2003년 3월에 로씨야정교회 모스크바 관구 신학교를 입학해서 2005년 5월까지 2년 동안에 모두 마쳤습니다.”

“두 분만 입학하신건가요? 제가 알기로는 다른 두 분이 더 계신 걸로 아는데....”

“야. 이거. 어떻게 그렇게 저희들에 대해 잘 아십니까? 최 목사님은 저희들 뒷조사를 다하신 거 같습니다. 하하하(크게 웃음). 저희들(김표도르, 라요한) 외에도 최키릴로스로와 박요한 이렇게 두 분이 더 있습니다. 그분들도 저희와 똑같이 입학해서 졸업도 같이 했습니다. 저희들은 부제품을 받았지만 그분들은 로씨야에서 더 공부했고 나중에 서품을 받아서 로씨야정교회와 조선정교회를 위해 왔다갔다 일하고 있습니다.”

“아. 뒷조사는 아니구요.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웬만한 자료는 다 나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졸업장을 받았나요?”

“그러니까 정확히 2005년 5월 18일이 졸업식 날이었고 대주교님(당시 신학교 학장이던 베레이스키 예브게니 박사를 지칭)에게 직접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졸업식 할 때 특별히 기억나는 이야기 좀 해주세요.”

“특별히 학장님께서 우리들을 향해 ‘자부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강하게 하라. 조선에 가서도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모든 인민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아, 그랬군요. 그런데 두 분 신부님은 왜 수염을 안 기르시나요? 수염을 안 기르면 정교회 규율에 위반되는 거 아닙니까?”

“아. 우리 정백사원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조선식으로 이끌어갑니다. 우리들은 조선사람이다보니까니 로씨야 신부님들처럼 수염이 멋질스럽게 잘 나지도 않을뿐더러 수염을 길게 기르지 않아도 아무 일(문제) 없습니다.”

두 사제의 말을 종합하면 모스크바 교구 신학교 측은 특별히 이들 4명의 조선 신학생들에 대해서 5년 과정을 2년으로 압축하는 속성과정을 편성해 24시간 공동체생활을 시키며 집중교육과 사제 후보자 훈련을 시킨 것이다. 또한 신학교 재학 시절에는 교구와 신학교 측의 배려로 정식 사제서품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니폼 역할을 하는 사제복장을 하고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2년 동안 이수했던 교과목들은 성경전서와 신앙고백서, 정교회 역사서를 비롯해 각종 성서언어 등 고난도의 학습과정이었으며 특히 러시아정교회만의 특유하고 복잡한 의식을 집전하는 의전숙지가 매우 어려웠으며 이로 인해 개인적 시간이 조금도 주어지지 않을 정도의 강행군 훈련이었다고 한다.

▲ 담당사제인 라관철, 김회일 신부, 리콜라이김 성가단장과 담소하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고급스런 디자인으로 설계된 나선형 계단. [사진제공 - 최재영]


“저희들은 이 정백사원에서 결혼했습니다”

나는 1,2층 모두 합해 500명가량이 선 채로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이 본당에 매주일 몇 명이나 예배를 드리는지 몹시 궁금해 라 신부에게 물었다.

“평양주재 러시아 신자들 말고 순수한 조선(북한) 신자들은 몇 명이나 예배에 나옵니까?”

 “예, 저희 집사람을 비롯해 김 신부님 가족과 우리 가족들이 모두 나옵니다. 성가단 단원들도 모두 우리 조선신자들로 구성돼 있고 조선신자들은 모두 30명 정도가 나옵니다.”

“아. 정교회는 사제들도 결혼을 합니까?”

“아. 저희들이 신학교에 유학중 일 때가 30대 중반 나이였습니다. 로씨야에서 부제 서품을 앞두고 고민하다가 결혼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모두 귀국해 우리 정백사원에서 결혼례식을 올렸습니다.”

“아. 그럼 결혼예식을 올린 때가 정확히 언제쯤 입니까?”

“그러니까 그날이 2005년 1월 28일입니다. 정백사원이 아직 완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충 꾸려놓은 성당 안에서 례식을 거행했습니다. 하하(웃음).”

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무심코 듣다말고 평양 땅에서 기독교식으로 결혼예식을 치렀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록 개신교는 아니지만 기독교식으로 결혼예식을 올렸다는 사실은 아마 역사적인 일인 듯싶다.
      
사제들의 답변을 들어보니 가톨릭에서는 오직 독신자들만 사제 서품을 받는 자격이 주어지는 반면 러시아정교회는 이미 기혼자도 서품을 받을 수가 있다고 한다. 단, 미혼자일 경우 부제 서품 전에 결혼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이들 북측 신학생들은 결혼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또한 정교회 사제들 중 기혼 사제의 부인이 사망했을 경우에는 다시 재혼할 수 없으며, 주교가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은 무조건 독신이라야 한다고 했다.

“아. 결혼예식 주례는 누가 집례했습니까?”

“로씨야에서 홍콩교구로 파견된 신부님이 직접 오셔서 주례를 하셨습니다.”

이들의 결혼예식을 집례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홍콩으로 파견된 디오니시 포즈드냐예프 신부가 평양을 방문해 정백교회당에서 주례를 했다고 한다. 포즈드나예프 신부는 당시 홍콩 중국기독교문화연구소 객원교수로 홍콩에 머물고 있던 중 이들의 결혼 집례를 위해 일부러 평양을 방문했다고 한다. 한편 이들 신학생들은 결혼식과 신혼여행 일정을 마치고 곧바로 러시아로 다시 건너가 그해 5월 중순에 졸업식을 하고 연이어 부제서품을 받게 된 것이다.

▲ 예배시 사용하는 미사용 양초 쟁반에는 기도요청서가 준비돼 있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북측 신자들을 위해 준비된 예식서 순서지 앞면. [사진제공 - 최재영]

 

▲ 북측 신자들을 위해 준비된 예식서 순서지 뒷면. [사진제공 - 최재영]


‘베드로(김회일)와 요한(라관철)’, 부제 서품을 받다
     
러시아정교회 모스크바교구와 조선정교회위원회와의 특별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따라 파견된 조선유학생 4명은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도 2005년 5월 18일, 무사히 졸업식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에 계속 남아 공부할 두 명과 먼저 부제서품을 받아 평양으로 돌아갈 두 명으로 구별돼 졸업생 4명중 라관철(표도르), 김회일(요한) 두 신학생이 우선 부제서품을 받게 됐다.

“정확히 언제 서품을 받았습니까?”

“저희 두 사람은 2005년 5월 21-22일, 이틀간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첫날은 제가 받았고 둘째 날은 표도르 신부가 받았습니다.”

이틀간 진행된 서품 예식에는 러시아정교회에서 교회외교부 부의장을 맡고 있는 예고리에브스크 교구의 마르크 주교가 직접 집례했으며 5월 21일에는 김회일(표도르), 5월 22일에는 라관철(요한)을 각각 서품했다. 하루에 단 한 명의 서품만을 허용하는 러시아정교회의 전통과 관례에 따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것이라고 한다.

“서품식에서 기억할 만한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사실 저희들보다 서품식을 집례하신 마르크 주교님이 더 기뻐하셨습니다. ‘이 서품은 로씨야와 조선 인민들 모두에게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두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조선의 인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정교회의 빛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서품을 받은 두 명은 당시 완공을 앞두고 마무리 단계에 있던 평양 정백교회로 곧바로 부임하지 않고 계속해서 실습 과정을 밟았다고 한다.

“사제서품을 마친 후 그 다음엔 뭘 하셨습니까?”

“평양 정백사원이 완공되면 저희가 전담 사제로 일해야 하는데, 그건 막중한 책임 아닙니까? 저희는 공부만 마쳤지 아무 것도 잘 모르고 해서 실습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시로 파견돼 사제훈련을 받았습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평양에서 담임사제직을 맡아 정상적인 사목활동을 수행하려면 배운 신학 지식과 교리공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에 이들은 사목지에 투입되기 직전까지 실무경험을 쌓는 현장 실습에 들어간 것이다.

▲ 사제서품을 받은 날 김회일 신부가 주교들과 담소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정백교회당 봉헌예식을 집전하는 러시아 주교와 라관철 신부. [사진제공 - 최재영]

 

▲ 봉헌예식을 위해 방문한 러시아 주교단이 만경대 생가를 방문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우리도 기독교 절기는 빠짐없이 지킵니다’

나는 이들 두 명의 사제가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얼마나 객관적인 사목활동을 수행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기독교 절기를 지키는 부분에 대해 물으니 단호한 답변을 했다.

“저희들은 일반 기독교의 성탄절, 부활절은 물론이고 모든 절기들을 다 지킵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 기독교보다 우리 정교회 절기가 더 많아서 매우 바쁩니다.”

“올해 성탄절도 예배를 잘 드렸나요?”

“아. 물론입니다. 로씨야정교회는 성탄절이 매년 1월 7일 아닙니까? 그때 저희들이 참 바빴습니다. 올해도 로씨야를 비롯해 로므니아, 벌가리아, 뽈스까, 영국, 스웨리예, 스위스를 비롯해 여러 나라의 외교대표들과 우리 조선에 체류하는 정교회 신자들이 몰려왔습니다. 례식을 끝낸 후에는 서로 친교하고 음식을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그 순간 작년에 평양의 어느 식당에서 여성봉사원과 나눈 대화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날 식당 안에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길래 ‘저 장식을 왜 하는가?’를 봉사원에게 물었더니 전혀 답변을 못했다. 다른 봉사원에게 재차 물었더니 ‘우린 성탄절보다 수령님 탄생하신 태양절이 더 좋습니다. 이 장식물은 해외 동포들이 많이 오시니까 그냥 보기 좋게 장식한 겁니다’라며 답한 적이 있었다.

▲ 정백교회 설립 5주년 행사를 위해 공항에 도착한 마르크 대주교를 김회일 신부가 영접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대주교가 정백교회 설립 5돌 기념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2층 발코니에서 성가를 부르는 북러의 여성 신자 성가단. [사진제공 - 최재영]


봉수교회, 칠골교회도 없는 예식서를 비치하다

나는 평양에 공식적으로 세워진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주보지나 전도지를 본적이 없다. 그러나 이곳 정백교회당은 본당과 성소를 둘러보던 중 예식서나 기도요청서 등 인쇄물들이 간간히 눈에 띈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일반 평양시민들에게는 정교회가 생소한 종교이니만큼 조선어로 만든 순서지나 예식서가 필요했나 봅니다?”

“아. 최 목사님. 저기 입구 접수대에 가보시면 순서지와 례식서가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

양초를 쌓아둔 코너에는 기도요청서가 많이 놓여져 있고 다양한 유인물들이 조선말(한글)과 러시아어로 다양하게 준비돼 있었으며 심플한 전도지도 인쇄돼 있었다. 내국인 신자들과 외국신자들을 모두 배려한 흔적이 엿보였다.

▲ 평양 러시아장병 묘역에서 러시아 주교단과 북측 사제단이 공동으로 전몰장병 추도미사를 올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김회일, 라관철 신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도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사목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세 가지를 말하다
첫째, 완공된 지 3년 만에 드린 봉헌예식

이들이 이곳에 공동 담임사제로 부임한지도 (당시) 6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아무래도 저희들이 여기서 사목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세 가지인데 순서대로 기억해보자면, 첫째는 2009년 2월 12-19일까지 드려진 우리 정백사원 봉헌례식입니다.”

“아. 봉헌예식은 준공식할 때 드린 축성식 말고 또 다른 예식이었나요?”

“예, 그렇습니다. 축성식은 준공식 때 드린 례식이고 봉헌례식은 이 사원을 건축하면서 들어간 비용과 건축비를 다 청산하고 완전하게 마무리 된 교회당을 이제 하느님께 바친다는 례식인데 저희가 완공한 지 3년 만에 봉헌례식을 올렸습니다.”

“아, 그때 참 많이 분주하셨겠습니다?”

“네. 그때 로씨야정교회 울라지워스또크(블라디보스토크) 주교회 대표단이 평양을 대거 방문해 조로(북러)간의 국가 행사도 많이 가졌습니다. 쎄르게이 야꾸또브 단장님이 직접 봉헌례식을 집전하셨고 베냐민 주교님이 축복해 주셔서 이 례배당이 완전히 하느님께 올려졌습니다.”

“러시아대표단들은 봉헌식 말고 어떤 국가행사를 가졌습니까?”

"50명 정도의 조로 사제단들이 모여 평양시내에 있는 로씨야병사들 묘지와 기념비에서 추도례식을 갖고 기도행사도 개최하고 국가연회 참석과 사적지, 관광지도 참관했습니다.”

“조선에는 러시아병사들 묘지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평양시 사동구역에 가면 해방 당시 소련군 묘지와 해방탑이 있는데 거기는 우리 조선을 일제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용감하게 전사한 소련군과 소련공민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2,500명이나 되는 소련군 전사자들의 무덤은 평양뿐 아니라 청진, 흥남, 원산, 라진 등에 골고루 묻혀 있습니다.”
   

▲ 부활절 미사를 드리기 위해 제단에 조선글(한글) 자막을 장식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새 단장을 마친 성당 입구에서 김회일 신부가 집례복을 걸친 채 배웅 나온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둘째, 완공 5년 만에 드려진 𔃵돌 기념 예식’

“아. 두 번째 기억에 남는 사건은 뭔가요?”

“둘째는 작년 8월에 있었던 저희 정백사원 다섯 돌 기념행사들입니다. 그때도 국가적으로 거창하게 치러졌기 때문에 너무 바빠서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아. 그러셨겠군요. 주로 어떻게 기념했습니까?”

“그때가 2011년 8월 13일입니다. 이 당시도 로씨야정교회 대표단, 주조 로씨야 련방 특명전권대사와 대사관 성원들, 여러 나라들의 대사관성원들, 국제기구대표들이 참석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념미사는 모스크바총대주교회 해외기관조정위원회 예고리예프스키 마르크 대주교님이 집전하셨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대주교님은 감격에 겨워 ‘지금부터 5년 전에는 현재 로씨야 정교회 총대주교가 되신 키릴리스 대주교님이 완공식 때 오셔서 축성식 기념 미사를 집전하셨는데 오늘은 력사적인 자리에 내가 서있다. 이 사원은  이제 로씨야와 조선간의 친선과 우호의 상징이 됐다’고 평가해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때도 지난번 봉헌예식처럼 국가행사, 추도행사 등 바쁘셨겠군요.”

“물론입니다. 이 때는 만수대의사당에서 최고인민회의 량형섭 부의장님도 뵙고, 종교인협의회 본부에서 장재언 위원장님도 뵙고, 여러 행사 참관과 향산(묘향산)을 비롯한 명산도 참관하는 등 정신이 없었습니다.”

셋째, 정교회 예식으로 거행된 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도식

“그럼 세 번째 기억나는 사건은 뭔가요?”

“세 번째는 작년 12월 들어서 위대하신 장군님께서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서거하신 일입니다. 그때 저희가 추도미사를 두 번이나 올린 적이 있으며 저희들도 너무 애통해서 밤잠을 못 이루고 애도했습니다.”

나는 1년 전에 갑자기 타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독교식 추도에 관심을 보였다. 추도 미사는 2011년 12월 26일, 바로 이 성당에서 김 신부와 라 신부에 의해 집전됐다고 한다. 표도르 신부에게 당시 상황을 물어봤다.

“그 당시 정말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추도미사는 주로 누가 참석했습니까?”

“로씨야 측에서는 대사와 대사관 관계자들이 참석했고 우리 정부에서는 로씨야 외교를 담당하는 궁석운 외무성 부상, 장재언 조선종교인협의회장과 우리 가족들과 조선신자들과 외국방문객들도 많이 참석했습니다.”

“국방위원장님을 직접 뵌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장군님은 너무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나셨지 않습니까? 그분이 이 사원을 직접 세워주셨고 저희들도 장군님 배려로 로씨야신학교에 유학을 가고 사제가 됐지 않습니까?  또한 저희가 이곳에 부임한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관심과 배려를 해주셨고 조로(북러)간에 친선과 우호의 역할을 잘 해 달라 당부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슬프고 애통스럽습니다.”

“아. 그럼 생전에 이곳에도 현지지도를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조선 건축노동자들이 3년 동안 공사할 때 여러 차례 건설 현장을 현지지도 오셔서 작업과정을 살펴주시고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추도미사에서는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그리고 미사는 러시아어로 했나요? 조선말로 했나요?”

“아. 장군님 추모례식은 로씨아말과 조선말 두 가지 모두 했습니다. ‘장군님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인민을 가장 먼저 아껴주는 위민사상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조로간의 우호도 영원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참석한 로씨야 대사관 관계자들은 량국 관계 발전과 세계 인류의 자주위업수행에 불멸의 공헌을 남기신 장군님을 진심으로 슬퍼하며 추모하였습니다.”

이로써 이곳 정백성교회당에서는 결혼예식에 이어 추도예식까지 러시아정교회식으로 거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사제들은 필자가 이곳을 떠날 때 정백교회당은 곧바로 다시 내부 단장에 들어간다고 알려줬다. 예배당 내부에 성화들을 그려 넣거나 장식을 보완하는 일과 예배당 내부 도색 공사를 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성화만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성화전담 화가가 직접 방문 한다고 했으며 북측에서도 명망 있는 미술가들이 교회장식 작업에 동참한다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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