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여선(風流女仙)-미인도

혜원 신윤복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통해 이 땅이 곧 이상세계인 것을 알았고 동시에 김홍도의 [신선도]를 통해 선비와 신선을 동일하게 여겼던 전통을 배웠다.
인물화에 재능을 보였던 신윤복은 인물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신선도]의 매력에 빠졌다.
하지만 선대의 전통을 그대로 베끼기만 해서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할 수 없었다.
신윤복은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김홍도가 그린 신선이 된 선비의 그림에는 신선의 풍모를 드러내는 여러 소재들이 등장한다. 생황, 비파, 거문고 같은 악기, 책, 붓, 벼루와 같은 문방구, 칼, 파초, 태호석, 술이 담긴 호리병, 공작 깃털, 산호, 골동품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신선의 풍모를 드러낸 선비는 학문적 이상을 지키면서 음악과 시를 노래하며 풍류를 즐기는 모습인 것이다.

▲ 좋은 날, 좋은 곳을 찾아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위 그림에는 중인들의 여향문화가 포함되어 있지만 선비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신과 신격화 된 영웅을 인정하지 않는 유학적 풍토에서 김홍도도 현실적인 인물을 그릴 수는 없었다. 고사 인물(故事人物)을 차용하거나 모호하게 표현한 자신의 모습을 등장시켰다. 고사 인물은 특정한 개인을 추앙한다기보다 교훈적인 의미로 수용했는데, 이런 고사 인물의 흐름에 자신의 모습을 은근 슬쩍 끼워 넣는 방식을 선택했다.

신윤복은 이미 [단오]와 같은 풍속화를 통해 인물을 표현하는 능력을 과시하고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름을 가진 현실의 선비를 그릴 수는 없었다. 그렸다하더라도 고작 정형화된 초상화가 전부였을 것이다.
신선의 삶을 사는 조선의 선비를 그려야했다.

이덕무(1741-1793)는 조선후기 서울 출신으로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린 실학자이다.
이런 이덕무는 신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신선이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마음이 담백하여 때에 얽매임이 없으면 도가 이미 원숙해지고 내 몸 안에서 금단이 거의 이루어지는 것인데, 저 허공을 날아오르고 껍질을 벗어 신선이 된다는 것은 억지를 부리는 일이다. 만약 내가 잠깐이라도 얽매임이 없다면 이는 잠깐이나마 신선인 것이다. 반나절 동안 그러하다면 반나절 동안 신선이 된 것이다. 나는 비록 오래도록 신선이 되지 못해도 하루에 서너 번은 신선이 되곤 한다. 그러나 저 발아래 붉은 먼지를 일으키고 바삐 다니는 자들은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신선이 되지 못하리라.”

도술을 부리는 그런 신선이 아니라 현실적인 신선에 대한 개념은 신윤복 이전에 이미 정립되어 있었다.
선비들의 계모임이나 꽃놀이 혹은 일출을 보는 모습, 금강산과 같은 명승지 유람 따위의 그림을 떠올렸다. 신윤복은 이런 전통을 차용하여 선비들의 풍류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아름다운 풍경과 술과 시(詩)와 가무와 자유로움과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그런 신선의 세계가 화폭에 담겼다.

흔히 백성의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을 풍속화라고 한다. 김홍도나 김득신의 풍속화에는 일반 백성들의 생활이 담겨있다. 백성들의 생활을 그린 풍속화는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 시험문제에도 나온다. 풍속화는 왕이나 왕족이 백성의 생활을 살피고 이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간단한 선묘로 그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신윤복 또한 백성들의 생활상을 담은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하지만 신윤복의 풍속화가 특별한 것은 그림의 주인공이 대부분 선비라는 것이다. 왕이 선비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풍속화를 그린 경우는 없다. 왕이나 선비는 모두 지배계층이기 때문이다.
선비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선비의 생활상을 그린 것도 아니다. 선비의 일상은 학문과 정치이다. 기생과 함께 술자리를 하며 노는 모습은 일반적이지도 않고 모든 선비가 이런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선비들은 동료 선비들과 어울려 놀았다.
또한 신윤복의 풍속화는 성과 관련한 남녀관계의 모습이 중심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확실히 이런 그림의 주제는 누가 보아도 성행위 범주에 속한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선비와 기생, 성행위 따위를 연결시키면 선비들의 문란한 향락과 사치스런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러한 그림이 문란하고 퇴폐적인 사회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이라 여겼다면 모두 불태워버렸을 것이고 신윤복의 이름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비가 기생과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은 신윤복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대의 선비들이 이해하고 수용했다는 말이다.

신윤복의 풍류

풍류(風流)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최치원의 낙랑비서에 나오는 풍류의 해석은 접화군생(接化群生)이다.
모든 생명과 어우러져 발전해 간다는 의미이다.
또한 선비가 부패한 권력과 재부를 멀리 하고 청빈한 삶을 영위하면서 자연의 질서에 맞게 사는 즐거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학자는 풍(風)은 기(氣)를 뜻하고 류(流)는 기의 흐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 신윤복/혜원 전신첩/종이에 채색/조선 후기/간송미술관.
신윤복의 그림에는 선비와 기생이 풍류를 즐기는 그림이 많다. 그림 속의 분위기는 화사하고 여유로우며 재미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접화군생(接化群生)에서 핵심은 접화(接化)이다. 모든 생명을 만나고 변화시키는 주체는 바로 인간이다. 정치의 주역이자 철학과 학문, 예술의 중심이었던 선비는 조선시대를 이끌어가는 존재였다. 세상을 변화 발전시키는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풍류를 표현한 그림에는 군자나 선비들의 여러 모습이 나온다. 흐르는 물에 발을 씻는 탁족, 술을 먹고 낮잠을 자는 일, 거문고나 생황을 부는 일, 바람소리를 듣거나 계절의 변화를 살피는 일, 바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는 일, 술에 취해 시와 노래를 부르는 일, 부패한 재물과 부정한 권력을 조롱하는 일, 세상의 헛된 욕망을 버리는 일, 바람처럼 자유롭게 사는 일, 답답한 옷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허름하게 세상을 떠도는 일 따위가 있다.
모두 중국 고사에 전래되어 오던 내용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윤복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비들은 이러한 행동을 풍류라고 여겼고 신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선비와 기생이 놀고 있는 그림에는 신윤복이 직접 쓴 시가 있는데 그 속에 풍류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춘화(春畵)

춘화는 남녀의 성행위를 담을 그림을 말한다.
이런 춘화의 뿌리는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춘화는 화려한 궁궐 분위기를 배경으로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또한 성행위의 주인공도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이다. 섬세하고 화려하게 표현한 배경은 높은 수준의 기량을 가진 화원들이 아니면 그리기 어렵다. 귀족이나 고급 관료들이 돌려보거나 주문했을 것이다.

김홍도나 신윤복은 춘화를 그렸다.
이들은 도화서 화원을 지낸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다.
특히 김홍도는 스스로 선비와 신선의 풍모를 가지고자 노력했고 신윤복은 이름 난 화원가문 출신이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춘화를 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억지이다. 만약 춘화가 사회적으로 비난받고 남 몰래 그려야 했다면 서명을 넣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자신의 명성을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반대로 김홍도, 신윤복 정도의 실력과 명성을 가진 화가만이 춘화를 그릴 수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사진이나 영상 따위가 없었던 시대에는 그림이 곧 사진이었고 기록이었다. 당시 춘화는 인간의 성적욕망을 대신 풀어주거나 소비하는 ‘포르노’와는 전혀 달랐다.
춘화는 생명에 대한 찬미이고 현실적인 교재였으며 동시에 사람관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김홍도, 신윤복은 성행위라는 현실과 화가의 상상력, 아름다운 필치를 더해 세계적인 춘화를 창작했다.

춘화에는 역겹고 추하고 더럽다는 표현이 없다. 성행위는 즐겁고 우습고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춘화 속에 나오는 사람이나 성행위의 형태도 다양하다. 선비, 양반, 머슴, 하녀, 기생, 승려, 늙은이가 등장한다. 또한 동성애, 혼합성교, 훔쳐보기, 구강성교, 손 성교 따위의 성행위 방식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성행위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다.

▲ 중국의 춘화는 화려하고 일본은 괴기스럽다. 신윤복의 춘화는 정감이 있고 해학이 있다. 중국이나 일본, 조선의 춘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양반이나 귀족이다. 신윤복의 춘화에는 선비나 양반과 함께 머슴, 승려, 늙은이까지 다양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모든 백성, 다양한 성행위 장면을 그린 것은 성을 통제하거나 독점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말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남녀의 성행위는 본능이다.
이러한 원초적 본능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은 일부 종교인 밖에는 없다. 하지만 조선은 종교의 나라가 아니었고 유학경전에 성에 대한 부정적 기록은 없다.
유아사망률이 70%가 넘고 많은 수의 자녀가 가문의 힘이고 국력이었던 시대에 남녀의 성행위는 오히려 적극 권장되었을 것이다.
남녀의 성행위는 음양의 조화로 수용되었고 그 어떤 부정적 견해도 없었다. 다만 처첩제도에 따른 여성들의 불만은 있었다. 이것은 사회제도의 문제이지 성행위 자체는 아니었다.

이름 난 화가가 그린 춘화는 일반백성이 아니라 선비, 양반들이 수용했다. 비싸게 사들인 춘화를 계모임이나 술자리에서 돌려보며 품평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춘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대부분 선비들이다.
이것은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선비들의 성에 대한 의식을 보여주면 단면이다.

여선(女仙)과 기생

신윤복의 그림에는 기생이 유난히 자주 등장한다. [미인도]의 주인공도 기생이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몽롱한 표정, 야릇한 자세로 보아 신윤복과 정인(情人)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한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기생은 흔히 술집 여자, 매춘과 같은 분위기에 관념이 고정되어 있다. 평양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를 그린 영화나 소설에도 언제나 성적매력이 중심이다. 사실 황진이나 매창 같은 기생은 다방면에 재주를 가진 그야말로 선비 못지않은 인격적 존재였고 몸을 팔았다는 어떤 근거도 없다. 오히려 사모하는 한 남자에게 지조와 절개를 지킨 것으로 더 유명하다.
 
원래 지조와 절개는 선비의 전유물이었다.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대상은 학문적 가치, 혹은 인의예지신염치와 같은 유학적 가치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정치적 당파가 되기도 하고 인격적 존엄을 지키는 것에 해당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그림에는 온통 지조와 절개에 대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만큼 조선의 선비들이 반드시 가져야말 덕목이었다.
이런 지조와 절개를 여성과 결합하는데 여성이 학문적, 정치적 지조를 지킬 까닭은 없고, 다만 남녀의 사랑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것이다. 이는 돈과 권력 따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선비의 가치를, 돈과 권력의 유혹에도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과 동일한 가치로 본 것이다.

기생문화에서도 몸을 파는 기생을 낮게 보았다. 조선말기의 구분이지만 흔히 기생을 일패, 이패, 삼패로 나누고 그 중에서 삼패는 몸을 함부로 파는 기생으로 규정하여 천시했다.
흔히 관기라고 부르는 기생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역적으로 몰린 가문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주로 바느질, 옷 만들기, 침놓기 따위의 일을 했다. 술을 따르거나 몸을 파는 기생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기생의 신분은 천민이다. 민가의 기생은 호적을 만들어 관리했고 대물림을 했다. 
기생과 같은 천민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조선시대에는 기생, 갖바치, 백정, 재인 따위가 천민이었다. 
천민은 요즘 말하는 시민이 아니었다. 일반 평민은 납세, 국방의 의무를 졌고, 대신 경작할 땅을 받았으며 흉년이 들었을 때, 환곡을 받아먹을 수 있었다. 또한 적은 확률이지만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다.
이에 반해 천민은 경작할 땅을 주지 않았고 대신 국방이나 납세의 의무를 지지 않았다. 이들도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특수한 직업을 독점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특수한 직업이란 말은 정치적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가죽신, 육고기, 놀이, 여흥 따위는 모두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일반 평민이 고급 가죽신을 신고 다닐 수 없었고,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먹기 어려웠다. 사당패 같은 전문 놀이패의 공연도 힘 있는 가문의 환갑잔치나 명절이 아니면 구경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술과 여자가 있는 여흥문화를 일반 백성이 즐긴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무튼 천민들은 양반문화, 혹은 지배계층의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했고 그 대가로 생계를 유지한 것이다.

기생의 주요 손님은 돈 많은 양반이었다. 당연히 양반, 선비의 취향과 문화를 알고 있어야 했다. 유명한 기생들은 월매, 명월, 매창처럼 선비들의 유학적 가치가 담긴 기명을 사용했다.
선비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선비문화 즉,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어야 했다. 또한 유명한 학자의 시 구절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 했으며 생황이나 거문고, 비파 같은 악기를 다루고 시조창도 할 수 있어야 했다. 기생이 되는 일은 그야말로 유생이 선비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또한 기생은 다른 여성과 달리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외출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다양한 남자를 만나는 일이 가능했으며 제법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천민이라고 하나 일반백성들은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했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기생의 배후에는 언제나 힘 있는 양반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안보영/여선과 선동/디지털회화/2014.
김홍도의 군선도에 나오는 여선 부분을 디지털회화로 변주한 그림이다. 앞쪽은 여선인 하선고이며 뒤쪽은 여장을 한 남채화이다. 신선과 여선이 함께 놀았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연관성은 포착된다. 어쨌든 신선과 여선의 결합은 자연스럽다. 또한 이 둘의 결합으로 성적행위가 유추되었을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여선(女仙)은 그야말로 여자 신선이다.
중국 전설에 따른 신선 중에 유일한 여자는 [하선고]라는 신선이다. 김홍도가 그린 신선 중에는 [남채화]라는 이름을 가진 신선도 있는데 여성의 모습으로 그렸다. 김홍도의 [군선도]에는 신선과 여선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남채화]는 누더기 적삼을 입고 꽃바구니 혹은 꽃을 든 젊은 선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팔선 중 유일한 여선인 [하선고]는 연꽃줄기나 국자를 든 젊은 여인의 도상으로 나타난다.[네이버 지식백과] [八仙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기생과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이 그려져 있다.
선비가 조선의 신선이라면 당연히 선비와 함께 어울리는 사람도 신선일 것이다. 신윤복의 그림 속의 선비는 기생에게 담뱃불을 붙여주고 말을 태우고 자신은 걸어가기도 한다. 어디에도 무시하는 표현은 없다. 그림 속의 선비와 기생은 동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오히려 남성을 놀려먹는 해학이 있다.

선비는 조선의 신선이고 기생은 풍부한 생명력을 가진 여선으로 규정했다. 
신선과 여선이 함께 어울려 풍류를 즐기는 것은 전통적인 신선의 상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성적매력을 추가했다. 성적매력은 생명의 충만함인데 이는 우리그림의 핵심 미학과 잘 부합한다.

▲ 그림 속의 기생은 선비와 동격이다. 함께 춤을 추고 놀이를 한다. 조선의 선비가 신선이면 기생은 여선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기생을 여선으로 표현한 것은 진경산수의 영향이다. 신선은 현실의 선비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여선은 현실적인 인물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궁녀나 양반집 여인은 만날 수도 없었고 여선의 풍모에 맞지도 않았다. 또한 하녀는 선비와 격이 맞지 않았다.
여선의 풍모에 맞는 여성은 노래, 술, 음악, 글과 시를 알아야 하고 자유로운 신분이어야 했다. 또한 선비와 같은 신선과 대화가 통하고 유학적 핵심가치인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수준을 가져야 한다.
현실에서 이와 같은 여건을 충족하는 사람은 기생밖에는 없다. 또한 진경은 실경을 바탕으로 하는데 실제 대상을 관찰하여 그려야 한다. 현실에서 직접 만나고 보면서 그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여성은 기생보다 더 좋은 모델은 없었을 것이다.

[미인도]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상의 인물이기도 했다.
실제 [미인도]의 여성을 해부학적으로 보면 가능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상체와 하체가 서로 어긋나있다. 물론 보는 사람은 자연스럽겠지만 실제 이런 자세를 아무리 만들어 보려고 해도 어렵다. 상체는 약간 앞으로 숙였는데 발 한쪽으로 옆으로 삐져나와있다. 그러면서 풍만한 엉덩이가 느껴지도록 했다. 치마 속의 하체는 그야말로 상상의 영역이다.
김홍도가 그린 [송하맹호도]의 호랑이는 정면과 측면, 윗면의 시점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미인도]의 자세도 여러 시점을 결합해 이상적인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진경산수화법의 원리에 따라 그렸다는 말이고 동시에 다양한 기생의 모습을 함축하여 표현했다는 의미이다.

▲ 영화 속의 배우가 미인도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옷고름을 풀고 있는 모습, 한 발을 드러낸 모습은 같지만 옷의 주름이나 방향 몸의 자세는 엄연히 다르다. 다시 말해 미인도의 주인공이 취한 자세에서는 옷의 흐름이나 주름이 현실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한 배우의 자세에서 보듯이 발을 빼기 위해 다리를 옆으로 놓으면 몸의 무게 중심이 뒤쪽으로 간다. 하지만 미인도의 기생은 무게 중심이 앞쪽에 있다. 여러 각도에서 본 모습을 결합하여 이상적인 자세를 만든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미인도]는 신선도이면서 동시에 여선을 그린 것이다.
중국의 여선이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모습이라면 조선의 여선은 성적매력이 넘쳐나면서 동시에 아름답다.
조선의 신선은 선비이고, 조선의 여선은 기생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풍류의 여선인 것이다.

진경산수화는 이 땅을 신선의 세계, 이상세계로 만들었고, 김홍도와 신윤복은 이 땅의 사람들을 모두 신선으로 보았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는 선비, 농민을 비롯해 기생, 하녀, 왈짜, 승려, 늙은이, 가마꾼, 머슴, 하급관리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미인도]는 특별한 여성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여성은 곧 여선이고 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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