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연재 41회부터 총 15회 정도 북한의 기독교 교회를 탐방한 <북한교회 이야기>를 게재합니다. 한국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북한교회에 대해 새로운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 필자 주

 

김일성 주석의 생애와 연관된 교회들
      
필자는 칠골교회를 비롯해 북한 전역의 공식적인 기독교 공동체들에 대한 좀 더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칠골혁명사적관 해설사들의 증언, 북 관료들과 인민들이 알고 있는 ‘수령의 기독교관’을 참조했다. 특히 칠골사적관에 전시된 사료들과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과 어록, 출판물, 생전 인터뷰 자료를 참고했으며 손정도 목사의 차남 손원태 장로와 김형직 선생의 숭실학교 동문인 배민수 목사의 증언을 비롯한 김 주석과 관련된 인물들의 공신력 있는 증언자료들과 북한교회연구가들과 교회사가들의 자료들을 취합하여 칠골교회를 비롯한 북한교회 참관기를 기록하고 있다.
      
우선, 김일성 주석은 유년시절에 만경대 생가 인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 196번지’에 있는 ‘송산교회당’에 모친과 함께 출석했다. 또한 강반석 여사는 결혼 전에도 친정식구들과 함께 출석했던 ‘대동군 용산면’의 ‘하리교회당’을 결혼 후에도 자주 찾아와 예배를 드리곤 했는데 그때 소년 김성주도 모친을 따라 함께 다녔다. 세월이 흐른 후 부친 김형직 선생이 일제에 의해 투옥됐다가 석방된 후 온 가족이 중국 팔도구에서 조선으로 건너와 지금의 양강도 포평지역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포평교회당’을 열심히 다녔으며 포평교회는 부모님을 비롯해 작은아버지와 동생들까지 모두 함께 신앙생활을 했고 김 주석의 부모는 이 교회당을 주민들의 항일교육 장소로도 활용했다.
       
또한 부친 사후에는 중국 길림으로 건너가 육문중학에 편입학하면서 손정도 목사 사택에 하숙하며 손 목사가 목회하는 ‘길림조선인교회’를 3년여에 걸쳐 출석하며 교회생활을 했다. 이때 성가대장(연예선전단)과 주일학교 교사(반사)를 하였으며 동시에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학습을 시작했다. 손 목사와 길림조선인교회, 육문중학교는 청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변화하는 성장기의 김성주(김일성 주석)가 초기 공산주의 이론을 형성하게 했고 나아가 혁명운동의 요람이 되도록 했다. 특히 손 목사는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며 학생운동을 전개하던 김성주를 아들처럼 여기며 적극 포용하고 목회적인 차원에서 전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노년의 김일성 주석은 봉수교회 건립에 이어 칠골교회가 설립되도록 전적인 기여를 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평양시 광복거리에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이곳 칠골지역 아파트타운으로 이주한 시민들 중에 가정교회와 처소교회에서 신앙생활하던 신자들이 몰려들면서 당국에 교회당 건축의 필요성에 대한 요청과 민원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특히 김 주석이 유년시절에 출석했던 하리교회와 송산교회 터를 복원하는 의미로 현재의 칠골교회 장소에 건축하도록 최종 승인했으며 그 실무역할은 당시 김정일 비서(국방위원장)가 직접 관여해 준공할 때까지 진두지휘를 했다.       

▲ 칠골교회가 위치한 평양 광복거리의 고층아파트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반석공원 타운 입구 모습. 좌측에 칠골교회당, 우측에 칠골혁명사적관이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칠골교회가 위치한 반석공원 타운을 찾다
        
필자는 당국의 특별 배려로 칠골교회당 방문과는 별도로 교회당이 위치한 반석공원 내 전체 시설물을 둘러보기 위해 이곳을 두 차례 참관했다. 그래야만 칠골교회와 관련된 유래와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유년시기 김일성주석의 신앙의 뿌리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칠골교회당이 위치한 곳은 교회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최고의 조경을 갖춘 아름다운 거대한 공원 형태로 조성돼있으며 한가운데는 새로 건설한 1차선 아스팔트길이 깔끔하고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입구의 길가 좌우에는 아름다운 연못이 조성돼 있어 고즈넉한 정취를 풍겼다.
       
‘반석공원’이라고도 불리는 타운 입구에 들어서면 좌측에는 ‘칠골교회당’이, 우측에는 ‘칠골혁명사적관’이 길 좌우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사적관 앞 연못에 핀 연꽃들은 볼수록 매혹적으로 보였다. 칠골교회당을 찾아가려면 입구 좌측으로 들어가 우거진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조금 지나면 막다른 길 우측에 교회정문이 나온다. 칠골교회당 뒷편으로는 고층 아파트군이 둘러있었으나 매우 은밀하면서도 아늑한 터에 조성돼있어 큰 도로변이나 외부에서는 교회당 건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칠골사적관 내에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 생애 시작과 평양 입성까지의 과정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사진들과 함께 전시돼 있고 김 주석에게 영향을 미쳤던 관련 인물들의 자료들도 있었다. 기독교계통의 학교인 창덕학교 설립자이자 교감으로 재직했던 김 주석의 외조부 강돈욱(康敦煜) 장로와 외가 가문의 인물들의 자료들도 많이 전시되었으며, 특히 기독교 신앙인으로 당대의 선각자이자 교육가로서 명성이 있던 김 주석의 외조부 강돈욱 장로의 업적이 돋보였다. 이를 뒷받침하듯 1927년 7월 4일자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강서지역의 교육가 강돈욱’에 관한 신문기사가 스크랩되어 전시되었다. 또한 김 주석의 외종조부이자 창덕학교 스승이었던 강양욱(康良煜) 목사가 제자인 김일성 주석에게 세로로 쓴 장문의 편지 원본 등도 전시되어 있는 등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될 만한 수많은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궁금증이 많던 나는 큰 수확을 거뒀다.
        
사적관을 나와 건물 뒷편 아스팔트길을 따라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막다른 길이 나오며 정 중앙에는 김 주석의 모친 강반석 여사의 생가가 나온다. 생가 구조는 만경대에 있는 김 주석 생가와는 또 다른 형태의 초가 주택이었으며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경대 생가와는 달리 외국방문객들과 일반 참배객들의 발길이 간간히 보이긴 했으나 다소 한적한 편이었다. 고층 아파트단지와 빌딩들에 둘러싸인 공원의 생가 방안에는 외조부와 외삼촌들의 사진들과 함께 당시 사용한 가재도구들이 원형대로 보존돼 있었고 소년 김성주가 2년간 기거했던 공부방도 특별해 보였다. 생가 바로 옆 화강암으로 제작된 기념 안내석에는 김 주석이 이곳에 2년 동안 살면서 창덕학교를 다녔음을 기록하고 있었다. 또한 생가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조형물은 강반석 여사의 거대한 청동 좌상이었다.

▲ 기존 칠골교회당 정문 앞 건너편에 있는 오래된 또 다른 교회당 건물.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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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골교회당 정문 입구의 가로수와 담장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고층 아파트에 둘러싸인 초창기의 칠골교회당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재건축 이전의 칠골교회 예배당 내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기독교 학교인 창덕소학교에 편입한 소년 김성주
      
마지막으로 차량을 타고 타운의 가장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창덕소학교(彰德學校)가 나온다. 이 학교는 김 주석의 외조부 강돈욱 장로가 출석하며 시무하던 하리교회 측에서 설립한 미션계통의 민족학교로서 김 주석이 초등학교시절 2년을 다녔던 학교이다. 그 당시 학교 교무실과 교실은 물론 소년 김성주 학생이 사용하던 책상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창덕학교는 현재도 엘리트 남녀학생들을 모아 공부시키는 평양의 대표적인 모범학교로 운영되고 있으며 1923년도 당시의 학교 앞에는 소년 김성주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소년 김성주는 중국 팔도구의 부친을 떠나 열나흘만인 1923년 3월 29일, 해질 무렵에 만경대 고향집에 도착해 조부모의 영접을 받고 그곳에서 며칠을 머물렀다고 한다. 생가에서 며칠을 머물던 김성주는 외할아버지 강돈욱 장로가 주도해 설립한 창덕학교를 다니기 위해 칠골 외가로 거주지를 옮겼다. 당시 학교 교감이던 강돈욱 장로와 담임을 맡게 될 외종조부 강량욱 선생의 도움으로 5학년에 편입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입학을 한 이후에는 칠골 외가로 아예 거처를 옮겨 학교를 다녔으며 외가는 무장투쟁을 하던 외삼촌 강진석이 옥고를 치루는 상태였고 집안에 여러 어려움이 많았으나 외조부와 어른들은 외손자가 학업에 열중하도록 뒷바라지를 잘해 주었다고 한다. 
      
김성주를 담임한 강량욱 선생은 학비를 댈 수 없어 숭실학교를 중퇴한 상태였다고 한다. 강량욱은 자신이 담임한 학급에 편입된 김성주가 공부하는 2년 동안 항일정신과 애국애족의 투철한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등 애국적인 영향과 감화력을 끼쳤으며 공부하는 동안 의미 있는 여러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칠골에서 두 해를 보내며 창덕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중국에서 독립운동 하던 아버지 김형직이 또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는 급한 전갈을 외조부로부터 듣고 일제에 분노하는 마음으로 다음 날 중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주변사람들은 졸업식이라도 하고 떠나든지 날씨라도 풀리거든 떠나라고 만류를 했으나 결심을 꺾지 않고 결국 다음날 작은 외삼촌 강용석을 비롯한 외가 어른들과 친구 강윤범의 전송을 받으면서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졸업식을 마다하고 일제의 압제에 대항하기 위해 의분을 품었던 소년 김성주가 공부했던 교실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교실과 학교에는 소년 김성주가 친구들과 활기차게 뛰어놀던 모습과 체취가 서려있는 듯 했다. 엘리트 학생들 위주로 공부하는 학교라서 그런지 캠퍼스 안은 향학 열기로 적막감마저 감돌았으며 몇몇 학생들과 선생들만 간간히 왕래하는 모습만 눈에 띄었다. 특히 캠퍼스 정문에 들어서면 좌측 언덕기슭에 공덕비 두 개가 눈에 띄는데 이 비석들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던 것이라고 한다. 비석의 주인공들은 당시 관서지방의 교육계에 공헌한 것을 기념한 김 주석의 외조부 형제인 강돈욱 장로(학교운영)와 그의 형 강성욱(서당운영)의 공덕을 기리는 기적비(공덕비)로서 사이좋게 나란히 세워져있었다.

▲ 칠골혁명사적관 앞에서 해설사와 함께한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사적관에는 김 주석 외조부 강돈욱 장로가 교육가로서 동아일보에 보도된 기사(1927.7.4.)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하리(下里)교회 터에 세워진 칠골교회당
       
김일성 주석이 자라던 만경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칠골에는 외할아버지 강돈욱 장로가 설립한 미션계통의 창덕소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 캠퍼스에서 약 100여 미터 정도 큰길가 방향으로 올라가면 ‘하리’라는 동네에 교회당이 있었다. ‘하리’라는 한자이름은 말 그대로 ‘아랫마을’이란 뜻이다. 따라서 해방 전엔 이북지역에도 ‘하리’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과 동네가 많았으며 실제로 ‘하리교회’라는 교회이름들이 여러 개 있었다.
       
심지어 평안남도에만 ‘하리교회’가 네 개 있었는데 ‘대동군 용산면’, ‘대동군 용악면’, ‘순천군 순천읍’, ‘강동군 강동면’의 하리교회 등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현재 칠골교회터와 관련된 하리교회는 당시 ‘대동군 용악면’에 있던 하리교회이며, 그것이 현재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동에 건축한 칠골교회당 자리이다.
      
이 칠골동 하리교회는 1899년에 세워졌으며 네 개의 하리교회 중에 가장 먼저 세워졌다. 칠골동의 하리교회를 세운 장본인은 50세가 넘어 전도를 받은 홍신길이며 그가 ‘판동교회(板洞敎會)’에 출석하면서 하리교회가 서서히 설립되기 시작됐다(평양 장대현교회를 1903년까지는 ‘판동교회’, 혹은 ‘널다리교회’라고 불렀다). 홍신길은 자신이 살고 있던 하리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열성적으로 전도해서 열서너 명의 교인을 모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세 칸짜리 초가집을 사들여 하리교회를 세웠으며 이 교회는 훗날 ‘칠동교회(七洞敎會)’로 명칭이 바뀌었다.
       
하리교회를 담임한 교역자들은 김경삼, 김창문, 이재풍, 심익현 등이며 홍신길의 아들 홍성준은 1914년에 하리교회의 초대장로가 되었으며 특히 하리교회 장로들 가운데는 강기수(康紀守), 강관욱(康寬煜), 등은 김일성 주석의 외가 친척어른들이며, 특히 김 주석의 외종조부이자 창덕학교 담임선생이었던 강량욱 목사도 평신도 시절에는 한 동안 하리교회에 출석하였다.
      
어떤 사유인지 몰라도 강양욱은 평신도 시절에 일가친척들이 출석하는 하리교회에 함께 다니지 않고 좀 거리가 떨어진 ‘소룡리(小龍里)교회’에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 후 강량욱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으며 뛰어난 부흥목사로 맹활약을 했으며 사경회를 가장 잘하는 목회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당시 ‘제2의 김익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해방 후 귀국한 김일성 주석은 강량욱 목사와 함께 토지개혁에 앞장섰으며 그 후 조선기독교도연맹(현재 조그련의 전신)을 조직해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고 국가 부주석을 두 번 역임했다. 특히 이 교회는 김일성 주석의 외조부인 강돈욱 장로가 시무하고 있었으며 그는 엄격한 신앙을 가진 강서지방의 교육자로서 하리교회를 통해 창덕학교를 세우는 일을 직접 주도했으며 교장직을 맡지 않고 교감을 맡았다. 이처럼 하리교회는 유년시기 김성주의 외가 어른들과 일가친척들이 대거 출석한 가문의 문중교회와도 같은 교회였기 때문에 모친 강반석은 출가 후에도 어린 김성주(김일성 주석)를 데리고 자주 출석한 것이다.
 
만경대구역 칠골1동에 세워진 칠골교회당
      
지금까지 언급된 강씨 문중들의 성(姓)씨는 한문으로 ‘편안할 강(康)’이며, 이들이 모여 살던 마을을 ‘강촌(康村)마을’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을 ‘칠골 강씨’라고 불렀다. 그러나 칠골사적관의 해설사는 필자에게 김 주석 외가의 성씨와 관련하여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 상식과는 다른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칠골 강씨 족보와 분파’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여 필자를 당혹하게 했으나 나는 북측에서 알려주는 자료가 더 정확하고 신빙성 있다고 느껴졌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의하면 김 주석의 모친 강반석 여사는 만경대로 시집을 온 후에도 친정식구들이 다니는 하리교회에 자주 출석했으며 소년 김성주도 자연스레 모친을 따라 간 것으로 기록됐다. 원래 하리교회는 강반석의 친정 식구들과 종친들이 대다수 다니고 있는 교회이며 처녀 때부터 다닌 교회라서 인간관계도 얽혀있고 매우 친근한 교회였다. 그러나 평소 소년 김성주가 주로 다닌 교회는 집근처에 있는 송산교회였다.
       
옛부터 평양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룡악산에서 발원한 일곱 개의 골짜기들 중에서 ‘일곱 번째 골짜기’라는 뜻의 ‘칠골’은 행정구역상 만경대구역이며 부근에는 현재 광복1동, 광복2동과 당상1동, 당상2동이 인접해 있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현재 칠골교회가 위치한 곳은 칠골1동, 칠골2동, 칠골3동이 둘러있으며 칠골교회당은 사진에서 보듯 칠골1동에 자리 하고 있다.
       
1992년 11월 28일에 헌당식을 마친 칠골교회당이 이곳에 세워진 직접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광복거리 새 아파트촌으로 이주한 주민들 중에 가정교회나 처소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던 신자들이 제기한 교회당 건축 민원 요청을 접수한 김일성 주석이 1989년 5월, 김정일 비서를 대동하고 광복거리를 현지지도 하면서 시작됐다.
      
이때 김 주석은 자신이 유년시절 다녔던 교회들을 떠올리며 “칠골 창덕학교 뒤에 교회가 있었는데 만일 교인들이 요구하면 그 자리에 교회당을 하나 세워도 좋겠다”라고 최종 승인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후 하리교회가 있던 자리를 물색해 적당한 장소에 건축하면서 현재의 지명을 적용해  ‘칠골교회’라 명명한 것이다. 당시 현지지도에 동행한 김정일 비서(국방위원장)가 교시를 받고 칠골교회당 건축을 진두지휘했다. 김정일 비서는 건축과정을 지도하던 중, 건축공법상 하자를 발견해 거의 완공 단계에 있던 예배당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도록 했다. 그런 연유로 89년 말에 시작한 공사가 92년 말이 돼서야 완공되어 3년의 기간이 소요될 정도로 김정일 비서의 세심한 배려와 지도가 있었다.

▲ 김일성 주석의 모친 강반석 여사의 생가 앞에 선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소년 김성주가 외가에 2년간 거주하며 공부하던 방. [사진제공 - 최재영]

 

▲ 강반석 여사 생가의 곁방에 걸려 있는 김주석의 외삼촌들(강진석, 강용석 등) 사진. [사진제공 - 최재영]

 

▲ 강반석 여사 생가의 안방에 걸려 있는 외조부 내외(강돈욱, 위돈신) 사진. 가운데가 강반석 여사. [사진제공 - 최재영]

 

▲ 생가 옆에 세워진 강반석 여사의 청동 좌상. [사진제공 - 최재영]


칠골교회와 관련된 낭설들
       
남측에서는 흔히들 칠골교회를 가리켜 ‘반석교회’라고도 달리 부른다. 그러나 필자가 여러 차례 확인한 결과 북측 관계자들은 전혀 근거가 없다며 일축했다. 칠골교회 담임이었던 류병철목 사나 황시천 목사는 “남쪽에서는 칠골교회가 수령님의 어머님을 기념해 세운 것이라 해서 반석교회라고도 부르는 것 같은데 우리 수령님은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김 주석이 자신의 모친을 기념하기 위해 그 교회를 세우도록 지시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앞에 언급했듯 다만 유년시절 모친과 교회를 다녔던 추억을 언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친의 이름과는 상관없이 동네 이름이 칠골이어서 칠골교회로 명명했을 뿐이며 가정교회를 다니는 인민들의 민원에 의해 건축된 것이다.
      
원래 이 하리교회는 6.25전쟁 이전에는 300여 명 정도의 신자들이 출석했으나 전쟁 중에 교회당이 파괴되고 교인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삼삼오오 분산된 교인들은 각자 가정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며 처소교회 신앙을 유지해 오다가 이곳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서며 옛날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며 교회당 필요성이 제기되어 김 주석의 최종 재가로 현재의 칠골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이북은 아무리 수령이라 해도 사적인 이유에 의해 마음대로 종교시설물 건축을 명령하는 사회구조가 아니다.
      
또한 ‘강반석’이라는 이름에 대한 오해 부분이다. 원래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반석(磐石)’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12제자 중에 한명인 베드로를 의미한다. 따라서 김 주석의 모친 강반석은 ‘반석(磐石)’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흔히 알려졌으나 실상은 다르다. 강반석은 부친 강돈욱과 모친 위돈신 사이에 태어났고 오빠 강진석(康晋锡), 강용석(康用锡)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이름 돌림자가 모두 ‘주석 석(锡)’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康磐石’이 아닌 ‘康磐锡’이다. 그러나 그 후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확고하게 ‘磐石’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강반석이 태어날 무렵에는 조선 땅과 이북지역에 기독교 복음이 막 전래될 초기였기 때문에 자녀를 낳으면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을 짓는 보편작인 시기가 아니었다. 강반석의 부모가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의미하여 작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의 민간에서 흔히 불리는 토속적인 이름을 지어주었다. 필자가 해설사와 인근 고령의 주민들에게 확인한 결과, 강반석 여사의 출생 당시부터 불렸던 이름은 ‘동쪽 작은녀’였으며 강반석은 호적상의 이름이었다. 당시 집안 식구들과 동네 사람들은 강반석이 성장할 때까지 ‘동쪽 작은녀’라고 불렀으며 이런 류의 이름은 무지랭이 같았던 평범한 민초들에게 흔하게 사용된 이름이었다.

▲ 소년 김성주가 편입해 2년간 다닌 창덕소학교의 현재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소년 김성주가 공부한 교실 앞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소년 김성주가 공부했던 당시의 창덕학교 교사가 보존되어 있다(좌측 문이 교무실, 우측 문이 교실). [사진제공 - 최재영]

 

▲ 년 김성주가 공부했던 교실과 책상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김일성 주석의 외조부 형제(강돈욱, 강성욱)의 공적을 기리는 기적비가 학교 내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소년시절 김성주 모자(母子)가 출석한 송산교회
        
한편 유년기의 김성주가 평소 다녔던 교회는 1899년 설립된 ‘송산교회’로서 당시 약 300여명 교인들이 출석하는 교회였다. 원래 송산교회는 김일성이 태어난 만경대 인근에  1900년 3월 1일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신흥리(新興里)교회’의 브랜치교회(기도처소)로 세워졌으며 교회가 위치한 지역이 ‘남리(南里)’였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남리교회’라고 불렀다. 바로 이 남리는 김일성 주석의 출생지였다. 흔히 만경대로 알려진 생가의 주소는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였다. 그 후 남리교회는 1909년에 고개 넘어 인근마을인 ‘송산리’에 여덟 칸짜리 교회당을 짓고 이전하면서 그때부터 교회 이름을 ‘송산교회’라고 불렀던 것이다. 남리교회 출신 김형직과 하리교회 출신 강반석이 결혼하여 이 송산교회를 다닌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1권을 보면 “나는 어머니가 례배당에 갈 때에만 송산으로 다니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며 “엄숙한 종교의식과 목사의 단조로운 설교에 싫증을 느껴 예배당에 다니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당시 송산교회를 담임했던 교역자가 김성호(金聲瑚) 목사였다. 송산교회 주일학교는 어른들을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공책 등을 나눠주었는데 어린 나이의 김성주에게는 이런 기억들도 또렷이 남아 있었다.
        
남리교회에 다니던 부친 김형직과 하리교회를 다니던 모친 강반석은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른 후 만경대에서 신접살림을 차렸고 1912년에 김성주를 낳았다. 송산교회는 만경대 생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며 유년의 김성주는 부모를 따라 줄곧 송산교회를 다니다가 다섯 살 되던 해 봄에 ‘평안남도 강동군 봉화리’로 이사를 갔다. 회고록에는 1917년까지 만경대에 살면서 때때로 송산교회에 출석한 것을 언급한 것인데 그 때 당시 담임이 바로 김성호 목사였던 것이다. 그는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1913년에 졸업(제6회)했고 조사시절을 거쳐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송산교회를 담임했으며 김 주석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단조로운 설교”를 했던 주인공이다.
       
소년 김성주가 출석하던 당시의 송산교회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 196번지’에 위치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이다. 현재 송산교회가 있던 그 자리는 인민군 장교들을 재교육하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회고록에는 “송산이라면 지금의 군사대학이 있는 곳인데 거기에 장로교 계통의 례배당이 하나 있었다”라고 기록했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군사대학이다. 또한 1921년에 송산교회를 담임했던 베어드(W. M. Baird, 배위량 선교사) 목사는 훗날 김 주석의 부친 김형직 선생이 다니게 되는 평양 숭실대학을 설립했다. (계속)

▲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캠퍼스의 일부 모습. 이곳이 김 주석이 유년에 다녔던 송산교회당이 있던 장소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송산교회 담임목사였던 베어드 선교사는 평양숭실학교를 설립했으며 김 주석의 부친 김형직은 이 학교를 다녔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만경대 생가의 해설사와 함께 한 필자. 이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송산교회가 있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측면에서 바라본 만경대 생가 모습. 소년 김성주는 이곳에서 모친과 함께 송산교회를 다녔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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