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독립운동의 의의

대종교가 한국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민족사회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양상임을 볼 때, 획기적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와 같은 단기간의 혁명적 영향력의 배면에는, 대종교라는 에너지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바닥에 연면히 흘러온 단군신앙을 현대적으로 부활시켰다는 점과, 당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대종교를 국교적 정서로 인식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민족적 위기 때마다 고개를 든 단군구국론의 경험과도 무관치 않다고 본다.

1. 독립운동의 총본산

일제하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이것은 우연히 얻어진 승리와 영광의 기록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은 물론 주요 거점 개척과 참여는 어느 집단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가능했다. 또한 10만여 명이라는 고귀한 희생을 치른 피의 역사로 얻어진 결과였다.

일찍이 나철은 1907년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주도하여 국권회복의 의지를 내외에 천명했다. 그가 1909년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망했으나 정신은 존재한다)이란 명분을 앞세워 부활시킨 대종교의 등장은 구국운동의 일대 전기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대종교는 출발 당시부터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단군교포명서」에 의한 단군신앙의 재천명은 망국의 원인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더불어 민족이 재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확인시켜준 중차대한 선언이었다.

또한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경남일보> 등을 통해 발표된 대종교 중심인물들의 민족의식 고양의 글도 단군과 관련된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 경각심과 함께 조직적 저항의 끈을 묵는 지침 역할을 한 것이다.

대종교는 국내의 기반뿐만이 아니라 1910년 북간도에 교당을 마련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하였다. 1911년에는 나철에 의해 파견된 신규식은 중국 상해에 독립운동의 발판을 구축했다.

나철은 1911년 5월 백두산 기슭 화룡현 청파호의 총본사를 중심으로, 동만주 일대와 노령·연해주 지방을 관할하는 동도교구, 남만주로부터 중국 산해관까지 관할하는 서도교구,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는 남도교구, 북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북도교구, 중국·일본 및 구미지역을 관할하는 해외교구 등의 5개 교구를 획정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의 본산으로서 위상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특히 만주 무장독립운동에서는 이동녕·현천묵·계화·윤정현·황학수·김승학·홍범도·김혁·김좌진·윤복영·이범석·여준·이홍래·정신·이동하·한기욱 등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종교인들이 무장독립운동의 지도자급으로 활동했다.

▲ '청산리독립전쟁' 승리의 신화를 쓴 북로군정서는 서일을 총재로 대종교도들이 주축을 이뤘다. [사진 출처 - 대종교]

특히 나철의 제자 서일을 총재로 대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뭉친 북로군정서의 ‘청산리독립전쟁’의 승리는 한국독립운동사에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918년 대종교 2세 교주 김교헌은 재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결집해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이 선언은 일제에 대한 무장혈전주의 선언으로, 후일 동경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의 기폭제가 되었다. 특기할 사실은 여기에 서명한 39인 가운데 몇 명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대종교인이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파역을 담당한 신규식도 대종교의 시교사 자격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그는 ‘한국민족의 부흥은 반드시 대종교가 발전하는데 있다’는 신념하에 박찬익·조성환·유동열·조완구·이상설 등 대종교의 중심인물들과 활발한 외교활동과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급 이상으로 참여했던 대종교 인물은 이시영·박은식·이동녕·신규식·이상룡·조완구·박찬익·조성환 등을 망라하여 20여 명을 헤아린다.

한편 일제하 많은 지도층 인물들이 국교적 대종교관을 갖고 있었던 것도 대종교가 항일독립운동의 본산 역할을 충분히 했음을 보여준다. 국교적 대종교관이란, 대종교에 직접 입교하지 않았더라도 당시 항일독립운동의 지도층에 있었던 인물들이 대종교를 적극 받아들이려는 정서를 말한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도 신규식·박찬익과 더불어 의형제를 맺고 대종교의 주요 기념일인 어천절 찬송사까지 읊었다. 대종교 국내 총책임자였던 강우가 무오년인 1918년에 이미 이승만을 고유(告由)로서 대종교에 입교시킨 기록이 있다. 이는 대종교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였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註15)

안창호도 개천절 송축사를 통하여 단군자손으로서의 자긍심을 마음껏 흠모했다.註16) 이처럼 당대 대부분의 지도층 인사들은 정서적으로 국교적 대종교관을 갖고 있었다.

백범 김구 역시, 그의 사상적 이상의 좌표를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에서 찾았던 인물로서, 기회 있을 때마다 “배달민족으로서 대종교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언급은 국교적 대종교관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낸 말이다. 곧 대종교는 항일독립운동의 본산이었던 당대의 정서를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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