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정치학자가 문학에 관해 글을 쓰는 게 부담스럽다. 한국정치보다 국제정치를 공부해온 터에 한국문학을 얘기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기도 하다. 1990년대에 한국의 문학예술 작품을 바탕으로 한미관계에 관한 글을 쓰느라 1945년 해방 이후 발표된 소설과 시를 조금 읽기는 했다. 주로 미국이나 미국인을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작품들이었기에, 민족문학의 한 부분 정도는 다룰 수 있으리라는 오만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45년 해방 및 분단부터 70년이 흐른 오늘까지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짚어보며 그러한 상황에서 민족문학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살펴본다.

1. 해방과 민족문학의 부활

1945년 8월 한민족은 35년간의 일본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한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문인들의 움직임도 빨랐다. 해방 바로 다음날 조선문학 건설본부가 들어선 것이다. 1925년 경성 (서울)에 조선공산당이 세워지면서 조직되었다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사상탄압 강화로 10년 만에 해산된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예맹, KAPF)에서 활동하던 임화, 이태준, 김남천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잔재를 청산하고 진보적 민족문학을 건설하는 등의 목표를 세웠다. 다음 달엔 이기영, 한설야 등이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을 조직하여 두 단체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지만 결국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되었다. 1920-30년대 일제치하에서 전개되다 진압되었던 민족문학 운동이 1945년 해방과 함께 부활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프롤레타리아문학을 민족문학이 아니라 계급문학이라고 폄하하는 문인이나 비평가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임화가 얘기했듯, 일제 아래에서 공산주의 운동 또는 프롤레타리아 전위 운동이 계급해방 투쟁보다 민족해방 투쟁이었듯이, 그들의 문학 활동 역시 계급문학 운동보다 민족문학 운동이라고 평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그 무렵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이 대립적이기보다는 보완적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계급문학 겸 민족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 아래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분명히 민족해방 투쟁이었다. 공산주의 운동이란 간단히 말해 자본가와 지주 계급의 착취를 막고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식민통치 아래서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공장노동자나 소작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과 부일 세력 그리고 자본가와 지주를 제외한 거의 모든 조선 인민이 공산주의 운동에 호응하지 않았겠는가. 그 무렵 글줄이나 읽으며 공산주의에 빠지지 않으면 지식인이 아니라는 말이 나돌았던 배경이요, 해방 이후 미군정이 38선 이남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조차 70-80%의 인민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정부를 원했던 이유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을 이끌던 박헌영은 조선 민족이 완전하게 독립하고 토지문제를 혁명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기본 과업으로 삼는다는 이른바 ‘8월 테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발표했다. 토착지주와 부르주아가 새로운 외세와 결탁해 민족의 독립을 방해하려는 데 맞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진보적 시민들이 민족단일전선을 형성해 민족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임화는 1945년 <현하의 정세와 문화운동의 당면임무>라는 글을 통해 문화통일전선 운동을 내세웠다. 일제 식민지 문화에서 해방되어 반인민적 요소를 척결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인민의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해방은 민족문학의 부활과 아울러 친일문학의 반성도 불러왔다. 첫째, 이태준이 1946년 자신의 수기 형태로 <해방 전후>를 발표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친일작품을 쓰지 않았지만 일시적으로 그리고 소극적으로나마 친일 문필활동을 벌인 것을 스스로 비판하고 곧 월북의 길을 택했다. 둘째, 채만식도 1948년 자신을 주인공으로 쓴 <민족의 죄인>을 내놓았다. 경제적 이유에서였지만 친일신문 기자로 활동한 것을 고백하며 ‘민족의 죄인’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해방 이후 그는 이런 죄의식을 갖고 자신을 철저하게 비판하며 미군정을 풍자적으로 비판하는 소설을 쏟아냈을 것이다.

참고로, 김동인 역시 1947년 자신의 친일행적을 고백하는 <망국인기 (亡國人記)>를 썼다.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의 기록’이란 뜻을 지닌 제목의 자전 소설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반역자>를 통해 이광수의 친일행위를 비판적으로 그린 것과 달리 자신에 대해서는 비판보다는 변명에 가까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일제의 조선인 징병을 찬양하며, 일제가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을 착취하기 위해 외쳤던 ‘내선일체 (內鮮一體)’를 강조했던 사람으로서는 옹색한 변명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일제 아래에서처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웠을 뿐이다.

2. 미군정과 반미 저항문학

1945년 9월 미군들이 한반도 남쪽을 점령하자 한인들은 그들을 ‘해방군’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문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친일 시인 노천명은 미군을 ‘천사’로 찬양했고, 좌익 시인 오장환도 지구 반대쪽 “맨 끝에서 오는 동지”들에게 환영의 노래를 바쳤다.

미군정이 시작되고 분단이 굳어지자 평론가들은 1946년부터 미국과 소련 당국에 항의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기 시작했다. 오기영은 전쟁에서 패한 일본보다 분단된 한반도가 훨씬 더 불행하다고 한탄하며 미군과 소련군이 될수록 빨리 떠날 것을 촉구했다.

그 무렵 미군정 아래서의 생활이 일제치하에서의 생활보다 더욱 비참하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많이 나왔다. 1946년 4월 미군정 정보부의 여론조사에서 일본 식민통치보다 미군정을 선호한다는 한인들은 절반을 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 실시한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다수가 미군정보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오히려 선호할 정도였다. 이에 한보영은 미군정의 현실이 일본의 상황보다 훨씬 더 나쁘다면서, 일본에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한인들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충격적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

1948년엔 정진석이 미군정의 통치를 새롭게 등장하는 제국주의라고 간주하며, 문인들에게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 그리고 새로운 외세 식민통치에 맞선 자주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해방 운동에 기여해줄 것을 촉구했다. 이동훈 역시 미국과 소련의 점령군들이 세계평화라는 미명 아래 약소국들을 정복하려고 시도하는 새로운 적들이라고 간주하면서, 한인들이 그 적들에 맞서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주적 해방운동을 전개해나갈 것을 촉구했다.

미군정 3년 동안 발표된 소설 가운데 미군 통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은 적어도 50편이 넘는다.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소설가들은 분단에 대한 좌절과 분노 그리고 고통을 그렸다. 채만식의 <역노>와 <낙조>, 김영수의 <혈맥>, 계용묵의 <별을 헨다>, 이무영의 <나라님전 상사리>, 박노갑의 <사십년>, 김송의 <정임이>와 <한탄>, 최태응의 <월경자>, 이근영의 <탁류 속을 가는 박 교수>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친일파를 고용하는 미군정의 인사정책을 비판했다. 해방 이후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를 없애는 일이 한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업 가운데 하나였지만, 친일 부역자들이 처벌 받기는커녕 미군정에 다시 고용되고 승승장구하는 기막힌 현실을 보여준다. 이무영의 <굉장소전>, 계용묵의 <바람은 그냥 불고>, 엄흥섭의 <발전>, 채만식의 <맹순사>와 <미스터 방>, 전명선의 <방아쇠>, 김일안의 <뺨>, 박계주의 <예술가 K씨>, 이근영의 <탁류 속을 가는 박 교수>, 전홍준의 <준동>, 최태응의 <월경자>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농민들의 좌절을 묘사했다. 해방 직후 남쪽 인구의 80%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고 그 중 거의 80%가 소작농이었다. 대다수 민중이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것이 토지개혁이었으리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1946년 3월 이북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남쪽 민중은 상대적 박탈감까지 맛보게 되었다. 그 무렵 남쪽 지역에서 농민들이 시위를 벌이며 북쪽에서와 같은 토지개혁을 요구했던 이유다. 채만식의 <논 이야기>, 황순원의 <황소들>, 최정희의 <풍류 잡히는 마을>, 안회남의 <농민의 비애>, 이근영의 <고구마>, 홍구의 <뒷골 방천 사람들>, 김현구의 <산풍>, 박찬모의 <어머니> 등에 잘 묘사되어있다.

넷째, 노동자들의 고통을 보여주었다. 미군정의 노동정책에 대해 좌절하고 분개하는 공장노동자들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이동규의 <오빠와 애인> 및 <소춘>, 김영석의 <폭풍>과 <전차운전수>, 강형구의 <연락원>, 전명선의 <방아쇠> 등을 들 수 있다.

다섯째, 저속한 미국 문화를 거부했다. 소설가들은 특히 한인들을 상대로 한 미군들의 저속한 성적 (性的) 행위에 분노를 표출했다. 김일안의 <뺨>, 채만식의 <역노>와 <낙조>, 염상섭의 <양과자 갑>, 최정희는 <풍류 잡히는 마을>, 김동리의 <지연기>, 이봉구의 <뿌라운과 시계>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

미군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소설보다 시에서 더 직접적이고 더 강렬하게 표출되었다. 첫째, 미군정의 식량 정책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박석운은 <포복의 시>에서 미국인들이 식량으로 들여오는 강냉이와 밀가루를 먹고 한인들이 배탈이 나 고통 겪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미군정의 식량정책을 비난한다. 조남령의 <트루만 대통령에게>와 황철연의 <양과자> 역시 조선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밀가루와 과자 등으로 식량을 배급하는 미군정을 비판하고 있다.

전위시인 유진오 (兪鎭五)는 1946년 9월 1일 약 10만 명이 모인 국제청년의 날 기념식장에서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를 낭송했는데, 이틀 뒤 체포 구금되었고, 1946년 10월 미군정 재판에서 1년 징역 선고를 받았다. 해방 이후 최초의 필화 (筆禍)였다. 무슨 내용이었기에 일제 치하도 아닌 해방 정국에서 시 한 수로 감옥에 갇혔는지 알 수 있도록 아래에 몇 대목 (聯) 옮긴다.

“왜놈의 씨를 받아 / 소중히 기르던 무리들이 / 이제 또한 모양만이 달라진 / 새로운 점령자의 손님네들 앞에 / 머리를 숙여 / .....
그러나 오늘날 또한 / 썩은 강냉이에 배탈이 나고 / 뿌우연 밀가루에 부풀어 오르고도 / 삼천오백만 불의 빚을 걸머지고 / 생각만 하여도 이가 갈리는 / 무리들에게 짓밟혀 / 가난한 동족들이 / 여기 눈물과 함께 우리들 앞에 섰다 / .....
핏발서 날뛰는 / 외국 주구들과 / 망령한 영감님들에게 / 저승길로 떠나는 노자를 주어 / 지옥으로 쫓아야 한다.”

둘째, 미국의 퇴폐적 문화나 그 영향 또는 백인들의 인종차별 등을 비판했다. 박인환의 <인천항>이나 김수영의 <아메리카 타임지> 등에 잘 드러나 있다. 배인철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인종차별에 초점을 맞추어 미국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시를 연이어 발표했다. <인종선 (人種線) - 흑인 쫀슨에게>, <노예 해안>, <흑인녀>, <쪼 루이스에게>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외세의 의한 분단에 대한 반대나 이념적 적대감도 시에 표출했다.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갈망했던 권환은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고 외친다. 여상현의 <칠면조>와 양운한의 <8.15에 부치는 노래> 역시 외세에 반대하는 감정을 은근히 드러내며 민족적 자각을 고취시킨다. 김상오는 <우리는 모멸로써 그것을 돌려보낸다>를 통해 미국인들을 ‘제국주의자들’이나 ‘원쑤’라고 부르면서 직설적으로 더욱 강렬한 반미감정을 토해낸다.

넷째, 전위 시인들은 미국의 점령에 한인들이 항쟁할 것을 촉구하는 시를 발표했다. 김상훈은 <나의 길>에서 “착취와 탄압과 기만과 군림”에 “불끄럼이를 던지는 내 용감한 방화 범인이 되리라”고 맹세한다. 이병철은 <뒷골목이 트일 때까지>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죽인 원수들을 잊지 않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조남령은 <나의 눈물 나의 자랑>에서 1946년 가을의 인민항쟁을 기리며 미군정의 탄압과 유린에 복종보다 저항하는 게 적절한 대응이라고 선언한다. 상민은 <비라>를 통해 미국인들을 ‘식인종’으로 부르며 미군정의 감시를 피해 “악질 테러를 뚜드려 부시자!”는 삐라를 붙이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고 <다시 황혼>에서는 미군정을 ‘재생하는 나치스의 화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3.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보고문학 (reportage)

1947년 9월 제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반도 통일과 독립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결렬되자, 미국은 소련의 전술을 비난하며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기권한 상태에서 한반도 총선을 관리할 유엔 한반도임시위원회 (UNTCOK)를 설립하자는 미국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위원회는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반대하자 이남에서만 미군정이 계획한대로 1948년 5월 총선을 실시할 것을 승인했다.

이에 다수의 한인들은 이 총선 계획을 반대했다. 미국이 소련과 합의를 이루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데다, 남쪽에서만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인들은 미국에 반대하는 민족해방 투쟁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1948년 제주와 여수, 순천 등의 이른바 ‘반란’에 관한 보고문학 또는 르포(reportage) 작품 몇 편이 발표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이러한 문학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조덕송은 제주에서의 학살을 보고하며 한국인들이 미군장비로 무장한 한국의 진압군에게 살해당한 것을 한탄했다. 홍한표는 ‘제주반란’에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세계 제1의 미국 해군이 제주도 해안과 항공을 지키고 있는 터에 외부로부터 물자 지원과 지휘 통솔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는 ‘여.순 반란’에 관해 소련과 미국 사이의 전투로 간주한다는 보고문을 발표했다. 반란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지만, 진압군은 미국에 의해 무장되고 훈련받았으며 자문 받았기 때문이다.

이석과 정진석은 각각 1948년 민족을 구하고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진보적 또는 민족적 문화운동을 주창했다. 이석은 문화전선을 형성하는 다양한 문화운동 단체들이 미군들에 반대하며 민족해방 및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소개했다. 또한 미군정의 언론탄압 등을 비롯한 비민주적 문화정책을 비난하며, 한국 문화가 황폐해진 것을 한탄했다. 미군정은 몇 가지 신문 및 문예잡지를 정간하거나 폐간했으며 편집자들을 구금했던 것이다. 정진석은 문학의 정치적 또는 이념적 특성을 부인하며 참된 민주주의 문학에 맞서왔던 순수문학을 비판했다. 그에게 순수문학이나 예술은 자본주의의 타락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었다.

4. 한국전쟁과 기지촌소설 및 이념 시

3년간의 한국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반공과 ‘친미’를 각인시켰다. 북한의 침공과 전쟁 중 남한 사람들에 대한 잔인한 행위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참전과 전후 남한 재건을 위한 원조는 미국에 대한 우호적 인상을 심어주었다. 북한은 ‘가장 나쁜 적’으로 간주되고 미국은 ‘가장 좋은 친구’가 된 것이다.

이런 터에 기지촌소설이 등장했다. 박용구는 1951년 한국전쟁 중 한국 최초의 기지촌소설로 간주되는 <고요한 밤>을 발표했다. 성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미군의 총에 맞아 죽는 한 매춘부를 그리면서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들의 폭력과 살인 등을 보여준다.

매춘부들에 대한 주한미군들의 총질은 1957년 발표된 송병수의 <쑈리 킴>에도 이어져 나타난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 대한 비판이 당분간 억제되었지만, 기지촌 소설을 통해 반미감정이 다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송병수는 이 단편소설로 <문학예술>지 신인상을 받아 문단에 오르게 되고, <쑈리 킴>은 1950년대 기지촌 소설의 대표작이 되었다.

이범선의 <오발탄>은 북쪽에 고향을 둔 한 가족의 비참한 생활을 통해 민족 분단의 비애를 잘 그리고 있다. 주인공의 늙은 어머니는 “죽어도 고향에 돌아가 죽고 싶다”며 38선에서 “막는 놈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고 절규한다. 이렇게 한반도의 분단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죄로 작가 이범선은 그가 가르치던 고등학교에서 해직 당했다.

몇 몇 시인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 이념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외세를 비판하는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철범은 <야간 폭격>에서 한국전쟁이 외세에 의한 분단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민족이 외제 이념에 근거한 내전 중에 외제 폭격기에서 투하된 외제 폭탄에 의해 죽었다고 애도한다. 민재식의 연작시 <속죄양 I>에서는 외세에 대한 반감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강대국들의 위대한 국민들을 빈정거리면서 “조국은 (전쟁의) 개평거리냐 / 우리는 속죄양이냐”고 외치는 것이다.

5. 4월혁명과 반미 참여문학

1960년 4월혁명은 한국사회의 문학예술계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의 후원을 받아온 사람들조차도 금세 혁명적 문인이나 예술인들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미군정시대에 시작되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던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사이의 논쟁도 재개되었다. 이에 따라 현실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반외세주의 등이 문학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61년 5월 군사쿠데타로 4월혁명의 기운은 금세 반전되었다. 군사정권은 진보적 문화단체들을 해체하고 표현의 자유를 가혹하게 제한했다. ‘반공’의 정의와 범위를 확장시켰다. 이에 따라 문학예술 분야에서 정부나 미국을 비판하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1960년대 중반 한국정치에서 세 가지 이슈는 반외세 민족주의를 깊고 넓게 고취시켰다. 첫째, 한국인들에 대한 주한미군들의 빈번한 범죄에 따라 한미행정협정 (SOFA) 체결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둘째, 미국에 의해 강요된 한일외교정상화에 대한 거센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셋째, 미국의 요청에 따라 명분 없는 베트남전쟁으로의 한국군 파병에 대한 반대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른바 ‘반미문학’이 등장했다. 몇몇 저명 시인들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양키 고 홈”을 외치기도 했다. 1960년 처음 출판된 최인훈의 <광장>은 가장 먼저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를 깨뜨린 소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중편소설에서 주인공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둘 다 거부한다. 박경리 역시 <시장과 전장>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이 미국의 경솔한 계획에 따라 약탈자들의 무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한탄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둘 다 거부한다.

주한미군의 범죄를 고발하거나 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는 반미소설은 꽤 많다. 1965년 발표된 남정현의 <분지 (糞地)>는 아마 1980년대 이전에 발표된 가장 격렬한 반미소설일 것이다. ‘똥으로 된 땅’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독백 형태의 이 소설에서 미군에게 강간과 학대를 당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둔 주인공이 보복하는 내용이다. 이 가운데 한국사회를 “민중을 위해서 투쟁한 별다른 경험이나 경륜이 없어도 어떻게 ‘반공’과 ‘친미’만을 부르짖다보면 쉽사리 애국자며 위정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세상”이라고 외치는 대목이 백미랄까.

이 소설은 그 때까지 발표된 다른 반미소설과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첫째, 다른 작품들에서는 한인들에게 온갖 종류의 비행과 범죄를 저지르는 미국인들이 흑인들이었지만, <분지>에서는 백인들이었다. 둘째, 다른 소설들에서는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의 공격에 고통당하고 좌절하는 모습만 드러내는데 반해, 이 소설에서는 한국인이 미국인들에게 대항하고 보복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그는 이 때문에 5.16쿠데타 직후에 제정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장 남재희는 작가 남정현에게 원고를 청탁한 죄로, 그리고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남정현 씨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저항 행위는 지금 우리 문학으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과제”라고 옹호한 죄로 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했다.

위와 같은 주제들과 달리 전광용은 <꺼삐딴 리>에서 미국을 비롯한 외세에 아첨하며 명예와 부를 즐기는 의사를 그리면서 반외세 민족주의를 고취시킨다. 그리고 황석영은 <탑>에서 명분 없는 베트남전쟁 속의 무의미한 죽음을 고발하면서 외국 문화재에 대한 미국인들의 오만과 무차별적 파괴를 꼬집고 있다.

1960년대 시를 통해서는 더욱 강렬한 반미감정이 표출되었다. 4월혁명의 영향으로 시인들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주한미군 철수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문학평론가 김우창의 표현대로 “예술가의 양심을 넘어서 인간의 자유를” 온몸으로 외쳤던 시인 김수영이 앞장섰다. 그는 1960년 발표한 <가다오 나가다오>에서 한반도를 분단시킨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제국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며 한반도에서 즉시 철수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풀의 영상>에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미국의 침략과 학살을 비난하고, <VOGUE야>에서는 미국의 저속한 대중문화에 대한 조롱과 경멸감을 드러낸다.

김수영에 이어 신동엽도 주한미군 철수를 외쳤다. 1960년대 참여시인과 민족시인의 대표로 꼽히는 신동엽은 김수영보다 더 많은 작품을 통해 더 강하게 미국을 비판하며 거부했다. <껍데기는 가라>에서 남북한이 중립화 통일을 이루겠다며 외세를 상징하는 ‘껍데기’와 무기를 의미하는 ‘쇠붙이’들은 한반도에서 나가달라고 호소한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에서는 중립을 강조하며 통일을 기원한다.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금강>에서도 미국이 한반도를 착취하기 위해 분단시켰다고 분노를 표출한다. 무려 5천행이 넘는 장편 서사시에서 그는 미국의 원조물자가 한국인들을 착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남한이 버터와 달러 그리고 ‘양키즘’으로 부패되었다고 외친다.

이 밖에도 신동엽은 <글쎄 왜 와서 찝적이냐 말이오>, <주린 땅의 지도원리>, <발>, <산에도 분수를>, <종로5가>, <조국> 등을 통해 미국의 한반도 분단,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 한국인에 대한 착취 등을 고발한다. 그리고 <왜 쏘아>를 통해 미군들의 만행에 대해 절규하며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1960년대 초 미군들이 한국인들을 총 쏘아 죽이는 사건이 거의 매일 일어나다시피 하자 분노를 쏟아낸 것이다.

정공채는 <미 8군의 차>라는 서사시에서 주한미군이 한국의 국토와 여인들을 황폐화한다고 분노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그러나 이 시 때문에 그는 반미주의자로 낙인 찍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앞두고 조지훈은 <우리는 또다시 노예일 수 없다>는 시를 통해, 이 굴욕적인 협상을 부추기고 강요하는 미국의 터무니없는 행위에 분개하며 외세의 적들을 물리치자고 외쳤다.

김준태는 1969년 스무 살의 새내기 시인으로 등단하자마자 미국을 비판하는 시를 연이어 발표했다. <서울역>과 <시작 (詩作)을 그렇게 하면 되나>에서 ‘양키’를 경멸한다. 그리고 <어메리카 I>에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어메리카 II>에서는 미군들의 범죄를, <베트남>에서는 베트남의 미국화를, <껌둥이>에서는 미국의 인종차별을 비난한다.

6. 군사독재와 반미 저항문학

1970년대는 한국정치에서 암흑의 시대였다. 박정희는 기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덧붙여 긴급조치법을 발동하며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를 펼쳤다. 이 억압적인 유신독재 체제는 정부는 물론 동맹국인 미국에 대한 어떤 종류의 비판도 금지했다. 군사정권의 극단적 탄압 때문에 야당이나 반대세력은 지하운동을 펼치거나 새로운 형태의 저항으로 문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첫째, 일단의 혁명가들이 비밀리에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한국을 미국과 일본의 ‘신식민지’로 규정하고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투쟁한 것이다.

둘째,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은 시인이 되었고 시인들은 투쟁가가 되었다. 그들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외세에 맞서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한 투쟁의 유용한 도구로 시를 활용했다. 어떠한 종류의 정치적 집회도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에 민주화 및 통일 운동가들은 그들의 문학작품을 낭송하거나 배포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대학생들은 문화운동을 발전시켰다. 항의나 반대 시위가 금지되자 그들은 한국의 독재정치와 외세의 개입에 대해 탈춤이나 마당극을 통해 풍자하고 조롱했다. 박정희 정권의 혹독한 탄압 아래서 항의 시위가 문화 운동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1974년 11월 시인 고은을 비롯한 진보적 문인들은 민족문학운동 단체인 자유실천 문인협의회를 만들어 인권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들은 비판적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산업화의 모순과 자본주의의 역효과 등을 꼬집었다. 한반도 분단으로 초래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는 민족문학을 주창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종속이론이나 해방신학 같은 급진적 사상에 영향 받아 제3세계 문학을 소개하기 시작하고 민족해방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문인들은 대체로 ‘자기검열’을 실시했다. 1970년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그리고 긴급조치가 어우러진 군사독재와 유신체제 아래서는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저항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미있으면서 문학성도 뛰어난 기지촌소설 한 편이 발표되었다. <한국문학> 1974년 8월호에 실린 천승세의 <황구의 비명>으로, 1975년 만해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한국과 미국 사이의 불균형적 관계를 쉽고 재미있게 비유하며 반외세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게 일품이다.

전상국은 1979년 <아베의 가족>을 통해 한 여인과 그녀 가족의 소름끼치도록 비참한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어머니-자신-딸로 이어지는 3대에 걸쳐 미군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짐승 같은 미국인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와 복수심”만을 지니고 살아가는 내용이다. 1979년 한국문학작가상과 1980년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니 문학성도 뛰어난 듯하다.

유신체제 아래서 많은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은 시인이 되었다.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주의나 반미주의를 고취하는 시를 썼다. 시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투쟁의 유용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김지하는 1974년 감옥에 있으면서 담시 <분씨물어 (糞氏物語)>를 발표했다. 그 해 7월 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옥살이를 할 때였다. 나중에 <똥바다>로 제목이 바뀐 이 장편의 담시 또는 창작판소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한인들이 ‘양키들’에게도 짓밟힌 역사에 분노하는 등 외세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고은은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며 많은 시를 발표했다. 특히 <성욕>에서는 다소 외설적인 어휘들을 구사하며 분단과 전쟁에 따른 한국인들의 희생과 고통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양성우의 <노예 수첩>은 1970년대 발표된 가장 격렬한 반미 시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이 작품을 발표하기 전 1975년 2월 광주에서 열린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석방 환영대회’에서 <겨울 공화국>이란 시를 낭독해 다음 달 3월 그가 몸담고 있던 여고에서 파면되었다. 유신체제의 한국을 ‘얼어붙은 땅 (동토)’ 또는 ‘겨울 공화국’으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달 4월 정보기관의 강요에 따라 광주를 떠나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해 12월 500행이 넘는 장시 <노예 수첩>을 발표했다. 박정희 유신정권에서의 삶은 노예생활과 다름없다는 내용이다. 이 시로 그는 국가 모독 및 긴급조치 위반이란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1980년대엔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다 1988년 4월 서울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명식은 1976년 은밀하게 배포한 <10장의 역사 연구>에서 미국을 한반도를 “동강내는 마귀”로 부르며 미국인들을 “코 크고 노랑내 나는 놈들”로 묘사했다. 당연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다. 백기완은 1979년 <진술 거부>를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당하며 ‘몸서리치는’ 고통을 고백한 내용이다. 이 작품은 그가 “모진 고문 속에서도 끝내 민족적 원칙, 해방통일의 원칙을 확인해낸 무수한 투사들에게” 바치는 비나리다.

한무학은 <조국은 아직 먹구름 모양 여기 묵묵하다만>에서 한미 관계를 마르크스 관점에서 인식했다. 그는 풍자적으로 물었다. 한국은 원조를 받기만 하는데도 왜 더 못 살게 되고, 미국은 원조를 주기만 하는데도 왜 더 잘 살게 되느냐고. 미국이 ‘원조’라는 구실 아래 한국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 김명인은 1979년 첫 시집 ≪동두천≫을 펴냈는데, 여기에 실린 <베트남>과 <동두천>이라는 제목의 연작시를 통해 미국을 은근히 비판했다.

7. 광주항쟁과 반미 민중문학 및 통일문학

1979년 10월 박정희가 암살됨으로써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로 불렸던 7년간의 유신체제가 끝났다. 18년 동안 지속되었던 박정희 철권 군사독재가 종식된 것이기도 했다. 갑자기 그리고 뜻밖에 찾아온 정치 환경의 변화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민주주의에 대한 커다란 기대를 갖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1979년 12월 전두환의 군사쿠데타와 1980년 5월 광주항쟁에 대한 잔혹한 탄압은 그러한 기대를 꺾어버렸다.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방조와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좌절과 분노를 자아내게 만들었고, 이 좌절과 분노는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까지 반정부 및 반미 투쟁을 낳았다.

1980년대 한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회 현상은 민중운동의 발전이었다. 이 운동의 세 가지 주요 목표는 (1)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2) 외세의 지배로부터 실질적 독립을 성취하며, (3) 외세의 영향 없이 한반도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중운동은 반미주의를 비롯한 반외세 민족주의를 불러오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대엔 ‘반미문학’이란 말이 등장했다. 수많은 개인적 반미 문학작품 이외에 이러한 작품을 모아 편집한 책도 나타났다. 김상일이 1988년 편집해 펴낸 ≪반미 소설선≫은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발표된 10편의 소설을 담고 있는데, 전국 노동자 문화운동단체 협의회가 1989년 ‘노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했다. 시 분야에선 임헌영과 이영진이 편집한 ≪반외세 민족자주화 시선집: 아메리카 똥바다≫가 1988년 출판되었다. 평론으로는 최원식의 <민족문학과 반미문학>, 박덕규의 <80년대 반미문학론>, 이성욱의 <반미문학의 전개과정과 과제> 등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에 출판된 반미 문학작품은 너무 많기에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운데 대략 네 가지 특징을 들고 싶다. 첫째, 많은 작품들이 다양한 잡지 형태의 책 (무크)을 통해 발표되었다. 무크는 1980년대 독재정권의 통제를 피하기 위한 새로운 출판 형태로 인기를 끌며 자리 잡았다. 둘째, 시가 소설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발표되었다. 소설보다 분량이 적은 데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초엔 혹독한 정치적 탄압 아래서 미묘함도 필요했을 터다. 셋째, 작품의 분량이 길어졌다. 소설에서는 중편이 늘고 몇 권짜리 장편이 출현하기도 했으며, 시에서도 수백 행의 장편 작품이 많이 발표되었다. 넷째, ‘반미문학’이 ‘민족해방 문학’ 또는 ‘노동해방 문학’의 핵심이 되었다.

반미 보고문학 (르포르타주)의 출판도 주목할 만했다. 오연호는 1989년 ≪식민지의 아들에게: 발로 찾은 반미 교과서≫를 펴냈다. 1945년 이래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와 ‘미국의 배반’에 관한 역사를 폭로한 내용이다. 다음해인 1990년엔 ≪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 발로 찾은 주한미군 범죄 45년사≫를 출판했다. 제목 그대로 주한미군들이 1945년부터 저질러온 다양한 범죄를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얘기했듯 1980년대에 발표된 반미소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소개한다. 첫째, 이른바 기지촌소설을 통해 한국인에 대한 주한미군의 오만함이나 범죄 행위를 거부하고 있다. 과거엔 소극적으로 당하기만 했다면 이젠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또한 1970년대까지의 소설에서는 대부분 흑인병사들이 한국인에 대한 범죄를 주도했지만, 1980년대 소설에서는 백인들이 더 많이 악역으로 뽑혔다.

둘째, 미국은 이른바 ‘5월문학’을 통해 광주학살의 공범 및 전두환 독재의 지지자로 비난받았다. 1985년부터 광주항쟁을 그린 소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황석영의 보고문학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출판된 직후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될수록 즉시 폭로하기 위해 소설이 아닌 르포르타주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이나 걸렸다. 독재정권의 탄압 때문이었다.

셋째, 미국은 다국적 또는 초국적기업을 통해 한국을 ‘착취’하는 ‘제국’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소설은 1987년 가을 내내 전국적으로 분출되었던 노동자 투쟁의 물결에 이어 1988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넷째, 미국은 이른바 ‘분단문학’을 통해 한반도 분단을 꾀하고 한국의 독립을 방해한 나라로 묘사되었다. 한국 지식인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특히 미군정 시기 또는 ‘해방공간’에 대한 한국현대사를 공개적으로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다. 금기를 깨는데 소설가들이 합류했다.

다섯째, 미국은 이른바 ‘통일문학’을 통해 전쟁을 도발하며 한반도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으로 묘사되었다. 소설가들은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 ‘북한 바로 알기 운동’과 함께 전개된 통일운동은 이른바 ‘통일소설’의 등장을 불러왔다.

1980년대 시는 반미투쟁을 포함한 반정부운동의 효과적 도구였다. 상대적으로 창작하기 간편하고 정치적 탄압이 심한 상황에서 배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대 초 군사정권의 억압이 극도로 가혹할 때 시는 민족문학 또는 민중문학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저항 시는 문학예술의 다른 분야에도 폭넓게 적용되었다. 홍보나 선전선동을 위한 다양한 유인물에 자주 실렸으며, 항의시위 노랫말이 되기도 했고, 삽화를 곁들인 자료집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반미 시의 내용과 강도는 다양했다. 첫째, 미국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회문화적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비난받았고, 미국인들은 ‘양놈’을 비롯한 상스러운 용어로 표기되었다. 많은 시인들은 또한 미국 문화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분노를 쏟아냈다.

둘째, 미국은 광주학살을 방조하고 한국의 불법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비난당했다. 1990년 “5.18 광주 민중항쟁 10주년 기념시집”으로 출판된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엔 100편이 넘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셋째, 미국은 노동 시와 농민 시에서 경제적 ‘착취자’나 ‘침략자’로 묘사되었다. 1980년대엔 노동자 시인들이 등장해 유명해진 게 주목할 만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노동자 시인으로 1984년 ≪노동의 새벽≫을 펴낸 박노해를 들 수 있다. 1988년 ≪만국의 노동자여≫를 펴낸 백무산은 그 무렵 다른 어느 노동자 시인보다 더욱 급진적이고 전투적이었다. 1989년엔 다양한 노동자들이 쓴 노동 시를 묶어 편집한 시집 ≪통제구역≫이 출판되었는데, 여기엔 노동 투쟁에서부터 핵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의 반미 시가 수록되었다.

넷째, 일부 시인들은 한국 현대사의 재해석에 영향 받아 대개 수천 행에 이르는 장편 서사시를 통해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관해 비판했다. 이산하는 장편 서사시 <한라산>에서 1948년 제주 4.3항쟁을 다루며 미국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 시 때문에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혔다. 오봉옥은 “항일무장투쟁에서 반미항전으로 이어지는 혁명전통의 주류를 복원한 서사시집” ≪붉은 산 검은 피≫에서 1946년 8월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봉기를 묘사하면서 미군정을 비난했다. 그는 이 장편의 시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다섯째, 시인들은 미국이 한반도 통일을 막고 있다고 비난하며 제 3세계에서의 제국주의 활동을 비판했다. 한국에서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미국이 제 3세계에서 전개하는 제국주의 활동 역시 반미 시의 주제가 되었다. 이렇듯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국의 시에서 미국은 제국주의와 종속, 억압과 착취, 신식민주의와 민족해방 등과 연계되어 흔히 ‘미제’나 ‘외부의 적’ 또는 ‘경제 침략자’나 ‘착취자’ 등으로 묘사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 시인들은 작품에 “양키 고 홈”이란 구호를 직접 삽입했다.

8. 민주화 및 시민운동의 발전과 민족문학의 퇴조

1992년 12월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1993년 2월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1961년부터 30년 이상 유지되어온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것이다. 정치 사회 환경이 바뀌고 민주화가 진전되자 급진적이고 과격하며 투쟁적인 민중운동은 약화한 반면, 상대적으로 점진적이고 온건하며 비폭력적인 시민운동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저항 문화’도 폭력적 대중시위에서 비폭력적 문화투쟁으로 바뀌었다.

한국이 안으로는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밖으로는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이게 되자 새로운 민족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미국에 대한 한국 지배계층의 지나친 의존이 새로운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다. 이와 연계되어, 더욱 주목할 만한 현상은 1980년대 말부터 전개되어온 통일운동이 확산된 것이었다. 정부 차원에서는 여전히 북한을 적이나 원수로 대했지만, 북한을 껴안아야 할 형제동포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반세기 동안 유지되어 온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통일을 성취하는 게 한국사회의 가장 큰 과제가 된 것이다.

한편, 군사독재의 종식과 문민정부의 출범에 따른 민주화의 진전은 민중운동의 퇴조를 불러오며 민족문학 운동의 열기도 떨어뜨렸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민족문학 운동이 필요 없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문학 작가회의는 2005년 광복 60주년 분단 60주년을 맞아 ‘다시 민족문학을 생각한다’는 주제로 민족문학의 미래를 짚어보기 위한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곧 ‘민족문학’이라는 말까지 적절하지 않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서 민주화를 위해 ‘자유실천 문인협의회’를 만들어 군사독재에 저항해오다 1987년 민족문학 작가회의로 거듭나 민족문학을 이끌어온 문인들이 단체의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결국 2007년 12월 ‘민족문학’이란 말을 떼고 한국작가회의로 이름을 바꾸었다. 민족문학의 퇴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아닐까.

9. 민족통일과 통일문학을 위하여

2015년, 해방 70주년 분단 70주년을 맞았다.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완전한 자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분단된 지 70년이 흘렀지만 민족통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다. 자주와 통일을 위해서는 민족문학을 결코 소홀히 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민족’이라는 말 때문에 민족문학이 나라 안팎에서 ‘극우’문학이나 ‘좌파’문학으로 오해받는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악랄했던 일제 식민통치나 혹독했던 유신 군사독재의 총칼에도 ‘민족’을 지켰던 문인들이 그까짓 오해와 편견 때문에 ‘민족’을 버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물론 이름이나 형식이 바뀐다고 성격이나 내용까지 훼손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세계화의 물결에 따라 국경이 낮아지거나 무너지고 지구촌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성취할 때까지는 ‘민족’의 깃발을 결코 내리지 말기 바란다.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민족문학이 자주운동과 통일운동도 이끌어야 한다. 특히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북한을 주적으로 삼으며 남북 관계의 진전을 가로막고 평화 통일을 방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미국의 속성을 바로 알리고 북한에 대한 왜곡과 편견을 바로 잡는 통일문학에 다시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북한의 문인들은 1989년부터 ‘남조선 문학작품’도 소개하고 ‘해외동포 문학작품’도 실으면서 월간 ≪통일문학≫을 펴내왔으니 이 점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 이 글은 <계간 창작21>과 <창작21 작가회> 주관으로 2015년 8월 11-12일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 만해마을 문인의집 대강당에서 열린 <2015 만해축전 세계작가초청 평화문학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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