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의 역사는 1909년 교단 성립 직후부터 일제 통감부 경시청의 감시를 시작으로 해서, 1942년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인해 교세가 무너지기까지, 혹독한 탄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 강점 직후 대종교를 해산시키려 했던 일제의 음모를 박은식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경찰과 탐정하는 졸개들이 교직자의 미행을 잠시나마 그치지 않으며 또 까닭 없이 체포하는 경우가 많았다. 포교의 자유와 교당의 건설을 허가하지 않으며 … 교도들에 대한 주목은 날마다 심하여 갔다.’

즉 일제는 대종교 활동을 철저하게 억눌렀다. 일제는 이미 1911년 당시에도 충청남도장관이었던 박중양이 조선총독부 내무부장관 우좌미승부(宇佐美勝夫)에게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에서도 대종교를 불허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박중양이 「학도에 대한 대종교 권유 상황보고에 관한 건」이란 보고에서, 당시 대종교의 중요 문건이었던 「단군교포명서」와 「단군교 오대종지 포명서」를 통하여 지역 학생들에게 국권회복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총독부는 「본건에 대한 의견」을 통하여 대종교를 기성종교인 신도(神道)·불교·기독교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어 종교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더욱이 1915년 국내에서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진 이후의 대종교 국내 활동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즉 일제가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3호로 발포한 「포교규칙」에 의하여 대종교는 사실상 종교 활동의 중단 상태에 빠졌다.

▲ 조선총독부가 1915년 10월 「포교규칙」을 제정해 대종교를 옥죄어 오자 1916년 음력 8월 15일 홍암 나철 대종사가 구월산 삼성사에서 제천의식을 행하고 조천(朝天)했다. 사진은 2004년 개천절 민족공동행사 참가자들이 구월산 삼성사를 방문한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대종교는 포교뿐만 아니라 사사로운 집회나 강연 따위도 일절 금지되었다. 대종교가 대동청년단·조선국권회복단·귀일당·동원당(東園黨)·자유공단(自由公團)·조선어학회·해원도(解寃道)등과 같이 철저하게 비밀결사로 많이 움직이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치 않다.

1920년대의 국내 대종교 활동은 더욱 참혹했다. 비밀리에 집회활동을 하기 위해 각황사를 빌려 모이는가 하면, 중심부와 떨어진 변두리로 수시로 옮기며 집회를 갖기 일쑤였다. 당시 대종교의 이러한 국내 탄압상을 알려주는 기록 중

‘나는 옮기어 배움을 경성××학교에 수학하게 되자, 동무들의 권유로 대종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내가 여기에 든 것은 나의 주제넘은 생각에는 민족적 색채를 가진 이 교敎에서, 자가自家의 보물을 좀 찾아볼 도리가 행여 있을까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는 마침 무단통치시대인지라, 언론집회는 물론 대금물이어니와, 더구나 이 민족적 색채를 가진 대종교에 대한 감시야 실로 끔직하였지요! 빈궁한 살림살이에 고정한 회당조차 없이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는 곤경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핍박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심지어 교사敎史원고까지 빼앗기는 등, 실로 피가 뛰고 이가 갈리는 비분한 경우도 많이 당하였습니다. 나는 이 교敎의 교리를 연구하여 보는 한편에, 그 교사敎史즉 조선사를 배우는 것이 또한 큰 목적이었던 것이나 주위의 사정이 그러하고 보니, 나는 그만 떡심이 풀리고 점점 회당에 다니기가 싫어졌습니다.’

라는 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종교를 믿고자 해도 ‘끔찍하고 피가 뛰며 이가 갈리는’ 핍박으로 인해 돌아설 수밖에 없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일제의 대종교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종교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교세를 떨치자, 일제는 중국의 동북군벌정권과 결탁하여 대종교 탄압을 모색하였다. 즉 1925년 만주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맺어진 ‘삼시협정’에 의하여 길림성장 겸 독군이었던 장작상은 1926년 만주지역에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내렸다.

1929년 이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대종교총본사는 만주의 각지를 전전하면서 철저히 은둔해야만 했다. 이것은 단순히 교세의 위축을 넘어 교단의 체제와 연락망, 그리고 기록의 분실 등으로 이어졌다.

정세 변화는 대종교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향후 벌어질 사건의 서막에 불과했다. 대종교 몰락의 결정적 사건이라 할 1942년 임오년 대종교 지도자 일제 구속사건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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