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월 2일은 63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판문점을 건너 북으로 건너간 지 15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북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거쳐 북측 지역으로 넘어가는데 걸린 시간은 오전 10시 5분부터 20분까지 15분 남짓.

이들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복역한 총 기간 2045년, 1인당 평균 32년 6개월에 비하면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동안 그들은 남에서 북으로 분단을 허물며 넘어갔다.

‘불굴의 통일애국투사’

북에서는 이들이 송환되기 하루 전인 그해 9월 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63명 전원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하는 정령을 발표하고 4일 만수대의사당에서 수여식이 진행됐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수십년간의 옥중고초를 과감히 이겨내며 혁명적 지조와 의리를 지켜 끝까지 싸운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라고 불렸으며, 세월의 힘을 못 이겨 이들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세워진 묘비명에도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북은 이들에게 최고의 영예라고 하는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했으며, 거실과 방 3~4개가 딸린 40~50평의 현대식 아파트에 생활을 전담하는 담당 관리를 두고 지금까지 생활을 보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63명 비전향장기수들의 무사귀환을 기념하는 북한우표.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들 63명의 생애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한명 한명이 주인공인 장편소설로 탄생했는데, 초창기에는 지리산 빨치산 황룡갑 선생을 원형으로 해 김진성 작가가 집필한 『지리산의 갈범』, 함세환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림재성 작가의 『최후의 한 사람』 등이 창작됐다.

송환 당시 45년을 복역해 ‘세계 최장기수’라는 별명을 얻었던 김선명 선생은 송환 후 평양에서 ‘총각 할아버지’ 딱지를 떼고 가정을 이뤘으며, 송환자 중 최연소자이면서 남북어부 출신의 비전향 장기수라는 특이한 이력으로 주목받았던 리재용 선생은 환갑을 앞둔 나이에 딸을 보아 김 국방위원장이 ‘축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또 2003년에는 김중종 선생이 민족언어학 분야에서 이룬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해 김동기 선생이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로 활동하면서 사회정치학 박사학위를 받는 등 북송 비전향 장기수들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송환 8개월만인 2001년 4월 30일 이종환 선생이 42년 5개월의 수형생활을 뒤로 한 채 처음으로 별세했으며, 한달 보름만인 그해 6월 13일에는 윤용기 선생이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78살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을 만큼 학구적이고 열정에 넘치던 김중종 선생이 2009년 11월 20일에,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신혼생활을 시작한 김선명 선생은 2011년 1월 15일 타개했다.

15년이 지난 2015년 6월 현재 생존 비전향 장기수는 63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5명 정도 인 것으로 최근 알려졌다.

재외동포들이 평양의 비전향 장기수 자택을 방문한 뒤 방북기를 통해 전한 소식들을 종합하면, 올해 들어서만 윤희보·방재순·신인수 선생이 타개해 북으로 송환된 1차 비전향 장기수 63명 가운데 생존해 있는 분들은 모두 25명이다.

6.15남북공동선언의 직접적 산물

若事夢魂이 行有跡 이면 門前石路 半成砂(만약 꿈속에 영혼이 있어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문 앞에 놓인 커다란 돌은 다 닳아 모래가 되었을 것이다.)

2000년 송환을 일주일 정도 남긴 그해 8월 26일 비전향 장기수들이 남녘의 동포들에게 통일의 광장에서 다시 만나자며 남긴 말이다.

간절한 염원이 이룬 기적 같은 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자 앞으로 이뤄나갈 통일도 그런 마음으로 함께 만들어가자는 뜻이 담겨있는 고별사인 셈이다.

이처럼 이들의 송환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고 그해 남북의 정상이 만나 발표한 6.15남북공동선언이 없었다면 실현되기 어려운 극적인 사건이었다.

송환대상 비전향 장기수들인 신인영·우용각·최하종 선생들도 2000년 8월 24일 <통일뉴스>와 가진 간담회에서 당시 자신들의 송환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해 발표하자 감격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6.15남북공동선언 제3항에는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고 비전향 장기수 송환 문제가 명시돼 있다.

그러나 비전향 장기수 북송 문제는 1993년 3월 19일, 전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 노인의 송환을 계기로 지난 90년대 내내 남북 공방 속에 물밑에서 계속 논의되어 왔던 사안이며, 특히 북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비전향 장기수 무조건적 북송’이야말로 남북화해의 진정성 있는 표시라며, 남북 정상회담의 전제로 제기하기도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문제는 성격상 두 유형으로 나누어 추진되었다.

하나는 전쟁포로의 국제법상 권리로서 원적지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인민군, 의용군, 빨치산 출신의 전쟁포로 송환문제이고, 다른 유형은 국가보안법 등 반민주악법으로 장기구금 되었다가 풀려난 비전향 장기수의 구속되기 전 거소지 송환문제이다.

두 가지 유형 모두 공통적으로 부당한 장기구금을 당했으며, 잔혹한 고문 등 사상 전향공작에서도 정치적 신념을 지켜왔고 장기간 수감생활에서 풀려나 형식상 ‘자유인’이 되었지만 다시 사회안전법의 규제를 받았다. 또 구속되기 전 거주지가 북쪽이었고 자유의사로 귀향의지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꿈속 영혼이라도 돌을 모래로”

이들 비전향 장기수는 1989년 사회안전법의 폐기와 관련, 1988년 하반기부터 2000년까지 전향 각서에 서명하지 않고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사람들로 총 102명이다. 그 중 이인모 노인은 이미 북으로 갔고 13명이 타계했으며, 나머지 86명 중 남측에 잔존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을 제외한 총 63명이 최종 송환 대상자가 된 것이다.

이들 중 의용군 또는 빨치산 출신이 17명이고 나머지 46명은 공작원으로 남파됐다 체포돼 짧게는 15년부터 길게는 45년까지 복역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연령별로도 70세 이상이 전체의 82.5%인 52명에 이르고, 특히 90살 이상의 장기수도 2명이 있었다. 이들 중 51명은 북쪽에 가족을 두고 있었고 가족이 없는 12명은 남쪽 출신으로 주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 지난해 4월 평양 김동기 선생의 아파트에서 만난 최태국, 최하종 선생의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북쪽에 가족이 없는 사람들 대부분은 남쪽에 가족이 있으나 대체로 연락을 끊고 지내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1차 송환 당시 남북은 정전과 함께 북으로 송환되었어야 하지만 남측에서 재판을 통해 감옥에 가두었던 ‘전쟁포로’, ‘북이 고향인 사람’, ‘남북을 오가는 과정에서 북에 가족이 있는 사람’에 대한 2차 송환을 합의했으나 현재 논의가 중단된 상태이다.

남쪽에 남아있는 비전향 장기수 중에는 안학섭 선생처럼 남쪽에 가족이 있어 1차 송환 당시부터 자의에 의해 북으로 가지 않은 경우도 있고, 2002년 2월 기자회견을 갖고 전향 무효를 선언하고 북송 희망 의사를 밝힌 김영식 선생 등 2차 송환대상자들도 있다.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2001년 당시 33명이던 2차 송환대상자도 많이 돌아가셨고, 지난 7월 8일 김기찬(97세) 선생이 돌아가셔서 실제로 20분에 불과하다”며 “빨리 남북관계가 정상화 돼서 비전향장기수들이 가고자 하는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특히 2차 송환대상자 중 류기진 선생 등 한국전쟁 당시 전쟁포로가 된 5명의 경우 제네바협정과 정전협정에 따라 당연히 송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차 송환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비전향 장기수의 2차 송환은 통한의 생이별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기 위한 인도주의 정신과도 닿아있지만 전체 민족이 겪고 있는 분단된 남북관계의 개선에도 큰 힘이 될 수 있다.

▲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의 묘비로 확인 가능한 생몰연대만 표시. [통일뉴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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