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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교회를 가다④ 평양칠골교회 편(하)<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44회)
최재영  |  9191j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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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11  0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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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이번 시리즈는 총 15회에 걸쳐 북한의 ‘범 기독교 교회’들을 탐방한 ‘북한교회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남한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마치 초대교회 형태처럼 정착한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 필자 주

  

역사와 문화적 성찰을 통해 칠골교회를 찾다
        
칠골교회를 비롯한 현존하는 북한 기독교 공동체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결코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1895년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가 최초로 복음을 전한 이후 놀랄 정도로 급성장해 조선의 평양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는 종교도시였다. 그러나 조선 기독교의 황금 터전이었던 평양은 불행하게도 6.25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황폐해졌으며 기독교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장 먼저 조선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전한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 의해 철저히 폐허가 되어버린 이 북녘 땅은 그 이후부터 미국식 기독교가 뿌리 내릴 수 있는 도덕적 기초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후 복구사업과 함께 철저히 훼파된 교회터전 위에 지금까지의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의 생존적 특수교회를 추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2천 년 전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간 가정교회와 처소교회였다.
        
그리고 전후 이북에서 생성된 자생적 처소교회나 가정교회들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곳이 바로 옛날 하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던 칠골지역 신앙공동체였다. 그들은 전쟁의 비극적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의 동역자들과 신자들 위주로 삼삼오오 소그룹으로 모여 지속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변함없이 수십 년간 꾸준하게 예배를 드리며 신앙의 그루터기 역할을 해 오던 중 드디어 1989년 말에 기념비적인 칠골교회당을 가시적으로 건축해 자신들의 신앙을 세상에 드러냈고 터전을 삼은 것이다.
         
미국이 개입한 6.25전쟁으로 1, 2차 시기에 죽은 이북지역 희생자 숫자는 120만 명(1,231,540명)이 넘는다. 이런 엄청난 생명을 앗아간 참혹한 전쟁을 직접 경험했던 칠골교회 신자들과 평양 시민들은 미국을 제국주의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철저한 민족주의로 뭉쳤다. 그래서 북의 기독교 신자들은 민족정신이야말로 다른 그 어떤 종교적 전통보다 우선시 되었고, 그들은 그리스도인 이전에 조선인이어야만 하는 절박한 현실 속에 살아왔다. 나는 칠골교회가 지닌 이런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일반 인민들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 기독교 문화와 정서를 비교하면서 북의 신자들이 순수하게 조직한 독특한 ‘사회주의적 교회’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왜 북의 인민들이 서양 기독교, 특히 미국식 기독교를 철저히 경계할 수밖에 없는지, 왜 민족주의적인 기독교를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깊은 역사적, 문화적 성찰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이런 이해와 접근이 배제된 채 칠골교회와 봉수교회 신자들에 대한 근거 없는 무차별적 비난은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으며 그런 관점과 심보로는 예수의 정신과 복음을 타문화권의 어느 누구에게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으며 그런 행위는 또 다른 이름의 공허한 증오일 뿐이다.
 

   
▲ 세 번째로 건축한 칠골교회 예배당 앞에 선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첫 번째 건축한 칠골교회당
       
1989년 5월, 김일성 주석은 평양 광복거리 신도시 아파트타운에 몰려든 가정교회 신자들이 요청한 교회당 건축 요청에 대한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현지지도에 나섰다.  김 주석은 한 바퀴 돌아 본 후 당시 수행했던 김정일 비서(국방위원장)에게 실무적인 책임을 맡기며 옛날 하리교회터를 찾아 가급적 이 칠골지역에 교회당을 건립하도록 최종인가를 했다.
       
그러나 전쟁 시기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평양엔 단 한 채의 교회당도 남지 않았고 그 후 전후 복구로 인해 그 흔적과 자취를 잃어버린 지형에서 30년 전 옛 교회당 터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자 김정일 비서는 하리교회 인근에 살던 고령의 원주민 할머니들을 물색해 그들을 앞장세워 옛터를 찾는 사업에 적극 나서도록 했다.
       
동시에 김정일 비서는 교회당을 필요로 하는 칠골지역 신자들의 교세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그 실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만경대구역이 신시가지로 개발되기 전부터 이미 규모가 큰 가정예배 처소가 5곳이 있었고 신자들의 수는 560명 정도로 파악됐다. 그 후 광복거리가 개발되면서 더 많은 신자들이 몰려들었으며 이런 사실을 파악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비서는 결국 봉수교회당에 이어 평양 제2의 공식교회당인 칠골교회당 건설을 지체 없이 허락하고 추진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칠골교회당은 현재의 칠골교회당 대문 밖을 나와 ‘칠골1동’의 아늑한 공터 위에 세워졌다. 제법 규모가 큰 이 교회당 부지는 국가에서 제공했고 건축 공사는 칠골지역 가정교회 신자들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전형적인 시골교회를 연상하는 교회당은 3년여의 세월이 흐르면서 시설 면과 외형 면에서 다시 건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워낙 단순한 창고형 스타일의 교회 건물이다 보니 좀 더 세련되고 고풍스런 교회당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북에서는 워낙 교회당을 구경하기 힘든 상황이다 보니 교회가 설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국내외 신자들에게도 만족할 만한 외관과 시설물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배당 재건축 문제는 단순히 칠골교회 신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의 위신과 체면도 고려되는 외교적 부분도 내포되고 국내외 이목도 집중하게 되어 결국 국가에 건축 지원을 요청하게 됐다. 1989년 말에 건축된 이 칠골교회당은 결국 그 자리에서 약 4년 동안 예배를 드리다가 현재의 칠골교회당 터 위에 1991년 말에 재건축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92년 11월에 완공해 새 예배당으로 이전했다. 당시 옛날 칠골교회당은 지금도 정문 밖 건너편에 그대로 보존돼 있고  필요시마다 칠골교회 측에서 종교활동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 1989년에 건축된 최초의 칠골교회당을 차량 내부에서 촬영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칠골1동’도로표지판과 함께 보이는 최초의 칠골교회당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두 번째 건축한 칠골교회당
      
국가와 조기련, 칠골교회 측은 89년 말에 건축된 최초의 칠골교회당을 그대로 둔 채 현재의 칠골교회당 터 위에 칠골교회당 건축을 시작했다. 이 때 김정일 비서가 직접 교회당 건축에 관여하며 세심한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직접 지도해 주었다. 봉수교회당을 건축할 때와 마찬가지로 국가에서는 약 5천㎡의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했으며 건축비는 설계상 미화 10만 달러가 소요되는 것으로 계산됐다. 당시 조기련에서는 교인들의 헌금과 해외동포들의 지원금을 후원받아 충당했으며 건축이 시작되자 담임목사인 류병철 목사를 구심점으로 온 신자들이 직접 공사에 참여했고 교회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자주색 벽돌로 쌓아 올린 칠골교회당이 흰색 라인과 조화를 이루며 윤곽을 드러내며 완공됐다. 1992년㺋월 22일(넷째 주),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청명한 가을 하늘아래, 추수감사절 예배를 겸해 온 신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감격의 칠골교회 헌당식 예배를 올렸다. 이날 헌당식에는 조기련 위원장 강영섭 목사와 서기장 고기준 목사를 비롯한 연맹중앙위원, 연맹 평양시위원, 봉수교회 담임인 이성봉 목사, 평양시내 각 가정예배처소 인도자, 건축위원 등 100여명의 인원이 참석해 봉헌을 축하했다.
      
이전한 교회당의 초대 담임목사는 70년대에 평양신학원을 졸업하고 조기련 선전부 소속 전도사로 일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유병철 목사가 재임명됐다. 얕은 언덕배기에 세워진 칠골교회당은 총 150석 정도의 규모로 지어졌으며 평소 열심히 예배드리는 신자들은 100명 정도였다. 칠골교회 주변에는 김일성 주석의 모친 강반석 여사의 생가 주위로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도시와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 있어 교회당은 아늑한 위치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 타운 내 여러 시설물과 사적지 등은 당시나 지금이나 남측과 해외 방문단에게는 잘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로서 두 번째로 건축된 칠골교회당에서는 1992년 11월 말부터 2014년 4월 말까지 22년 동안 남측과 해외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곳을 찾아 예배를 드리게 됐으며 특히 미국의 국부적 종교지도자인 빌리 그래함 목사를 비롯해 남한과 해외의 저명한 목회자들이 간혹 방문해 설교를 하기도 했다.

   
▲ 1992년 11월 22일, 추수감사절에 헌당한 두 번째 칠골교회당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칠골교회 장로, 권사, 집사를 비롯해 성가대원들이 떠나가는 방문단을 환송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세 번째 칠골교회당 건축이 시작되다
        
2013년 7월 여름날, 나는 뜨거운 태양열 아래 개건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칠골교회 공사현장을 방문했다. 공사는 이미 지난 4월말부터 시작됐다. 당시 조그련 국제부장 출신인 황시천(황민우) 목사가 칠골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고령에다가 건강마저 좋지 않아 그를 대신해 부목사인 백봉일 목사가 공사를 돌아보고 있었다. 마침 처음부터 건축 과정에 관여하며 인부들을 보살피던 백 목사는 필자를 보자 반갑게 맞이하며 친절히 곳곳을 안내해주었다. 외부의 특별한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신자들 자체의 힘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으며 뙤약볕 아래 노동을 하는 20여명의 공사장 노동자들을 보니 모두가 힘겨워 보였고 낯선 방문자에 대한 의아한 눈초리마저 따가워 보였다. 순간적으로 “아차, 음료수라도 사올 걸...”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백 목사의 안내를 받으며 공사장 인근 주변과 예배당 내부 등을 자세히 둘러보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까지 공사를 하는 동안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어느 개인이나 단체도 이곳에 방문한 적이 없었으며 북측의 사정상 외부인들의 공사장 방문은 물론 사진 촬영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이해가 됐으나 그런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는 조그련의 현실이 매우 안타까웠다. 그러나 조그련과 칠골교회 측은 나에게는 예외적으로 대해 주었으며 적극적인 안내와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공사현황을 브리핑해줬다.
      
내가 볼 때 재건축(개건공사) 공사는 큰 골조 일부는 남겨뒀지만 거의 완전히 헐고 새로 짓다시피한 것으로 보였으며 입구 좌우엔 예전에 없던 남녀 화장실을 추가로 만들었고 예배당의 전체 면적이 예전보다 더 넓고 쾌적하게 보였다. 예배당 폭의 면적은 좌우로 각각 3미터가 늘어나 예전의 공간보다 6미터가 더 넓어졌다고 한다. 건물 윤곽도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내부와 외부가 전혀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국가에서 조금은 지원이 있다고는 하나 어서 속히 남측과 해외교회들이 재정적인 지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이 정도의 공사규모라면 본당과 교육관, 부속건물까지 포함해 최소한 30만 달러의 예산이 필요할 듯 보였다.

적십자병원도 폭파했는데 교회당인들 온전합니까?
       
필자가 방북 시마다 자주 만나보는 조그련 서기장 오 경우 목사는 최장수 서기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서기장이라는 직책은 남측에서는 총무격이며 위원장직은 총회장이나 교단장 격이다. 이날 오 목사는 백봉일 목사와 함께 칠골교회가 최초로 세워진 계기에 대해 자세히 증언해주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6.25전쟁기간)’에 미제의 야수같은 폭격으로 조선과 평양의 교회당은 모두 파괴되고 수많은 신자들이 희생했고 겨우 살아남은 신자들도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조선의 신자들은 기독교를 믿는 미국을 마치 하나님의 사도처럼 철석같이 믿었는데 조선에서 행한 저들의 야수적인 만행과 일시적 강점시기에 미군들이 저지른 귀축같은 살인만행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기독교 신앙을 떠나 대부분 탈교했지요.”

“저도 미국립문서보관소를 비롯해 여러 전쟁 관련 문서들을 살펴보니 이북지역에 대한 미군폭격은 생각보다 심각해 거의 초토화시켰더군요. 미공군 폭격대는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민가에도 야간에 불빛만 비치면 무조건 공격을 했고 중국군이 항미원조 전쟁(6.25)시 인해전술이 시작되기 이전에 벌써 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 등 주요 5개 도시는 이미 쑥대밭이 된 상태였지요. 오죽하면 미 극동군 공군사령관 오도넬이 맥아더 청문회에 출석해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이름값을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더 이상의 목표물이 없어 중국군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 우리는 이미 무기를 손에서 놓게 되었다”고 증언했겠습니까?”

“최 목사님이 잘 아시는군요. 전쟁협약 국제법상 적십자사나 거기서 운영하는 병원들은 절대 공격하면 안 되는데 미군놈들은 적십자 병원들마저도 무참히 폭파했고 교회당도 모두 폭파시켰습니다.”

실제로 평양시에 대한 미공군의 초기 기습공격은 서울이 다시 점령된 1951년 1월 3일 밤중에 시작돼 이튿날 정오까지 계속됐는데 매 15분 간격으로 소나기 퍼붓듯 폭탄을 투하했다. 처음에는 소이탄으로 시작해 네이팜탄, 고성능폭탄, 그 후에는 더 많은 양의 소이탄과 시한폭탄을 연속적으로 투하했으며 이런 체계적인 공습 때문에 그 어떤 인명 구조작업도 불가능했고 수만 명의 주민들이 건물 잔해 속에 깔려 구조 받지 못한 채 질식사와 압사를 당해 죽었다. 파괴된 건물 중에는 각종 종교시설물과 교회당, 성당은 물론이고 8,000미터 상공에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적십자 표시를 해놓은 병원들마저도 포함되었으며 이로서 평양시내의 건물은 단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파괴되어 허허벌판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인민들의 의사와 요구를 들어주시고 그것을 나라의 정책으로 작성하여 풀어주시는 수령님은 1989년 광복거리 건설현장을 현지지도하시면서 그전에 칠골지역에 교회당이 있었다고 회고하시면서 ‘이곳의 신자들이 교회당 건설을 제기하는 조건(상황)이니 그 자리에 국가에서 건설해 주자고 말씀하시어 시작됐지 않았습니까?”

나는 혹시 기독교를 믿는 이북의 신자들은 국가로부터 차별당해 불이익이나 피해를 당하지는 않는지 조심스레 물었으나 오경우 서기장은 정색을 하며 단호히 못을 박았다.
 
“우리 공화국 정부는 해방 후 그리고 전쟁 후 지금까지 시종일관 종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의 자유를 법적으로 담보해주고 있습니다. 종교인들도 공화국 공민으로서 국가의 모든 정사에 참여하는 권리와 의무가 있고 자신들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며, 무상치료와 무상교육의 권리를 비롯해 모든 혜택을 동등하게 모두 다 받으며 생활합니다.”

옆에 걸터앉아 편한 인상으로 웃음만 짓고 있던 백봉일 목사도 흥분한 듯 한마디 거들었다.

“여기 칠골교회만 해도 광복거리가 건설된 후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 새집을 받고 생활하면서부터 신자수가 늘어나게 되어 그들 속에서 교회건설 문제가 일정(민원제기)에 오르게 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남조선에서는 교회를 다니면 총살하고 정치범수용소에 가둔다는 말도 안 되는 모략을 늘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최 목사님이 혼자 아무 때나 평양시내 다니면서 지나가는 시민들 붙들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예수를 믿거나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붙잡아 가는지......”
 

   
▲ 공사 현장을 방문해 당시 부목사인 백봉일 목사와 함께한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교육관 공사장을 둘러보는 백봉일 부목사. [사진제공 - 최재영]

 

   
▲ 교육관 공사장을 둘러보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교회 대문에서 입장할 때 우측에 있는 교회부설 건물. [사진제공 - 최재영]

    
W.C.C와 남측교회도 건축지원에 동참하다
       
이런 와중에도 칠골교회와 조그련은 중요한 건축자재중의 하나인 외부타일 지원을 W.C.C(세계교회협의회)에 요청했다고 한다. 마침 부산에서 개최되는 W.C.C총회 참석문제로 울라프 트비트 총무와 매튜 죠지 국제사업담당 국장 일행이 조그련 초청으로 이번 8월 말경에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때 국제사업담당이 모금액을 통해 구입한 타일을 직접 칠골교회로 가져올 것이며 이번 일이 성사되면 이번 공사에서는 처음으로 외부의 지원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 대문을 들어오면 좌측과 우측에는 자그마한 단층 건물들이 보이는데 이것들을 헐고 새로 교육관을 건축할 예정이며 그곳엔 상담실과 사무실 등 다용도 건물로 꾸며진다고 한다. 나는 공사 현장을 둘러보며 교회당이 아름답게 완공되어 서평양과 칠골지역에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증가되어 부흥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되길 기도했다. 또한 오 목사와 백 목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교리적인 부분을 언급했는데 모두가 동의하며 공감해주었다.
        
“제가 볼 때 남과 북의 신자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와 ‘교회당’그리고 ‘성전’이라는 단어를 자꾸 혼동해 사용하는 것을 봤습니다. 교회건물은 ‘교회’가 아니고 그냥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에 ‘교회당’혹은 ‘예배당’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말이지요. 진짜 교회는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진정한 교회 아닙니까?”

“우리 조선의 교회야말로 최 목사님이 말씀하는 그런 교회입니다.”

“저도 그 부분을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십자가 구속사건으로 그 기능과 역할을 다했는데도 아직도 여전히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평양의 신자들은 공식교회당을 출석하든, 가정교회를 다니든 믿는 신자 자신이 교회이며 믿는 신자들 공동체가 바로 참된 교회 아닙니까? 건물자체가 교회는 결코 아닙니다. 제가 볼 때 그런 의미에서 이북의 500개가 넘는 처소교회와 가정교회 신자들은 교회건물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초대교회 신자들로 보입니다.”

공사장 방문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떻게 하면 칠골교회 건축비용을 지원할 수 있을까를 여러모로 고민했다. 그리고 방북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하던 길에 며칠 서울에 들려 광화문의 감리교본부를 찾아 건축 지원을 협의하려 했으나 만남이 성사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교단 관계자는 철저히 외면하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감리교는 그 동안 10년 넘게 대외적으로 칠골교회당 건축 청사진과 조감도를 제작해 언론에 공개하며 칠골교회당은 자신들이 짓겠다고 큰소리쳤으나 막상 건축을 시작하니 교단 내부의 헤게모니에 휘둘려 정신이 없어 그런지 모두가 무관심한 상태였다.
       
서운하고 야속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의 영향으로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경색되고 북한교회에 대한 일체의 지원이 중단되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칠골교회당 건축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도 멀어진 것은 이해했다. 장로교 통합측이 주도한 봉수교회당을 건축할 때는 무려 500개 교회와 120개 단체가 헌금에 동참했고, 1,500명의 개별 신자들이 동참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번 칠골교회당 건축에는 너무 무관심했다.
       
다행히 필자가 서울 방문 후 여러 언론매체에 인터뷰와 기고를 통해 칠골교회 지원의 시급함에 대해 널리 알리자 한국교회가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와 별도로 조그련 측에서도 한국교회 대표기관인 KNCC측에 공문을 보내 적극적으로 지원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특히 건축 관련 물품지원을 직접적으로 요청하자 칠골교회의 개보수 지원을 위한 한국교회협의회 실행위원회가 열렸다.
     
이 자리는 봉수교회를 건축한 예장 통합총회 측의 제안으로 회원교단의 모금을 통해 건축을 지원하기로 결의했는데 특히 칠골교회 측이 긴급 요청한 ‘전압주파수 안정기’와 ‘배전판’을 예장통합과 기독교장로회, 구세군 등이 적극적인 후원을 해 현장으로 전달됐다. 북에서 요청한 장비들은 당시 가격으로 약 55,000달러(남한 돈 6천만 원)상당에 해당되는 액수였는데 한국교회가 그나마 작은 지원을 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칠골교회당 외부 모습1. [사진제공 - 최재영]

 

   
▲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칠골교회당 외부 모습2. [사진제공 - 최재영]

 

   
▲ 공사중인 칠골교회당 내부를 둘러보는 필자와 백봉일 부목사1. [사진제공 - 최재영]

 

   
▲ 공사중인 칠골교회당 내부를 둘러보는 필자와 백봉일 부목사2. [사진제공 - 최재영]

 

   
▲ 공사중인 칠골교회당 내부를 둘러보는 필자와 백봉일 부목사3. [사진제공 - 최재영]


공사를 모두 마친 칠골교회당을 다시 찾다
      
세 번째 칠골교회 건축공사는 2013년 4월말부터 시작해서 2014년 7월 6일까지 약 1년 3개월이 소요됐다. 나는 칠골교회 건축공사를 온전히 마치고 입당을 마친 2014년 10월 5일 첫 주일 아침, 평양 만경대지구 칠골동에 자리 잡은 새로운 칠골교회당을 둘러보고 주일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방문했다. 칠골교회당은 지난 7월 첫 주일에 이미 입당을 마치고 예배를 드려왔으나 여러 준공 행정절차 등을 거친 후 특별한 종교예식은 치루지 않았다. 교회당은 고급석재와 건축재료들로 품위 있고 단아하게 지어졌고 현대적인 설비들과 비품들을 갖추고 있는 럭셔리한 교회당으로 변모해 있었다.
      
10월 첫 주일 아침, 나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일행들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예배시간이 임박한 오전 9시 55분이 돼서야 허겁지겁 주차장에 도착했다. 예배당 주변은 나무들이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으며 마당에 이르러 바라보면 아늑하고 푸근한 맛이 느껴졌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장로님과 여 집사님들 서너 명, 양복을 입은 70대 장로님 한 분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우리 일행은 입구에서 신자들을 안내하는 봉사팀과 간단히 인사를 건넨 후 기념촬영을 마친 후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예배당 내부는 예전보다 더 아담한 순백의 공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미리 기다리며 찬송을 부르는 신자들을 바라보니 눈물이 울컥했다. 발꿈치를 들고 조용히 앞자리로 이동하는데 왠지 신자들 보기에 죄를 지은 것 마냥 민망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념과 사상이 다르다 해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한 가족처럼 느껴졌다. 이런 단순한 이치를 깨닫기까지 우리에게는 긴 시간이 필요했었나 보다. 10시 정각이 되자 백봉일 목사가 등단하며 새로 헌당된 칠골교회당에서의 감격스러운 예배가 시작됐다.
 

   
▲ 아담한 규모로 완공된 칠골교회의 세 번째 본당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칠골교회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있는 교육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예배 교회당 입구에서 백봉일 담임목사와 함께 한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예배 전 교회당 입구에서 칠골교회 장로, 권사들과 함께. [사진제공 - 최재영]

 

   
▲ 예배를 마친 후 미국의 북한 원조단체인 '조선의 그리스도인 벗들(Christian Friends of Korea)' 일행과 함께. [사진제공 - 최재영]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엮는 통일의 대향연, 헌당을 하다
      
그동안 흩어져 살아왔던 우리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하나의 생명 공동체가 되어 하늘과 땅, 남과 북을 하나로 이어주는 은혜와 감격의 제사를 드리는 순간이 됐다. 모두를 하나로 엮어내는 통일의 대향연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공간 속에 내가 앉아 있는 것이다. 예배당은 여전히 순백의 성스러움을 더해 주었고 아담한 공간이라 그런지 포근함마저 더해졌다. 지난 7월에 입당은 했지만 이제야 정식으로 헌당을 하게 된 것에 대해 더욱 감격스러웠다.
      
예배가 시작되자 입례송을 부르는 성가대의 그윽한 찬양은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며 간절한 외마디 기도를 뱉어내게 했다. 여기 앉아있는 동포 신자들이 더 이상은 ‘가짜 신자’라며 손가락질하는 일부 사악한 자들에게 멸시당하거나 조롱당하지 않기를, 그리고 이들의 순수한 신앙을 비아냥거리며 악의적으로 매도하는 자들이 이제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또한 더 이상 같은 민족끼리, 남북의 신자들끼리 오해하고 분열하고 증오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장로의 기도가 시작됐다. 외세에 의해 동족이 서로 원수와 적이 되고,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비통한 우리 역사를 통감하면서, 이제라도 우리가 서로의 아픔을 감싸고 진실 되게 사랑하도록 도와달라는 간곡한 기도내용이었다. 기도를 드리는 도중에 나는 도대체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서로를 껴안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뒤돌아보며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구를 올렸다.
       
칠골교회를 새로 담임한 백봉일 목사는 소박하고 서민적이어서 옆집 아저씨나 동생같이 편안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현 남한의 정국을 한 눈에 꿰고 있었으며 성경 본문과 적절하게 적용하는 예리함도 있었다. 백 목사의 설교가 끝나자 연이어 내가 등단해 감격스런 메시지를 전했다. 엄숙하고 경직된 분위기임을 간파한 내가 백 목사가 나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실수한 것을 화제 삼아 회중석을 향해 조크를 던졌더니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며 분위기가 한결 밝아지고 화기로워졌다.

   
▲ 칠골교회 주일예배 광경. [사진제공 - 최재영]

 

   
▲ 칠골교회 주일 성가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대표기도를 드리는 장로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메시지를 전하고 축도를 하다
         
내가 전한 메시지 내용은 며칠 전 평양 단군릉에서 개최된 개천절 행사에 남, 북, 해외동포 3자가 연합해 동참한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앞으로 우리 조국의 통일도 이와 같이 3자가 주체가 되어 힘을 합쳐야 이룩할 수 있다고 역설했으며 오늘날 기독교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특히 남측과 서방세계는 북한이 종교를 아편으로 보고 있다며 무조건 맹비난한 것을 예로 들었다. 아편 비유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그것은 종교가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민중의 아편이 된다는 뜻인 것이다. 사랑의 종교가 침략의 종교로, 섬김의 종교가 군림의 종교로, 평화의 종교가 잔혹한 종교로, 나눔의 종교가 착취의 종교로, 평등의 종교가 억압의 종교로 둔갑할 때 그 종교는 이미 민중들과 신자들의 피를 말리게 하며 그 사회를 황폐하게 하는 독소가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짧은 메시지를 전한 후 백 목사와 나란히 서서 마지막 찬송을 부르고 예배의 마지막 순서인 축도를 하기 위해 다시 설교단에 올랐다. 축도를 하는데 울컥하는 마음이 들더니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축도 문구마저 헷갈리고 버벅댔다. 모든 예배 순서를 마친 후 칠골교회 측에서는 예외적으로 친교자리를 잠시 마련해 주었다. 그 자리를 통해 그들의 확고한 신앙 의지와 성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칠골교회 신자들은 단순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언젠가는 우리나라를 통일시켜주시고 민족을 구원해 줄 것이라며 막연하게 기다리는 수동적 신앙이 아닌 행동하는 신앙을 갈구했다. 그들은 민족 공동체 모두의 생존권 문제를 절실하게 고민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와 현실참여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칠골교회와 봉수교회 신자들은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대한 민족성이 결여된 기독교는 진정한 종교가 될 수 없다며 이구동성으로 강조했다. 칠골교회를 떠나는 나의 마음은 아쉬운 석별의 정 때문에 언어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으로 침통한 표정으로 슬픔에 빠졌다. 우리는 칠골교회나 북의 기독교가 서방세계의 보편적 교회와는 달리 철저히 정치적이며 이미 정치화된 종교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칠골교회와 봉수교회 신자들의 신앙이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든 우리가 그들의 신앙을 왈가왈부할 수 없고 재단할 수 없다.
      
함부로 비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평소 익숙하게 지니고 있는 정서와 상식, 감정과 경험으로 상대를 평가하기 때문에 객관성이 매우 결여되거나 일방적일 때가 많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진리를 향한 인간의 믿음을 특정한 교리나 언어로 제한할 수 없듯이 북한의 기독교 신자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신앙양상과 형태를 우리가 그 어떤 기준으로도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믿음처럼 남과 북의 동포들이 서로를 향한 믿음을 잃지 않을 때 통일은 하루 빨리 앞당겨질 것이다. 하나의 조국을 향한 믿음으로 우리 남과 북의 동포들이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감싸며 마음껏 예배를 드리는 그날을 간절히 고대하며 칠골교회당을 빠져나왔다. (계속)
 

   
▲ 칠골교회에서 메시지를 전하는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칠골교회 담임 백봉일 목사와 예배의 마지막 찬송을 부르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칠골교회에서 축도를 하는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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