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 사리원에서 선군정에 올라온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그 사회의 희망이다. [사진제공-정찬열]

평양에도 애완견을 기르기 시작하는가

10월 12일(일) 맑음, 북한 방문 9일째다. 6시 기상. 대동강 산책을 나갔다. 거북선 모형 배가 떠있다. 명량해전 현장인 우수영 울돌목에 거북선이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만, 국토종단 중 속초 부근 바닷가에 전시해놓은 거북선을 보았을 때는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동강에서 또 거북선 모형 배를 보게 되었다.  
 
아주머니가 애완견을 앞세우고 산책을 하고 있다. 엊그제 어떤 남자가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오늘 두 번째다.  
 
7시 50분, 사리원을 향해 숙소를 출발했다. 재령, 신천을 거쳐 개성에 도착할 예정이다. 평양 시내를 물차가 물을 뿌리며 지나간다. 길에 먼지가 덜 나도록 대동강 물을 퍼다 길을 축인다고 했다. 경운기도 보이고  리어카를 끌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물에 볼을 담아 어깨에 둘러메고 가는 녀석들이 보인다. 깡충깡충 뛰어가는 모습을 보니 아마 어느 팀과 오늘 한 바탕 붙기로 한 모양이다. 평양 변두리의 일요일 아침 풍경이다.
 
다리를 건너간다. 충성의 다리, 라고 한다. 강 가운데 쑥섬이 있다. 저곳에서 김구 선생이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평양을 벗어났다. 김 참사가 문배주 이야기를 꺼낸다. 모란봉 아래서 대대로 술을 만들어 팔던 집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비가 아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가 남쪽에서 술을 만들어 팔았다. 어느 날 아들에게 “이제 세계적인 술을 만들어 팔게 되었는데...” 당시 문광부 장관을 하던 사람을 만나 소개를 했다.

6.15회담 때 박지원이 술을 가지고 방북,  회담장에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술을 따르며 얘기함으로써 알려졌다. 술맛을 보던 김 위원장이 “모란강 물로 술을 담아야 진짜 술맛이 난다”고 했단다. 그 얘기를 듣던 아버지가 우리 가문 대대로 지켜오던 비밀인데 어떻게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는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배주가 북한에 알려지게 된 경로란다. 

▲ 애완견을 앞세우고 산책하는 아주머니. [사진제공-정찬열]

 

성불사에서 <성불사의 밤> 노래를 부르다

정방산 성불사에 들러 가기로 했다. 차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산자락으로 휘어들어 한참을 올라가니 사찰 입구가 보인다.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간다. 밤새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쓸린다. ‘국보유적 87호’ 안내석이 세워져있다. 성불사는 신라 말인 893년에 건립했는데 6.25때 폭격으로 부숴진 것을 1955년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正方山成佛寺> 현판이 보인다. 이른 아침이라선지 경내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마당 한 쪽에 5층탑이 서있다. 아침 햇살이 절 마당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다. 신발을 벗고 대웅전에 올라가 인사를 드렸다. 천불상, 극락전 등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돌아보는데 스님 한 분이 나타난다. 법성스님(한상열)이라고 한다. 40대로 보이는 젊은 스님이다. 머리를 깎지 않았다. 사찰 둘레가 12킬로라고 한다. 절의 내력에 관해 얘기를 들려준다.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온다. 호수가 맑기도 하다. 단풍든 산이 물속으로 내려와 발을 씻고 있다. 나도 호숫가에 서서 노래 한 곡을 부른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 주승은 잠이 들어 객이 홀로 듣는구나 /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성불사의 밤>을 혼자 부르다가 김 참사에게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모르겠단다. 깜짝 놀랐다. 남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이 가곡을 모르다니.
 
절 입구 길가에서 엄마를 따라 나와 있던 남자아이를 만났다. 여섯 살이란다. 예뻐서 안아주려고 했더니 저만치 도망쳐 버린다. 도망가는 녀석을 좇아가 붙잡아 안아주고, 차에서 과자 한 봉지를 가져다 손에 쥐어주었다. 지켜보던 어머니 얼굴이 환하다.   
 

▲ 정방산 성불사. [사진제공-정찬열]

 

▲ 성불사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재령평야 나무리벌, 송해 선생의 고향을 지나다

신천을 먼저 간 다음, 되돌아오는 길에 재령과 사리원을 들리기로 했다. 사리원을 잠깐 지나 재령 평야지대를 통과한다. 2차선 포장도로다.
 
황해도 재령은 방송인 송해(88) 선생의 고향이다. 그가 자신의 평전 ‘나는 딴따라다’ 출간기념회 자리에서 “2003년 평양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했는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령 나무리벌에서 ‘전국노래자랑 송해, 나무리벌에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한번 외칠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습니다”고 말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고향은 그런 곳이다. 
 
이곳 재령평야 나무리벌은 청천강 연안 넓은 안주평야 열두삼천골과 함께 북한 최대의 곡창지대다. 아니나 다를까. 상당히 오랫동안 자동차를 달려도 계속 들판이다. 청일전쟁 당시 파죽지세로 청군을 몰아치던 일본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이곳 재령평야를 지나면서 “황해도 땅이 비옥하니 일본의 식량창고로 써야 한다”고 이토오 히로부미에게 전보를 쳤다는 일화가 있다.
 
시절이 10월 중순인지라 나락을 베어 묶어 놓은 곳이 많고 이미 추수를 끝낸 논바닥도 여기저기 보인다. 쉬지 않고 달려 신천에 도착했다.

신천 박물관 방문, 생각할수록 ‘야만의 시대’였다

잠깐 휴게실에 앉아 쉬는 동안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었다. 신천은 인구 15만 정도의 도시라고 한다. 이곳에서 2백여리 떨어진 곳에 구월산이 있단다. 이 지방의 유명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종달 온천이 유명하단다. 옛날 발목이 상한 새가 그 물가에 왔다 갔다 하더니 상처가 낫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산리의 가물치 맛도 일품이란다. 이 지역은 농업지대이며 강냉이, 고구마, 수수, 기장 등을 주로 심어먹는다고 설명해준다.
 
신천박물관으로 안내한다.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저질러졌다는 장소다. 군청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란다. 입구에 “신천땅의 피의 교훈을 잊지말자!”라는 구호가 새겨져있다. 바로 옆에 ‘승냥이 미제를 천백배로 복수하자!’는 그림이 보인다. 안내원에 의하면 당시 신천군민 1/4에 해당하는 3만5천여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 중 어린이, 노인, 부녀자가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사건을 증거하는 여러 가지 물건과 기록이 보관되어있고, 당시 주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십자가, 찬송가, 묵주 등 성물이 전시되어있다. 방공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다는 생존자의 증언도 들었다.
 
북한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기록을 찾아보니 신천 민간인 희생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었다. 신천군 사건은 미군에 의해 전적으로 저질러진 일이 아니라, 해방 전후의 좌-우 대립과 갈등을 비롯한, 복합적인 원인이 맞물려 동족 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라는 견해였다.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일어났던 ‘노근리양민학살사건’, 그리고 한국군이 미군과 함께 싸웠던 월남전에서도 양민학살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수많은 민간인이 전쟁 중에 죽임을 당했다. 전쟁은 그렇게 잔인하다. 후일, 미국 정보국장이었던 데니스 블레어는 이렇게 술회했다. “1930년부터 1975년까지는 동남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야만적 충돌의 시기였다. 군인들이 군인들을 죽이고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죽였으며 민간인들이 서로를 죽였던 시기였다.”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야만의 시대였다. 

▲ 당시 군청건물이 신천박물관이 되었다. [사진제공-정찬열]

 

재령의 해림상회는 고향사람을 기다리고
 
차를 돌려 재령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미국 우리 동네에 재령 출신이 있다. 위진록 씨다. KBS 아나운서로 6.25사변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처음 방송으로 내보낸 분이다. 그 분의 수필집을 읽어보면 이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분들이 초기에 얼마나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알 수가 있다. 그 분뿐이겠는가. 막막한 세상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것마저 힘겨웠을 저들의 고통은 짐작도 할 수가 없다. 많은 실향민, 이산가족들이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다. 나이 들어 생이 얼마 남지 않는 그들이 고향을 찾아가고, 가족을 만나게 할 수 있는 길은 정녕 없는가. 분단의 비극이다.

넓은 재령평야 곳곳에 볏단을 쌓아놓았다. 삼시강 협동조합 앞에 “큰소리 치고 잘 살날이 눈앞에 보인다“는 배너가 걸려있다. 한 주민에게 재령출신이면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오래된 건물이 있냐고 물었더니 ‘해림상회’를 보고 가란다. 그가 말해준 곳으로 갔더니 ‘海林商會’라는 간판이 붙은 2층 건물이 길가에 서있다. 1910년에 지은 이 지역의 유명한 상업건물이라고 했다. 보존 상태가 좋다. 오랜 세월 주민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을 해림상회가 고향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시작한 일은 끝을 본다”는 배너가 보인다. 소달구지가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점심때가 되어 들판 가운데 있는 그늘 밑으로 가서 주문해 가져온 도시락을 폈다. 눈앞에 보이는 배추며 수수대며 깻단, 그리고 누렇게 익은 벼 이삭이 정겹다. 땅 한 평이라도 허비하지 않으려는 듯 손바닥만 한 곳도 비워두지 않고 배추를 심었다.
 
한 여름, 수수대는 농촌 사람들의 군것질 감이었다. 껍질을 벗기면 하얀 속살이 나왔다. 사근사근한 그 속살을 씹으면 단물이 혀를 적셨다. 껍질을 벗기면서 날카로운 껍질에 입술을 베이기도 했다.  
 
저렇게 깨를 베어 단을 만들어 세워놓았다가 마르면 깨를 털었다. 어머니는 밭 귀퉁이에 이불 호청을 깔고 그 위에서 깨를 떨었다. 수북수북 쌓여가는 깨를 보며 “하따 오지다 징허게 오지다야”, 참말로 오지게 웃던 우리 엄니 웃음소리며, 흩어 떨어진 깨알을 쓸어 담으시며 “오~매 으째야 쓰꺼나 깨 한 말이면 느그들 한 학기 납부금인디” 하시던 말씀 귓가에 맴돈다. 게으르게 깻단을 날라 오는 나에게 “죽으면 썩을 삭신 애깨서 뭐한다냐”며 혀를 끌끌 차시던 어머니가 보인다 .
 
오래 전 추억이다. 저만치 다리 위로 주민들이 걸어간다.

▲ 고향사람을 기다리는 재령 해림상회. [사진제공-정찬열]

 

▲ 트렉터로 볏단을 실어 나르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달구지에 깻단을 싣고 집에 가는 농부의 모습. 한 폭의 그림이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리어카를 끌고 논바닥으로 들어선다. 가만히 지켜보았다. 리어카에 실린 나무 가구의 문을 열자 닭이 쏟아져 나온다. 열댓 마리는 되어 보인다. 닭들이 논바닥에 떨어져 있는 벼이삭을 주워 먹느라 바쁘다. 그런 다음 녀석은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저렇게 닭을 데려다 이삭을 주워 먹게 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점심을 끝내고 논두렁을 따라 녀석에게 갔다. 무어라 물어도 씽긋이 웃기만 한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는 이삭이 남는다. 남은 이삭을 쥐도 먹고 새도 먹고 야생동물이 주워 먹으며 겨울을 난다. 저렇게 닭 모이도 된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면 저런 모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요즘 남한에서는 논바닥에 이삭을 남기지 않는다. 기계로 타작을 한 다음, 볏짚을 비닐로 말아 유산균으로 발효시켜 ‘곤포(梱包) 사일리지’를 만든다. 이 사료뭉치 하나면 소 50마리의 한 끼 식사가 된다고 한다. 논에서 볏짚과 이삭이 사라지면서 야생동물에게 비상이 결렸다. 먹을 것이 없어져 생존을 위협받게 된 것이다. 남겨주는 미덕이 그리운 세상이다. 힘든 시절, 아버지 밥상을 곁눈질하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남기신 밥 한 숟갈도 이를테면 이삭이 아니었을까.
 
곤포 사일리지를 먹는 소도 옛날을 그리워할 성 싶다. 작두로 볏짚을 썬 다음 콩깍지와 쌀겨를 섞어 쇠죽을 끓여 소를 먹이던 시절, 마굿간에서 쇠죽을 끓이면 소가 냄새를 맡고 혀를 내둘리면서 침을 흘렸다. 소죽을 퍼주면 맛나게도 먹던 황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논두렁에 콩을 심어놓았다. 내가 농사를 지을 때도 논두렁콩을 심었다. 식량 자급자족을 외치던 시절이었다. 돔부콩을 드문드문 넣어 햅쌀로 밥을 하면 고소한 쌀밥 속에 섞인 포근포근한 콩이 부드럽게 입에 씹혔다. 자르르 기름기가 흐르던 햅쌀밥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인다.  
 
한 농부가 달구지에 깻단을 싣고 느릿느릿 걷고 있다. 푸른 가을 하늘, 달구지에 깻단을 싣고 소 코뚜레를 붙잡고 집에 돌아가는 농부의 모습. 한 폭의 그림이다. 우리가 살아왔던 추억이 북녘 땅에 저렇게 고스란히 남아있다. 

▲ 달구지에 깻단을 싣고 가는 농부. 한 폭의 그림이다. [사진제공-정찬열]

 

▲ 닭을 데려와 풀어놓고 공부하는 아이. [사진제공-정찬열]

 

사리원 미곡협동조합, 장마장이 10일에 한 번 열린다고

사리원으로 가는 길. 가로수 밑에 주민들이 앉아있다. 점심시간인 모양이다. 오른쪽으로 비닐하우가 여러 채 줄지어 서있다. 묘향산에서 보았던 반영구식 비닐하우스다.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을 방문했다. 농장 사무실 앞에 맨드라미가 곱게 피었다. 보랏빛 맨드라미꽃을 오랜만에 만났다. 10년 전이던가, 세계에서 제일 큰 나무가 있는 북가주 레드우드 국립공원을 방문했을 때 뜰에 피어있던 분꽃, 맨드라미를 보며 반가웠던 기억이 살아난다.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것은 무엇이던 기억 속에 담겨 있다가 반가움으로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조선속도로 세계를 앞서나가자’라는 구호가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써 있다. 도로에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벌판 저쪽에서 자전거에 볏짚을 싣고 오는 사람이 보인다. 소달구지가 볏짚을 한가득 실어 나르고 있다.
 
홍보담당 책임자를 만났다. 강경일이라는 젊은 분이다. 서른 아홉이란다. 우리 일행을 높은 동산으로 안내한다. 들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사리원시가 보인다. 시멘트로 지은 연립주택 형태의 마을이 산 아래 모여 있다. 저쪽 마을은 살구동네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마을 특성에 따라 이름을 지어 부른다고 한다.
 
원래 마을 앞 농토가 바다자리였는데 간척지를 막아 논이 되었단다. 협동조합 관할 논이 750정보라고 한다. 정보당 예상 수확량을 물으니 10톤 정도라고 한다. 지난 번 묘향산 가면서 나락을 벨 때 그곳 관리자는 5톤 정도라고 대답했는데, 산중 다락논과 평야 지역은 소출에 많은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수확량 중 60-70%를 국가에 납부한단다. 조합의 전체 농민은 2,956명이며 분조 규모는 20명 정도란다. 20명 단위로 생산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얘기이다. 개인 텃밭은 한 가구당 30평이란다. 공동으로 작업을 하게 되면 능률이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사상교육이 잘 되어있어 그런 염려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젊은이들의 결혼은 문제가 없을까 싶어 운을 떼었다. 청년동맹원들이 합숙소에서 생활하더니 올해 3쌍이나 결혼을 했다고 자랑을 한다. 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부하여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별다른 어려움 모르고 넘어갔다고 한다.
 
장마당 얘기를 꺼냈다. 각자 다른 생산품을 가지고 나와 서로 바꿀 수 있는, 이를테면 물물교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시장 형태라고 대답한다. 보통 행정구역 단위로 장이 서고, 이쪽 지역은 열흘에 한 번씩 장마당이 열린다고 했다. 전국적으로 장마당이 열리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 공화국은 생산, 분배, 교환, 소비의 경제형태가 완벽하게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며 본인의 의견을 피력한다.
 
“전기사정이 긴장하지 않습네까?”
“그렇습네다.”
 
운전사 방 동무가 물으니, 안내원이 답변한다. 전기사정이 좋지 않다는 얘기다.

최제원 씨 댁을 방문하다

농가를 방문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러시라며 선선히 앞장을 선다. 길가 담 밑 텃밭에  배추가 탐스럽게 여물었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니 마당을 빙 둘러 파, 무, 배추, 미나리 등 채소를 심어놓았다. 감나무에 감이 탐스럽게 열렸다. 방문 앞에 ‘10 인민반 최제근’이라는 문패가 붙어있다. 바로 밑에 ‘선군생활문화 모범가정’이라는 표창장이 액자에 넣어 걸려있다. 방충망 뒤로 거실이 보인다. 주인이 나와 반갑게 맞아준다.
 
방에 들어가 통성명을 했다. 나이를 물으니 올해 예순 아홉이시란다. 비닐 장판이 깔려있고, 테이블 위에 TV가 놓여있다. 예쁜 커버를 씌워놓았다. 방을 둘러보니 ‘장군님 식솔’이라는 액자가 문지방 위에 걸려있다. 한 장짜리 달력이 유리문에 붙어있고, 졸업사진과 표창장이 벽에 걸려있다. 가족사진을 여러 장 액자에 넣어 걸어두었다. 몇 가지만 빼면 우리네 옛 시골 안방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벽시계가 2시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어떻게 살아가시냐고 물었다. 장군님 덕택에 잘 살고 있다는 답이 돌아온다. 방바닥에 공책이 펴 있어 집에 학생이 있냐고 했더니, 좀 전에 손자가 숙제를 하더니 놀러나간 모양이라고 대답한다.
 
방바닥에 놓여있는 공책을 펼쳐보았다. 초등학생 국어 노트다. “짐승 다루는 말, 이라는 제목 아래 (소-이랴, 와와), (돼지-꿀꿀...), (고양이- 야웅), (말-쩌쩌), (닭-꺼꺼...), (개-뭉툴이)”라고 씌여있다. 개는 왜 뭉툴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병아리를 보고 기를 쓰고 쫒아 오던 족제비는 개가 나타나자 기가 죽어 비실비실 뒤걸음을 쳤다”는 문장을 써놓았다. ‘기를 쓰고’와 ‘기가 죽어’를 넣어 짧은 글짓기를 하라는 숙제인 모양이다.
 
또 다른 페이지에는 “물음문- 공원에 가니?, 추김문- 공원에 가자, 시킴문- 공원에 가거라” 하는 내용도 있다.  
 
옆방을 좀 구경할 수 있냐고 했더니, 그러시라며 안내해준다. 아주머니가 먼저 들어가 얼른 방을 치운다. 창문 왼쪽에 재봉틀이, 오른쪽은 책장이 놓여있다. 책장 앞에 작은 책상이 놓여있는데 손자 공부방으로도 사용하는 모양이다. 곡식포대가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취사는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물었다. 매탄가스를 이용한다고 한다. 가축의 분뇨를 한데 모아두면 가스가 나오는데 그것을 이용한다는 얘기다. 부엌으로 안내를 해서 이동식 작은 버너에 불을 붙혀 가스를 켜 보인다. 올망졸망 부엌살림이 보인다. 냄비도 보이고 얇은 망사로 덮어 놓은 음식물도 보인다. 부엌 바닥에 상을 펴놓고 며느리가 수돗물을 내려 설거지를 하고 있다. 이 시간에 며느님이 집에 있는 걸 보니, 손님이 온다고 불러왔는지도 모르겠다.    
최제근 씨 집을 나와 들판 가운데 타작현장을 가보기로 했다. 트랙터를 이용하여 타작을 하는 현장이다. 마침 휴식 시간이다. 일하는 분들과 얘기를 나누고 나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니 아가씨가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친다. 어렵게 사진을 찍었다. 티 없이 웃는 아가씨의 모습이 가을 하늘을 닮았다. 

▲ 초등학생인 손자의 국어 노트. [사진제공-정찬열]

 

▲ 이동식 작은 버너에 불을 붙혀 매탄가스를 켜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 며느리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어렵게 사진 한 장을 함께 찍었다. 가운데 남자가 안내원 강경일 씨다. [사진제공-정찬열]

 

사리원, 봉산탈춤 경연대회가 매년 경암루에서 열린다고
 
사리원 가는 차 안에서 김 참사가 에이스침대 안유수 회장의 얘기를 들려준다. 이곳 사리원 출신인 그가 고향을 위해 극장을 세우고 도로 포장을 하는 등,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금년에도 컨테이너 22대 분량의 비료를 북한에 지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향은 모두에게 그런 곳이다.
 
공회당 앞 광장에 도착했다. 한쪽에서 여러 명이 널어놓았던 옥수수를 담고 있다. 그 뒤로 “조선속도 창조의 불길로 생산과 건설에서 일대 앙양을!” 표어가 보인다. “조선은 결심하면 한다”는 구호도 걸려있다. 광장 저쪽에서는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사리원 애육원을 방문할 차례다. 마당에 미끄럼틀, 시소 등 각종 놀이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346명의 고아를 돌보는 곳이란다. 50대로 보이는 여자 원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우리 원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고 부연한다. 5,6살 아이들 교육과 육아를 책임지는 곳인데, 그 이전은 유아원에서, 그 이후는 유치원에서 맡아 기른다고 한다. 1979년부터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 좁아 신축 예정이란다. 교사 47명(남,7, 여40)이 일하고 있으며,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벽에 일과표가 붙어있다.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일정이 빽빽하다. 교실을 돌아보는데 복도에 ‘오늘은 정말 오실까’라는 제목의 그림이 노래가사와 함께 붙어있다. 그리운 아버지 장군님을 기다린다는 가사다. 아이들이 율동을 하다가 손을 흔들어준다. 입을 쭈욱 내밀며 장난을 걸어오는 아이도 있다.
 
경암루에 들러보자고 한다. 경암루는 1436년에 세워진 건물로 사리원 중심부에 위치한 공원 안에 있다. 입구에 민속놀이터, 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공원 주변에 첨성대, 광개토대왕비 모조 모형이 세워져있다. 경암루 쪽을 바라보니 마침 오늘이 일요일이어선지 결혼 커플이 올라가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원래 사리원은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면소재지였는데 지금은 황해북도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인구는 30만 정도라고 한다. 봉산탈춤의 본향인 봉산탈춤 경연대회가 추석 무렵에 매년 이곳 경암루에서 열린다고 한다. 농장별, 탈춤경연을 통하여 대를 이어 후계자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차를 타고 산을 빙 돌아 꼭대기에 있는 ‘선군정’에 올랐다. 사리원 일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성불사가 있는 정방산이 지척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운하가 시내를 통과하여 저 들판의 농사를 짓게 된다고 안내원이 설명을 덧붙인다. 이곳 특산물이 무어냐고 물었다. 경암 포도주와 미나리가 유명하다고 한다.
 
선군정에 올라온 아이들을 만났다. 중학생 정도로 보였는데 몇은 고등중학교 졸업반이라고 한다. 남쪽으로 말하면 고3이란 얘기다. 좀 놀랐다. 졸업한 다음 계획을 물어보았더니 군에 입대할 계획이란다. 아이들이 똑똑하고 당차다. 저렇게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사회의 희망이다.    

▲ ‘오늘은 정말 오실가’라는 제목의 그림. [사진제공-정찬열]

 

▲ 아이들이 율동을 배우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경암루, 신랑 신부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정찬열]

 

▲  사리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개성 도착, 온돌방에 누워 불을 껐더니 창호지문에 댓잎 그림자 흔들린다

개성을 향해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달린다. 마주 오는 자동차가 간간히 스쳐 지나갈 뿐, 도로를 전세 내어 달리는 기분이다. 검문소를 몇 번 통과했다. 개성이 가까워 오자 안내원이 저 산을 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개성 뒷산인 송악산이다. 임신한 여인이 머리를 풀고 누워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 송악산을 어머니산, 혹은 자모산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개성 시내로 들어선다. 개성은 우리나라의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의 옛 수도다. 고려왕조와 함께 500년 가까이 한민족의 수도로 군림했다. 수도일 뿐만 아니라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기와집 처마를 따라가면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는 개성. 화려했던 시절을 꿈꾸고 있는 듯, 옛 도성이 어둠에 잠기고 있다.
 
개성공단 출퇴근 버스가 지나간다. 가로등 없는 골목길이 오히려 정겹다. 잠자리는 한옥으로 정했다.
 
저녁식사가 나오는데 13첩 밥상이다. 열세가지 반찬이 올라왔다. 반찬 그릇이 고만고만한 작은 놋그릇이다. 이런 밥상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식사를 하는데 전기가 왔다 갔다 한다. “전기가 긴장합네다” 내가 농을 건넸더니 운전사 방 동무가 소리 내어 웃는다. 
 
잠자리는 온돌방에 이불을 깔아놓았다. 불을 껐더니 창호지 문에 댓잎 그림자가 흔들린다. 저런 풍광을 본 지가 30년도 넘은 성싶다.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데 마당 건너 별채에서 코 고는 소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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