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단군구국론의 재확인

▲ 단군 영정. [사진출처 - 대종교]

우리 민족사에 있어 단군은 민족 구난의 상징적 존재였다. 단군구국론이란 바로 이러한 의식을 통해 민족의 위난을 극복코자 했던 우리의 정서를 말하는 것이다. 단군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던 불가(佛家)의 일연이 쓴 『삼국유사』나 유가(儒家)의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 실린 고조선과 단군사화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주적 역사의식의 발로였다는 점을 우리는 경험했다.

고려 공민왕이 요동정벌의 명분을 단군조선에서 찾은 것이나, 조선왕조의 ‘조선’이란 국호 역시 이러한 정신의 계승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조선조 단군존숭의 전통이 우리 민족 정체성 확인의 발로라는 것도 이미 확인된 바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정신을 무시하고 존화사상에 심취한 정통 성리학자들에 의해 단군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기자숭배만이 전부로 알았던 그들은 단군조선이야말로 이풍(夷風)을 벗지 못한 저열한 문화단계로 보았고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한 비합법적인 국가로 매도했다.

성리학자들의 기자숭배는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명에 대한 보은관념으로 존화양이의 정서는 한층 굳어져, 명이 멸망한 후에도 우리만이 유일한 중화국가임을 자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양란 이후 기층사회에 고개를 든 단군숭배 의식은 사회 저변에서 일어났다. 즉 단군을 중심으로 한 주체적 역사의식을 통해 우리의 자주성에 눈뜨고자 했던 반존화주의 열망이 폭발한 것이다.

도가(道家)에 의해 주도된 조선후기의 단군숭배는 단군을 우리나라 도가의 종주로 추앙하면서 단군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였다. 특히 실학자들에 의한 단군과 상고사의 연구는 실존하는 단군의 의미를 더욱 고양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상고사의 지평을 넓히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중화의식에 함몰된 자아 각성에 중요한 디딤돌로 작용하였다.

한말 대종교의 등장 역시 이것과 무관치 않다. 전래의 고신교(古神敎)인 단군신앙의 중흥을 내걸고 출발한 그들의 명분이 ‘국수망이도가존’이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일제하 독립운동의 정신적 동력이 되었던 이 외침은 정신의 망각으로 망한 나라를 정신의 지킴으로 되찾자는 구호였다. 그 정신은 바로 단군이요, 단군정신은 곧 대종교였다. 대종교는 바로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선 것으로 단군구국론의 재확인이었다.

박은식은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강하게 외쳤다. 신규식은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 그리고 역사를 잃어버림이 망국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신채호 역시 단군시대의 선인을 국교이며 민족사의 정화로 보고, 이것을 계승한 화랑을 종교의 혼이요 국수의 중심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모두 대종교의 영향 속에서 이와 같은 의지를 잉태시킨 것으로, 단군구국론과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일제하 대종교의 독립운동은 또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대내외에 천명한 일대사건이었다. 항일운동 본산으로서 역할과 더불어 총체적 저항의 사표를 보여준 점, 그리고 단국구국론을 재확인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종교운동이나 독립운동 차원을 넘어 잠재된 민족의식과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는 등 대종교는 민족정신을 각성시키는 정신적인 에너지원이었다. 참혹한 일제의 억압하에서 분연히 일어난 민족적인 저항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은 바로 대종교정신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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