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생프란시스코 체제로 퇴행

광복 70주년, 전후 70년이서서히 저물고 있다. 반드시 역사의 매듭을 풀 것이라는 전후 70주년 당초의 큰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다. 동아시아의 파고는 가라앉지 않고 날로 높아만 가기 때문이다. 미일신동맹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포함한 군사대국주의를 부추기고 중국을 봉쇄하는 등 동북아를 신냉전 3각 구조의 대결장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동북아는 현재 역사전쟁. 영토분쟁, 패권경쟁으로 심각하게 요동치고 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는 우리는 양 패권주의에 둘러싸여, 한반도의 평화통일의 미래를 전혀 기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동아시아가 샌프란시스코 체제(San Francisco System) 로 다시 퇴행하는 것으로 보고 매우 실망하고 있다. 여기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태평양전쟁과 일제식민지전쟁을 종결시킨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동시에 1951년 9월 같은 날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 라는 같은 장소에서 체결된 주일미군의 법적 근거인 ‘미일안보조약’, 상기 두 조약을 모두 합쳐서 지칭한다. 전자에서는 응징의 차원에서 전범국 일본에게 단호한 징벌을 하는 대신에 상당한 특혜와 면책을 부여하였다. 또 후자에서는 일본을 패전국에서 해방시켜 동등한 조약당사국으로 인정, 국제사회로 복귀시켜 미국과 동등하게 군사적 방위에 참여할수 있게 약속한 것이다. 1951년 당시 동아시아 냉전을 의식한 미국은 전범국가 일본을 단호하게 응징하지 못하고 오히려 면죄부를 준 모순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태평양전쟁과 일제식민전쟁을 종결시킨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2.4.28 발효)은 원래 평화조약의 취지와는 전혀 달리 일제의 태평양 전쟁범죄 및 식민지 통치로 고통을 받은 조선인과 타이완 국민들을 조약 서명국에서도 배제시켜 가해자에 대한 엄격한 책임추궁과 피해자에 대한 정당한 배상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조약으로 한국인과 타이완인으로 부터 강한 비판을 받아왔다.

주 원인은 조선인과 타인완인 피해자 문제를 관할대상에서 배제시킨 1946년 극동 전범재판소까지 소급한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11조는 극동 군사재판소의 판결을 수용한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극동 전범재판소 대상에서 배제한 조선인과 타이완인 피해자 문제는 논리상 다루지 않았다. 물론 구체적으로 조선인은 상해 임시정부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았고, 타이완은 중국과의 대표성문제, 그리고 1952년 “日華(일화)평화조약”를 통한 배상 포기조약 등으로 두 나라는 배제되었다고 한다.

샌프란치스코 평화조약, 극동 전범재판소 판결 수용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가해자 처벌의 측면과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으로 둘로 구분한다. 전자 전쟁범죄 면에서는 동 조약 제11조가 규정하고 있고, 후자는 동 조약 제14조가 다루고 있다. 특히 전쟁범죄 책임 문제를 다룬 제11조는 “일본은, 극동 국제군사재판소의 판결 및 일본국 내외의 다른 연합국 전범 재판소의 판결을 수락해(Japan accepts the judgments..), 이를 통해 일본에서 구금되고 있는 일본국민에 이러한 법원이 내린 형을 집행한다. 이러한 구금되고 있는 사람을 사면, 감형, 및 가출옥시키는 권한은, 각 사건에 대해 형을 부과한 1 또는 2 이상의 정부의 결정 및 일본의 권고에 따르는 것 외에는 행사할 수가 없다. 극동 국제 군사재판소가 형을 선고한 사건에 대해서는, 위 사면 권한은, 재판소에 대표자를 낸 정부의 과반수의 결정 및 일본의 권고에 따르는 것 외에는, 행사할 수가 없다.”고 돼 있다.

위 제11조 중 “판결을 수락해”(Japan accepts the judgments..)의 해석이 일본측과 연합국측이 다르다. 일본측은 극동군사재판소 재판을 단순히 인정한다는 뜻이고, 판결의 법적 합법성과 집행성 보장하는 데까지 확대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효력을 발효한 이후, 극동군사재판소 판결집행을 어럽게하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동 재판에 계류된 피고인들의 범죄성의 정도에 상관없이 이들을 사면시켜주어야 한다는 국민적 운동이 강하게 있었다. 이 결과로 일본 공산당을 제외한 일본하원은 1953년 8월 3일 사면투표결의를 통과시켜, A급 전범은 1956년 3월 31일, BC급 전범은 1958년 5월 30일 석방되었다. 둘째는 전범의 아무도 일본 국내법에서 범죄자로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본내 극동재판소 판결을 거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연합국 측은 동 재판소의 구체적 판결을 인정하고 그 집행성을 보장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극동군사재판소 판결에서 다룬 내용만 다루고, 판결에서 제외시킨 조선인과 타이완 피해자 문제는 손해배상대상에서 다루지 않았다. 식민지피해 책임과 관련하여 조선인을 손해배상에서 제외시킨 것은 연합국측이 냉전질서를 의식하여 피해자 조선인과 대만인보다는 가해국인 일본과 일본의 강한 여론을 더 중시한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전쟁과 관련이 없는 나라로 분류된 조선

후자 손해배상문제를 다룬 제14조의 범위는 전쟁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연합국 손해배상문제만 다루었다. 여기서 다루지 않은 전승 국가들은 신청으로 양자조약을 통해 이루어졌다. 평화조약 제14조(a) 에서, “일본은 연합국에게 전쟁기간 중 입힌 손실과 고통에 대해 배상을 해야 한다고 승인한다”라는 내용을 규정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일본이 모든 손해 및 고통에 대해 완전한 배상을 행하기 위해 충분한 자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의 존립 가능한 경제적 유지”라는 한정된 범위내에서 만 배상을 실시한다는 한계 규정을 두었다.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국가의 범위에 대하여 “현재의 영역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고 일본군에 의해 손해를 입은 연합국”으로 제한시켰다. 그 중에서도 희망하는 국가에 한하여 배상 교섭을 하도록 규정하였다. 배상요구를 포기한 국가에 대해서는 배상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미국.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전승국가는 배상청구권 포기를 선언하였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만이 대일 신청 요구를 하여 개별적인 배상협정을 체결하였다. 최대 피해자인 중국, 대만, 남한, 북한은 평화조약의 서명자가 아니므로 강화조약에 입각한 배상청구권을 갖지 못하고, 개별적 교섭에 의하여 전후 처리해결을 도모하였다.

전쟁과 관련이 없는 나라로 분류된 조선은 동 조약 제4조에서 기타 피해를 본 나라끼리 양자 간 해결로 미루어 버려 1965년 한일협정 체제라는 사생아가 탄생하였다. 조선은 제14조 전승국가로서 아니라 제4조 기타 식민지 피해국으로서 양자 간 협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1965년 한일 협정은 이러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틀 속에 갇혀서 한일 간 전쟁과 식민 책임을 해결하는데 일정한 한계를 가졌다. 특히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그 아류인 1965년 한일협정체제 모두 1910년 한일 강제병탄조약의 합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본 역대 정부가 사죄성 발언을 하여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이고 도의적 차원 사죄이고 반성일 따름이지, 식민통치의 불법성과 원천적인 무효를 인정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는 데 있다. 이 뿌리가 최대 피해자인 조선인과 타인완인을 제외시킨 1946년 극동군사재판소 판결과 이를 수용하기로 명시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한계점에서 연유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 극복하는 새로운 동아시아 평화체제 필요

평화조약의 대표적 전형은 1919년 1차 대전 이후 체결된 ‘베르사이유 평화조약’과 2차대전이후 맺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다. 평화조약은 원래 국제법적으로 전쟁상태를 법적으로 종결시키는 전승국과 패전국이라는 두 편 사이의 양자 조약이다. 주요한 기능은 교전국 사이에 전쟁상태의 종결, 우호적인 정상상태 회복, 전쟁으로 야기된 문제 해결이라는 세 가지 기능을 갖는다.

전통적 평화조약 개념 기준에서 볼 때,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전쟁으로 야기된 문제해결” 기준에 매우 미흡하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지난 태평양전쟁과 일제 식민지 통치기간에 가장 큰 피해자인 조선인과 타이완인의 피해자문제에 대한 손해배상 문제 및 손해를 끼친 전쟁범죄자 처벌문제를 제대로 다루어 지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조선인과 타이완인을 재판 원고로서 제외시킨 1946년 극동군사재판소 재판소와 그것을 수용하겠다고 명시한(제11조)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 전략의 틀속에서 갇혀서 1910년 한일 강제병탄조약의 합법성을 사실상 묵인해 준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군위안부문제, 독도문제, 강제징용문제 등 한일간 과거식민지 잔재가 현재 미해결로 남아있는 근본 요인이다. 이것을 해결하기위해서는 전쟁책임과 식민지책임문제를 구명하고 책임지우는 내용을 담는 새로운 아시아 평화공동체체제가 필요하다. 이 새로운 체제만이 근본적으로 한일 간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에서 역사화해, 동아시아 평화. 지역협력이 가능하다. 동아시아 평화는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 침략 전쟁행위를 인정한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은 철저한 아시아인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국제사회와 이웃국가에 임해야한다.

더욱이 현행 국제사회와 국제법은 제국주의 시대와 탈식민지의 찌꺼기를 점차적으로 걷어내고 인도주의와 적극적 평화의 개념을 지향가치로 하는 국가관행과 법원 판례를 내는 추세에 있다. 그런데 최근 미일 신동맹 3각 구조 구측은 시대정신인 동아시아 평화 그리고 한반도 분단체제 극복에 명백히 역행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 냉전과 식민제국주의 면책을 지향하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체제로 복귀이며, 역사의 명백한 퇴행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한계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동아시아 평화체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세계사적 문명사적 대세에 부응하여 광복 70주년 그리고 전후 70주년이 저물기 전에 일본정부와 일본주류사회의 역사인식 제고와 용기있는 정치적 결단을 촉구한다.

 

 

고대 법대 졸업, 서울대 법학석사, 독일 킬대학 법학박사(국제법)

-한국외대 법대 학장, 대외부총장(역임)
-대한국제법학회장, 세계국제법협회(ILA) 한국본부회장.
엠네스티 한국지부 법률가위위회 위원장(역임)
-경실련 통일협회 운영위원장, 통일교욱협의회 상임공동대표,민화협 정책위원장(역임)
-동북아역사재단 제1대 이사,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역임)
-민화협 공동의장, 남북경협국민운동 본부 상임대표, 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동아시아역사네트워크 상임공동대표, SOFA 개정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현재)
-한국외대 명예교수, 네델란드 헤이그 소재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재판관,
대한적십자사 인도법 자문위원, Editor-in-Chief /Korean Yearbook of International Law(현재)

-국제법과 한반도의 현안 이슈들(2015), 한일 역사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공저,2013), 1910년 ‘한일병합협정’의 역사적.국제법적 재조명(공저, 2011),“제3차 핵실험과 국제법적 쟁점 검토”, “안중근 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평가” 등 300여 편 학술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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