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모란그림의 역사는 1000년이 훌쩍 넘었다고 추정한다. 단지 보존이 어려운 회화작품의 특성상 전해지지 않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도화서에서 창작된 [궁중모란도]에는 100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꽃그림은 좀처럼 완성되지 않는다. 그려지고 없어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그렇지만 [궁중모란도]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조형성을 가지고 있다. 조형성뿐만 아니라 ‘생명의 만개(滿開)’라는 보편적 가치도 포함하고 있다.
형식이 완결되었다는 것은 그 속의 내용도 함께 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용 없이 형식만 완성시키는 경우는 없다.

▲ 좌-원형에 가까운 궁중모란도. 우-괴석과 결합한 궁중모란도. [자료사진 - 심규섭]

[궁중모란도]는 모란그림의 한계를 넘은 완벽한 꽃그림이다.
모든 꽃을 대표하는 그림인 것이다.
중국에도 수많은 모란그림이 전해지고 지금도 창작되고 있다. 하지만 [궁중모란도]를 당할 그림은 없다. 세계에는 숱한 꽃그림이 있고, 뛰어난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지만 [궁중모란도]를 뛰어 넘지는 못한다.
이런 형식과 내용을 가진 꽃그림은 세상에서 [궁중모란도] 밖에는 없을 것이다. 세계적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 바람 맞은 궁중란도, 같은 화가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좌측 작품은 화장품 회사에서 소장하고 있고 우측 그림은 독일에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런 완벽한 [궁중모란도]에도 변화와 파격이 일어난다.
먼저는 수석(괴석)과의 결합이다.
원래 수석이 없이도 조형성이나 내용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수석이 결합한 것은 중국에서 전래한 도교의 영향이라고 본다.
하지만 도화서 화원들은 이러한 변화를 조선의 정서에 맞게 수용하여 그린 것이 [석모란도]이다. 태호석이나 침향석 같은 괴석은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었다. 풍파에 구멍이 숭숭 뚫린 못 생긴 돌이지만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생태성이 선비의 사상과 맞았기 때문에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런 괴석을 부귀의 상징으로 수용했다. 권세가나 부자들의 정원을 장식하는 돌이 된 것이다.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가짜 괴석을 만들어 팔았다는 기록도 있다.
모란과 괴석에 결합하면 그야말로 ‘천년만년 부귀영화를 누려라’는 도교적 의미를 갖는다.

아무튼 이러한 청나라 문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은 괴석을 궁중모란도에 녹여내어 도교적 상징을 벗겨낸다. ‘부귀영화를 영원토록 누려라’가 아닌 ‘생명의 충만함이 영원하라’가 된 것이다.

가끔 바람을 맞은 것처럼 꽃과 이파리가 흐트려진 [궁중모란도]가 발견된다.
온전한 모란도와 함께 병풍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한 폭의 독자적인 그림도 있다. 모두가 어색한 그림이다. 온전한 궁중모란도와 함께 병풍이 되어 있는 그림은 화법이나 표현의 차이가 있어 각기 다른 화원이 그렸거나 혹은 다른 그림을 한 병풍에 넣은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궁중모란도]의 경우는 한 폭만 그리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독자적인 그림이 아니라 다른 병풍에서 분리된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궁중모란도]의 원형에서 벗어난 바람 맞은 [궁중모란도]는 충격적이고 엄청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형식이나 조형성을 보면 틀림없는 [궁중모란도]이다.
하지만 과연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그려졌는지, 아니면 도화서 출신의 화가가 개인적으로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그림을 일개 중인 신분이었던 화원이 창의적이고 독자적으로 그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소한 선비들이나 양반들의 주문이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이 바람 맞은 궁중모란도가 그려질 수 있었던 시대적 환경과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이 그림의 창작연대는 대략 조선 후기이다. 이 시기는 서구의 이양선이 출몰하고 유학이 퇴행하여 철학적 가치가 흔들리고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세계적 격동에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저 중국의 눈치를 보며 따라가고자 했다. 청나라가 흔들리면서 조선도 급격히 무너진다. 선비들은 저마다 새로운 사상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양반은 보신주의에 빠져든다. 삼정(三政)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진다. 민란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해졌다.
바람 맞는 모란그림은 이런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추측한다.

미술을 비롯한 모든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조선 후기에는 한(限)이 담긴 판소리나 마당놀이가 만들어지고 또 다른 이상세계를 염원하는 소설이 창작된다. 세상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놀이와 문화가 유행하고 난세를 피해 은둔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바람 맞은 모란도는 궁중회화로 자리 잡지 못했다. 아니 자리 잡을 시간도 없었다.
만약 바람 맞은 모란도가 궁중회화로 수용되었다면 정치가 현실을 수용했다는 말이고 이는 역사의 또 다른 전개를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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