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초록 (겨레말큰사전 선임연구원)


“우리, 산보하러 갈까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누구에게나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북에서 이성에게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가는 예기치 못한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북에서는 이 말이 ‘데이트 신청’의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산보’는 남과 북에서 모두 쓰는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산보’의 뜻풀이는 아래와 같다.

산보 (散步) [명]
《표준국어대사전》 =산책.
《조선말대사전》 바람을 쐬거나 쉬기 위하여 멀지 않은 곳으로 이리저리 거니는 일.

산책 (散策) [명]
《표준국어대사전》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 [같은말] 산보.
《조선말대사전》 가벼운 기분으로 산보하는것.


위의 뜻풀이를 보면 ‘산보’나 ‘산책’에 ‘데이트’의 의미는 없다. 그런데 겨레말 말뭉치에서 ‘산보’와 관련된 북측 용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보인다.

○ 정학은 … 허물없이 {산보도} 하고 영화 구경도 가고 도서관에 가서 함께 책을 읽기도 하면서도 웬일인지 사랑한다는 말만은, 나의 안해가 되여 달라는 말만은 할 수가 없었다.(《김형지: 적후의 별들》)
○ 경희는 그와 교외의 한적한 밤거리를 {산보하였던} 아름다운 추억을 더듬었다.(《김승권: 아름다운 륜리》)

위의 용례들을 보면 ‘산보’가 단순히 바람을 쐬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교제를 위해 함께 걷는다는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23차 남북공동회의에서 ‘산보’의 뜻풀이를 합의할 때 나와 함께 토론하던 북측 편찬위원에게 북에서도 ‘데이트’라는 말을 쓰는지를 물었다.1) 북측 편찬위원은 ‘데이트’라는 말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거의 쓰지 않는다고 했다. 북에서는 젊은 남녀가 데이트하는 것을 ‘산보’라고 하며, 남녀가 데이트를 하러 갈 때 ‘산보하자’ 또는 ‘산보 가자’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데이트 신청’이라는 말 대신 ‘산보 신청’ 또는 ‘산보 제의’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우리는 ‘산보’보다 ‘산책’을 더 많이 쓰지만, 북에서는 ‘산책’보다 ‘산보’를 더 많이 쓴다는 것이다. 실제로 겨레말 말뭉치에서 ‘산보’와 ‘산책’의 북측 용례를 각각 찾아보면 ‘산보’의 용례가 ‘산책’의 용례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북에서는 나이가 많거나 직책이 높은 사람이 주로 ‘산책’이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참고로 산보의 어원을 살펴보자. 중국 과학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야부우치 기요시에 의하면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오석산(五錫散)이라는 일종의 흥분제를 먹는 것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오석산은 독물인 비소(砒素)를 포함하고 있어 먹으면 정신이 상쾌해지고 병자도 일시적으로 나은 것 같은 기분이 되나 이것을 오래 먹으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난다. 복용 직후에는 몸 전체가 후끈거려 그것을 발산시키기 위하여 걸어 다닐 필요가 있었다. 이것을 행산(行散)이라고 하는데 ‘산보’라는 말은 여기서 생겼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산보’가 일본식 한자어이기 때문에 ‘산책’으로 순화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도 ‘산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산보’의 일본어 발음과 한국어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산보’를 일본어에서 유입된 말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산보’를 ‘산책’과 뜻이 같은 말로 다루고 있을 뿐 일본어에서 유입된 말이라는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산보’를 ‘산책’으로 순화해서 사용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각주>
1) 《조선말대사전》에는 ‘데이트’라는 단어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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