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헌 / 동국대 북한학 박사수료

 

▲ 북한 양강도 혜산시 혜산농민시장 광경. 북한에 있어 장마당을 비롯한 시장은 국가의 조세수입처임과 동시에 비사회주의의 온상으로 단속의 대상이기도 하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시장화는 중앙계획체제로부터의 변화 혹은 이탈이라는 의미로 보통은 경제학적 혹은 정치경제학적 논의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90년대 이후 북한의 변화 전체를 통칭 ‘시장화’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북한 ‘경제’의 변화라는 관점과 ‘북한의 변화’라는 차원이 서로 혼재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시장화라는 경제적 변화는 국가‧개인‧공간이라는 존재의 각 층위에서 삶을 구성하는 관점‧태도‧습관‧윤리 등을 포괄하는 차원들이 지난 산업화 시기의 그것과 분명 달라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북한을 과연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직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시장의 확대와 같은 경제개혁 조치의 제한성은 공식 담론에서 어떻게 표출되는가? 그러한 담론들에서 사회주의가 아닌 것, 즉 ‘비사회주의’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그렇다면 ‘비사회주의’와 ‘반자본주의’의 관계는 무엇인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흔히 현대 사회주의론에서 북한은 사회주의와 무관하다고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북한에서 말하는 비사회주의는 역설적 의미를 띠게 된다. 사회주의가 아닌 북한에서 지켜야 할 것으로 상정된 ‘사회주의’는 무엇을 지시하는가? 미리 결론을 말하면 ‘사회주의’는 ‘국가’와 ‘민족’의 다른 이름이다. 실제적으로도 사회주의와 비사회주의는 혼재되어 서로를 구성한다.

내내 살펴보았듯이, 장마당을 비롯한 시장은 국가의 조세수입처임과 동시에 비사회주의의 온상으로 단속의 대상이기도 했다. 따라서 국가는 시장메커니즘 자체는 일정한 묵인과 용인 속에 통제하고 관리하면서도 ‘사회주의 생활양식’이라고 하는 가치와 규범의 변경 가능성에 대해서는 가히 알레르기적인 혐오의 눈초리를 보냈다. 국가의 이러한 중첩된 태도는 북한의 ‘시장화’에 대한 일련의 관점을 드러내 주는 매우 중요한 논의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시장의 역할과 한계에 주목해서 유의해볼 점은 북한이 자본주의에 대해 주민들에게 주입시키고자 하는 공식적인 언술이 갖는 특징들이다. 북한의 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악”, “문화적 퇴폐”와 이를 막기 위한 “인생관”, “생활태도” 확립 등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담론들을 자본주의를 질병과 같은 것으로 은유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난 것은 개혁이라는 일정한 변화 속에서 공존하는 ‘파국’의 담론과 ‘사수’의 언어들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변화는 받아들이지만 변질은 막는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정하게 양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변화되는 현실이 마치 전염병과도 같이 순식간에 파국으로 치닫는 공동체의 변질로 이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혐오’와 ‘공포’의 담론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에 관한 ‘투명성’을 제거하고 ‘신비화’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것이 북한 주민의 신체에 침투했을 때 벌어질 온갖 ‘재앙의 이미지’들을 제시하면서 국가의 생존이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각인시키려는 것이자, 강력한 일상의 도덕규율을 작동시키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구체적인 형상으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닌, 그저 공포스럽고 혐오스러운 ‘은유’로서만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부르죠아사상독소가 우리 내부에 쉬를 쓸지 못하게”라는 표현이 있는데 “쉬쓸다”는 한국어로는 ‘쉬슬다’ 즉, ‘파리가 알을 여기저기에 낳다’는 말이다. “좀”이 쓰는 것과 “쉬쓰는” 것은 뿌리를 뽑아 없애기 전에는 언제든지 확산‧창궐할 수 있는 전염병과 같은 것으로서 공동체 구성원 각 개인들, 그리고 개인들 간에 부과되는 쉼 없는 일상의 도덕과 규율을 체화하도록 하는 방역(防疫)의 상황과 유사한 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항구적이고 일상적인 규율은 “동기와 표현형태가 어떠하든 … 극히 부분적이(라도)” 간단히 스쳐 지나가선 안 된다는 언술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당국의 이러한 완전무결한 방역의 욕망은 특별히 사회주의적인 발상 혹은 태도라기보다는 독재 혹은 파시즘의 일반의 욕망과 멘탈리티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표현은 “종교 및 미신행위”에 대한 태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미신행위가 “악성종양”이라는 암(癌)의 형상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자본주의사상문화와 생활양식은 마약과 같은 것이여서 일단 여기에 물 젖게 되면 벗어나기 힘들다”는 식으로도 표현된다.

또한 전염병은 언제나 ‘혐오스러운 타자’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자본주의― 즉, 남한, 미국, 서구 ― 를 언급하는 문건들에서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이색적인”, “너절한”, “추잡한”, “색정적이며 구역질나는”과 같은 표현들은 자본주의에 관한 ‘즉자적인’ 혐오의 감정만을 허용한다. 이는 파시즘의 통치에서 주로 나타나는 ‘인종주의적’ 정서로서 대상에 대한 사고 판단을 중지시키고 특정의 감정구조만을 허락하는 태도와 유사하다.

또한 여기서 타자란 “외국 출장자들”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외부의 병균을 보균할 가능성이 있어 공동체의 내부로 옮기는(“류포”) 주체들로서 오염된 타자로 규정된다. “이질화”는 사회주의사상의 본질을 이루는 “일심단결”에 균열을 내 감염의 경로를 마련할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오염으로부터 “민족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우리의 생활양식”을 “이질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외모에서부터 시작해”, “장발”, “여성의 화장 및 옷차림” 등으로 “민족적 미감”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의 변질을 막고자 하는 이러한 편집증적인 담론은 악순환의 메커니즘을 본원적으로 내재하게 된다. 즉 공동체 내부의 변화에 대한 반응이 소멸해버릴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공동체의 또 다른 위험 앞에서 “우리는 기존관념에 사로잡혀 지난 시기의 낡고 뒤떨어진 것을 붙들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대담하게 없애버릴 것은 없애버리고… 모든 문제를 새로운 관점, 새로운 높이에서 보고 풀어나가야…”와 같은 담론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또한 목도하는 것이다.

냉전시기를 풍미한 개념인 아메리칸 바운더리(American Boundary)라는 개념이 있다. 그 범위란 반공주의와 민주주의였다. 반공주의가 민주주의를 넘어서서는 곤란하지만 민주주의는 또한 반공주의의 한계 내에서 작동해야 한다. 예컨대 미국은 이승만의 반공주의가 민주주의의 최저선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이르자 암살의 계획까지 세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랬을까? 민주주의가 그만큼 숭고해서였을까?

반공주의와 민주주의는 그저 이질적인 것의 병존 혹은 대립적인 것의 공존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조건을 한계 짓는 무엇으로 봄이 적합하다. 민주주의의 최저선에 대한 위협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가져올 수 있다는 반공주의적 연관성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반공주의의 확대는 민주주의라는 정체성의 최소한을 상실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유명한 개념을 원용해 본다면 북한의 그것은 국가주의와 발전주의이다. 유사하게도 북한의 발전은 국가 자체의 재생산과 강화를 위한 것이지만 또한 국가주의가 일정 정도의 발전을 저해해서도 안 된다. 북한의 변화는 이 범위 내에서 용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유동성 내에서 반자본주의와 비사회주의의 담론적 내용도 새로 구성, 재구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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