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친구 녀석이 영화 <원초적 본능>의 무삭제판(우리나라에서나 통용될 단어다) LD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는 지속적으로 그 녀석과 접촉하며 협상을 벌였다. 당연히 우리 집엔 LD 플레이어가 없었기에 비디오 테이프로 복사를 해야만 했다. 녀석은 끈질긴 나의 설득에 결국,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무언가를 대신 주겠다는 협상조건에 동의하고 무려 <원초적 본능>을! 복사해 주기로 했다. 으아, 무려 샤론 스톤이라니!

그런데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영화를 복사하기 위해서는 집에 있는 비디오 플레이어를 들고 친히 녀석의 집에 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플레이어의 부피가 크진 않았지만, 아무튼 귀찮은 일임엔 분명했다. 하지만 감히 귀찮다니! 샤론 스톤의 뜨거운 몸짓과 뇌쇄적인 눈빛을 무려 무삭제로! 볼 수 있는데, 감히 귀찮다니! 그야말로 이건 입에 꺼내기도 두려운 건방진 생각이었다. 당연히 나는 맹렬히 녀석의 집으로 비디오 플레이어를 들고 달려갔다. 그리곤 드디어 복사! 이거 불법복제 아니냐고? 날 구속하라! 그러나 나의 샤론을 향한 이 뜨거운 열정만은 구속하지 못하리니!

그렇게 나는 미션을 완수하고 집으로 달려갔다. 백만 대군이 내 눈앞에 버티고 있어도 막지 못하리라. 나의 발걸음을! 그런데! 백만 대군이 아닌 웬 낯선 이가 그만 나의 당당한 보폭에 제동을 걸었다. 그는 군(軍)이 아닌 경(警)이었다. 달랑 한 명이!

뭐야? 당신이 뭔데 감히 샤론 누님과의 데이트를 초장부터 방해하는 거냐! 외치려던 나의 뇌에서 그만, ‘야, 정체성을 자각해, 넌 지금 중딩이야’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렇다. 나는 중딩이었던 것이다. 언감생심 샤론 누님을 합법적으로 만날 수 없는 서글픈 계급이었던 것이다.

“야, 이 비디오 플레이어 누구 꺼야? 너 이거 들고 어디가고 있었어?” 어디서 초장부터 선량한 시민이 될 선량한 학생에게 반말이냐, 그러는 당신은 신분증이나 먼저 봅시다. 관등성명을 대야 하는 것 아니냐, 누가 미란다 법칙을 요구했냐. 하긴 난 범법자가 아니니 미란다 쥬스라도….

그런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분명 나의 소유임이 분명한 비디오 플레이어이건만, 마치 장물을 획득하여 급속히 처분하러 가는 모양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뭐냐, 이 이해하기 싫은 시츄는. 난 샤론 누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비굴한 표정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만 했다.

“아, 제가 친구 집에서 가요프로그램을 복사해서 다시 집으로 가져가는 길이에요. 듀스 아세요? 아님 서태지와 아이들은 설마 아시죠? 춤을 좀 배워볼까 하구요. 헷. 그런데, 아저씨 더운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조금만 더 가면 집인데, 같이 가셔서 시원한 냉수라도 한 잔 하실래요?”

뭐가 그리 말이 많고, 구구절절한 게냐. 내가 생각해도 더럽게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아, 거듭 말하지만 난 중딩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런 말들이 경찰을 더 의심케 한다는 것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내 립서비스를 다 듣고 난 경찰은 “너 잠깐 똑바로 서봐, 손 위로 올리고” 그러더니, 갑자기 내 양 발목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하는 시츄! 아, 이 양반은 내가 발목에 칼을 숨겨두었나 확인한 것이었다.

아니, 이렇게 선량하게 생긴 중학생이 발목에 칼을 숨기고 다닌다면, 이게 나라인가! 이게 과연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질법한 일이냔 말이다. 당신은 당신이 살아가는 이 아름다운 나라의 선량한 중학생을 끝내 믿지 못한 것인가!

끝까지 반말을 투척한 경찰은 내 가냘픈 발목을 확인한 뒤(이럼 그냥 가야 하는 것 아니냐, 양심적으로?) 앞장을 서란다. 어디로? 우리 집으로! 아, 정말 투철한 직업관을 갖고 계신 양반을 재수도 좋게 만났다. 이 동네 원래 이리 유능한 경찰들이 많았냐. 미처 몰랐네. 할 수 없이 난 경찰을 대동하고, 아니 경찰의 무려 호위를 받으며 집으로 왔다. 다행히 부모님이 없으셨기에 망정이지, 오 이게 뭔 아름다운 모습인가.

집에 돌아온 나는 정확히 원 위치에 비디오 플레이어를 안착시켰고, 공약대로 더럽게 차가운 냉수 한 잔을 건넸다. 물론 미소를 머금은 채! 살짝 무안해졌던 것일까. 경찰은 물 한 잔을 냅다 원샷하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매정한 양반, 인사라도 하고 가시지. 암튼 얼렁 승진하시길 바라오. 그대의 그 열정이면 김태촌은 못 때려잡겠소?! 아주 든든하오, 이 나라의 치안이!

음…. 재미없는 이야기, 길게 했다. 이게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경찰과의 첫 개인적인 만남이었다. 그 후로도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경찰을 만나왔지만(오해마시라, 난 그때나 지금이나 한없이 선량하시다. 다만 어린 나이에 호기심이 전체 국민 평균적으로 있었을 뿐. 난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암.) 유독 당시의 기억이 오래 남아있다. <원초적 본능>은 그래서 봤냐구? 아, 다시 떠오른다. 그날의 감동과 격정이! 지금도 난 그녀보다 섹시하게 담배를 태우는 여배우를 본 적이 없다는 정도로 나의 이 뜨거운 마음을 대신한다.

▲ 히가시노 게이고, 『신참자』, 재인, 2012,3. [자료사진 - 통일뉴스]

자, 이제부터 서평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여럿 읽었다. 마니아 수준은 아니기에 전 작품을 읽은 건 아니다. 하지만 작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평가는 존재한다. 그는 인간의 이야기가 담긴, 세상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쓴다. 그게 그의 매력이자 강점이다.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의 모습을 추리와 스릴러에 접목시키는 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신참자>는 언뜻 그저 그런 살인사건 하나를 해결해 나가는 형사의 이야기다. 엽기적인 연쇄살인마도 없고, 기발한 트릭도 없다. 하지만 각종 미스터리 순위의 1위를 차지하고, TV드라마와 영화로까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난 그 무언가가 바로 주인공 형사 ‘가가 교이치로’에게 있다고 본다. 그는 단지 살인사건만을 보는 게 아니라,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경찰, 형사에 대한 정의는 나를 중학교 시절 그 경찰을 떠오르게 했다.

“형사는 수사만 하는 게 아닙니다. 사건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또한 피해잡니다. 그 피해자를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 전 말이죠. 이 일을 하면서 늘 생각하는 게 있어요. 사람을 죽이는 몹쓸 짓을 한 이상 범인을 잡는 건 당연하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철저히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걸 밝혀내지 못하면 또 어디선가 똑같은 잘못이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때 만약, 그 경찰이 비디오 플레이어를 들고 환희에 차 달려가는 중학생을 수상히 여겨, 가는 길을 막고 진상을 파헤치려 했다면, 조금 더 온건하게 접근할 수는 없었을까. 마치 때릴 것만 같은 강압적 자세가 아닌, 동네 아저씨마냥 친근하게 물어볼 수는 없었을까. ‘어딜 그렇게 신나게 가고 있니? 마치 예쁜 아가씨와 데이트라도 하러 가는 얼굴이구나? 얼굴이 빨개졌네?’

하지만 그는 어린 중학생의 몸수색을 아무런 사전 고지 없이 무단으로 길거리 한 복판에서 했다. 유죄로 증명되기 전까지는 무죄라는 기초 상식을 무시하고, 나를 절도범 취급하며, 무려 칼을 찾아내려고까지 했다. 그리고 나의 결백이 밝혀진 뒤에도 일언반구 사과의 말도 없이 사라졌다. 서운한 사람.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것이다! ‘나, 야동 없어요!’

주인공인 형사 가가는 한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가던 40대 이혼 여성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며, 사건의 배경이 되는 거리 일대의 상점가를 돌며 탐문수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강압적이거나 신경질적이지 않다. 오히려 어느 새 상인들의 개인적 고민과 비밀을 이해하며, 무려 다독여주고 해결해 주기도 한다. 그것이 살인사건의 해결과는 그리 큰 관련이 없는데도 말이다.

아울러, 그는 끝내 비극의 원인이 된 ‘가족 간의 사랑’을 이해한다. 정의로우면서도 인정의 끈을 놓지 않는 경찰. 아마 이명박, 박근혜 시대를 살아오며 수많은 경찰들을 길거리에서 목격하고, 또 해야 하는 우리들에겐 반드시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아쉽게도 현실에서 찾기는 극히 어렵지만 말이다.

밀양의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할머니들을 무참히 진압(!)한 뒤, 해맑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여경들, 용산참사, 세월호 참사 앞에 무너진 가족들을 다시 한 번 차가운 거리로 내몰고 짓밟은 경찰들 그리고 지금도 길거리를 점령한 채 오가는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선사하는 경찰들. 그 무리들.

물론 그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국가의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폭력인 그들은 국가의 명령에 순응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아무리 옳지 않은 일이라도 말이다. 그게 그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그들을 ‘권력의 개’ ‘민중을 짓밟는 제2의 용역’으로 부르는 이유 역시 곰곰이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그들이 진정 받들어야 할 대상은 국가가 아닌 국가의 주인, 국민이라는 사실은 자각한 채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경찰의 참다운 모습이 아닐까.

히가시노 게이고를 ‘사회파 작가’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렇게 정당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섹시하고 선정적인 연쇄살인마, 잔혹한 사이코 킬러 등의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는 동시에 잘못된 사회가 만들어낸 잘못된 관계와 그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무엇이 진정한 정의인지 다시 한 번 독자들에게 묻는다. 그 질문은 당혹스럽지만, 또한 고맙기도 하다.

무조건 경찰이 미워 보이는 사회는 분명 잘못된 거다. 공권력에 대한 국민의 증오가 쌓이면 결국 공권력은 그 ‘력’을 잃게 된다. 자명하다. 때문에 경찰을 쳐다보는 우리들의 눈은 슬프다. 그들의 박봉과 과로를 알기에 더욱 슬프다. 국가 권력은 경찰을 개처럼 다룰 수 없다. 그러면 안 된다. 경찰도 국민이다. 그들이 지금보다 정당하고 정의로운 업무에 충실하도록 해야 한다. 그게 도리다.

‘가가’와 같은 형사가 우리에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야근과 잠복을 반복하며, 우리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그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가’들이 힘들어할 때마다 위로와 용기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회정의는 어찌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 경찰이 이유 없이 두렵지 않고, 다가가 먼저 수고한다는 말을 건네고 싶게 만드는 것, 그것이 아마도 가장 이상적인 정의 사회가 아닐까.

따뜻한 미스터리 작품이었다. 아, 오늘은 생각난 김에 샤론 누나와 데이트 한 번?! 물론 이젠 합법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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