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 / 동국대학교 북한학 박사 졸업

 

약석천년재(藥石千年在) 약산의 바위는 천년을 여기 있고
청강만리장(晴江萬里長) 맑은 강은 만리 먼길을 흘러간다
출문일대소(出門一大笑)  문을 나와 크게 한번 웃어보고
독립의사양(獨立倚斜陽)  지는 해에 기대어 나홀로 서있다.

- 약산동대(藥山東臺)  이유태


  진달래는 한반도에서 흔하디흔한 꽃 중 하나이다. 이른 봄, 산 중간 노란 개나리와 분홍 진달래는 봄의 생명력을 의미했다. 겨우내 집안에 있었던 여인네들은 분홍색 진달래로 화전을 만들어 새봄 집안의 우환으로 없애고 소원을 빌었다. 한반도 어디나 피어나는 진달래지만, 진달래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 이후 자연스레 역시 영변의 약산과 연결되었다. 이렇게 김소월은 분단으로 70년 동안이나 가보지 못한 영변의 약산을 진달래로 기억하게 하였다.

▲ 약산 진달래꽃.

  영변읍에서 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구룡강 왼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높이 480m인 약산은 그 이름처럼 돌미나리와 명나물, 두릅 등 약초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했고, 약산의 동대는 오래전부터 평안남북도에 있는 여덟 곳의 명승지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약산의 또 다른 유래는 산 아래에 있는 서운사 근처에 유명한 약수에 사람이 모여 소란스럽게 해서, 수행을 하는 사찰이 몰래 약수를 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약초와 약수로 유명했다는 것이다.

  약산은 제일봉과 제일봉에 있는 큰 바위인 동대, 깊은 벼랑 사이의 바위 봉우리로 솟은 학벼루 등 기암괴석, 절벽과 울창한 수림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특히 약산 제일봉에 있는 큰 바위인 동대에서 구룡강과 대령강, 저 멀리 묘향산 등을 조망하는 풍광이 아름다워, 이유태, 김소월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시의 소재로 삼을 정도였다.

▲ 그림 . 약산 절벽.

  또한 험한 산세로 유명하여 고구려 시대 외침을 막기 위한 성을 쌓기도 했다. 연주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영변의 성은 항아리를 닮아 튼튼한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철옹성(鐵甕城, 북한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 36호)으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서 감강찬 장군이 거란군을 섬멸했고, 몽골군 등도 이곳에서 물리친 곳으로 서북 방어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또한 임진왜란에는 선조가 3일간 피난하여 머무르기도 했다. 그중 약산성은 성의 서쪽을 방어하고 있는데, 동, 서, 북의 세면은 절벽을 자연 성벽으로 삼았다. 동대의 절벽은 단지 군사적으로 활용된 것은 아니고, 많은 세력가와 문인들이 시와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은 화선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 약산 천주사.

   약산에는 앞서 거론한 서운사와 천수사 등 고찰이 남아있다. 서운사(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 50호)는 고려 충목왕 때 건립되었고, 천주사는 조선시대에 건립되었다. 특히 천주사(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 46호)는 현존하는 북한의 사찰 중 단청이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랫동안 군사의 요충지로 활용되면서 주변에 무기고 터도 있으며 절집 양식도 일반적인 절집이 아닌 궁궐이나 관청에 가까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인조시기 평안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이괄이 궁전으로 이용했다는 이야기도 전승되고 있다.

  북한 정권은 약산을 개발하여 주민들의 휴양지로 이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광편의를 위해 약산동대로 올라가는 약산다리 폭을 확장하고 천주사까지 길과 여러 등산로를 보수했다. 또한 동대 전망대를 보수하고 천연기념물인 거북바위 옆에 전망대를 새로 만들었으며, 버스주차장과 식사터, 휴식터를 만들어 관광명승지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현재 남한주민에게 영변의 약산은 진달래와 함께 핵발전 시설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심지어 영변의 핵발전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까지 창작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영변하면 약산의 진달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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