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마식령은 조선 최초의 스키장이 건설된 곳

10월 18일(토) 맑음. 북한 방문 15일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스키장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바람이 차다. 이곳 마식령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원산시 신풍리에 속한다. 신풍리는 1920년대에 조선 최초의 스키장이 건설된 곳이다. 1880년, 일제의 압박에 의해 원산항이 개항하면서 원산에 왜놈 거리가 생겨나고, 원산 앞바다인 동해를 건너 일본 상품이 밀려들면서 눈썰매·스키 같은 것이 처음 들어왔다. 그렇게 일찍부터 신풍리 언덕에 스키장이 생겨나고, 나중에는 여기서 멀지 않은 석왕사 아래 쪽 삼방이란 곳에 자연 슬로프의 제대로 된 스키장까지 생겨났다. 원산 출신 소설가 이호철 선생의 글에 나온 얘기다.

2014년 12월 31일 마식령스키장에서 개장 행사가 있었다. 북한에 현대식 스키장이 건설된 것이다. 김정은이 직접 리프트를 타면서 스키장을 시찰했다고 한다.

▲ **2 250 - 뒤쪽에서 본 호텔 부근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10월 18일? 어, 오늘이 내 생일이네

산책을 다녀온 다음 방에 들어와 수첩에 날짜를 적다보니 10월 18일. 어, 오늘이 내 생일이다. 아침을 먹으로 식당에 내려갔다. 어떻게 알았는지 생일 케익이 준비되어 있다. 평양에 온 다음날 일요일에 나를 성당으로 안내 했듯이, 제출 서류에 적힌 내 인적사항에서 생일임을 알았을 성 싶다. 산나물 토장국에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다.
 
평양을 향해 출발한다. 여기서 평양까지는 189km, 자동차로 두 시간쯤 걸린다고 한다. 금강산과 함흥이 각각 131km인데 역시 두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한다. 도로사정이 나아지면 금방 오갈 수 있는 멀지 않는 거리다. 원산은 16km 15분 거리.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원산, 금강산 지역을 관광지구로 개발한다니, 겨울 스포츠인 마식령 스키장까지 포함하여 사계절 내내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 참사가 계응상이란 분을 아느냐고 묻는다. 누에고치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린 세계적인 유전학자이자 잠학자라고 한다. 누에에서 색깔 있는 실을 얻을 수 있게 한 학자라고 했다. 돌아온 다음 자료를 찾아보았다. 계응상(1893~1967)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서울보성중학교, 일본 도후쿠대학, 동경고등잠사학교를 졸업했다. 유전학적 자료에 기초하여 누에고치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리는데 기여했다. 북한 최초의 농학박사이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리원대학을 계응상대학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가만있자, 이 분이 평북 정주 출신이라 했지. 그리고 보니 정주 출신 유명 인사가 한둘이 아니다. 이번에 생가를 방문하고 싶었던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교주가 정주출신이다. 시인 백석, 춘원 이광수. 그리고 조선일보 방우영 창업주도 정주출신이라 했다. 그 작은 고을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 지역이 선조 대대로 학향이며 마을 서당이 전국에서 제일 많은 고을이었다고 한다. 교육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이 틀림이 없다.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

길가 전망대에서 잠깐 쉬어가기로 한다.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첩첩이 산이다. 푸른 하늘 아래 산마다 단풍이 들어 제각기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험한 산을 요리조리 빙빙 돌아 올라온 한 줄기 하얀 선. 방금 우리가 왔던 길이다. 그 길 위로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간다. 한가한 저 길에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달려갈 때가 언제쯤일까 생각하다가, 그게 꼭 바람직한 모습일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어진다.   
 
눈을 돌려 북쪽을 보니 산자락 낮은 곳은 물론 가파른 중턱까지도 밭을 일구어 놓았다. 사람이 올라가기도 힘들어 보이는 꽤 높은 곳이다. 저 절벽 같은 언덕에 무엇을 심어 가꾸었을까. 큰비라도 쏟아지면 견뎌내기나 할까. 걱정이 된다.   
 
어제처럼 산삼을 사라고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 사주는 사람이 있으니 저렇게 팔려고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시 출발. 오는 길에 들렸던 신평휴게소에 들렀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이 업은 아주머니가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간다. 아주머니를 따라 다리를 건너가 보니 주유소가 나온다. 자동차는 보이지 않는다. 운행하는 차가 많지 않으니 주유소에 들르는 차도 당연히 드물 성싶다.
 
호수 위에 다리가 놓여 있고, 맑은 물 위에 단풍진 산 그림자가 내려와 발을 씻고 있다. 다리 위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간다. 트럭 위에 사람들이 한가득 타고 간다. 트럭 난간 끄트머리에 앉아 출렁거리며 가는 네댓 사람이 위태위태해 보인다.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내가 손을 흔들었더니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 높은 산 위까지 개간을 해서 밭을 일구어 놓았다. [사진제공-정찬열]

 

▲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평양-원산 도로. [사진제공-정찬열]

 

▲ 다리 위로 트럭한대가 지나간다 - 사람이 가득 탔다. [사진제공-정찬열]

 

▲ 신평휴게소 옆 주유소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개건된 고구려 시조릉, 동명왕릉을 참관하다

휴게소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다음, 다시 평양 원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다. 동명왕릉 3km 이정표가 보이더니 이내 동명왕릉에 도착한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동이다. 전에는 평남 중화군 진파리에 속하던 곳이다. 이 부근이 바로 고고학에서 유명한 ‘진파리 고분군’이 산재해 있는 지역이다.
 
대소인원 계하마(大小人員 堦下馬.)라고 쓴, 작은 비석 하나가 연꽃무늬 돌받침 위에 얹혀있다. 하마비(下馬碑)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말에서 내려라’ 는 뜻이다. 요즈음 말로 한다면 모두 차에서 내려 걸어가라, 는 정도의 의미일 성싶다. 이 자그마한 비석 앞에서 모든 문무백관들이 말에서 내려 걸어 올라갔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동명왕릉 오르는 길 오른편으로 건물이 보여 무슨 집이냐고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정능사 절이라고 한다. 왕의 극락왕생을 빌고 왕능을 지키기 위한 절이란다.
 
능에 도달하기 전, 안내원이 왼쪽 건물로 안내한다.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의 건국설화에 나온 이야기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안내원이 그림을 따라가며 차례로 설명을 한다. 고주몽의 아버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였다 주몽은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는 활쏘기의 명수였다. 주몽은 마구간 일을 하며 구박받고 살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탈출시키려고 준마의 혓바닥에 바늘을 꽂아 놓았다. 예상대로 말이 비쩍 말라 쓸모없게 되자 주몽의 차지가 되었다. 주몽은 말을 타고 달아났다. 추격병에 잡히려 할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주어 살아났다. 마침내 주몽은 졸본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국 창건을 선포하니 때는 기원전 277년이었다. 주몽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건물을 나와 능쪽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안내원이 “이 능은 1993년 5월 14일 개건했다”고 안내한다. 복원이 아니라 개건이라는 말이다. 옛 모습대로 살린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입장에서 새로 세운 것이라는 얘기였다.
 
동명왕릉 앞에 섰다. 규모가 대단하다. 기단의 한 변 길이가 31미터이고 봉분의 높이는 11.5미터라고 했다. 능 앞에 “이 유적은 주체93(2004)년 세계 문화유적으로 등록되었다”는 내용이 유네스코 문양과 함께 자그마한 돌에 새겨져 있다.
 
능 주변에 오래된 소나무가 빙 둘러 있어 왕능의 기품과 위엄을 더해주고 있다. 해묵은 노송이 수백그루다. 소나무 수령이 어느 정도이며 몇 그루나 심어져 있냐고 물었더니 수령 5백년 정도이며 1,600그루 정도 된다고 한다. 1,600그루라니, 거대한 소나무 숲이다. 능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소나무들이 능을 향해 가지를 뻗쳐있다. 그 모습을 가리키면서 안내원이 웃으면서 말한다.
 
“보십시오. 소나무들이 왕릉을 향해 절을 하고 있지 않습네까.”
  
바람 한 줄기 숲을 흔들고 지나간다. 소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는 특별하다. 저 바람 소리에 수천 년 역사가 스며있다. 
 
돌아온 다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4>를 읽어보았다. 그는 이곳을 방문한 다음, “동명왕릉은 시조의 능다운 위용과 고구려 고분다운 힘이 있었다.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부여 능산리의 아담한 고분, 경주 서약동의 화려한 고분과는 달리 굳세 보였다”고 기록했다.
 
북한은 이곳 동명왕릉을 1993년에 개관한 다음 단군릉을 이듬해인 1994년에 개관한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왜 그렇게 시조릉 개건에 열중했을까. 유홍준은 같은 책에서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의 장정신 관장이 대담 중에 “주체를 올바로 세우는 뜻에서 3대 시조릉에 대한 개건사업을 전개했다”고 한 말의 행간에서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고 썼다.     
 
능 앞쪽을 바라보니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있다. 안내원과 함께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왕릉 앞 소나무 숲속에서 황소 대여섯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암소가 순한 눈망울을 굴리며 풀을 뜯고, 저만치 송아지 한 마리가 낯선 길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랜만에 소를 가까이서 보았던지라 암소를 만져보려고 다가가는데, 옆에 서 있던 고삐에 매인 황소가 뿔 달린 머리를 숙이며 공격 자세를 취한다. 수컷의 본능이다. 멈칫하여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둔중한 몸을 부르르 떤 다음, 긴장이 풀린 듯 먼 산을 바라본다. 씩씩거리며 논밭을 갈아엎던 시절을 그리는지도 모르겠다.

▲ 대소인원계하마(大小人員堦下馬). 표지석. [사진제공-정찬열]

 

▲ 고주몽의 건국설화 그림. [사진제공-정찬열]

 

▲ 동명왕릉 - 기단의 한 변 길이가 31미터이고 봉분의 높이는 11.5미터란다. [사진제공-정찬열]

 

▲ 동명왕릉 주변의 소나무 숲. [사진제공-정찬열]

해외동포 애국자묘 참관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애국릉이 있다고 한다. 걸어서 10여분 거리라고 했다. 차를 타고오니 금방이다. ‘해외동포 애국자묘’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묘역의 넓이는 6정보(약 5만9천㎡), 1988년 조성되었다고 한다. 김 참사가 안내원을 찾았으나 마침 부재중인 모양이다. 
 
현판이 걸린 정문을 통과해 올라가니 줄지어 비석이 서있다. 묘비에 고인의 사진과 생몰연대가 새겨져 있다. 개인용, 부부용, 가족용 등 세 가지 형태의 묘로 조성되어있으며, 재일 총련, 재중동포, 재미동포 등 4백여 명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곳에 묻힐 수 있냐고 김 참사에게 물었다. 해외동포로서 조국을 위해 일한 공로가 인정되면 누구라고 묻힐 수 있다고 한다. 노력영웅, 김일성훈장, 조국통일상, 등 수상자와 공화국 교수, 박사, 인민예술가,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은 해외동포들이 안장됐다고 한다. 재미동포 출판인 김병주 선생도 묻혀 있다고 했다.  
 
앞쪽을 바라보니 제법 넓은 들판이다. 다른 나라에 선례가 있는지 모르지만, 해외동포를 위한 묘역을 따로 마련하는 일은 흔치 않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묘역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방아깨비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 간다. 조금 있으려니 메뚜기가 날아와 자동차 앞 범퍼 위에 멈춘다. 이놈들을 본 지 40년은 넘었을 성 싶다.  청정지역이라는 증거다. 
 
부근 옥수수를 베어낸 밭에 소떼를 놓아먹이고 있다. 소는 널브러진 옥수수 잎을 씹으며 이따금 꼬리를 흔들어 파리를 쫒고 있다. 한가롭게 되새김하고 있는 저놈들은 인간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는 성 싶다. 
 
길가 밭둑에 원두막이 서있다. 자동차를 타고가면서 여러 번 원두막을 보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밭둑에 높고 낮은 저런 모양의 원두막이 있었다. 남쪽의 원두막은 주인이 수박이나 참외밭을 지키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세우는 거지만, 이곳에서 원두막을 세우는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나뭇가지를 얽어 바닥을 깔았다. 집을 엮어 주위를 둘러친 다음 지붕은 옥수수대로 덮었다. 원두막 앞에 가을걷이가 끝난 콩밭, 그리고 남새밭이 보인다. 저 원두막이 들판에 널려있는 곡식을 지키기 위한 것은 아닐 테고, 농부들이 땀을 식히거나 음식을 먹는 장소가 아닐까싶다. 아니면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좀 다른 얘기지만 남한을 걸어서 종단할 때, 어느 지방을 지나는데 “농산물 빈집털이 빈번발생 외부차량 번호단속 양해바람 - 금계리 주민일동 -” 이라고 쓴 배너를 본 적이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농촌을 돌아다니며 추수한 농작물을 훔쳐가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였다. 농부들이 일 년 동안 뼈 빠지게 지은 농작물을 밤새 훔쳐가는 못된 X이 있다니...     

▲ 해외동포 애국자묘, 정문. [사진제공-정찬열]

 

▲ 자동차 범퍼 위에 날아와 멈춘 메뚜기. [사진제공-정찬열]

 

▲ 옥수수 베어낸 밭에 소떼를 놓아먹이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길가 밭둑에 세워진 원두막. [사진제공-정찬열]

 

▲ 평양-원산 간 고속도로변에 있는 ‘애국림’. [사진제공-정찬열]

 

신작로와 관련된 아련한 풍경이 떠오르다 
 
차를 타고 평양을 향해 간다. 들판 저쪽에서 차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다. 비포장도로인 모양이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차가 멈칫 하면 뽀얀 먼지가 차를 감싸곤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오래된 풍경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신작로와 관련된 아련한 추억이다.
 
“고등학생 때 광주에서 자취를 했다. 대부분 자취생들처럼 나도 한 달에 한 번쯤 시골집에 내려가 식량과 반찬거리를 가져왔다.
 
어머니는 쌀과 보리쌀을 반반씩 섞어버린 다음 포대에 담았다. 전에는 쌀과 보리쌀을 따로 담아서 가져갔는데 자취생들이 쌀을 팔아 주전부리를 바꾸어 먹는다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으셨던 모양이다.
 
김치는 옹기그릇에 담아주셨다. 두 달은 넉넉히 먹을 분량이었다. 아버지는 비료 포대를 자른 비닐로 뚜껑을 덮은 다음 가는 새끼를 꼬아 단지를 동여매 주셨다. 그리고 좀 통통한 새끼줄을 골라 식량자루를 메고 갈 멜빵을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를 도와 밀려있던 농사일을 대충 마무리한 다음 점심을 먹고 나서 집을 나섰다. 식량을 짊어지고 김치단지와 된장 그릇은 양손에 들었다. 전깃불도 구경할 수 없고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던 깡촌이라 20리쯤 되는 길을 영암읍까지 걸어 나왔다. 오뉴월 따가운 햇볕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광주행 완행버스를 탔다. 주말 오후라 자취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올망졸망 짐도 많았다. 운전사 옆자리 엔진 위의 네모진 공간에 김치단지와 식량포대를 올려놓았다. 그곳은 짐을 싣는 곳이었다. 엔진이 달궈지면 따끈따끈해져 추운 날이면 사람들이 앉고 싶어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버스는 출발부터 만원이었다. 그렇지만 신작로에서 사람들이 손을 들 때마다 계속 태웠다. 가다 서고 가다 서고 손님은 점점 많아져갔고, 내 짐 위로 다른 짐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차장은 사람을 계속 밀어 넣었다. 문을 닫지 못한 채 차장이 아슬아슬하게 창문에 매달려 가기도 했다. 사람 사이에 끼어 숨쉬기가 거북했지만, 운전사가 급정거를 하고 사람이 한 번 앞뒤로 쏠리고 나면 숨통이 좀 트이곤 했다. 
 
자갈 깔린 신작로를 따라 버스가 지나가면 바퀴에 치인 자갈이 멀리 튕겨 나가곤 했다. 움푹 팬 길을 차가 속력을 내고 지날 때면 버스가 천장 높게 뛰었다. 사람도 짐도 널뛰듯 함께 뛰었다. 그럴 때면 보자기에 싸서 선반에 올려놓은 암탉까지 꼬꼬댁 꼬꼬댁 소리를 질러댔다. "워~매, 간 떨어지것네이, 쪼깐 천천히 갑시다 잉^^.” 누군가 소리를 질렀지만 운전수는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차 안은 땀 냄새로 가득했다. 에어컨도 없는 완행버스라 이런저런 퀴퀴한 냄새도 함께 섞여 비위를 거슬렀다. 어떤 아주머니가 숨 막혀 죽겠다며 문 좀 열라고 해서 창문을 열었는데, 버스가 서면 창문을 통해 먼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먼지 때문에 열렸던 창문이 다시 닫혔다.
  
신작로를 걸어가던 행인들은 버스가 지나면서 만든 먼지를 뒤집어쓰고 먼지 구름이 지나갈 때까지 한참 동안 길가에 몸을 웅크리고 서 있었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갓 쓴 할아버지가 먼지를 피해 저만치 논둑으로 달아나며 손을 휘젓는 모습이 뿌연 차창을 통해 희미하게 보였다.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김치찌개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오뉴월 만원 버스에 번져가는 김치 냄새로 사람들은 코를 막으며 무어라 수근 거렸다.
 
세 시간쯤 걸려 버스는 광주에 도착했다. 상점들이 등을 켜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짐을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깨진 김치단지에서 흐른 김칫국물이 자취생들의 쌀자루를 차례로 적셔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동차 엔진에 달궈진 짐칸 위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맨 밑에 있는 깨진 김치단지가 얼핏 보였다. 운전사가 주인이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물었다. 여러 명의 남녀 학생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짐을 들추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 김치단지였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그냥 놔두고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불쑥 일었다. 순간,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깨진 김치단지를 주섬주섬 주워 담았다. 김치 국물로 범벅된 쌀포대 주인들도 말없이 자기 것을 챙겼다.
 
짐이 많은 아이는 지게꾼을 불러 집으로 가고, 다른 아이들은 시내버스를 타고 갔다. 나는 시골집에서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자취하는 집까지 꽤 먼 길을 식량자루를 짊어지고 걸어서 갔다. 김치 냄새 때문에 시내버스를 타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며칠 동안 왜간장에 마가린을 비벼 먹거나, 멀건 된장국을 끓여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에 들어가 보니 누군가 꽤 많은 김치를 가져다 놓았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이따금 자취생 부엌을 점검(?)해 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김치단지 깨진 얘기를 전해들은 친구들이 반찬을 가져와 주어서 그달은 다른 때보다 더 풍성한 밥상을 차려 먹었다.”

 

평양 노래방에서 놀다
 

▲ 노래방 풍경. [사진제공-정찬열]

참 오래 전 이야기가 되었다. 평양-원산 간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왼쪽 산에 ‘애국림’이라고 돌로 박아 만든 하얀 글씨가 보인다. 해외동포들이 식목해놓은 산이라고 김 참사가 설명해준다. 미국에서도 북한에 나무보내기 운동을 했는데, 보내준 나무를 저 산에 심었던 모양이다. 
 
검문소다. 군인이 검문을 한다. 평양시와 평안북도 경계라고 한다. 차 안을 들여다보는 눈빛이 매섭다. 평소 경험하지 않는 일을 체험할 때 특별한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패인 도로를 고치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평양에 도착했다. 오늘 저녁은 노래방이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자고 한다.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란다.
 
매운탕을 주문했다. 맥주 세 병,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밥이 나오고 술이 나온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노래가 시작된다.
 
도우미 아가씨가 ‘생일 축하합니다’라는 노래를 한 곡 부르고 난 다음, 김 참사와 운전사 방 동무가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다. 지난번 묘향산에서도 들어봤지만 이 사람들의 노래솜씨가 만만치 않다. 노래 곡목집을 가져온다. 책을 들쳐보니 아는 노래가 별로 없다. 반갑습니다, 심장 속에 남는 사람, 등 대부분 북한 노래이고, 남한 노래는 황성옛터, 신라의 달밤, 하숙생 정도다. 하숙생을 골라 한 곡조 부른 다음, 진도아리랑을 불렀다. 
 
노래방 기기는 성능이 좋아 방을 쩡쩡 울린다. 조명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스무 살쯤 되었을까, 유니폼을 입은 도우미 아가씨 두 명이 시중을 든다. 노래솜씨도 일품이다.   
 
9년 전에 왔을 때도 노래방에 들렀는데, 그때 안내원이 “노래방은 외국에서 온 방문객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장소라고” 설명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내 곳곳에 노래방이 생겨났고, 식당과 노래방이 함께 있는 곳이 많아 현지인도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단, 고려호텔 노래방 등 외화만 받는 곳은 현실적으로 내국인은 드나들 수가 없다고 했다. 

노래방은 한국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놀이문화의 한 형태다. 한국은 물론 이곳 미국에도 한인이 밀집한 지역이면 노래방을 흔히 볼 수가 있다. 어울려 놀기 좋아하고, 가무를 즐기는 민족성 때문이리라.
 
10월 18일. 하루가 저물어간다. 금년 생일은 오래 기억될 성 싶다. 아주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보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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