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10월 6일 (월요일) 맑음. 북한 방문 3일 째다. 6시 10분 기상. 호텔 마당에 안내원이 벌써 나와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대동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어제와는 반대 방향이다. 둑길을 걸어간다. 자그마한 흰색 애완견을 앞세우고 중년남성이 지나간다. 날씨가 흐리다. 저녁에 비가 내렸는지 도로 곳곳 움푹한 곳에 물이 고여 있다. 왼쪽으로 강변도로가 눈 아래 보이고, 강 건너 쪽엔 양각도 호텔이 서있다. 48층 건물이며 1천개 가까운 객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른 아침의 평양시내 산책

  이른 아침이라선지 사람이 많지 않다. 오른쪽 둑 아래 큰길 저만치 남자가 리어커를 끌고 간다. 리어커를 타고 가는 여인이 아내인 모양인데, 무어라 얘기를 나누며 함께 일터로 가는 모습이 정겹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변에 사람들이 많아진다. 둑에 서서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는 아주머니. 가져온 소형 녹음기를 틀어놓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할머니들. 강변 공터에 마련된 연습장에서 배드민턴 놀이를 하는 사람들. 운동부 선수들이 유니폼을 입고 단체로 구보를 하고 있는 모습 등. 강변 풍경이 다양하다. 대동강 가운데 준설선이 불을 켜놓고 작업을 하고 있다.

▲ 강변 공터 연습장에서 배드민턴 놀이를 하는 사람들. [사진제공-정찬열]

 
  돌아가는 길은 김책공업종합대학 앞쪽을 통해 시내 구경을 하면서 가기로 했다.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다. 학교 문 앞에 “장군님 따라 천만리”라고 새겨진 하얀 돌이 세워져있다. 학생들은 대부분 검은 양복에 구두를 신고 넥타이를 단정히 맺다.  긴팔 와이셔츠를 입은 학생도 간간히 보인다. 무거워 보이는 검은 가방을 맨 남학생이 노트를 보면서 지나간다. 뒤따르는 학생도 책을 읽으면서 걷는다. 나도 시골에서 중학을 다닐 때 영어 단어장을 들고 학교를 오가면서 외우던 시절이 있었지만, 저렇게 대학생들이 책에 빠져 거리를 걸어가던 모습은 기억이 별로 없다.

  거리에 리어커를 세워놓고 청소를 하는 사람이 보인다. 평양국제문화회관 앞을 지난다. 젊은 아주머니 세 명이 무거운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걸어간다. 곡식자루인 모양이다.  “윤이상 음악당” 이란 글이 멀리서도 똑똑히 보인다. 경남 통영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음악당이 평양에 있는 줄은 몰랐다.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갰다.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봉화역이다. 시계가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다. 왼쪽은 아파트 단지다. 9층 건물이다. 베란다에 화분이 놓여있다. 4거리에 여자 교통순경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신호등 앞에 서있는 교통순경이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아파트 단지. 9층 건물이다. [사진제공-정찬열]

  
  호텔에 돌아왔다. 1시간 30분 걸렸다. 평소에 않던 아침 산책을 하니 밥맛도 좋고 몸이 가볍다. 아침 식사는 어제처럼 뷔페식이다.

  밥을 먹고 3층 숙소로 올라오니 어디서 경쾌한 음악소리가 들린다. 밖을 내다보니 뒷마당에서 남녀 백여 명이 어울려 춤을 추고 있다. 호텔 종업원들이다. 댄스를 지도하는 여자의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만경대고향집을 방문하다

  오늘 오전 일정은 만경대 방문이다. 운전사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 첫날 공항에 마중 나왔던 방 동무다. 아까 보았던 춤추는 사람들 얘기를 했더니, 얼마 남지 않은 당창건일에 나가기 위한 합동연습일거라고 설명해준다. 서서히 출발하면서 김 참사가 묻는다.

  “방 동무, 까스가 충분한가 보시라우.”
  “한 눈깔 밖에 안 남았시유.”
  “기러먼 까스를 넣고 갑세다.”

 길가에 빨간 글씨로 크게 쓴 “승리의 신심 드높이 강성국가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비약의 불바람을 세차게 일으켜나가자!”는 현판이 보인다. 주유소에 차들이 밀려있다. 가격표시판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공무를 수행하는 차들이 와서 개스를 넣는 곳인 모양이다. 

  만경대에 도착했다. 김일성 주석의 고향집으로 평양을 방문하는 사람은 대부분 다녀가는 곳이다. 만경대(萬景臺). 만 가지 경치가 보이는 곳이라는 의미라 했다. 김일성의 어린 시절 얘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를 안내원이 설명해준다. 지게와 호미, 쟁기 등 옛 농기구, 그리고 찌그러진 항아리를 포함한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언덕을 따라 만경대 정자에 오르니 멀리 평양시가 눈에 들어온다. 여자 안내원의 나긋나긋한 말씨가 착착 귀에 감긴다. 

▲ 만경대 김일성 생가 앞에서. [사진제공-정찬열]

  남한은 박정희 생가가 경북 구미에 조성되었고, 노무현 생가는 경남 봉하마을에 있다. 봉하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자그마한 초가삼간이었다. 그가 몸을 던졌던 부엉이 바위가 지척에 건너다 보였다. 김대중 생가는 전남 신안,  외딴 섬 하의도에 있다고 들었다.

해당화 식당, “료리는 과학이며 예술입니다”

  점심을 좀 특별한 곳에서 먹자고 했더니 평양시내 해당화 식당으로 안내한다. 작년에 지었다는 6층 건물이다. 지하에 주차장이 있고, 1층은 상점과 일반 식당, 2층은 연회장과 철판구이 전문, 3층은 목욕탕과 물놀이장, 4층은 한증막과 이발관 미용실 당구장, 5층은 각종 료리실습실과 료리전자 도서열람실, 6층은 커피샾이다. 건물 전체가 먹고 노는 곳으로 이루어진 최신식 빌딩이다. 외국 관광객을 위한 필요도 있겠지만, 이런 곳을 찾는 주민이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엘리베이터를 내리니 복도에 “친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주체 102(2013)년 현지지도하실 때 들리시었던 철판구이집”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주체 102년이 무슨 뜻이냐고 안내원에게 물으니, 김일성이 태어난 해로부터의 햇수를 말한다고 한다.

 잘 보이는 벽 중앙에 김정일이 요리사 모자를 쓰고 요리하는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바로 아래 “료리는 과학이며 예술입니다”라는 글이 붙어있다. 그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어느새 알고 직원이 달려오더니 필름을 지워달라고 한다. 저렇게 인민과 친숙한 모습을 널리 알리는 게 좋은 홍보가 아니냐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다. 사진을 지울 수밖에.

  실내장식은 원목을 가져다 고급스럽게 꾸몄다. 철판구이를 주문했다. 쉐프 모자를 쓰고 흰 가운을 입은 요리사가 요리를 시작한다. 중국에 유학하여 배워왔다고 한다. 철판을 달군 다음 고기를 구워내는데 요리칼을 다루는 솜씨가 아직은 좀 서툴다. 미국에도 ‘베니하나’라는 비슷한 형태의 음식점이 있는데 그곳 요리사의 현란한 칼솜씨에 비하면 좀 못하다는 얘기다.

  음식 맛이 괜찮다. 술 한 잔 반주로 간단히 했는데 합하여 일인당 30달러 정도. 미국과 비슷한 가격이다. 나오는 길에 연회실을 잠깐 둘러보았는데 화려하게 꾸며놓았다.

  밖으로 나와 의자에 앉았다. 10월답지 않게 날씨가 따뜻하다. 북한은 올해 100년만의 가뭄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력발전소가 제 기능을 못해 전기사정이 힘들다고 한다. 길 건너에 “위대한 변혁의 해”라는 구호가 붙어있다.

  학교가 끝났는지 여대생들로 보이는 한 무리가 지나간다. 모두 하이힐 구두를 신었다. 진청색 유니폼을 입었는데 대부분 양장이고 몇 명은 같은 색깔 한복을 입었다. 바람이 치맛자락을 슬쩍 건들고 달아난다. 

 소화도 시킬 겸 근처 대동강 둑을 걸어간다. 강변에 낚시꾼 몇이 앉아 낚시를 하고 있다. 강둑 버드나무 늘어진 잎이 강바람에 흔들거린다. 둑 옆에 만들어진 롤러스케이트 장에서 아이들 몇이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 여자들이 대부분 하이힐 구두를 신었다. [사진제공-정찬열]

모란봉 공원에서 만난 결혼 풍경과 춤추는 아주머니들

  오후에는 모란봉 공원을 올라갈 예정이다. 차를 타니 금방 모란봉 입구다. 평양거리는 교통체증이 없다.

  입구에 차를 세우고 안내원과 함께 걸어간다. 운전사는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입구에 ‘모란봉공원전경도’가 큼직하게 그려있다. 모란봉이란 이름은 공중에서 보면 산 모습이 모란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 했다.

  조금 올라가니 신랑신부가 친구들에 둘러싸여 사진을 찍고 있다. 여러 명의 친구가 카메라를 가지고 왔다. 신랑은 양복을 입고 왼쪽 가슴에 큼지막한 꽃을 꼽았고, 신부는 한복을 곱게 차리고 머리에 팔랑거리는 꽃 몇 개를 얹었다. 신부가 예쁘다. 허긴 예쁘지 않는 신부가 어디 있겠는가. 신랑 서른한 살, 신부 스물네 살. 같은 직장에서 만나 연애를 했다고 한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신랑 집으로 가는 길에 공원에 들러 사진을 찍고 있는 중이라 한다.

  사회자가 신랑 신부를 나무 옆에 세워 놓고, 나무에게 말을 걸어보라고 한다.

 “이 나무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나무처럼 가지를 치고 오래오래 잘 살아봅시다.”

 배우처럼 제법 능숙하게 신랑신부가 대화를 나눈다. 주위의 친구들이 짓궂은 농담을 던진다. “자, 이제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사회자가 말하자 신랑신부가 걸어간다. “뒤로 돌아 오세요” 신랑신부가 되돌아 걸어오자, 일제히 환영의 박수를 친다. 이렇게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집에 가서 하룻밤을 잔 다음, 다음날 신부 댁에 들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단다. 그리고 마련해 둔 신혼살림을 가지고 신랑집으로 가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된다고 했다. 신혼여행 같은 건 없냐고 신랑 친구에게 물었더니 “우리 북조선에선 그런 절차는 없습네다”고 간단히 대답한다.

▲ 결혼 커플이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결혼 풍경을 지켜본 다음 발길을 옮긴다. 대여섯 명의 노인들이 돌계단 위에 비닐을 깔고 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다. 빈 술병 몇 개가 보인다. 인사를 건넸더니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나에게 잔을 권한다. 평양소주다. 은퇴 노인들이라고 소개를 하며 이렇게 친구들과 소일하는 게 하루일과라고 했다.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도 많이 보던 풍경이다.

  김 참사는 저만치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길가 공터에서 나이든 아주머니 20여명이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한 분에게 “친구 분들이 함께 놀러오셨냐”고 묻자, “자연 군중이라요”라고 대답한다. 노래를 틀어놓으면 누구라도 뛰어들어 흥겹게 놀면 된다는 말이었다.

  작은 호수 근처로 걸어가는데 그림 그리는 학생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한 아이는 FIFA 로고가 새겨진 후드를 입었다. 꽤 잘 그린 그림 한 장이 눈에 띈다. 중학생처럼 앳되어 보이는 학생에게 물어보니 평양미술대학 3년생이란다. 나이 열여섯, 이름은 김건명이란다. 내가 수첩에 이름을 적어 넣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김권명 이라고 고쳐 말해준다. 월반한 학생이라고 김 참사가 설명해준다. 재능이 특별하면 몇 년씩 월반할 수 있다는 얘기다.

  70세가 넘어 보이는 노인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수묵화다. 찬찬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림이 좋습니다”고 하자 그려놓은 그림 한 장을 가방에서 골라주신다. 그냥 받기가 미안해 김 참사에게 얼마정도 드리면 결례가 되지 않겠냐고 가만히 물었다. 연방죽과 절벽이 어울려 경치가 그만이다.

▲ 그림 그리는 학생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또 다른 결혼 커플이 사진을 찍고 있다. 휴일도 아닌데 공원은 늘 이렇게 결혼한 사람들로 붐비는 모양이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길 따라 내려오고 있다. 다시 보니 20명 정도의 아이들 세 그룹이다. 선생님의 인솔을 받아 걸어오는 아이들에게 “몇 살이에요” 묻자, “다섯 살이에요” 입을 모아 대답을 한다. 소리치는 아이들의 입이 병아리 주둥이 같다. 표정이 밝고 맑다. “소풍 왔나요?” 묻자, 자연학습을 나왔다고 선생님이 대신 대답해준다.

▲ 소리치는 아이들의 입이 병아리 주둥이 같다. [사진제공-정찬열]

  바로 왼쪽에 ‘애련정’이라는 정자에서 한 무리의 나이든 남녀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춤추는 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을밀대를 향해 올라가는 길에 어떤 할머니가 바위에서 책을 읽고 앉아계시기에,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보고 계시냐고 물으니 책을 보여주신다. ‘등에’라는 책이다. “무슨 내용이에요, 재미있습니까” 하고 묻자, “이거, 예수 믿지 말라는 책이야요” 하고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을 주신다.

을밀대에 오르다

  을밀대(乙密臺)에 올랐다. 허리 높이의 돌기둥 위에 키 높이의 나무기둥을 올려놓은, 기둥 열 개가 받치고 있는 단층 정자다.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 내성을 쌓을 때 군사지휘처로 지은 건물이다. 을지문덕의 아들인 을미장군이 쌓은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전시에는 군사지휘소로 평시에는 정자로 쓰였던 모양이다. 을밀대를 빙 둘러 허리 높이로 돌벽이 둘러 있고, 한 발 간격으로 네모진 구멍이 나 있다. 저 구멍을 통해 활을 날렸을 터이다. 앉아서 구멍을 통해 내려다보니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오는 적군을 향해 화살을 당기는 궁사가 된 기분이다.

▲ 을밀대에 올랐다. 남녀가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망루에 서서 바라보니 대동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높푸른 가을 하늘, 그 아래 푸르게 굽이쳐 흘러가는 대동강. 그리고 저만치 강변에 부벽루가 있다.

  ‘부벽루’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와 시구가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읽었던 것인데 몇 십 년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시인이 부벽루에 올라 아름다운 경치에 취했는데 기둥에 붙은 시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모두 뜯어버리고 자기가 시를 지었다. 그런데 몇 자를 쓰고 더 이상 시가 써지지 않아 울면서 떠나갔다는 얘기다. 그가 쓴 시의 마지막 부분 “까맣게 점 찍은 듯 산,산,산...”이라는 구절도 생생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였는지 중학교 때 교과서였는지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이야기라 잊혀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후, 시인이 여말 김황원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9년 전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 대동강변 ‘련광정’에 걸려 있던 현판,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를 접할 수가 있었다. “긴 성벽 한쪽 면에는 늠실늠실 강물이요, 넓은 벌 동쪽 끝으로는 띄엄띄엄 산들일세”라는 뜻이다.

  그 이야기가 실린 교과서가 어느 때였는지 늘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북한을 방문하게 되면서 우연히 유흥준 씨가 쓴, <나의문화유산답사기 4>를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 교과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에 실렸다고 했다. 저자가 필자와 비슷한 나이니, 같은 교과서를 배웠던 게 틀림없었다.

  답사기에는 <대동강>이라는 단원으로 김황원 이야기가 실려 있는 1962년도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가 누렇게 바랜 사진으로 나와 있었다. 책 내용이 나와 있는 사진이 보이는데 높다랗게 을밀대가 있고 그 아래 대동강 가에 부벽루가 있었다. 단원 전문이 거의 그대로 실려 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 글을 읽는 동안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시절로 돌아갔다. 3학년 때의 담임선생이며, 내 짝궁이며,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위에 소개한 김황원의 시는 초등학생 수준에 맞게 다음과 같이 실려 있었다.

  평양성을 끼고 흐르는 강물,
  아, 넓기도 하여라.
  강 건너 멀리 아득한 벌판 동쪽에는
  점 찍은 듯 까맣게 산, 산, 산.......  
 
  그러고 보니 마지막 줄 “점 찍은 듯 까맣게 산, 산, 산.......”을 나는 “까맣게 점 찍은 듯 산,산,산...”으로 잘 못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뭐 그런 게 대수랴. “산, 산, 산...” 이라는 끝 대목이 워낙 강렬하였으니 그 부분이 틀리지 않았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초등학교 3학년 열 살쯤의 나이에 배웠던 것을 60년도 넘은 지금 생생히 떠올리고 있으니, 미완성된 이 시가 어린 우리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렇게 어떤 장소와 관련된 문학작품은 독자를 통해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 글에 나와 있는 현장을 찾아가 보고 싶도록 만든다. 해남 땅끝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걸어서 종단할 때,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란 작품의 현장인 강원도 창평 땅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필자의 수필집 <쌍코뺑이를 아시나요>에 나오는 “쌍코뺑이 언덕”을 보려고 사람들이 필자의 고향을 찾아오더라는 얘기를 마을 형님으로부터 들은 적도 있다.

  을밀대에서 바라보니 건너편 쪽 봉우리에 망루가 보인다. 칠성루라 했다. 성벽 뒤로 돌아가 을밀대를 올려다보니 튼튼한 돌벽이 아슬하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흠하나 없는 걸 보니 당시의 성 쌓는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만하다.

▲ 을밀대를 올려다보니 튼튼한 돌벽이 아슬하다. [사진제공-정찬열]

  을밀대 계단 앞쪽에 남녀가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이곳에선 주패놀이라 부른단다. 김 참사에게 카드는 서양문물인데 어떻게 주민들이 카드놀이를 하느냐고 묻자, 벌써 오래전 군인들이 무료한 시간에 카드놀이를 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하락을 했단다. 그래서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주패를 즐기게 되었다는 얘기다.

   을밀대를 떠나 길 따라 내려오는데 “국보유적 제1호 평양성”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길 따라 키 높이로 아래까지 뻗어있는 돌담이다. 화장실을 찾아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두 아이를 데리고 언덕 아래서 은행을 까고 있다. 정주에 사는 데 평양 딸네 집에 왔다고 한다. 사는 게 어떠세요, 물었더니 그냥 희미하게 웃으신다.

  중년이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 세 분이 언덕을 올라오신다.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십니까” 물었더니 “감찬 성에 갑네다” 대답한다. 그러고 보니 성벽 넘어서 노래 소리가 들린다. 아주머니를 뒤따라 내려갔더니 강감찬 장군 동상이 보이고 바로 앞에 정자를 세워놓았다.   대동강이 한 눈에 굽어보인다. 경치 좋은 곳에 정자가 세워진다. 여기서도 정자가 가득하도록 많은 분들이 어울려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얼핏 서른 명은 넘어 보인다.  녹음기 한 대를 틀어 놓고 빙빙 돌며 흥을 돋우고 있다.

▲ 강감찬 정자, 많은 분들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시간이 꽤 지났다. 김 참사와 함께 소나무 숲길을 내려오면서 보니 소나무 마다 중간쯤에 비닐을 감아놓았다. 벌레를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 때 한국에서 솔잎혹파리가 번져 소나무를 거의 전멸 상태에 몰아간 적이 있었다. 저렇게 감아놓은 비닐에 겨울을 나기 위해 벌레가 모여들면 고스란히 벗겨가 불태워버린다고 한다.

어두워지자 대동강엔 젊은 남녀들이

  숙소에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김 참사와 함께 대동강 산책을 나갔다. 사람을 쉽게 판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둡다. 깜깜한 지하 통로를 건너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가방, 반값에 팝네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아주머니가 가방을 사라고 한다. 서울 지하철 계단에서 바닥에 물건을 펼쳐놓고 세일을 하던데 이곳은 저렇게 물건을 파는가 보다. 몇 발자국 걷다보니 길가 모퉁이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할머니가 빵과 옥수수를 팔고 있다.

  9년 전 방문 했을 때, 평양 시내는 밤이 되면 우리가 묵은 고려호텔 주변에 가로등 몇 개가 서 있을 뿐, 해가 지면 거대한 도시가 어둠 속에 잠겨 들어갔다. 어둠에 잠긴 도시는 적막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 같지만 아직 힘든 터널을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대동강 가에 이르렀다. 강 건너편도 이쪽도 깜깜하다. 잔잔한 물결 위에 달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둠 속에 대동교 아치가 둥글게 반짝거리고 그 빛이 강물 위에 반사되어 강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뻗어있다. 왼쪽으로는 주체탑 긴 그림자가 물에 어리고, 오른쪽은 양각호텔의 높은 등불들이 물 위에 깜박거린다. 캄캄한 속에 작은 불빛들은 유난하다. 이렇게 도심 속 강가에서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인지도 모른다.

  어둑한 강가를 청춘 남녀가 손잡고 거닐고 있다. 강변을 천천히 걸어가는데 오른쪽 숲속 어둑한 벤치에서 청춘남녀가 속삭이더니 우리가 지나가자 얘기를 멈춘다. 두 개의 실루엣이 하나가 되기도 한다. 청춘의 사랑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호텔로 돌아와 김 참사는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구내 다방에 들렀다.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가 혼자 지키고 있다. ‘전금희’라는 명찰을 달았다. 손님도 나 혼자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눈다기보다 내가 주로 물었다. 집안 이야기, 학교 시절의 이야기, 결혼 이야기 등,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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