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반을 넘는 박근혜 대통령의 심정은 어떨까?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퇴임 후 자신의 업적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이다. 정치, 경제, 외교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보자. 국내 정치는 여야가 늘 티격태격하면서 정치적 혐오를 주는 터라 누구라도 점수 따기가 쉽지 않다. 경제 경우도 창조경제를 입에 달고 다니지만 그 개념도 어렵고, 또 경제라는 게 글로벌화 된 현대에 있어 일국적 차원에서 부침하는 것도 아니고 성과가 빨리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남북관계를 비롯한 외교는 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 상승에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 그렇다면 당연히 치적을 여기에 둘 만하다. 그러나 비교적 후한 점수를 받아온 북측에 대한 강경 입장, 해외에서의 패션외교도 2년이 넘으니 약효가 떨어진 듯하다. 게다가 현실은 더 혹독하다. 한국은 세계 패권을 꿈꾸는 동북아시아의 두 강자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오락가락 행보를 강요받고 있다.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경우처럼, 미국이 중국 전승절 행사의 한국 참가에 반대 의사를 밝히자, 난처한 입장이 됐다. 취임 이후부터 남북관계와 한일관계가 경색돼 왔고, 미·중 사이에 채이다 보니 사면초가에 외톨이가 된 느낌이다. 집권 초기엔 호기라도 부렸지만 이제 임기 반을 넘기니 한계를 느끼는 듯하다. 한마디로 꽉 막힌 남북관계와 한일관계를 자력으로 뚫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초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게 이번 광복절 70주년 8.15경축사에서 나왔다.

먼저, 8.15경축사를 앞두고 남북관계에서 현안은 남측이 지목한 ‘북측 소행의 DMZ 지뢰폭발사건’이었다. 박 대통령은 경축사 남북관계 부분 모두(冒頭)에서 “지금 북한은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숙청을 강행하고 있고, 북한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며 평소대로 강하게 압박하면서 “북한은 우리의 거듭된 대화 제의에 응하지 않으면서, 평화를 깨뜨리고 남북간 통합에 역행하고 있다”며 남북관계 경색의 원인을 북측 탓으로 돌렸다. 여기까진 상투적이라 하자. 이어 박 대통령은 “특히, 최근에는 DMZ 지뢰 도발로 정전협정과 남북간 불가침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하고, 광복 70주년을 기리는 겨레의 염원을 짓밟았다”며 현안인 지뢰폭발사건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대응이 “북한의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며 당연하고도 원론적인 경고에 그쳤다. 더 이상의 확전을 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어 “만약 북한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오면 민생향상과 경제발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기회’에 방점을 찍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조성과 남북간 철도·도로 연결 △남북 이산가족 명단교환 연내 실현 △홍수·가뭄·전염병 등 자연재해와 안전문제 공동 대응 △민간차원의 문화와 체육교류 통한 민족 동질성 회복 등 북측에 네 가지를 제안했다. 물론 이들 제안은 대개 이전에 제시한 것들인데, 특히 이산가족 상봉 문제와 관련 “남북 이산가족들이 금강산 면회소를 이용하여 수시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북한의 협력을 촉구한다”고 강조했으나 현 남북관계 상태로 보아 공허할 뿐이다.

다음으로, 한일관계에서 현안은 8.15 하루 전에 있었던 아베 신조 총리의 담화였다. 아베 담화에서의 국민적 관심사는 ‘식민지배, 침략, 반성, 사죄’ 등이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담화에서 “일본은 지난 전쟁에서의 행동에 대해 거듭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해 왔다”면서 “이러한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식민지배’와 ‘침략’의 주체를 명시하지 않았고, ‘반성’과 ‘사죄’도 역대 내각의 표명으로 대신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특히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 “전쟁터의 그늘에서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두 차례에 걸쳐 언급하면서도 ‘위안부’ 동원에 대한 주체는 명시하지 않았다. 모두가 아베의 ‘진정성’ 문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박 대통령은 일단 “우리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여기까진 그렇다고 치자.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 국민들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준 점과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한 사죄와 반성을 근간으로 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국제사회에 분명하게 밝힌 점을 주목한다”고 후한 평가를 하며 사실상 면죄부성 입장을 밝혔다. 아베 담화에서 ‘진정성’ 문제의 추궁을 회피한 것이다. 그러면서 방향을 돌려 “특히,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조속히 합당하게 해결하기를 바란다”며, 일본 측에 한일관계 개선의 시금석으로 줄곧 제기해온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거듭 촉구했다. 그러나 이 촉구는 기약 없는 메아리로 비쳐질 뿐이다.

이렇듯 박 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지뢰폭발사건’과 ‘아베 담화’라는 두 가지 현안에 대해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다. 분명 집권 상반기와는 다른 모습이다. 확전을 피한 박 대통령은 북측과 일본 측에 관계개선을 위한 두 가지 문제를 꺼냈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산가족 상봉 문제와 일본군‘위안부’ 문제. 이 두 가지 문제는 그동안 박 대통령이 남북관계 및 한일관계와 관련해 스스로 그어놓은 마지노선이었다. 북측에는 남북대화의 조건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일본 측에는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위안부’ 문제의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해 왔다. 이렇게 볼 때 박 대통령에겐 남북관계와 한일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는 강한 투쟁의식도 없고 그렇다고 단절된 두 관계를 타개하겠다는 창발적 대안도 없다. 그냥 흘러간 옛 노래를 다시 튼 것이다. 그러기에 ‘지뢰폭발사건’과 ‘아베 담화’에 대한 추궁을 더 이상 하지 않고 대신 관계개선을 위해 북측과 일본 측에 각각 이 문제를 꺼낸 것은 일종의 양보였다. 그런데 양보를 하더라도 소위 ‘분별 있고 질서 있는 퇴각’이 필요했다. 민족적 차원에서는 배려하고 외세에는 엄격한 것 말이다. 즉 북측엔 이산가족 상봉을 제시하면서 금강산 관광 재개와 그에 다른 5.24조치 해제, 나아가 상호 비방 중상 금지 등 군사문제까지 일괄논의하자고 제안했어야 했다. 그리고 일본 측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기에 아베 담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어야 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이 두 가지를 차별하지 못하고 뭉뚱그려 두루뭉수리 넘어갔다. 민족 문제와 외교 문제를 똑같이 취급한 것이다. 시간에 쫓겼는가? 힘에 부쳤는가? 분별없는 양보로 북측은 받기 어렵고 일본 측은 받을 수 있는 모양새가 됐다. 박 대통령이 남북 문제와 한일 문제의 줄타기에서 스르르 주저앉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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