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서(겨레말큰사전 책임연구원)


작년 12월 25차 공동회의에 참석한 북쪽 선생님 중에 아주 오랜만에 회의에 참석하신 분이 계셨다. 2009년 이후로 회의 참석을 안했으니 거의 6년 만에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그 6년 동안 박사원에 들어가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나왔다고 했는데, 얼굴이나 몸집에 살이 퍽이나 오른 모습이었다. 그분은 6년 동안 10kg 정도 찐 것 같고 난 반대로 10kg 정도 빠진 상태였으니 서로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우린 이 낯설음과 반가움을 뒤로 하고 회의에 매진했다. 그리고 회의를 모두 마친 마지막날 동석 식사에서 난 그분에게 일부러 이렇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 살이 많이 찐 것 같습니다.”

이 말에 북쪽 선생님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완서 선생이 날 사람 취급 안하는구먼.”

난 다시 맞받아서 말했다.

“사람 취급 해드리지요. 그동안 몸이 많이 나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우린 그렇게 말을 주고 받으면서 빙긋이 웃었고, 화기애애하게 회의 마지막날 밤 동석 식사를 마쳤다.

예전에 말했던 대로 북에서 ‘살찌다’라는 말은 사람에게는 쓰지 않고 동물에게 쓰는 말이다. 그래서 ‘살이 찐 것 같다’는 내 말에 북쪽 선생님이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라고 답을 한 것이고 난 다시 사람 취급해 주겠다면서 ‘몸이 많이 난 것 같다’라는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

이런 남북 차이는 ‘살찌다’와 의미적으로 반대에 놓이는 ‘여위다’에도 존재한다. 남과 북의 사전 모두 ‘여위다’의 풀이는 별 차이가 없다.

《표준국어대사전》 여위다, 몸의 살이 빠져 파리하게 되다.
《조선말대사전》 여위다, 몸의 살이 빠져서 앙상하고 메마르게 되다.

남쪽에서 ‘여위다’는 주로 웃어른께 쓰는 말이다. 이 ‘여위다’를 북에 가서 웃어른께 쓴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이런 대화가 오가게 될 것이다.

    남: 선생님, 아주 오랜만에 뵙네요.
    북: 그러게, 김 군도 그동안 잘 있었나?
    남: 선생님 그동안 많이 여위셨네요. 어디 편찮으셨어요?
    북: 여위다니? 김 군이 이렇게 도덕 없는 사람인 줄 몰랐네. 날 지금 동물 취급하는 겐가.
         사람 그렇게 안봤는데 영 형편없군. 불쾌하이. 오늘은 이만하세. 다음에 보자고.

‘여위다’라는 말에 남과 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북의 선생님이 매우 불쾌해하며 도덕 없는 김 군이라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북에서 ‘여위다’는 동물이나 아랫사람 또는 동등한 사람에게만 쓰는 말이다. 남과 북의 ‘여위다’ 용례를 보면 남은 웃어른께 사용하므로 높임을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시-’와 같이 쓰이지만, 북은 그런 경우가 없이 동물이나 아랫사람, 또는 동등한 사람에게 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남>

⦁오빤 몹시 {여위셨어요}.《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아버지의 사진을 찾아내었습니다. 빛도 다 낡아빠진 아마 삼십년은 넘은듯한 오랜 사진입니다. … {여위신} 얼굴이나 눈에서만은 사람을 찌를 듯한 광채가 납니다.《정인택: 소설가의 아버지-아버지의 눈》

<북>

,⦁안해의 {여위고} 파릿한 얼굴에는 짐짓 웃음이 어려있었으나 석별의 정이 담긴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변희근: 뜨거운 심장》

⦁사료가 부족할 때 양들은 {여위고} 저항력이 약해져서 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그런 후과에 대해서 이미 눈물 나게 체험을 했습니다.《강태정: 한계점》

⦁소년은 토스레 무릎바지에 더덕더덕 기운 적삼을 입었는데 피골이 상접한 {여윈} 아이였다.《로종익: 영원한 흐름》

북에선 사람에게는 ‘살찌다’가 아닌 ‘몸이 나다’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웃어른께는 ‘여위다’가 아닌 ‘축이 가다’라는 표현을 쓴다. 즉 위의 가상 대화에서 남쪽 화자는 북쪽의 어른께 ‘선생님 그동안 많이 여위셨네요.’가 아닌 ‘선생님 그동안 축이 가셨네요.’라고 해야 도덕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북쪽의 용례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그에게는 언제나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고 계시던 어버이 수령님께서 근심에 잠기신 것만 같이 생각되였다. 그리고 얼굴도 {축이 가신} 것만 같았다.《림재성: 한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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