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5년 세계교회협의회 활동가 자격으로 첫번째 방북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30년 이상 남북 기독교 인사 및 인도적 지원단체 관계자들과 교류하고 있는 에릭 와인가트너 씨를 지난 5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캐나다인이면서 북측 당국으로부터 시민권을 획득한 최초의 비정부 기구 대표.

에릭 와인가트너 씨를 설명하는 여러가지 수식어 중 하나이다.

와인가트너는 지난 1985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활동가 자격으로 남북 교회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한 첫 번째 방북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30년 이상 남북 기독교 인사 및 인도적 지원 단체 관계자 등과 폭넓게 교류해 왔다.

그는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 개선 모두 신뢰에서 시작되며, 신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 바에야 이를 위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신뢰 구축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을 못 만나게 하는 모든 정부의 정책은 정말 잘못된 것”이며, 만남의 계기를 이어갈 수 있는 “인도적 지원, 개발협력사업, 사회문화교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또한 그는 인권을 빌미로 다른 나라를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것에 반대한다. 나아가 스스로 인권을 유린하면서 인권을 기준으로 다른 정부를 비판하고 몰아세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의 성서에는 네 눈의 들보를 먼저 보고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이를 대접하라는 경구가 있다.” 그가 생각하는 중요한 인권의 원칙이다.

이미 은퇴한 70대의 이 국제 NGO활동가는 지난 달 23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북측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의 만남을 주선한 뒤 바로 서울로 와서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대북지원과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열린 ‘2015대북지원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1985년 한국교회가 북측과 처음으로 접촉할 때 그 일에 대한 주선을 의뢰받고 처음으로 방북한 WCC의 외국인 활동가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남북 교회 대표단은 그의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지난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남북한 대표단이 모두 참여한 4개의 국제회의를 성사시키기도 했으며 지난달 말에도 그 일을 하고 왔다.

지난 1995년 북이 국제사회를 향해 처음으로 원조를 요청한 이후 1997년부터 1999년까지 2년 6개월간 평양에서 근무하며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의 식량원조연락소(FALU; Food Aid Liaison Unit) 창립 대표로 일했다. 이때 그는 북이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절, 북 전역을 돌아다니며 기근 해소를 위해 활동한 외국인 벗이었다.

캐나다로 돌아간 후에는 북-캐나다 외교관계 수립에 기여하고 양국 관계를 다루는 뉴스레터 및 웹사이트인 ‘Cankor’의 편집장으로 일하다 2013년 은퇴했다.

‘2015 대북지원 국제회의’ 마지막 날인 지난 5일 서울 여의도에서 그를 만나 최근 남북 관계 현황과 지원사업, 평화문제, 인권 개선 등 현안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김동진 박사(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지난 3일 개최된 '2015 대북지원 국제회의'는 5일 '대북지원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공동선언문' 발표로 폐막했다.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는 에릭 와인가트너 전 캔코리포트 편집장(오른쪽), 왼쪽은 카타리아 젤버거 전 SDC 북한사무소장. [사진제공-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 통일뉴스 : 쉬운 질문부터 드리겠다. 평양시 명예 시민권자로서 특전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 에릭 와인가트너 : 특별한 것은 없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우한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으로부터는 대우를 받는 편이다. 북측 당국에게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조그련은 30년 동안 만나왔기 때문에 만나면 서로 좋아한다. 사람들이 많이 바뀌어서 정부 인사들의 경우에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지금은 안 보이는 경우가 많다.

□ 강수린 조그련 위원장의 근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

■ 강영섭 위원장이 사망(2012.1.) 후 아들이 물려받은 것이다. 지난해 두 번 만났다. 한번은 제네바에서 만났고 지난 주 평양에서 만났다. 그 사람은 자신감이 있고 진지하면서도 열정적이다. 원고도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구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평양에서는 제네바에서와 달리 좀 더 공식적인 모습을 보였다. 주로 개·폐막식 행사에만 나타나고 뭔가 실제적인 일을 할 때는 나타나지 않았다.

□ 강수린 위원장이 겸하고 있던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10월 중순 사임한 것으로 알려졌고 일각에서는 건강 악화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 굉장히 건강하고 전혀 문제없어 보였다.

▲ 이날 인터뷰는 김동진 박사(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 오른쪽)의 통역으로 진행됐다.[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1985년 처음으로 방북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 1984년 일본 도잔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주최한 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주제는 ‘동북아에서의 평화와 정의’였다. 그렇지만 포커스는 한반도 문제에 맞춰져 있었다. 남과 북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WCC의 목표였다.

도잔소 전에는 남측 교회가 북측과 연계하는 것을 굉장히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안법 등으로 인해 위험한 상황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는데, 1984년에 처음으로 한국교회가 WCC에 북한에 무언가를 좀 했으면 좋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때 비록 북에서 일본 도잔소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한국 교회가 WCC에 처음으로 북측 기독교인들을 초청하는 문제를 의뢰했고 이 문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1985년에 파견된 WCC 실무자 2명 중 한 사람이 와인가트너였다. 그는 이때 북측과 협의를 통해 북측 기독교인들이 제네바로 와서 남측 교회 대표자들과 만나는 모임이 가능하겠는지를 협의하기 위해 방북을 했다.

실제 남북교회의 만남은 지난 1986년 9월 스위스 글리온에서 성사됐다.

대북 교류·지원 30년...상상할 수 없었던 기근, 함께 극복 보람

□ 30년 전이었다. 이때 평양의 첫 인상은 어쨌나?

■ 그때는 고려호텔이 없었다. 지금은 확충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단층 건물이었던 보통강호텔에 묵었다. 당시에 한국에는 와 봤었지만 북은 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로웠다. 공항은 굉장히 작았고 어린 소녀가 꽃을 갖다 주면서 우리 일행 두 명을 브이아이피(VIP)로 극진하게 대접해 준 것이 기억에 남는다.

도로는 굉장히 넓은데 운행되는 차량은 없었고 심지어 자전거도 하나도 없었다. 왜 자전거가 없냐고 물었더니(베이징에서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 들어왔으니까 베이징 거리에 자전거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봤는데 평양에는 한 대도 눈에 띄지 않아 신기해서 물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자전거가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거 복잡하고 싫다. 안되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전거가 없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이미 주체탑도 있었다. 판문점에 가서 정전협정 체결 장소도 보여주었다. 조그련을 보러 간 것이었는데 그들은 일요일에 한번만 봤다. 가정교회가 있다고 했었는데 교회건물도 없을 때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조그련 사람들은 가정교회라는 데서 일요일에 몇 번 만나고 계속 당에서 나온 사람들과 구경 다니고 이야기 나누고 했다. 워낙에 북측 당국과 협의하러 갔던 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때 한편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북에도 종교적인 삶의 양태가 있었지만 굉장히 제한적이고 통제하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평양은 아주 깨끗하고 잘 정돈도 있었으며, 건물에 색칠도 잘 되어 있었다. 교통만 많지 않았을 뿐 굉장히 아름다운 도시였다. 평양뿐만 아니라 먼 외곽지역과 지방도시까지 함께 다녔고 농촌에서 농사짓는 사람들도 다 봤는데 사람들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영양상태도 좋아 보였고 옷도 잘 입고 다녔다.

그때는 10년 뒤에 정말 그런 기근이 발생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고 나서 1987년에 한 번 더 갔었다. 87년에는 조그련과 더 많이 만났었다. 그 후 1997년부터 2년 반 동안 체류했다.

▲ 지난 3일 개최된 '2015 대북지원 국제회의' 모습. [사진제공-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 1985년 첫 방북 무렵 북측 관계자들과의 만남에서 별 문제는 없었나.

■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오히려 그들이 질문이 많았다. 남쪽 사정과 국제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공식 미팅뿐만 아니라 술 마시고 할 때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북을 방문하기 전에 제네바에 나와 있는 대표부 사람들을 만나고 가긴했는데 그들은 WCC 뿐만 아니라 본인이 알고 있는 해외동포 중에서 친북 또는 친남 성향의 동포들에 대해 이름을 거명하면서 물어볼 정도였다. 그 사람들이 질문은 많이 했지만 사실은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우리가 오히려 놀랬었다.

□ 첫 방북 때와 1990년대 중반 WFP-FALU 창립대표를 지냈을 때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 1997년부터 1999년까지 2년 반 북한에 상주했다. 12년 전 첫 방북의 기억이 있던 나로서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가서 만났던 사람들이 많이 야위었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걸치고 있는 옷도 너무 남루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 오래 입어서 제대로 빨지도 못했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12년 전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은 타일이 다 떨어지고 색도 다 바래고 페인트가 다 벗겨졌는데 보수를 엄두도 못내는 상황으로 보였다. 창문은 전부 깨져 있었는데 깨진 창문을 다른 유리로 복구할 수도 없어서 플라스틱 조각 같은 것들로 대충 얼기설기 막아놓은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기도 했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단순히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특히 에너지난으로 인해서 하루에 몇 시간밖에 전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기반시설이 전부 붕괴돼 있었다. 그저 단순히 식량이 필요한 상황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경제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서 중첩된 상황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때 느낌으로는 결국 이건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 아니고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이후 몇 년 지나는 동안에 북한이 무역 파트너들을 다 잃고 석유를 싼 가격에 사오거나 지원받을 수 있는 소련 등 관계들이 끊어지면서 에너지난이 심화되고, 그 모든 것이 중첩되어서 이런 결과를 빚어냈다고 생각했다.

그전에 방북했을 때에는 평양에 돌아다니던 전차가 잘 정돈돼 있었다. 1997년 평양에서 본 전차는 전력을 공급받는 전차 위의 전선이 너무 자주 끊어지고 지나치게 노화되어서 한 블록 지나면 보수인력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심각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 당시 체류하던 구역은 어디었나?

■ 대사관들이 밀집돼 있던 문수동 외교구역이었다. 대사관 근무자들을 위한 아파트가 있었는데 거기에 살고 있었다.

▲ 에릭 와인가트너는 정확한 기억력과 따뜻한 애정, 생동감 넘치는 표현으로 지난 30년간 해 왔던 대북 지원 사업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북이 가장 어려웠던 2년6개월을 평양에 체류하면서 직접 목격했는데, 위기가 극복되는 추이나 동향까지 보았나.

■ (웃음)나는 정말 최고의 직업을 가졌다. 세계식량기구(WFP) 본사 직원보다 훨씬 좋았다. 그들에게는 식량원조사업만 있었지만 내가 일했던 FALU는 WFP를 지원하는 NGO를 조정하는 사무국 기능을 했다. NGO들이 다양한 사업을 원했기 때문에 WFP의 사업장이 없는 지역에도 우리는 다양한 사업장을 두고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북동부지역의 식량부족이 심한 것 같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나는 바로 북측 당국에 이야기해서 따로 갈 수 있었고 상황이 어떻게 개선되는지 모니터링도 즉시 할 수 있었다.

그때는 북의 전역을 다 돌아다니면서 상황이 어떻게 나아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던 특별한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NGO, 지원 활동 외 북에 대한 이해 높여야

□ 당시 북 당국의 제약은 없었나.

■ 당시에도 지금 국제기구 관계자들이 북측 당국에 24시간 전에 통보하면 해당 지역을 방문할 수 있는 수준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초반이어서 그랬는지 북도 대응하는 매뉴얼이 없었던 것 같다.

처음엔 사실 굉장히 편했다. 어디를 가자고 하면 다 협조해 주었고 가만히 있어도 북측에서 오늘은 어디를 보고 싶으냐고 물어보고 제안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통제가 심해진 측면이 있다.

그는 자신이 이미 12년 전에 방북 경험이 있었고 북측 관계자들과도 면식이 있으며 한반도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원이 많지 않던 초기 NGO활동가였기 때문에 북측도 통역이나 이동 수단 등에서 큰 불편 없이 지원해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인도적 지원단체가 늘어나면서 북측이 나중에는 대학생들까지 동원해서 통역지원에 나서는 등 애를 썼지만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처음엔 1~2일이면 해결되던 일들도 나중엔 일주일씩 걸리기도 했으며, 이 같은 상황은 서로에게 악영향을 주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이 북측 당국의 의도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기보다는 지원 기구 활동가들이 한반도와 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북측 당국과 부딪히는 문제라고 진단했다. 앞으로 국제기구 등에서 지원 능력은 물론 지역에 대한 이해 수준을 높이고 지원 대상인 북 당국과의 신뢰 부족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조언했다.

▲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 북이 기근을 극복하는 과정을 함께 했던 에릭 와인가트너씨.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북에 체류하면서 겪었던 지원활동에 대해 더 설명해 달라.

■ 중앙당 간부와 지역 당 간부, 농장 관리원 등이 어떤 태도나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지원활동에도 많은 영향이 있었다.

도 당 비서나 협동농장의 관리원이 여성인 경우에는 특별히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지원기구 관계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었던 반면, 어떤 경우에는 우리를 속이고 지원물품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구역 내 창고에 저장해 두었던 물품이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 가가호호 방문을 요청하자 똑같은 사람을 여러 집의 주인으로 등장시킨 경우도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지난 일이긴 했지만 이런 일이 평양의 고위 간부들이 지시해서 벌어진 일이라기보다는 지역 관리원이 자기 권한으로 한 짓이라고 평가했다.

다른 경우, 지원 기구에서는 어려운 사람을 도우러 갔는데 정작 지원을 받아야 할 북측 사람들 중에는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하는 일도 있었다. 부모가 지원 기구 사람들에게 배고프고 힘든 자식을 보여주는 것을 꺼리는 것은 부끄러워서 감추는 것으로 이해하게 됐다.

“이렇게 하면 도와줄 수 없다”고 했더니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격리해 놓은 시설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 충격적인 상황을 보고 난 후에는 많이 조심스러워졌다고 고백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그 이후에 계속 방북하면서 본 북의 상황이 나아졌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 북이 겪고 있는 상황이 너무 충격적이라고 했는데 반드시 개선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나?

■ 1995년 북한은 유엔에 처음으로 원조를 호소했다. 한 달 사이에 엄청난 규모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WFP의 경우에는 7명의 직원이 1년 사이에 50명으로 늘어났다. 내가 하던 사업팀만 해도 500만 달러 규모의 사업을 진행했다.

전체 경제 구조를 바꾼다던지, 남북의 정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적어도 극심한 기근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고 실제로 국제사회의 지원을 통해서 북한이 적어도 기근의 상황에서는 벗어나는데 분명한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 당시 북측 관계자들의 부정적인 모습과 적극적인 해결 노력에 대해 모두 이야기 해주었다. 전반적인 모습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나?

■ 정말 적극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모두가 고통 받았던 시절이었다. 주민들뿐만 아니라 당 고위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우리와 함께 일하던 통역사는 항생제가 공급되지 않아 고통 받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항생제를 챙겨주겠다는 우리의 제안에 대해 “아니다. 그 항생제는 너희들의 계획대로 전체적인 해결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받지 않았다.

처음에 WFP는 평양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기근을 먼저 지원하는 정책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평양은 아무래도 잘 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WFP는 절대로 평양은 지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많은 보육원·애육원을 돌아다니며 확인한 결과 평양이라고 해서 기근상황이 다르지 않고 엄청난 규모의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다음부터 평양에 대한 지원도 시작됐다.

물론 최고위층은 그래도 잘 살았을 것이라고 본다. 가끔 만찬에 초대받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음식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건 정말 소수였다.

□ 당시 김영삼 정부는 북측의 원조요청에 대해 호응하지 않았다. 어떻게 느꼈나.

■ 마음이 아팠던 건 전 세계가 북한을 돕고 있었는데 동족이 외면하는 상황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남측 정부에 WFP를 통해서라도 지원해 달라고 요청을 했더니 ‘WFP는 모니터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지원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느 날 지원을 한다고 하면서 조금 지원을 하고는 정부지원이라며 모니터링은 커녕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재미있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남북 사이에 신뢰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이 같은 상황이 최근까지도 달라진 것 같지 않다고 하면서 “남측에서 뭐라도 들여보내는 경우에는 내용물에 한국에서 보낸 것이라고 엄청나게 붙여놓고 북측은 북측대로 그걸 뜯어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며, 한편 재미있기도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라고 꼬집었다.

남북 신뢰 없어...그럴수록 인도지원·개발협력 중요

□ 남북 사이에 신뢰가 없다는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 과거 김대중 정부 초기 햇볕정책이 발표되었을 때 전 세계가 흥분했다는 느낌이 있다. 그 후로 남북관계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1999년 내가 북한에서 나올 때 김대중 정부의 요청에 의해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북과 수교를 하려고 했다. 캐나다의 경우에는 북 외무상 부상이 귀국하는 나에게 부탁한 바가 있어 캐나다 의회 대표단을 이끌고 재방북, 2001년 2월 북-캐나다 수교로 이어지게 됐다.

내가 느끼기에, 북은 언제나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바뀌는 것은 남측과 미국의 정책이다.

북측 인사들은 “아니 미국과 한국은 항상 선거에서 정부가 바뀌어서 정책이 자주 바뀌는데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신뢰가 없으면 장기적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것 아니냐. 뭘 믿고 오랜 기간 협력사업을 할 수 있겠느냐 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북의 전쟁 세대, 전후 세대 입장에서 보면 최고의 강대국인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억제력은 핵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부에서 ‘핵무기를 개발할 돈이면 왜 가난한 사람들 먹이지 않느냐’며 북을 공박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내 생각에는 재래식 무기라고 하더라도 엄청나게 비싼 첨단 무기이다. 그런 무기를 살 돈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안 되는 북의 입장에서 안보에 있어서 핵무기를 하나 가지는 것이 가장 싸게 먹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국제사회는 이 같은 북의 입장을 용납할 수 없고 이에 따라 북의 핵개발 이후 미국, 한국과 북한의 신뢰관계는 깨져 버렸고 예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 그는 "네 눈의 들보를 먼저 보고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이를 대접하라"는 성서 구절을 중요한 인권의 원칙으로 여기고 있다며, 인권을 빌미로 다른 나라를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지난 1985년 첫 방북과 1997년부터 2년6개월 체류, 지난 주 방북을 거치며 느낀 북의 변화에 대해 비교한다면?

■ 3년 전 방북 이후 지난주에 처음 평양에 들어갔다. 많이 알겠지만 최근 북한은 엄청난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지역에 새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특히 미래과학자거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교통체증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3년 전엔 일반 차량을 택시로 바꾸어 운행했었는데, 지금은 다양한 색상의 택시 전용차가 너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었고 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아파트에는 태양열 판넬이 정말 많이 부착돼 있었다.

내가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보이는 모습만 보면 대북 경제제재는 아무 효과가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 한반도의 평화와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한국, 북한, 미국은 각각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제안해 달라.

■ 계속 해 왔던 이야기이다. 신뢰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신뢰를 구축하자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야 한다. 신뢰는 상층부뿐만 아니라 밑에서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중간에서라도 시작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인도적 지원, 개발협력사업, 사회문화교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정부에 다 말하고 싶다. 왜 사람들을 못 만나게 하나. 그건 정말 잘못된 정책이다. 어떻게 해서든 만나게 해야 한다.

북에서 활동하는 미국 NGO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있지만 좀 힘든 상황이다. 내 경우에 이번 방북 때에도 보험을 들 수 없었다. 정부가 반대하는 여행을 보험회사에서는 계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정부는 북에서 활동하는 NGO와 학계 인사를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계속 제약을 하고 있다. 이러면 만남을 주저하게 된다.

북은 국제사회가 자신들에게 고립정책을 펴고 있다고 하는데, 북이 그럴 수는 있지만 개방된 국제사회가 북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인권개선 중요, “제 눈의 들보부터 보라”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북한 인권과 관련해서 꼭 한마디 하고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스스로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의 인권 개선을 위해 직업 경력의 절반 이상을 바쳤다고 자부하는 그는 북의 인권 옹호에 대해서도 100% 지원한다는 입장이지만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권 유린국에 대해 결의안을 만들고 비판하고 압박하는 등의 활동으로는 인권문제를 개선할 수 없으며, 정말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국민이 자신들의 인권상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개선을 위해 그들 스스로 노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결국 배고플 때 식량을 지원하고, 물이 오염됐을 때 식수 개선과 위생사업을 통해서 그들이 물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인권을 빌미로 다른 나라를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며, “게다가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스스로 인권을 유린하면서 인권을 기준으로 다른 정부를 비판하고 몰아세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인들의 성서에는 네 눈의 들보를 먼저 보고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이를 대접하라는 경구가 있다. 중요한 인권의 원칙이다.” 에릭 와인가트너의 말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