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올해는 광복 70년 분단 70년이라고 연초부터 꽤 떠들썩했습니다. 제가 1월 미국을 시작으로 오늘 여수까지 여기저기 쏘다니며 ‘강연 특수’를 누리는 것도 이렇게 특별한 해를 맞은 때문이고요. 지난주 광복절은 유별나게 요란스러웠습니다. 광복절 전날을 공휴일로 만들기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빈 수레가 요란하듯 무슨 겉치레 행사만 여기저기서 떠들썩하게 열렸지 우리가 실제로 거둔 것이 무엇인가요? 올해를 ‘통일원년’으로 삼자거나 ‘통일이 참된 광복’이란 말이 많이 나오기도 했는데, 광복절 전후로 분단 70년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좁혀지기는커녕 어제오늘의 남북관계를 보면 오히려 무력충돌에 이어 전쟁까지 터질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어요?

저는 올해 특별한 광복절을 맞아서도 남북 공동행사나 대화의 마당조차 열리지 못한 근본적 배경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친일정신과 뼛속까지 스며든 친미주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친일파들은 북한에 대한 원한과 증오를 증폭시키며 평화통일을 가로막고 있고, 친미파들은 북한이 주적이라고 강조하며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지요. 더욱 심각한 문제는 친일파와 친미파가 한 몸통으로 국회와 정부, 검찰 및 경찰과 군대, 그리고 언론 등 모든 권력수단을 장악한 채 대대손손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민족을 분열시키며 북한과의 대립과 충돌을 부추기는 현실입니다. 북한과의 갈등과 대결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적대적 공존’ 또는 ‘적대적 공생’을 이끄는 겁니다.

마침 광복절을 전후로 요즘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영화 ≪암살≫과 미국에 가서 넙죽넙죽 큰절을 한 새누리당 대표와 국회의원들 덕분에 친일과 친미에 대해 좀 쉽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는데, 먼저 ‘광복’의 감추어지거나 어두운 측면부터 좀 들여다볼까요? 우리 거의 모두 존경하는 백범 김구 선생은 1945년 8월 중국에 머무르면서 일본이 항복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기뻐하기보다 한탄했다고 합니다. ≪백범일지≫에서 일본의 항복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고 표현했지요. 수년 간 애써서 참전 준비를 해온 게 허사가 되어버리고, 우리가 일본과의 전쟁에 한 일이 없어서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작년 8월 출판된 재야 역사학자 김상구의 ≪김구 청문회≫에 따르면, ≪백범일지≫를 이광수가 윤문하는 등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니 관련 전문가들의 연구와 논쟁을 더 지켜봐야겠지만, 김구가 미국에 의한 해방을 아쉬워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구의 한탄처럼 우리 힘으로 해방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에 의해 광복이 주어지는 바람에 한반도는 해방도 되기 전에 38선을 따라 국토가 분단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들어선 3년간의 미군정에 의해 친일파가 척결되기는커녕 권력을 다시 잡았습니다.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 쏴죽이던 밀정이 해방 후 경찰 간부가 되는 것 보셨지요? 영화감독이 막판에 전지현을 시켜 그 악질분자를 처단하는 바람에 울분 속에서 잠시나마 통쾌함을 맛볼 수 있었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아무튼 우리 힘으로 광복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는데, 분단 때문에 참혹한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분단 70년 전쟁 60여년이 되도록 아직도 외세에 휘둘리며 남북의 화해협력과 평화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1945년 8월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일본에 핵무기를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광복이 앞당겨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렇듯 한반도 분단과 전쟁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불러왔는데, 미국에 의한 광복의 어두운 측면 한 가지만 더 밝히겠습니다. 우리 한민족 역시 그 핵무기의 피해자라는 사실입니다. 미국 핵무기 때문에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하고 이에 따라 조선의 해방이 앞당겨졌지만, 핵무기에 의한 피해는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에게도 매우 크고 끔찍했거든요. 한 조사에 따르면 그 원자폭탄의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은 히로시마에서 42만 명, 나가사키에서 27만 명으로 총 69만여 명인데, 이 가운데 조선인은 히로시마에서 5만 명, 나가사키에서 2만 명으로 총 7만여 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방사능 노출로 죽은 사람이 모두 23만여 명인데 이 가운데 조선인은 약 4만 명으로 추정되고요. 조선인이 전체 피폭자 가운데 약 10%이며 폭사자 중에서는 약 17%를 차지한 것입니다. 미국에 의한 광복의 뒷면엔 우리 조상들의 이러한 끔찍한 피해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편, 해방 직후부터 1948년 8월 이승만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3년 동안 한반도에서 신탁통치가 실시된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은데, 이는 심각한 오해요 착각입니다. 신탁통치에 대한 찬성과 반대 논쟁이 투쟁으로 이어지긴 했어도 단 하루도 실시된 적은 없습니다. 1945년 12월 이른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소련이 먼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것도 엄청난 역사 왜곡이고요. 늦어도 1943년부터 신탁통치를 처음으로 제안하고 줄기차게 밀어붙인 나라는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으니까요. 또한 일본과의 전쟁에 소련의 참전을 간청했던 나라도 미국이요,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소련에게 38선을 제안했던 나라도 미국입니다.

1945년 8월 미국에 의한 광복과 그에 따라 1948년 8월까지 실시된 3년간의 미군통치를 통해 빚어진 가장 심각한 폐해는 친일파의 부활이었습니다. 일제 총독부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미군정에서 행정을 맡고, 일본의 앞잡이를 하던 순사들이 다시 경찰이 되었으며,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했던 군인들이 한국 군대의 지도자들로 변신하지 않았습니까? 조선의 젊은 남자들에겐 천황을 위한 군인이 되고 여자들에겐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라고 부추겼던 언론인들과 문인들은 다시 언론과 문단을 장악했고요. 그러기에 천황에 충성하겠다고 혈서까지 쓴 친일파가 대통령이 되고 그도 모자라 그의 딸까지 대통령이 되잖아요?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목숨과 재산을 빼앗기고 광복 후엔 그 후손들이 가난에 허덕이며 비참한 생활을 해온 반면, 일제에 부역하던 사람들은 광복 후 다시 권력을 잡고 후손들은 지금까지 호강하며 잘 사는 것에 저는 분노를 느끼지만 견딜 수는 있습니다. 친일파의 자손들이 대통령이 되고 집권당대표가 된 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부모를 선택한 건 아니니까요. 물론 아버지가 친일했다는 게 밝혀지자 당대표직에서 물러난 양심적인 정치인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부모의 친일을 희석시키거나 심지어 미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일입니다. 영화 ≪암살≫에서 그 밀정이 자기는 독립운동 밖에 하지 않았다고 법정에서 진술하듯이 말이죠. 더 참을 수 없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친일을 정당화하며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반공을 악용하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친일이든 독재든 모든 죄악을 덮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과거의 반공이요 요즘의 종북몰이 아닙니까. 친일파들이 남북의 화해협력을 거부하고 통일을 가로막는 배경입니다.

최근의 사례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위이자 박근혜 현 대통령의 제랑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가 최근 ‘국민 여동생’ 김연아에게 “공화당에선 노란 리본을 종북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경고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비판은 물론 애도조차 종북으로 몰아붙여도 먹혀들어가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죠. 이에 앞서 자신의 아내 즉 박정희의 딸이자 박근혜의 동생이 일본을 방문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난하며 친일 망언을 쏟아낸 것은 적극 옹호했고요. 사소한 사례 같지만,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수단이 반공이었으며,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 종북몰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일본을 옹호하고 친일을 부추기는 게 미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잠깐 역사 한 토막 공부할까요? 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자 미국은 즉시 일본과 비밀협약을 맺었습니다. 미국이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전리품으로 챙겼던 필리핀을 식민지로 지키기 위해 일본에게 필리핀을 넘보지 말고 조선을 점령하라고 했던 이른바 ‘태프트-카쓰라 밀약’이죠. 이게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을사늑약’으로 이어지고, 1910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한일합방’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1941년 아시아를 넘어 미국까지 공격하자 미국은 소련을 끌어들여 1945년 일본을 물리쳤고, 이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을 전리품으로 챙겨 소련과 나누어 점령했습니다.

1949년 10월 중국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1950년 2월 소련과 중국이 동맹을 맺자, 미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적이었던 일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연합국이었던 소련이 전후엔 적국이 되고, 전쟁 중 적국이었던 일본이 전후엔 동맹이 된 과정입니다. 1961년 친일파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미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한.일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도록 강요해 결국 1965년 굴욕적 한일협정이 맺어졌습니다. 반공을 앞세워 한.미.일 공조체제를 만든 겁니다. 1970년대엔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았습니다. 중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만을 쫓아내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급속도로 성장하자 이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해오고 있습니다. 미국이 일본더러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도록 밀어주고, 평화헌법을 고쳐 장상적인 군대를 갖도록 부추기며, 유사시 한반도에까지 병력을 보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배경입니다. 이렇듯 미국은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100년이 넘도록 한반도 주변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적을 친구로 만들기도 하며 국제관계를 전개해오고 있는데, 친일파에 뿌리를 둔 한국의 위정자들은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죽으나 사나 일편단심 미국에 매달릴 뿐입니다. 심지어 2주 후 9월 3일 열리는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기념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잖아요. 미국이 싫어할 것 같다면서. 우리 독립군과 광복군이 중국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자리이니 누가 뭐래도 만사 제쳐놓고 가야하는데 말입니다.

이러한 예속적 친미 또는 종미와 관련해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냉정한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주한미군의 원래 목적이나 임무는 정전 기간 동안 북한의 남침을 막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냉전이 심화하면서 소련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목적을 지니게 되지요. 1957년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을 개발한 직후부터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남한 땅에 수많은 핵무기가 배치되었던 배경입니다. 그런데 소련이 사라진 탈냉전시대엔 급속하게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반도가 통일되어도 주한미군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이지요.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유지해야 하고 한.일 공조를 강화해야 합니다. 주한미군을 유지하고 한.일 공조를 강화하려면 북한을 주적으로 삼으며 북한의 호전성을 강조해야 하고요. 1953년 7월 맺어진 정전협정을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하는 배경입니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 불가침조약이나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주한미군을 유지할 법적 명분이 약해지거나 사라지고,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데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지요.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이라는 북한은 줄기차게 평화협정을 요구하는데 세계평화를 지킨다는 미국은 한사코 평화협정을 거부하는 역설적 현상의 배경입니다. 이를 무턱대고 따라야 하는 친미파는 한반도의 평화를 가로막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반일과 반미를 주창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화 또는 지구촌 시대에 친일도 하고 친미도 해야지요. 그러나 친일 때문에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친미 때문에 중국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어떻게 이루고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겠어요? 북한을 주적으로 삼는 한 남북 사이의 갈등과 긴장 그리고 어제오늘 같은 전쟁 위기는 사라질 수 없는 한편, 한.중간 교역 규모가 한.미간 교역과 한.일간 교역 규모를 합친 것보다 훨씬 크고, 무역으로 먹고 사는 우리가 중국 아니면 엄청난 무역적자에 시달리게 되는 터에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 친일하면서 친북도 하고, 상황에 따라 친미하면서 친중도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이른바 균형 외교나 등거리 외교 또는 양다리 걸치기를 하자는 거죠.

나아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 친북은 빨갱이로 매도되고 법적으로 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데, 친북하지 않고 북한과 화해협력하며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침 이 강연 시작하기 전에 여수 MBC TV 뉴스데스크의 인터뷰에 잠깐 응했는데, 첫 질문이 여수.순천 사건을 겪은 이 지역에서 빨갱이나 종북이라는 낙인으로 피해를 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더군요. 1948년 10월의 이 불행한 사건과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둘 있는데, 하나는 이른바 ‘반란’의 배후 조종자였던 박정희요, 다른 하나는 ‘반란’의 와중에 두 아들을 잃었던 손양원입니다.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군인 박정희는 체포되어 사형의 위기에 처하자 동지들을 밀고해 살아남아 1961년 반공을 앞세우며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까지 했고, 손양원 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까지 양자로 삼았는데 1950년 한국전쟁 중 공산군에게 처형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역사의 반전도 있었지요.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서기 전 여기 여수의 손양원 목사 기념관에 잠깐 들러봤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리는 그 분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고요. 두 친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았으니 속된 말로 사람이 아니죠.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그랬다는데, 제가 예수를 욕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보다 더 한 분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그 분을 흉내조차 낼 수 없지만 그 분과 비슷하게 북한의 악행을 용서하고 선으로 대해온 기독교인 두 분만 소개합니다. 저를 이 자리에 초청한 대표 단체가 여수YMCA인데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대형교회 목사들을 비롯한 보수 기독교인들이 반북에 앞장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분은 세계YMCA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고 이화여대 교수와 감리교 목사를 지내기도 한 서광선 선생입니다. 이 분의 아버님은 한국전쟁 때 반공목사라는 이유로 ‘북괴군’들에게 총살을 당했답니다. 너무도 비참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상한 마음과 굳어진 가슴을 풀기가 너무너무 힘들다”면서도, 그 원한과 증오를 뛰어넘어 평화통일운동에 앞장서고 계시지요. 제가 2008년 펴낸 ≪두 눈으로 보는 북한≫의 출판기념회도 마련해주시고 서평을 해주셨는데, 서평의 제목이 “두 마음으로 읽는 이재봉 교수의 두 눈으로 보는 북한”입니다. “한국전쟁 때 개신교 목사 아버지가 북한군에게 반공목사라는 이유로 총살당한 비참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해군으로 북한에 총을 겨누고 싸운 사람으로서 ..... 내 굳어진 가슴을 풀기가 너무 너무 힘들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머리로는 이재봉 교수의 책을 이해하고, 북한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나의 상한 마음, 굳어질 대로 굳어진 내 마음은 풀어지지 않는 것을 느낀다”면서도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다른 한 분은 미국 노폭대학교의 교수직을 은퇴하고 두어 해 전까지 숭실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신 철학자이자 문인인 장로교회 장로인 김동수 선생입니다. 이 분의 아버님은 손양원 목사와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동기인 김예진 목사로, 1919년 3.1운동에 앞장서기도 하고 1920년엔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져 항일무력투쟁도 벌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 김구의 측근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독립운동가였지요. 불행하게도 그 역시 손양원 목사처럼 그리고 서광선 선생의 아버지처럼 1950년 한국전쟁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했습니다. 그런데 감동적인 일은 서광선 선생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처형한 북한에 대해 원한과 증오 그리고 적개심을 버리고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아직 김동수 선생을 만나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지난 1월 제가 펴낸 ≪이재봉의 법정증언≫을 읽고 내용이 좋다며 수십 권을 구매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얘기를 들려주시더군요. 지난 4월 북한을 방문해 6-7월 <프레시안>에 방북기를 연재하기도 하셨고요. 참고로, 김동수 선생이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 공동으로 편집해 2010년 출판한 ≪나라 사랑의 가시밭길에≫라는 책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님에 관한 내용인데 독립운동가들의 고난과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맛볼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 일본은 35년간이나 지독하고 악랄한 식민통치를 펴며 신사참배 우상숭배를 강요했어도 20년 만에 친구처럼 지내오면서, 북한과는 3년간 참혹한 전쟁을 치렀다 할지라도 60년이 넘도록 화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예수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 아닌가요? 손양원 목사나 서광선 목사 그리고 김동수 장로처럼 하진 못해도 기독교인들이 북한을 증오하는데 앞장서는 것은 말아야죠. 대략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종교를 갖고 있고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기독교도라면 전체 인구의 1/4 또는 1,000만 명 이상이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아니에요? 죄를 지은 자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며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적극 따르지는 못할 지라도, 예수를 배반하지만 않는다면, 친일파와 친미파에 맞서 친예수파가 북한을 용서하고 북한과 화해협력하며 평화통일을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한편, 군인 출신 노태우 정부 때 만들어지고 보수적 김영삼 정권 때 조금 고쳐져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온 우리의 통일정책 첫 단계는 북한과의 화해협력 및 공존공영입니다. 이승만 시대처럼 무력 북진통일을 추구한다면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적대하며 쳐부수는 게 당연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세워진 평화통일 정책을 지향하려면 북한을 화해협력의 대상으로 삼아야죠. 친북하지 않고 반북하며 화해협력을 이룰 수 있겠어요? 전쟁과 분단이 아닌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우리 모두 친북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은 정부의 통일정책을 지킴으로써 북한과 화해하고 협력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분도 빠짐없이 저와 함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친북에 앞장서주시길 바라며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 이 글은 2015년 8월 21일 여수시청 문예홀에서 열린 <광복70돌 여수시민 평화통일한마당>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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