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 / 동국대학교 북한학 박사 졸업

 

성불사 깊은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노승은 잠이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 이은상 


  정방산은 황해북도 사리원시에서 약 8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산으로 높이 481m의 크지 않은 산이다. 천성산(千聖山이)라고도 불렸다는 정방산(正方山)은 4개의 산마루들이 서로 닿아 정방향을 이루고 있다고 붙여진 명칭이다. 우리 선조들은 정방산에 올라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으나, 아무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도 결국은 같은 것을 비유하는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정방산’, 누구나 속아 넘어갈 만큼 이야기를 잘 꾸미거나 허풍을 잘 떠는 경우 ‘정방산도 돌려 꾸민다’라는 속담이 만들어질 만큼 친근한 산이었던 것 같다. 이는 정방산이 황해도의 구월산(높이 945m)이나 멸악산(높이 818m)처럼 험난하고 수려하지는 않지만, 재령평야 주변에서 주민들의 삶과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과거 정방산은 “제밤에 울 닭이 대낮에 운다”고 할 정도로 수림이 우거졌으며, 병풍처럼 둘러선 절벽과 사방에 솟은 봉우리, 2단 폭포 등이 있어 좋은 경치와 운치를 주고 서남부의 평야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었다. 특히 고려시대 정방산성이 만들어지고 국방경계의 중요 지역이 되었다. 정방산 마루 둘레 12km, 성안 넓이 약 2㎢ 규모의 정방산성은 고려시대에 처음 쌓고, 조선시대 정묘호란 이후 재건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 안에 4개의 못과 7개의 우물이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이 있을 때마다 재령평야 주민의 도피처가 되었고, 황주와 봉산 일대에서 활약하던 의병부대의 근거지가 되었다.

▲ 정방산과 정방산성
출처 : 평화문제연구소
▲ 성불사 경내 전경

 

 

 

 

 

 

 

 

 

  비록 조선후기 이후 보수하지 않아 많이 훼손되어 있으나 동서남북에 문루와 타첩(陀堞 : 활이나 총을 쏘거나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게 쌓은 작은 성벽)과 사혈(射穴)이 각각 1,336개소, 포혈(砲穴)이 4,800개소, 치성(雉城 : 성의 외부로 돌출시켜 적을 향하여 사격할 수 있게 쌓은 성벽) 7곳 등이 아직 남아 있다. 성내에는 무기창고터와 식량창고터와 정방산성의 성장이었던 김성업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79년 세워진 숭덕비가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정방산성의 남문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복구한 것이다.

  정방산이 우리에게 친근한 것은 바로 일제시대 이은상의 시에 홍난파가 곡을 입힌 ‘성불사의 밤’에 나오는 그 성불사가 있기 때문이다. 성불사는 고려창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도선이 풍수지리설에 의해 서쪽을 방비하도록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현재 성불사에는 고려시기에 만들어져 북한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인 ‘웅진전’과 고려 양식의 4각5층석탑이 있고, 임진왜란시 소실되었다가 일제시대 복원된 극락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등이 남아있다.

▲ 정방산 유원지

 현재 정방산은 북한주민들이 자주 찾는 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북한정권은 정방산과 성불사의 유물유적을 복원·보존하고, 1997년에는 정방산에 농구장과 배구장 등 체육시설과 낚시터, 잔디밭, 찻집, 식당, 상점, 동물원 등을 만들어 유원지화 하였다. 또한 도로를 정비하고 주차시설을 만들었고, 버스노선도 신설하여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정방산은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한반도 서쪽을 방비하고, 너른 평야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한 자락 여유와 품을 내주는 마을 뒷산 같은 산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지금, ‘성불사의 밤’의 쓸쓸함과 애잔함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늦은 가을 남북 주민들이 함께 정방산 단풍과 성불사 풍경소리를 즐기고 싶다는 희망을 버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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